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물이 지상에 완성되기 전에 컴퓨터의 화면에서 모든 모의실험이 진행된다. 인간이 살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 완비되었는가를.
"30대 중반의 회사원 K씨 부부는 벽에 걸린 사진들을 바라보며 다가올 새 봄을 새삼 어린 애들처럼 조급하게 기다리고 있다. 실로 결혼생활 10년만에 지겨운 셋방살이를 청산하고 변두리이긴 하지만 조그마한 내집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즐겁고 대견스러운 것이다. 얼마전 설계사무소에서 컴퓨터를 통해 본 영상들은 벌써 내집을 본 것처럼 가슴을 설레이게 하였다. 그 영상들은 맨 처음 까마득히 높은 위치에서부터 서울의 전체를 마치 비행기를 타듯 한바퀴 선회한 다음 집주위의 모습들을 자세히 보여주었다. 이어서 자동차를 탄 것처럼 진입로의 모습들을 뒤로하고 집 어귀에까지 이르는 광경이며 차에서 내린 다음 대문을 열고 집에까지 들어가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현관을 지나 거실에 이르러서는 기존에 설계된 각 방들을 드나들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들은 순간적으로 수정할 수 있어서 많은 시간을 소요하지 않고도 마음에 드는 안을 곧 결정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먼 훗날의 공상이 아니라 얼마 안 있어서 아니 지금도 어느 곳에선가는 벌써부터 일어나는 현상일 수도 있다. 컴퓨터의 혁명은 건축에서도 이처럼 급격한 변화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우리는 벌써 '저확률 고충격'의 시대, 즉 '앨빈 토플러'가 '제3의 물결'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정보화시대에 들어서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른 모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컴퓨터의 혁명은 건설업계에서도 뒤늦은 것이긴 하지만 크게 주목되는 현상이다. 건축에 있어서의 컴퓨터화는 구조계산을 필두로 하여 설계과정에서의 도면의 제작 및 시공단계에서의 공정관리의 전산화, 예산 및 회계관리, 인원관리 등의 전반적인 영역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설계분야에서의 컴퓨터의 이용, 즉 설계의 초기단계부터 최종과정에 걸친 다양한 컴퓨터의 이용을 CAD(Computer Aided Design)라고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그 영역은 점차 확대되고 있는 추세이다.
컴퓨터를 이용한 도면제작
건축은 인간의 생활을 포용하는 공간을 창조한다는 점에서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요구조건들을 만족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그 시공은 당대의 산업기술을 종합하는 면모를 지니면서 일반 생산라인과는 다른 일품생산적인 독특한 성격을 갖고 있다. 즉 대지환경이 천차만별하고 건축주의 계획의도가 각양각색이며 각종의 자재 기기류 등의 공급이라는 점에서 타산업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에 다시 건축가는 그들의 가치관이나 사상 및 예술성을 표현하고자 하므로 그 작업과정은 매우 창조적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건축의 설계과정을 보면 굉장히 많은 부분이 창조적이기 보다는 반복적이고 단순한 도면의 제도라는 문제가 있다. 이러한 반복적인 제도작업을 컴퓨터를 이용하여 손쉽게 처리하려는 것이 바로 CAD의 출발이었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서 건축의 평면도, 입면도, 단면도, 구조 및 설비도면 그리고 상세도면 등 각종 도면을 컴퓨터그래픽을 이용하여 신속하고 정확하게 그려내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 소요되는 장비들을 개괄적으로 살펴보면 (표 1)과 같다. 이와 같은 기본적인 입출력장치 외에 컴퓨터 본체에 해당하는 중앙처리장치(CPU)와 CAD용 소프트웨어가 갖춰짐으로써 비로소 도면을 그릴 수 있게 된다.
