다음은 아직도 시원히 해명하지 못하고 있는 잠과 꿈의 현대적 풀이다. 원전은 C.EVANS의 'Landscape of the night,와 E.Hartmann의 'The Functions of Sleep'로서 최광복씨가 편역했다.
외계인이 지구 상공으로 날아와서 지구의 생물들이 사는 꼴을 자세히 관찰하였다고 가정해 보자. 한눈에 "이 곳은 살 곳이 못되는군" 하고 우주선을 되돌려 자기들의 별나라로 돌아갈 것 같이 생각된다. 왜냐고 하니 파리와 같은 하루살이 곤충에서부터 시작하여 동물의 왕자로 군림하는 사자에 이르기 까지 온갖 생물들이 서로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매일매일을 살아가는 삶의 현장을 보았기 때문이다. 멋도 모르고 개구리의 눈 앞을 날아가는 파리는 0.5초도 못되어 개구리의 입 안에 들어가고 개구리 역시 잠시 한눈을 팔다가는 뱀의 아침식사가 되고 만다. 행동이 잽싼 다람쥐는 도토리를 주워 먹다가도 고개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면서 족제비가 오지않나하고 신경을 곤두세운다. 마음놓고 식사도 못하는 험악한 이 곳이 외계인의 마음에 들리가 없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지구에서 사는 생물은 나의 먹이를 '잡아먹는' 노력과 남의 먹이로 '잡아먹히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하루 온종일을 보내고 있는 거대한 싸움터로 외계인의 눈에 비쳤던 것이다.
먹고 먹히는 생존의 논리
핸들을 180도 돌려서 막 지구를 떠나려고 하는데 -잠깐!-외계인의 눈에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 벌어졌다. 지구에 어둠이 깔리자 온갖 생물들이 하나 둘 으슥한 데로 기어들어가서 죽은 듯이 누워있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하루 종일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던것들이 이제는 "나를 잡아 잡수"하는 식으로 부동의 자세로 잠에 떨어졌으니 말이다. 그것도 잠깐이 아니라 몇시간씩이나 꼼짝없이 누워있는 것이 아닌가.
동물의 몸구조를 보면 신기하다고 생각될 만큼 "먹이를 찾고 적의 공격을 피하는" 일에 능숙하다. 달리는 사자가 얼마나 빠르며 개의 코가 얼마나 냄새를 잘 맡는가. 미물인 고슴도치도 바늘로써 적물 막고 스컹크는 독한 냄새로 적을 물리친다. 이와 같이 모든 생물의 몸의 구조와 행동습관은 생존 경쟁에 알맞도록 수백만년 동안 발달되고 진화되어왔다. 생존경쟁에 불리한 행동습관을 가진 동물은 이미 오래전에 멸종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이런 의미에서 잠을 자는 것은 극히 불리하고 위험한 짓이다. 잠을자는 동안에는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물은 모두 잠을 잔다. 왜 이렇게 위험한 짓을 하는가. 모두 잠을 잔다는 사실은 그것이 매우 위험한 짓이라 하더라도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일게다.
