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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양수술의 새로운 가능성

인체의 전기회로 이용

'인체는 전기회로와 같다'는 놀라운 이론을 발표한 스웨덴 방사선 의학자 '비요른 노르덴슈테름'의 임상실험과 방대한 이론체계를 디스커버지에서 소개한다.
 

노르덴슈테름 박사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스톡홀름'의 '비요른 노르덴슈테름'박사의 임상실험실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외과의사들이 손들어버린 폐종양때문에 1년을 넘기지 못할 노환자가 박사의 획기적 요법을 받아보기로 승락한 것이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박사의 깊게 팬 눈매에는 과로가 몸에 밴 65세의 나이가 엿보인다. 긴 바늘을 집어들고 환자의 가슴을 한동안 바라보던 박사는 환자의 폐를 두루 볼 수 있게 손수 고안해낸 X선장비의 도움을 받아 이윽고 환자의 가슴 근육을 뚫고 폐종양의 한가운데에 바늘을 꽂는다. 두번째 바늘을 10인치 아래에 꽂고 두 전선을 구부려 이은 후 박사가 고갯질을 하자 조수는 주홍빛 상자의 다이얼을 돌린다. 치료가 시작된 것이다. 혹시 아프지 않느냐는 박사의 물음에 환자는 괜챦다고 대답한다. 간호원이 날라준 커피를 의사와 환자가 마시고 있는 동안 전류가 환자의 폐를 흐르고 있다. 한 생명을 구하려는 모험 속에서 침착히 기다리고 있는 박사는 과대망상의 전기요법가일까? 그러나 그가 일찌기 1950년대에 개척한 임상방사선상의 혁신적 요법은 지금은 거의 모든 병원이 쓰고 있다.

 

임상 방사선 요법의 개척자
 

그는 지금까지 '스톡홀름'의 '카롤린스카'연구소의 진단방사선 과장, '노벨'상 재단의 의학분과장 등을 역임해왔다. 지난 83년에 펴낸 '생체 폐쇄 전기회로; 임상·실험·이론적 증거'에서 그는 인체에도 전기회로와 같은 전기운동의 신비한 세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노르덴슈테름'에 따르면 인체의 전기회로는 상처나 감염, 종양 심지어는 정상적인 활동에 의해서도 가동되며 수시로 전압이 바뀐다. 이 전류는 동맥, 정맥을 따라 흐르고 모세혈관벽을 드나들면서 이를테면 상처가 생겼을 때 이를 아물게 하는 과정을 진행시켜 내부 기관의 활동에 평형상태를 가져온다. 피돌기만큼이나 중요한 이 전기체계에 이상이 생기면 암이나 그밖의 병을 악화시킨다는 것이다. 전기회로가 저항체계나 세포증식이나 치료에 큰 도움이 된다는 생각은 적어도 2백 년 전부터 있어왔지만 지난 세기말 전자기학이 마치 만병통치약이나 된 듯 떠든 연구가들의 실패로 인한 의혹은 아직도 남아있다. 그러나 '노르덴슈테름'의 책에는 어떤 비전의 이론이나 하나의 특수한 실험 결과가 아니라 꼼꼼한 실험들과 잇다른 관찰, 이론적 뒷받침과 입증된 사실을 토대로 한 이론이 차근차근 나와있다.
 

정통의학 역시 호르몬, 효소 등의 화학적 요소 및 혈압과 같은 물리적 요소 외에도 수많은 전기적 힘이 인체내에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사람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신경섬유를 통한 전기적 신호로 이루어지며 실로 세포막을 드나드는 이온의 끊임없는 흐름이 없이는 생명 자체가 지속될 수 없다.

 

생체 폐쇄 전기 회로의 발견
 

하지만 '노르덴슈테름'의 요점은 이제까지의 의학에서는 화학적 요소와 물리적 요소가 따로놀고 있을 뿐 그 상관관계가 빠져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원인이 없는 결과만의 그림을 그려왔다는 것인데 그가 이 원인이라고 지적하는 것이 바로 생체 폐쇄 전기회로의 흐름이다.