작업과정을 살펴보면 실제 제도판 위에서의 작업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먼저 필요한 만큼의 보조선을 긋고 그 보조선을 이용하여 정확한 위치에 필요한 도형들을 그려서 작업해 나간다. 점, 선은 물론 각종 다각형 및 원이나 타원 등을 치수대로 순간적으로 그릴 수 있고 점선, 실선 및 쇄선 등도 굵기를 달리하여 그려넣을 수 있으므로 손작업하는 것보다 훨씬 손쉽게 작업할 수 있다. 이렇게 그려진 도형은 한개 혹은 몇개씩 이동시키거나 복사 삭제할 수 있고 필요에 따라서는 변형 혹은 대칭시킬 수 있으므로 도면작성의 속도는 굉장히 빨라진다. 또 큰 도면을 조그만 화면상에서 작업하므로 정확히 작도하기 곤란한 경우에는 확대, 축소하는 기능에 있어서 얼마든지 크게 확대해 작업할 수 있으므로 그 정확성은 놀랄만하다. 또한 도면단위로 복사하여 조합하거나 중첩시켜 도면을 완성시킴으로써 그 속도는 더욱 빨라진다.
예를 들어 수평으로 일곱가구가 배치되고 높이가 12층인 아파트의 입면도를 그리는 과정을 상상해 보자.
먼저 단위가구 및 단위층들을 위한 보조선을 긋고 이어서 맨 좌측이나 우측의 한 가구분을 정확하게 그린다. 반복될 수 있는 한 가구가 정확히 그려졌다면 그것을 수평으로 일곱번 복사하고 다시 한 층분을 12번 수직으로 복사하면 곧 한장의 입면도를 그릴 수 있다. 이처럼 CAD를 이용하는 경우 그 도면의 생산속도와 정확성이 크게 향상되는데 특히 아파트, 호텔, 고층의 사무소 건물, 병원, 학교 등 대단히 반복적인 건물의 경우 그 효율은 더욱 높아질 수 있다.
또한 건축에서 자주 사용되는 심볼(symbol)이나 상세도면 등을 컴퓨터의 무한한 파일링 기능을 이용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해 넣어두면 필요할 때마다 순간적으로 불러 사용할 수 있고, 나아가 그 설계사무소가 주택, 아파트 또는 사무소 건축 등을 주로하는 전문업체라면 각각 그 종류별로 규모를 달리하여 바람직한 대안들을 평소에 수없이 만들어 파일해 둘 수 있다. 이것을 이용하면 시일이 촉박한 경우라도 이미 축적된 안들을 불러내어 비교하거나 수정을 가하여 사용함으로써 그 설계기간 내에 끝낼 수 있고 인원수급의 어려움도 해결할 수 있다.
또한 이미 그러한 도면들은 보조기억장치인 디스크나 자기테이프에 얼마든지 보관할 수 있으므로 필요한 경우 언제든지 청사진과 같은 복사도면이 아니라 직접 잉크로 그린 원도를 플로터를 통하여 수 없이 뽑아낼 수 있다. 이러한 CAD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경우라면 해외의 건설현장에 수백 수천매의 도면을 보내야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그 많은 도면을 힘들게 우송하거나 직접 운반하지 않고 테이프 몇 개만 보내 현지에서 플로터로 도면을 뽑아내면 될것이다. 또한 현지의 컴퓨터로 수정하여 출력할 수 있으므로 또다시 도면들을 국내로 가져왔다가 수정하여 내보내는 불편이 없게 된다. 더우기 데이타 통신의 발달로 머지않아 방대한 데이타의 도면까지도 현재의 펙시밀리처럼 원격지 송수신이 가능하게 될 것이므로 더욱 편리해질 것이다.
CAD는 건축의 새로운 수단
6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CAD의 역사는 오랜기간의 연구개발을 거치면서 평면적인 도면을 그리는 기능에서 나아가 차차 투시도, 조감도 등의 3차원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이로써 건물의 입체적인 감각과 규모, 균형 등을 보다 효율적으로 체크할 수 있게 되었고 더우기 여기에 다양한 색깔들을 넣어봄으로써 현실감을 더 할 수 있게 되었다. 빨강, 녹색, 청색의 빛의 삼원색을 조합하여 1천6백만가지의 색을 만들 수 있고 또 순간순간 채색을 달리할 수 있으므로 수 없이 많은 대안들을 비교할 수 있으며 광원을 조정하는 기능을 이용하면 야경까지도 나타낼 수 있다.