도대체 잠이란 무엇인가? 왜 동물과 사람은 잠을 자는가? 이런 질문은 사람은 왜 먹느냐 하고 물어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질문이다. 사람이 배가 고파서 밥을 먹듯이 피로하기 때문에 잠을 자는 것이 아닌가. 이 보다 더 명쾌한 대답은 없을 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2천3백년 전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이 잠을 자는 것은 머리가 무겁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머리가 무겁다는 것은 피로가 쌓였다는 말과 같다. 사람이 낮에 활동을 많이 하여 피로가 쌓이면 눈이 저절로 감기고 의식을 잃으며 잠에 떨어진다. 즉 잠은 몸의 피로를 푸는 휴식의 시간이다.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잠에서 깨어나면 머리가 가뿐하고 새로운 생기를 얻기때문에 또다시 하루의 일을 시작한다. 이 얼마나 단순명료한 해답인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2천년이 넘도록 잠에 대한 새로운 이론이 생겨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고등동물일수록 오래 잠잔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하여보면 '잠은 곧 휴식'이라는 해답이 잠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여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우선 사람과 동물의 잠의 현상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첫째, 거의 모든 동물이 잠을 자지만 고등동물일수록 수면시간이 길고 하등동물일수록 수면시간이 짧으며 식물이나 식물과 비슷한 아주 원시적인 동물은 잠을 자지않는다. 소화기능과 생식기능은 모든 생물계에 공통된 현상이지만 잠은 그렇지가 않다. 둘째, 수면시간이 나이에 따라 다르다는 점이다. 나이가 어릴수록 잠이 많고 나이가 늙을수록 잠이 적다. 사람의 경우 갓난아기는 하루에 16시간 이상을 자고 세살된 아기는 12시간 정도 자며 청년이 되면 7~8시간 노인이 되면 5~6시간 밖에 잠을 자지 않는다. 나이에 따라 잠을 자는 시간에 차이가 있는 것은 사람의 경우뿐만 아니라 동물에서도 마찬가지다. 셋째, 잠은 깊은 잠과 얕은 잠으로 구분되는데 계속적으로 얕은 잠을 빼앗긴 사람은 다음 번의 잠에서 평소보다 얕은 잠을 더 많이 잔다. 넷째, 잠을 자면서 꿈을 꾸지 못하도록 방해받는 사람은 다음 번의 잠에서 평소 보다 꿈을 많이 꾼다.
잠의 현상에서 특기할 사실은 잠자는 동안에 눈동자가 빨리 움직이는 시간이 여러번 있으며 이 시간이 뇌파의 알파상태(뇌파의 초당 파동수가 10내지 14번으로서 꿈꾸는 시간)와 거의 일치한다는 점이다. 짧으면 10분 길면 60분까지 지속되는데 평균20~30분 정도로서 하루 밤 잠자는 동안에 눈동자가 빨리 움직이는 시간을 모두 합하면 1시간 반 내지 2시간 즉 수면시간의 20% 내지 25% 정도가 된다. 그런데 눈동자가 빨리 움직일 때에 잠을 깨우면 80%이상이 꿈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즉 눈동자가 빨리 움직이는 얕은 잠을 잘때에 꿈을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을 때(델타상태, 즉 뇌파의 초당 파동수가 7번 이하로서 깊은 잠에 빠져있는 상태) 깨우면 깨우기가 무척 힘들 뿐만아니라 꿈을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잠을 못자면 후유증 심각
천적(天敵)에게 잡아먹힐 것을 각오하고서라도 자는 잠이라면 잠이란 것은 생존에 절대필수적인 것이 틀림없을 것인데 만일 잠을 오랫동안 자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건강한 사람이라면 사흘 동안 한잠 자지 않더라도 머리가 좀 띵-할 뿐 일상업무를 수행하는데 큰 지장이 없다. 그러나 5~6일 동안을 한숨도 자지 않으면 착각 또는 환각현상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벽이 이리왔다 저리 갔다 하고 벽지의 무늬가 벌레처럼 기어가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 때까지는 "내가 너무 오랫동안 잠을 자지 않아서 그렇구나"하고 이성적인 생각을 할 여유가 있다. 그러나 수면박탈의 상태가 일주일이 넘어가면 거의 모두가 매우 심각한 환각현상을 경험한다. 구두끈이 진짜 뱀으로 보이며 벽의 줄무늬가 살아있는 현실의 지네처럼 보인다. 맥박을 재러오는 간호원은 자기를 죽이러 오는 사형집행인으로 보이기도 한다. 한마디로 현실과 꿈을 구별하는 능력이 없어지며 온갖 환상과 공포증세, 강박증세를 나타낸다. 의술진의 감독 하에 열하루 동안을 자지 않고 버틴 기록이 있는데 환각현상이 너무 심하여 더 계속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 사람은 실험 후에 병원에 입원할 수 밖에 없었는데 잠의 보충으로 환각현상은 곧 없어졌지만 우울·공포 등의 정신심리학적인 후유증이 3개월이나 지속되었다고한다. 의학적으로 말해서 굶어서 죽는 시간 보다 수면박탈로 죽는 시간이 더빠르다고 한다. 그리고 고문 중에서 가장 무서운 고문이 잠을 못자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수면부족이면 꿈부터 꾼다
그런데 잠안자기 실험에서 재미난 현상이 발견되었는데 4~5일 또는 일주일 동안 잠을 빼앗긴 사람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잠에 떨어지면 이때까지 못잔 수면을 보충하기 위하여 2,3일 동안 계속 자는 것이 아니라 열대여섯 시간 정도만 자면 원상회복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눈동자 측정을 해보면 눈동자가 빨리 움직이는 시간이 평상시에는 수면시간의 20%에 불과한데 잠을 오래 못잔 사람의 경우는 이것이 70~80%나 된다는 것이다. 즉 꿈을 오랫 동안못꾼 사람이 잠을 자면 꿈의 부족을 우선적으로 보충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꿈을 꾸기 위해서 잠을 자는 것이 아닐까. 과연 꿈이란 무엇인가?