 

'노르덴슈테름'이 옳다면 이 회로는 침술과 전자기학 요법의 신비한 치료 효과를 비롯, 인체의 많은 조절과정을 밝혀줄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이론이 단지 학문적 호기심거리가 아니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폐와 유방의 종양에 전기 실험을 했는데 그의 연구가 아직 미완성인 것을 고려하면 결과는 꽤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앞서의 임상 치료가 진행되는 동안 그는 의학계의 냉담한 반응에 약간 곤혹스러운 듯 말했다. "내가 옳다면 시간이 내편이죠…. 처음에는 어느 출판사에서도 내 책을 내려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누가 읽겠느냐면서 모험을 꺼렸지요. 내가 단 하나의 실험 얘기만 썼다면 그들은 쉽게 움직였을 지 모르지만 나의 이론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는 얘기에 의학계에서는 미친 소리라고들 합디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나 중요하고 근본적인 이론입니다"라면서 그는 웃었다.
 

그의 책이 나온 지 만 1년이 지난84년, 첫 서평이 '방사선 연구'지에 실렸다. "이 책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중요한 개념을 담고있는 창조적인 저술"이라는 평이었다. 1년 뒤에는 보다 유력한 '미국 뢴트겐학지'에 '노르덴슈테름'의 강연 초록과 서평이 나왔다. "공동 저술이 대부분인 여느 저작과는 달리 그의 독창적 개념, 실험, 분석, 서술은 전적으로 그의 것이다. 외톨이로 완전히 몰두해있는 그의 작업은 선구적 과학자의 그것이며…그의 최종 결론이 아직 미숙하기는 하지만 의학계에서 진지하게 검토될 만한 대담하고 고무적인 이론이다"

 

너무나 엄청난 이론
 

그러나 그러한 검토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단지 4개의 소그룹-프랑스, 이탈리아에 하나씩, 일본에 둘-이 걸음마단계에 있다. '컬럼비아'대학의 방사선학자인 '오스틴'은 너무나 광범위한 이론이라서 이 나라에서는 아무도 그의 작업을 건드리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의학계에서 신망이 두터운 '노르덴슈테름'의 몇몇 동료들은 그의 작업이 1628년 순환체계에 관한 '하비'의 이론에 견줄 만큼 혁명적이라고 말한다. 그의 이론이 옳다면 의학뿐 아니 생물학 전체에도 중대한 일이며 틀리더라도 실험 자체의 가치는 크다는 것이다. 기이한 것은 대부분의 의학계가 그의 이론의 존재조차 모른다는 점이다. 방사선학자, 나아가 암전문가, 생체물리학자, 병리학자 중 누구를 붙잡고 그의 이름을 물어도 여러분은 십중팔구 "그가 누군데?"라는 되질문을 받을 것이다. "노르덴 슈테름이 절실히 바라는 것은 그의 이론이 옳은지 그른지 한번 판가름해볼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한 동료는 말한다.
 

1920년 스웨덴 중부의 한 마을에서 태어난 '노르덴슈테름'은 '스톡홀름'에서 수련의 과정을 마치고 2차대전 후에는 한때 오스트리아에서 스웨덴 적십자단의 일원으로 고아들에게 결핵예방접종을 펴기도 했다. '스톡홀름'과 '미시간'에서 외과 및 방사선 관계의 경력을 쌓은 그는 1956년부터 흉곽과 폐를 절개하지 않고도 폐종양이 악성인지 양성인지를 가려내는 방법에 몰두했다. 그의 착상은 단순한 것으로서 X선의 도움으로 바늘을 종양에 찔려넣고 얇은 조직을 떼내 이를 현미경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생체검사법을 위한 바늘 및 X선 기기의 개량이 필요했다. 당시의 동료들은 그것이 너무나도 위험한 과정인 데 반해 그는 너무나 저돌적이었다고 전한다.

