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누님들, 글자를 읽는다는 건 그 자체로도 충분히 즐거운 일 아니겠습니까.”
통역사가 그의 말을 옮겼다. 나는 통역사를 돌아보았다.
“제가 지어낸 거 아니에요. 정말로 ‘누님들’이라고 말했어요.”
통역사가 짧게 대답했다.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통역사와 내 얼굴을 번갈아 살피더니, 고고학자답지 않은 몸짓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누님들은 기억이 잘 안 나실지도 모르지만, 저는 맨 처음 글자를 읽던 날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몇 살 때였는지는 모르겠지만요. 누구한테 배워서 안 게 아니었고, 그냥 어깨너머로 하나하나 글자를 깨쳤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거리의 간판들이 눈에 들어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예, 읽을 수 있게 된 거였습니다. 그냥 그림인 줄 알았던 모양들이 갑자기 의미를 갖게 된 순간이었죠. 마치 불이 켜진 것 같았습니다. 딱히 불이 들어오는 간판도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그게 바로 의미라는 거였겠죠. 무언가 눈앞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은, 그런 빛나는 것들로 가득 차 있는 세상이라니. 그러니 즐거운 일 아니겠습니까.

물론 다 자라고 나서는 글자라는 게 그렇게 빛나 보이지 않게 됐습니다. 누님들처럼 훌륭한 제복을 입는 직업을 가지신 분들은 저보다 더 잘 아시겠지만, 어른이 된다는 건 보기 싫은 글자들을 엄청나게 많이 봐야 하는 일이니까요. 글자들로 가득한 책을 한 10년쯤 보다보면 글자들이 더 이상 반짝거리지 않게 되는데, 저도 그랬습니다. 글자를 읽는다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지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한참을 지내다 어느날 우연히 그 글자를 만나게 된 겁니다. 요란 문자를요.”

“요란 문자요?”
“읽는 법을 아무도 모르는 특이한 상형문자였습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제가 태어난 곳이 아나톨리아 반도 아니겠습니까. 고대도시의 유적들이 거의 노천탄광처럼 흩뿌려져 있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지중해와 아시아가 만나는 곳이고, 비잔틴 제국의 수도가 있었던 곳이기도 했죠. 그거 아십니까. 그리스 문명은 그리스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지중해 동쪽 해안 전체에 걸쳐 있었다는 걸요. 그리스는 그리스보다 아나톨리아 반도에 더 많이 있었습니다. 중세 유럽 사람들이 동로마 제국을 뭐라고 불렀는지 아십니까? ‘동로마 놈들’이 아니라 그냥 ‘그리스 놈들’이라고 불렀답니다. 그 땅을 다시 투르크 유목민들이 지배하고, 콘스탄티노플의 대성당 바로 옆에는 무슬림들의 화려한 블루모스크가 들어섰고요. 그렇게 여러 문명이 겹쳐지는 동안 그 땅에는 파괴된 도시의 유적이 수천군데나 남게 된 겁니다. 그리스 시대의 도시, 로마제국 시대의 도시, 그리고 그 이전과 이후에 들어선 수많은 이름 모를 민족들의 도시 유적들이.

그러니까 제가 태어난 나라는, 유적들이 거의 노천탄광처럼 아무데나 흩어져 있는 나라였습니다. 집 근처에서 아무 때나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외딴 산속으로 한참을 걸어 올라가면 로마나 그리스 시대의 오래된 도시 유적을 분명 한 군데는 만나게 돼 있었거든요. 그것도 좀 과장이기는 하지만,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요란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세운 도시인지는 아무도 몰랐죠. 그리고 이 도시 유적에는 특이한 점이 있었습니다. 보통 고대 도시 유적에는 목욕탕, 학교, 노천극장, 광장, 상점, 신전, 이런 것들이 기본으로 들어가 있거든요. 그런데 요란에는 다른 데는 없는 독특한 시설이 있었는데, 바로 광장이었죠. 광장이, 엄청나게 넓었습니다. 광장 옆에 조그만 마을이 붙어 있다고 해도 좋을만큼 넓었죠. 신전이 따로 없는 걸로 봐서는 그 광장 자체가 종교시설인 것 같았어요. 그런데 더 이상한 건, 요란 유적이라고 알려진 여섯 개의 도시에서 발견된 그 거대한 광장의 모습이 하나같이 다 똑같이 생겼다는 거였습니다.”