꿈은 주파수를 잘못 맞춘 라디오의 잡음처럼 숙면을 해치는 방해꾼으로 생각하여 꿈이 많았던 잠은 설친 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한편 꿈은 신령한 존재나 죽은 이와 대화하는 순간으로 생각하여 꿈을 너무 신비스럽게 생각하거나 미신화하는 사람들도 있다.
꿈에 대하여 처음으로 과학적인 분석을 시도한 사람은 '프로이드'였다. 그에 의하면 꿈은 어디까지나 충족되지 못한 무의식적 욕망을 해소하는 방법이라고 풀이된다. 욕망의 즉시적 충족을 꾀하는 원초적 본능인 '이드'(ID)'는 현실적 사고의 주체가 되는 '에고(EGO)'와 더 나아가서는 사회적 윤리규범과 죄의식(양심)을 대표하는 '수퍼에고'에 의하여 억압당하는 것이 우리 보통인의 일상생활이다. 충족되지 못한 욕망은 우리의 무의식 세계에 감금되어있다가 꿈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욕망의 얼굴은 너무나 추하고 저속하여서 꿈속에서도 있는 얼굴을 그대로 보여주지 않고 수수께끼 같은 상징에 의하여 나타난다. 꿈이 내포하고 있는 상징을 해석하는 것이 바로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이다.
프로이드의 편협한 해석
꿈을 욕망의 해소라고 본 프로이드의 가설에 일리가 있기는 하지만 욕망의 대표적인 얼굴을 성욕이라고 본 점이나 수수께끼 같은 꿈을 상징적으로 분석함으로써 해결책을 찾으려고 한 점은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 무리가 있다고 하겠다. 프로이드의 '꿈해석'방법이 얼마나 일방적이고 우스꽝스러운가를 잠깐 구경하고 넘어가기로하자. 프로이드에게 찾아온 지성적이고 교양많은 어느 부인환자의 꿈얘기는 이러했다.
"나는 요리사와 함께 시장에 갔다. 정육점에 가서 무엇인가를 달라고 하였는데 정육점 주인이 그것은 구할 수가 없읍니다. 이 것도 좋으니까 가져가시지요라고 말하였다. 나는 거절하고 야채가게로 갔다. 야채가게 아줌마는 나에게 꾸러미로 묶여있는 이상하게 생긴 채소를 팔려고 하였는데 그것은 검은 색이었다. 나는 '이것이 도대체 무엇인가요? 난 안사겠어요'라고 말하였다."
사실 그 부인은 꿈을 꾸기 바로 전날에 시장에 갔으나 시장이 문을 열지 않아서 돌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프로이드는 이 꿈을 "저속한 욕망의 상징적 표현"이라고 해석하였다. 프로이드는 이 꿈의 주제를 "정육점이 문을 열지 않았다"로 풀이하였는데 이 말의 반대어는 "정육점이 문을 열었다" 이고 이것을 비엔나의 사투리로 말하면 "당신의 바지 앞문이 열려있다'는 뜻이 된다고 해석하였다. 또 꾸러미로 묶여져있는 검은 색의 채소는 아스파라거스와 검은 무우를 의미하는데 이것들은 남자의 성기를 상징한다고 보았다.