건축설계를 행하는 과정에는 조그마한 모형들을 만들어 봄으로써 그 느낌을 잡아보는 과정이 있는데 그것 역시 실물크기가 아닌 한 정확히 어림하기는 쉽지않다. 그러나 CAD에서는 위의 3차원 기능을 잘 활용하면 모형보다 훨씬 현실감 있는 모델효과를 볼 수 있다.
더욱 진보된 CAD 소프트웨어들은 3차원으로 건축설계를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2차원의 도면으로는 불가능했던 물량의 산출이나 각종 설비 시스템의 결정 및 조명방식의 경제적 분석까지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3차원의 CAD 시스템에서는 입면 단면 등이 함께 들어가 있는 셈이므로 그 각각의 도면들은 한꺼번에 변경시킬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즉 건물을 수평으로 자르면 평면도가 되고 수직으로 자르면 단면도, 그리고 멀리서 보게되면 입면도 혹은 투시도까지도 순간적으로 뽑아낼 수 있고 평면과 입면을 동시에 변경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은 아직 크게 이용되지 못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실용화 될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CAD의 발달은 종전의 건축물을 투영하는 방법에 의해 설계함으로써 발생하는 도면독해의 어려움과 오류들을 실제적인 3차원으로 처리함으로써 보다 쉽고 정확하게 설계할 수 있게 되리라는 전망이다.
컴퓨터 그래픽의 진보는 3차원으로 그린 도면들을 다시 활동사진화하는 애니메이션(Animation)을 가능하게 하였는데 그것은 곧바로 건축에서도 응용되고 있다. 예를 들자면 태양열 주택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태양의 이동에 따른 빛과 그림자의 변화, 반사 및 흡수를 모의실험(시뮬레이션) 할 수 있을 뿐만아니라 그림자의 변화를 추적하여 주위의 건물에 대한 일조권의 침해 여부까지도 찾아 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고층건물의 경우 지진이나 풍력의 부하를 계산하여 변형되는 모습까지도 볼 수 있고 여기에 비디오 기법을 이용하게 되면 그야말로 영화와 같은 애니메이션이 가능하게 된다. 특히 이 애니메이션 수법은 도시의 재개발에도 이용되기에 이르렀는데 이경우 먼저 기존의 건물과 도로 등의 현황이 입력된다. 이어 이것을 가까이 혹은 멀리서 애니메이션 시켜봄으로써 비행기를 타거나 자동차를 타고 드라이브할 때와 같은 영상을 연출해 낼 수 있고 또한 새로이 설계되는 건물들을 여러가지로 비교 검토함으로써 그 개발방향의 결정을 쉽게하거나 주민들의 신속한 합의형성에도 기여할 수 있게 되었다.
나아가 이러한 애니메이션들은 건축 이외에도 관광안내나 회사소개 필름, TV방송의 광고까지 널리 이용되고 있다. 더우기 최근 급속히 발달하고 있는 이미지 프로세싱(Image Processing)을 이용하면 현실의 사진까지도 컴퓨터 화면에 자유로이 불러들여 그 영상들을 삭제, 첨가, 변형 등의 편집을 가할 수 있게되어 이 이미지 프로세싱이 CAD와 결합하면 더 한층 생생한 효과를 가져오리라고 기대된다.
결국 CAD는 먼 훗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눈앞에 닥친 새로운 건축의 수단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국내의 건설수주 경쟁에서도 필수요건화 되고 있는 추세이다.