 

미국에서 20여년뒤 도입 시작
 

이 생체 검사법이 미국에 받아들여진 것은 약 20년 뒤인 70년대였다. '예일'의 과대학 방사선과장인 '그린스펀'은 '노르덴슈테름'이전에 누가 허파에 바늘을 찔러넣어 종양의 생체검사를 하자고 했다면 나는 놀라자빠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혁신이 '노르덴슈테름'의 도정의첫걸음이었다면 마지막은 생체 폐쇄 전기회로 이론으로서 이 역시 195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임상에서 폐의 종양덩어리를 X선으로 투시할 때 종종 그 둘레에서 달무리같은 밝은색의 줄무늬가 빛나는 것을 보고 호기심을 느꼈다. 그러나 이 달무리 현상은 어느 종양에서나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같은 종양에서도 한번은 나타났다가 다음번 X선에서는 사라지곤 했다. 그는 이 수수께끼같은 현상을 동료들에게 보였지만 그들은 이 줄무늬를 거의 알아보지 못했고 그 사소한 것이 왜 문제냐고 갸우뚱했다. 이 현상의 원인과 의미를 알아내기 위한 각고의 10년끝에 1965년 그는 종양의 전기적 특성을 시험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이것은 거의 막다른 골목에 처한 그의 궁여지책이었다.
 

인체내의 종양은 실험실 재료로 쓸 수없고-그렇다면 달무리 현상을 일으키는 조건이 사라질테니까-환자에게 생체검사법의 위험부담을 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노르덴슈테름'은 바늘 대신 전극을 써서 조직 검사와 체내 종양의 전기적 특성의 연구를 접맥시켰다. 그 결과 그는 달무리가 있는 종양은 대개 전기력을 띠고 있고 나아가 그 가장 깊은 곳의 세포가 이미 죽어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실험은 그를 완전히 사로잡아 60년대말 무렵이면 더이상 전통적 방사선학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는 실험 속에 생리학, 암병리학, 병리학쪽으로 옮아갔다.
 

자신만의 학문적 지평을 열게 되었으며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인체의 전기적 평형
 

종양의 전기력을 이해하기 위해 피의 전력을 측정하는 과정에서 그는 그것이 천천히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피는 그 상태를 변질시키지 않고 뽑아 낼 수 있는 유일한 실험 재료였는데 그는 여기서 부패과정의 피가 처음에는 +, 다음에는 -로, 그리고 모든 혈구가 죽을 때까지 하루종일 +와 -상태를 오간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이 그의 이론의 실마리로서 인체에 어떤 상처가 생기면 전압이 일어나 +와 -를 끊임없이 오가다가 결국 전기적 평형에 이르는데 이것이 바로 치료와 관계된다는 것이다. 다음에 그는 산 동물을 재료로 한 면밀한 측정을 통해 전기저항이 피의 2백배가 넘는 동맥과 정맥의 혈관벽이 절연전선의 구실을 하고 있음을 밝혀냈다. 다시 개를 상대로 한 실험에서 전류를 백혈구에 흘려보냈더니 음전기(-)를 띤 백혈구가 +극쪽으로 끌려갔다. 과학자들 사이에는 아직 숙제로 남아있는 백혈구의 치유력의 신비가 그의 이론에 의해 한가닥 벗겨진 셈이다.
 