이 것이 소위 프로이드가 말하는 '꿈의정신분석학' 이라는 것이다. 그냥 웃어넘겨야 할까 아니면 프로이드의 말장난의 재능에 감탄을 해야 할까. 프로이드는 "시장이 문을 닫았다'라는 현실의 사실을 "정육점이 문을 닫았다'로 고쳤으나 꿈의 해석이 제대로 되지 않으므로 그 반대어가 되는 "정육점이 문을 열었다"로 고치고 또 이것을 비엔나의 사투리에 뜯어맞추기 까지 하였다. "꿈은 성욕의 숨은 얼굴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그의 가설을 합리화시키려고 노력한 흔적을 뚜렷이 볼 수 있다.
「융」은 「원초적본능」으로 확대
심리학자 '칼 구스타브 융'은 꿈을 상징적인 것으로 본 점에서 프로이드와 맥락을 같이하고 있으나 상징의 해석을 성욕이라는 좁은 테두리에서 벗어나 인간 모두에게 공통된 '원초적 본능'으로 확대시켰으며 이를 '집단무의식'이라고 불렀다. 집단무의식에 의하여 상징적으로 표현되는 원초적 본능은 개인의 경험이 아니라 인류공통의 가장 원시적 본능으로써 꿈에 자주 그리고 계속하여 나타난다고 하였다. 이런 점에서 '융'은 '프로이드'의 억지스런 편협에서 벗어나 일보 진전된 꿈이론을 전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프로이드나 융의 꿈이론은 어디까지나 꿈의 주체가 되는 뇌의 생물학적 기능을 고려하지 않은 심리적 접근에 불과한 것이다. 최근 20~30년 동안에 활발이 전개되고있는 뇌와 뇌를 이루고 있는 신경세포의 기능에 따라 과학적 연구로 인하여 잠과 꿈에 대한 새로운 안목이 펼쳐지고 있다.
인간의 뇌(큰골)는 10억개가 넘는 신경세포(뉴런)로 구성되어 있는데 마치 컴퓨터의 전자회로 처럼 서로 연결되어 수많은 정보를 처리한다. 인간의 뇌가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수는 우주에 있는 모든 원자의 수 보다 더 많을 만큼 무한대에 가깝다도 한다.
잊어버린것도 시실은 보관돼 있다
뇌수술하는 도중 뇌피질의 어떤 부분을 건드리면 환자가 수십년 동안 잊어버렸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는데 이는 우리가 보고 듣는 모든 정보가 기억을 저장하는 뇌신경세포에 고스란히 저장되어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가 과거의 잔잔한 일을 평소에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그 일이 현재의 생존에 별로 중요한 정보가 되지 못하므로 지하실 창고 속에 쳐박아 놓았기 때문이다.
컴퓨터가 하는 기능은 뇌의 기능과 비슷한 점이 많다. 컴퓨터는 수십개 또는 수백개의 프로그램(소프트웨어)으로 운영된다. 프로그램이 잘 짜여있을수록 컴퓨터의 기능이 뛰어나고 또 프로그램의 수가 많을수록 여러가지 일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처리할 정보의 수가 많을 경우에는 컴퓨터의 기억 용량을 늘리면 되지만 정보의 내용이 달라지면 기존의 프로그램을 뜯어고치거나 조정(업데이트)하여야만 한다. 예를 들어 봉급계산을 하는 프로그램의 경우 직원 중 한 사람이 결혼하여 아기를 낳았다면 가족수당을 지급해야하고 가족1명 증가에 대한 세금공제를 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프로그램을 조정하지 않으면 옛날 봉급과 똑같은 봉급 명세서를 작성하게 될 것이다. 프로그램의 수가 작으면 그때 순간적으로 조정하면 되겠지만 상당히 고성능의 컴퓨터라면 프로그램의 수가 수십개에 이를 것이고 또 매일매일 홍수 처럼 쏟아지는 정보를 감안하면 고쳐야 할 프로그램이 하루에도 수십개 이상이 될것이다. 이런 때에는 업무시간이 끝난 뒤 컴퓨터의 일상적 기능을 정지시켜놓고 프로그램을 하나하나씩 고치는 것이 능률적이다. 필요없는 정보는 지워 없애버리고 훗날에 혹시 쓰일지라도 모르는 정보는 따로 떼어서 기억장소에 보관시켜 놓는다. 새로운 내용의 정보로서 당장 필요한 것은 중앙처리실(CPU)에서 언제라도 찾아 쓸 수 있도록 직접 손이 닿는 가까운 곳에 배치해 놓는다(다이렉트 억세스) 그래야만 내일 아침 부터 오류가 없는 봉급명세표를 작성할 수 있다.