분화에서 통합으로
과학의 역사는 시종 분화과정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유사이래 종교, 철학, 예술 등의 초기적인 분화로부터 시작하여 산업혁명을 거쳐 근대에 접어들면서 그 분화의 길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건축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로 설계와 시공의 분리, 다시 설계로부터 구조, 설비, 전기, 조경, 인테리어 등이 분리되었다. 이러한 분업화는 그 생산성이나 전문적인 지식의 축적으로 효율은 매우 높아졌다고 할 수 있으나 그 분화가 지나치게되면 전반적인 건축과정의 종합적 파악이나 통일성의 확보가 어렵게되어 일관성이 없는 건물이 나타나게 된다. 건축이라는 것이 건축가의 철학적 소산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 일관성의 확보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이제 CAD가 그를 위한 도구가 될 수 있으라는 전망이다. 다시 말해서 설계 이외의 구조나 설비, 전기 등은 건축을 보조하는 측면이 강한 것으로써 이러한 것들이 CAD의 보조시스템으로 들어와진다면 건축가 한 사람만으로도 충분히 전체설계를 수행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산업혁명 과정에서도 보았듯이 도구의 변혁은 생산성의 급격한 증가와 더불어 널리 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컴퓨터라고 하는 새로운 도구의 등장은 건축의 경우에서도 예외없이 그 커다란 변화를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CAD화가 설계의 컴퓨터화로 그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킨다는 의미는 물론 더욱 근본적으로는 이제까지 끝없이 분업화, 전문화되면서 그 줄기를 잡을 수 없도록 복잡해진 건축의 현실을 통합하는 새로운 도구로서의 가능성을 지닌다고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주목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더우기 이러한 가능성은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의 발달과 더불어 그 실현이 한층 앞당겨질 전망이다.
구속이나 창조냐
국내업계의 CAD화 추세를 살펴보면 8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기업을 중심으로 CAD 시스템 도입이 시작되어 최근 몇 년 동안 급속히 확대 되고 있는 형편이다. CAD시스템의 도입 대상국들은 주로 영국, 미국, 일본 등으로 그 대체적인 소프트웨어들을 살펴보면 GDS/BDS, CADAM, SIGMA, APOLLO, APPLICON 등의 중형, 대형용이 대부분이나 아울러 16비트 마이크로 컴퓨터의 대중화 추세로 소규모 CAD 소프트웨어들의 보급도 현저하다. 또한 CAD 소프트웨어의 국내 자체 개발도 시도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 규모가 방대하고 또한 개발에 막대한 인력이 소요되며 끊임없이 최신화되지 않으면 안되므로 소프트웨어산업의 기반이 취약한 국내현실에서는 시스템 도입은 당연하며 오히려 CAD 시스템을 어떻게 최대한으로 활용하는가 하는 점이 관건이 될 수 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CAD화 과정에서는 한동안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를 해외의 유수한 전문 공급업자들로부터 공급받을 수밖에 없겠지만 최소한 국내적인 현실에 맞도록 개조할 수 있는 능력과 협조체계를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 아울러 건축계로서 보다 중요한 것은 CAD화의 실체를 이루는 데이타베이스를 과연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가 개별기업의 차원에서는 물론, 국가적 경쟁력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정부주도나 민간연합체의 성격으로 통일을 꾀할 수도 있으리라고 본다. 이를 위해서는 일부 대기업의 중 대규모의 CAD시스템 소유회사들뿐 아니라 널리 산재한 중소기업들의 참여야말로 중요한 기반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대규모의 CAD 시스템을 구입할 수 없는 중소기업들의 경우 국내에서도 마이크로 컴퓨터가 빠른 속도로 보급되고 있으므로 비록 부분적이나마 이를 설계 및 건설의 각 분야에 착실히 적용시켜 나간다면 산발적이나마 아이디어가 다양하게 발생할 것이고 이를 종합하는 조직을 구성함으로써 미래의 CAD화 시대를 대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미래는 기술과 데이타의 축적 이외에도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보다 중요한 사회적 여건을 배경으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토플러가 이야기하는 사회전체의 민주적 분위기가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밑으로 부터의 참여, 즉 개인의 창의성이 자유로이 표현될 수 있고 정보가 독점되지 않으며 자유롭게 유통될 때 비로소 그 풍부한 창조력으로 새로운 재화와 용역을 개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이가 이러한 CAD화, 컴퓨터화 과정에서 경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그 컴퓨터화 과정이 컴퓨터가 갖는 독특한 작업방식을 늘 우리에게 강요함으로서 인간을 구속하려 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작업에서 인간관계와는 다른 컴퓨터와의 커뮤니케이션이 정형화된 작업과정을 요구함으로써 인간성의 고갈이나 비인간화를 초래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거기에 대응하는 새로운 가치체계를 수립하여 그 변화가 초래하는 갈등을 지혜롭게 극복해야 한다. 바람직한 미래는 컴퓨터가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주체적인 노력으로 이루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