그는 스웨덴인들의 느긋한 생활방식과는 달리 무서운 정력으로 일에 몰두했다. 그날의 문제를 훑어보고 다음날의 실험계획을 짜면서 10시에 잠들면 새벽 3~5시에 일어나 다시 실험에 매달렸다. 그는 어떤 조수도 원치 않았으니 모든 실험을 최선의 상태에서 손수 해내고 그 결과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1978년경 그는 자신의 기본 연구를 마무리지었다. 그는 생체 전기회로의 모든 요소를 밝혀냈으니 혈관간 폐쇄회로에서 종양의 회저가 교류 동력원의 역할을 하며 혈관은 상처난 조직과 건강한 조직 사이의 전선이 되어 전기적 피의 회로를 소통시키며 모세혈관벽 세포의 효소가 이 체계의 전극이된다는것이다. 하지만 83년에 다시 쓰여진 그의 책은 어떤 출판사도 거들떠보지 않아 결국 자비로 2천권을 찍었는데 그나마 4백권밖에 팔리지 않았다. 여기에는 의학지에의 기고를 거의 기피하고 20년의 독학끝에 불쑥 두꺼운 책을, 그것도 1백35달러라는 비싼 값에 내놓은 그 자신의 책임도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그간 3차례나 논문을 발표했지만 일반의 반응은 커녕 그의 동료들마저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항변한다.

 

실험을 거듭한뒤 이론정립
 

이 책 자체도 그가 1979년 가벼운 뇌일혈을 일으킨 후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저술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자신의 저서를 출판시키지 못하면 끝장이라고 생각하는 기존의 의학계의 풍토에서 전연 파격적인 방식이었다. 그는 새로운 집필에 대해서는 "내게는 근본적인 학문적 연구가 지상의 과제이기 때문에 더 이상 연구할 수 없을 때가 오면 다시 무엇인가를 쓰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이론에 대해 웬만큼 아는 동료들 사이에도 이견은 분분하다. 아직 아무도 실수를 찾아내지 못할 만큼 그의 실험적 관찰이 옳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그의 전반적인 종합이론에는 좀 억지가 있다는 것이다. 인체의 전기회로가 X선에 의한 폐암 발견부터 백혈구의 축적, 침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수수께끼를 풀 수 있다는 그의 단언은 전통적인 생각에 젖은 사람들에게는 의아심만을 일으킬 뿐이다. 그가 순수히 연구에만 몰두하기 위해 79년 '카롤린스카'병원의 과장직을 물러났을 때 바깥 사람들은 혹시 병원측이 그가 현실감각을 잃었다고 보아 은근히 그의 사직을 종용한 게 아닌가 하고 수근댔다.
 

원래 말이 적고 금욕적 인상을 주는 그는 자신의 직업에 대한 거의 광신적 신념으로 인해 이런 의혹을 더욱 부추긴다. 그는 때때로 자신이 19세기에 미개한 아프리카 대륙에 첫발을 디딘 선교사같은 기분이 든다고 털어놓는다. 미국 뢴트겐학지에 그의 원고가 실렸을 때도 '피글리'는 그가 어떤 진지한 비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말한다. "아무도 그의 성실과 진지함을 의심하진 않지만 나는 그가 거의 종교적 열정 때문에 자칫 객관성을 잃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전극을 꽂는 치료법^종양이 +전기를 띠고 있는 동안 달무리 현상이 자연적으로 나타나면 수분(파란색)이 주변의 조직으로 흘러들어 종양의 수분을 빼앗고 빛을 내는 구조와 아아치를 만들어낸다. '노르덴슈테름'은 유방의 종양에 +전극을, 부근의 정상조직에 -전극을 꽂는다.

 