수많은 정보의 수정, 정리시간
뇌의 기능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동물이나 인간의 뇌는 컴퓨터에 비할수 없이 고성능이어서 프로그램의 수가 수십만개 내지 수백만개에 이르며 매일 엄청난 수의 정보를 받아들이고 처리한다. 사람이 잠을 자는것은 수많은 프로그램을 고치고 처리하는 시간이다. 잠을 오랫동안 자지 못한 사람이 환각증세를 일으키는 것은 기존의 프로그램을 정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이 오는것을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머리가 무겁기때문인데 이는 처리할 새로운 정보가 많다는 뜻이다.
인간의 뇌피질(큰 골)은 갓태어났을 때 백지상태와 같다고 한다. 호흡을 하고 혈액을 순환시키고 움직이고 먹고 배설하는 기본적 생존기능은 본능적인 프로그램으로 짜여져있는 뇌간및 작은 골이 다 알아서 처리한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 것은 매일 매일 새로운 프로그램을 형성하는 능력에 달려있다. 새로운 프로그램이 많아질수록 인간의 뇌는 더욱 풍부하게 되는 것이다. 어린아이에게 잠이 많은 이유는 보고 듣는 것이 새로운 정보이어서 프로그램을 새로이 만들고 처리할 정보가 많기 때문이다. 노인에게 잠이 적은 이유는 일생동안 이미 수백만개의 프로그램을 만들어 놓았고 대부분의 하는 일이 습관에 붙어서 새로운 프로그램을 업데이트 시킬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꿈을 꿀때 눈동자는 빨리 돈다
동물들의 꿈꾸는 시간(눈동자가 빨리돌아가는 시간)을 조사해보면 뇌가 큰 동물일수록 꿈꾸는 시간이 많다.
악어는 잠을 자되 눈동자가 돌아가는 잠을 거의 자지 않는다. 이러한 뇌가 작은 하등동물이 가지고 있는 프로그램은 그 수가 얼마되지 않고 또 본능적으로 고정되어있어서 프로그램을 조정할 필요성이 거의 없다. 즉 꿈을 꿀 필요성이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양서류인 개구리는 눈 앞에서 날아다니는 작은 벌레를 잡아먹고 사는데 죽어서 '움직이지 않는' 파리를 눈 앞에 갖다주었을 경우 아무리 배가 고파도 먹지 않는다. 개구리의 단순한 프로그램에서는 '움직이지 않는' 것은 먹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뇌가 작은 동물은 환경의 변화에 융통성 있게 대처하지 못하는데 이는 프로그램이 고정되어있어서 새로운 정보가 들어와도 프로그램을 바꾸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개구리가 꿈을 꾸지 않는 것은 새로이 업데이트 시킬 프로그램이 없기 때문이다.
조류나 포유동물들은 모두 꿈을 꾸는데 사람에 가까운 유인원 부류(고릴라, 원숭이 등)가 새나 들짐승 보다 꿈을 더 많이 꾼다. 동물의 뇌가 커질수록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도 커지게 되며 매일 매일 꿈 속에서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인간은 가장 꿈을 많이 꾸는 동물이다. 먹이를 찾고 적의 공격을 피하는 일에만 신경쓰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사회생활을 영위해야하고 또 예술과 학문 등의 창조적인 일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꿈은 잠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꿈을 꾸기 위하여 잠을 자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잠을 자는 동안에 눈동자가 돌아가는 시간 즉 꿈을 꾸는 시간은 그날 하루 동안이나 최근에 일어났던 일들을 영사기 처럼 돌리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새로운 정보의 내용을 분석하여 필요없는 옛날 정보는 멀리 떨어진 기억저장소로 보내고 새로운 정보는 언제라도 찾아서 사용할 수 있도록 다용도실에 차곡차곡 챙겨놓는 시간 즉 프로그램을 정리하는 시간인 셈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프로그램의 수는 수백만개에 이르기 때문에 깨어있는 상태에서는 업데이트를 시키지 못한다. 컴퓨터에서 온라인의 전원을 일단 끊어놓고 프로그램을 고치듯이 인간의 뇌도 감각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의 문, 즉 오관(시각, 청각 등)을 닫아놓은 수면상태에서만 프로그램을 고칠 수 있다.
꿈은 무의식과 의식의 중간상태
꿈은 알파상태인 얕은 잠에서 꾸는데 얕은 잠은 의식과 무의식이 겹쳐지는 반의식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꿈이란 뇌가 바쁘게 정보를 처리하고 있는 도중의 의식이 어느정도 개입됨으로써 우리에게 기억되는 것이다. 즉 꿈이 스토리로 전개되는 것은 의식의 개입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무의식적인 욕망이 의식화되는 것을 꿈이라고 말한 프로이드의 이론에도 일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꿈의 형태는 여러가지이며 그 모두가 무의식적 욕망의 해소가 아니다. 우리가 소위 '개꿈'이라고 부르는 밑도 끝도 없는 꿈 스토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잡다한 정보를 처리하고 있을 때 꾼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적 꿈의 해석을 시도한 심리학자 '에반스'박사의 꿈얘기를 들어보자.
'나는 유리로 둘러싸인 큰 식당에 물을 가득채워놓고 실험을 하였다. 그 실험이란 식당 안에서 헤엄을 치고 있는 물고기들의 수위(물 높이)를 재는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물이 꽁꽁 얼어서 물고기가 냉동이되어버렸다"
생존에 중요한 것-되풀이해 나타나
곰곰히 생각해보니 에반스 박사는 이꿈을 꾸기 전날에 물고기에 관련되는 세가지 사건이 있었음을 기억해내었다. 첫째,그는 큰 식당에서 오래간만에 생선요리를 먹었다. 둘째, 집에서 기르는 금붕어의 어항에 물을 갈아 주었는데 호스로 물을 갈아주면서 어항의 수위가 자꾸 낮아짐에 따라 물고기가 헤엄치는 수위도 낮아진다고 생각하였다. 셋째, 그날 저녁 몇달 만에 텔레비전을 보았는데 광고선전물에서 방금잡은 파닥거리는 물고기가 갑자기 냉동된 후에 후라이팬으로 옮겨지는 장면을 보았다는 것이다.
이 '물고기' 꿈은 개꿈에 해당되는 것일까. 최근에 일어났던 일 중에서 물고기에 관련된 정보가 저장창고에 처리되는 과정이 이야기로 엮어져 꿈으로 나타난것이다. 즉 물고기라는 주제에 관련되는 최근의 정보들을 순간적으로 처리하고 있던 중에 꿈을 꾸게 된 것이다. 이는 컴퓨터의 인사기록 프로그램에서 '해외근무'라는 키를 누르면 우리 회사에서 해외근무의 경력이 있는 직원의 명단이 찍혀나오는 것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꿈은 '에반스'박사에게 별로 의미가 없는 꿈이므로 개꿈이라고 할 수 있으나 누구나 심심찮게 같은 주제를 계속해서 꿈꾸는 경우가 있다. 나의 꿈을 예로 들면 내가 군에서 근무하였던 부대를 자주 찾아가는 꿈을 요즈음도 가끔씩 꾸곤 하는데 꿈의 배경이나 상황은 조금씩 변하긴 하지만 꿈의 내용은 천편일률적으로 "내가 아직도 제대를 하지 않았던가" 또는 "나는 만기근무를 다하였는데도 왜 제대를 시켜주지 않느냐"는 불평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군대에서 가장 부러워한 것은 자유로운 생활이었다. 방위병들의 고생스러운 사역 모습을 볼 때에도 "그래도 저녀석들은 낮에 아무리 고생이 많다 하더라도 저녁5시면 집으로 돌아가서 내일 아침 출근시간까지는 자유롭게 지낼수 있지 않는가" 하고 부러워 하였다. 내가 왜 장교로 들어오지 않았을까 하고 후회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장교는 퇴근 후면 자유시간이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내무반 생활이 어려웠고 단체 기합도 많이 받았다는 생각이 나지만 근본적으로 내가 얼마나 24시간 얽매여 있는 졸병생활을 싫어했으며 자유를 그리워했는가를 이 꿈은 반증하여 주고있다.