보통의 의학자는 이해하기도 힘들어
 

그의 이론의 확산에 큰 장애는 아마도 이 이론이 놀랄 만큼 폭넓은 분야에 걸쳐 있다는 점인 듯하다. 일단 의대를 졸업한 뒤에는 방사선 관계 기술의 엄청난 진보를 따라잡기에도 바쁜 방사선학자들은 기초물리학은 물론 생체물리학, 생화학, 병리학, 종양생리학에까지 미치는 그의 이론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그의 작업을 평가할 수 있는 소수의 생체전자기학 전문가들의 증언도 엇갈리고 있다. 캘리포니아 V·A병원의 '아데이'는 '사이언스'지에 그의 전공분야의 최근 동향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노르덴슈테름'의 이름을 거론조차 하지 않았으며 '컬럼비아'대학의 외과 명예교수인 '바세트'는 그를 가리켜 기존의 지식체계를 무시하고 자신의 결과에만 집착하는 신출내기라고 비판했다. 반편 '생체전기학지'의 편집차장인 '리핀스키'는 그의 업적이 생체전자기학상의 기존의 지식과 완전히 부합되는 듯하며 나아가 그의 이론은 흩어진 이론과 실험 결과를 합리적으로 집대성한 최초의 업적이라고 추켜세웠다.
 

이슬비가 뿌리는 오후, '노르덴슈테름'은 자신의 성공담과 실패담을 얘기하면서 한때 그에 관한 자세한 기사가 '전국 탐방'지에 나간 후 몇달 동안 전화문의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그의 이론이 가치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임상요법으로도 개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첫 임상치료는 78년 6월에 있었다. "이 환자는 수술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은 66살의 할머니였지요. 난소암이 폐암으로 전이된 상태였는데 나는 환자의 폐종양에 조그만 전극을 꽂아 1시간 가량 전류를 흘려보냈어요· 7개월 뒤부터 종양이 사라지기 시작하더군요, 5년동안 재발이 없다가 난소암의 재발로 죽었읍니다. 두번째 환자는 극히 악성의 종양을 가진 19살의 처녀였죠. 외과수술로 자궁을 잘라냈지만 2년후 폐 양쪽에 두개씩 전이가 생겼는데 제일 큰 것은 지름 4cm였어요. 외과수술, 방사선치료, 화학요법 어느것도 속수무책이라 머리칼이 다 빠져버린 상태에서 마침내 내게 보내졌지요. 나는 한번에 하나씩 4개의 종양에 전극을 꽂았어요. 결국 4개 전부가 퇴화해서 7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녀는 매우 건강합니다."

 

종양 50% 성공적 치료
 

그러나 병원의 윤리위원회가 그에게 배당하는 환자는 다른 모든 치료법을 거부하거나 효과를 못본 사람들 뿐이다. 그래서 이미 온몸에 큰 종양이 마구 퍼져있는 그들은 그의 전기요법으로 폐종양이 파괴되더라도 다른 암이 너무 빨리 번져 얼마 못가서 죽을지도 모른다. 그가 전극치료요법을 실험한 첫 환자 20명 중에서 10명의 경우는 종양이 퇴화했으며 7명의 경우는 종양이 완전히 사라지거나 무해한 조직덩어리만 남긴 채 종양이 죽어버렸다. 그는 의사들이 말하는 임상요법상의 성공을 거둔 것 이다. 25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한 두번째 임상실험에서는 전압을 10볼트에서 20볼트로 올렸더니 성공율이 떨어졌다. 두 전극 사이의 회로가 단축되어 전기장이 종양의 작은 부위에만 집중된 탓이었다. 마지막 실험에서 그는 다시 전압을 낮추고 회로를 천천히가동시켰다. 지금까지 치료한 80명의 환자 가운데 이 치료로 인한 사망자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요법은 안전성뿐 아니라 그 이상의 서광도 보여준다.
 

이러한 개가가 알려지자 '카롤린스카'병원의 부인 암병리학 과장 '페터손'은 가망이 없는 6명의 환자를 보내 대부분의 경우 종양의 퇴치를 보았다. 다른 암전문의 2명도 그들의 환자를 의뢰하여 효과를 본 후 '소수의 신봉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요법이 고립된 종양에만 들었고 그 대부분이 지름 4cm이하의 작은 종양이었다는 점을 들어 '기적의 요법'이라는 헛된 희망을 걸지 말라고 강요했다.