자유란 나에게 의식주 다음으로 강한 본능이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매우 중요한 프로그램이었다.
이와같이 자기의 생존에 중요한 프로그램일 경우에는 같은 내용의 꿈이 여러번반복된다. 이는 마치 집단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는 원초적 본능과 같은 것이어서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프로그램이다. 만일 의식적으로 잊어버렸다면 무의식으로라도 꿈의 형태로 반복되는 것이다.
가정에서 애완용으로 키우는 고양이는 주인이 포식하게 해주므로 전혀 쥐를 잡아먹을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태어나서 한번도 쥐를 잡아먹지 않았지만 고양이의 꿈꾸는 모습을 살펴보면 발톱을 휘젓는다거나 목을 내밀어 물어뜯는 시늉을 하는 것을 가끔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먹이를 사냥하는 가장 본능적인 꿈을 꾸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먹이를 사냥하는 것은 고양이의 생존에 가장 중요한 본능적인 프로그램으로서 쉽게 없어지지 않는 법이다.
한 편 꿈은 미래를 예시한다고도 하는데 꿈이 뇌의 기능이라고 본다면 꿈의 예시기능 역시 뇌의 신비한 능력에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우리가 오랫동안 잊어버렸던 사건을 아무리 기억해내려고 해도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 꿈에서 쉽게 기억해내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도 예시하는 능력을 전연 배제할 수는 없지 않을까. 꿈꾸는 사람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날아가기도 하니까.
깊은 명상때의 뇌파수는 꿈꿀때와 같다
깊은 명상에 잠겨있는 상태의 뇌파수는 꿈꾸는 상태와 마찬가지로 알파상태라고한다. 뇌파의 파동수가 적은 알파의 상태 또는 그 이하의 델타의 상태에서는 뇌가 외부의 감각으로부터 차단되어있는 매우 안정되고 조용한 상태, 즉 비어있는 상태이다. 우리가 깨어서 활동하는 상태(베타상태)는 파장이 짧고 파동수가 많아서(즉매우 바빠서)시공의 한계를 넘어서는 정보를 받을 여유가 없지만 선인(仙人)처럼 조용한 마음의 상태 즉 꿈의 상태에서는 3차원을 초월하는 정보를 받아들일 여유가 생기는 것이 아닐런지 한번 짐작해보기도 한다. 4차원의 세계에서는 공간이 휘어져서 시간과 일체를 이루듯이 꿈의 세계에서도 시간과 공간의 구분이 엷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미래를 예시하기도 하고 멀리 떨어져있는 사람과 텔레파시로 통하게 된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꿈은 뇌가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의식이 관여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뇌의 거대한 정보처리작업에 비추어 보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우리가 꿈을 꾸지 않는 동안에도 뇌는 쉴새없이 일하고 있을 것이다. 잠은 육체에서는 일시적 휴식이 되겠지만 뇌에게는 매우 바쁜 시간이다. 꿈의 컴퓨터 이론은 실로 오묘한 뇌의 기능에 대하여 한 귀퉁이를 이해하려는 노력에 불과하다. 우리는 왜 잠을 자는가, 그리고 우리는 왜 꿈을 꾸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정확히 대답해줄 수 있는 존재는 우리의 뇌 자체 밖에는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