 

수십년의 세월이 필요하다
 

미국에서는 그의 암치료법이 별 주목을 못 끌고 있다. 여기에는 그 자신의 선전 부족의 탓도 있다. 하지만 '예일'의 '그린스펀'은 조심스런 낙관론을 편다. "종양의 크기가 줄어드는 임상 결과를 그의 책에서 사진으로 보았지만 아직 정확한 통계가 나와 있는건 아니예요, 알다시피 종양은 저절로 줄어드는 경우도 있거든요. 하지만 이 경우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제 직감입니다."
 

'노르덴슈테름'은 이 작업의 막연한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방사선요법은 적어도 85년 동안 세계각지에서 매일같이 쓰여왔지만 아직 낙관이 이른 형편인데 훨씬 복잡한 변수를 안고 있는 이 전기요법은 이제부터 온세계가 매달린다 해도 얼마나 많은 세월이 걸릴지 모릅니다."

어떤 극적인 전환이 없는 한 그의 작업이 받아들여지는 데는 수십 년이 족히 걸릴듯하다. 통상 그 정도의 연구자는 젊은 제자들을 받아들여, 자신의 이론과 방법을 훈련시킨 후 다시 내보내서 자신의 학설을 의학계에 퍼뜨린다. 하지만 그의 책이 나올 때까지 그에게는 단 한명의 제자도 없었다(지금은 '스톡홀름'지역에서 몇몇 연구자들과 함께 일하고 있으며 야심과 재능있는 누구라도 환영이라고 한다)

 

아들까지 제자되기 꺼려
 

의학계의 주류에서 그렇게 벗어난 것을 추구하기 위해 스웨덴까지 달려갈 젊은 연구자들은 거의 없다. 설혹 '노르덴슈테름'의 이론이 옳다 하더라도 그 과제를 추진 한다는 것은 기존 의학계와의 끊임없는 투쟁이 되기 십상이다. 반면 자기공명영상법처럼 공인된 새 기술분야에서는 출판도 명성도 보장된다. (한때 '노르덴슈테름'이 외과의사인 그의 맏아들에게 같이 일하자고 권했을 때 그 아들은 이렇게 거절했다; "제가 잘 되면 아버님 탓, 못 되면 제탓이 됩니다") 젊은이들이 이 정도이니 이미 상당한 기반을 쌓은 장년층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노르덴슈테름'의 숭배자인 '그린스펀'같은 이도 왜 그와 합류하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우물쭈물 넘어간다.
 

국립의료원 원무과 계장인 '첸'은 '노르덴슈테름'이 그의 작업을 인정받으려면 기업가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한다. "내가 만일 그사람이라면 나는 국립의료원, 미국암협회, 각종 재단을 쑤시고 돌아다닐 거예요. 지금 열쇠는 어디 틀어박혀 글이나 쓰는 게 아니라 세일즈맨이 되는 겁니다." 하지만 65세의 '노르덴슈테름'은 세일즈맨이 되기는 커녕 죽을 때까지 연구에만 매달릴 것이다. 그의 이론 자체에 대해서는 낙관하는 사람도 의학계의 반응에 대해서는 비관적이다. '그린스펀'은 "그가 가고 나도 가고난 오랜 뒤에야 그가 옳았다는 것이 밝혀질것"이라고 말한다.

 

유행이나 타는 의학계 현실
 

'페터손'은 의학 연구자들 역시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유행을 타기 마련이라고 씁쓸하게 지적한다. 한해는 인터페론, 다음해는 자기공명영상법, 이런 식이며 막대한 돈줄과 언론의 뒷받침 없이는 묻혀지고 만다. 또 '그린스펀'은 생체폐쇄 전기회로 이론에 대한 의료계의 냉담성을 이렇게 풀이한다; "어떤 것을 진리라고 배운 사람들은 자신이 불완전한 이론의 토대에서 일생을 보냈다는 얘기를 특히 듣기 싫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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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동아일보사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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