“똑같다는 건?”

“도시 지도를 그려보면 광장들이 완전히 포개진다는 거였죠. 광장이 놓여있는 방향이며 넓이, 광장에서 뻗어있는 길의 각도 그런 것들이 거의 오차 없이 완벽하게 똑같았다는 겁니다. 그것 자체가 뭔가 의미가 있는 것 같았어요. 요란 문자도 신기했지만, 도시 자체가 벌써 흥미를 유발하는 주제였죠. 그래서 저는 그 요란 유적을 조사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사실 그 유적들은 좀 인기가 없었습니다. 다른 문명과의 연관관계가 전혀 없어서 별로 돈이 안 됐던 거죠. 그래서 저는 거의 단독연구를 해야 했는데, 아까도 누님들께 말씀드렸지만 워낙에 유적들이 노천광산처럼 퍼져 있는 나라여서 그런 일은 전혀 드문 게 아니었거든요. 우리 어머니는 제가 학자 같지 않고 무슨 광부 같다고 말씀하시곤 했는데, 그 말씀이 맞았습니다. 딱 그래 보이기는 했으니까요.”

“그건 됐고, 요란 문자 이야기를 좀 더 해 보세요. 해독하는 데 성공하셨나요?”

“예, 누님. 맞아요. 성공했죠. 그 문자들이 빛을 내게 하는 데 성공했어요. 뿌듯한 순간이었죠. 그 순간은 마치 ……. 아, 넘어가라고요? 예, 누님.

그러니까, 해독의 단서는 이웃 로마 도시들에 남아 있었습니다. 거기 사람들이 요란인들과 교역을 하면서 작성한 상품비교목록이 발견됐거든요. 요란이라는 이름도 그걸 보고 알게 됐고요. 그 목록을 통해서 단어 몇 개를 알게 됐습니다. 그 순간, 글자들이 갑자기 숨겨뒀던 빛을 뿜어내는 게 아니겠습니까. 크리스마스 장식처럼 정말 환한 빛이 났는데, 물론 제 눈에만 그렇게 보였겠죠. 아무튼 저는 그 단서들을 가지고 광장에 있는 석판을 아주 천천히 해독해 갔답니다. 6년이나 걸렸는데, 아주 외로운 기간이었죠. 저는 우리 조상님들이 아직 유목민이던 시절, 저 초원에 홀로 외로이 세워놓은 비석에 새겨져 있던 위대한 빌게 카간의 비문을 자주 떠올리곤 했습니다. 그 글자들도 아마 빛이 났겠죠. 등대처럼 그렇게 외로이 서서 들판을 홀로 비추고 있었을 거예요. 저한테는 요란 문자가 바로 등대였습니다. 그 빛이 있어서, 그 6년이 외롭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찾아왔나요?”

“그 사람들이요? 아, 예, 누님, 그 사람들이 찾아왔었습니다. 요란 광장 바닥 한가운데에 새겨진 글자들을 대략 반쯤 해독했을 때였습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헬리콥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왔고, 그리고 저를 데려간 것이었습니다.”

“납치됐다는 말씀이신가요?”

“아니요, 사실은 제 발로 따라갔어요. 제 지식을 유용하게 써먹을 데가 있다고 했거든요. 아, 물론, 보수 이야기도 있었어요. 정말 어마어마한 금액이었죠. 하지만 누님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돈에 팔려간 건 아니었습니다. 그 액수를 듣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아, 내 지식이 이만큼이나 가치 있는 거였구나. 나도 그동안 헛고생만 하고 산 건 아니었구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이 소식을 전해 들으셨어야 하는 건데. 어머니, 당신 아들은 그냥 흔해빠진 유적광부가 아니었다고요. 등산 가이드도 아니고요.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왜 저를 필요로 했는지 이유를 몰랐거든요. 그렇잖아요. 그런 잊혀진 문명의 상형문자 따위 그 큰돈을 주고 사서 어디에 써먹겠어요.”

“잠깐만요, 메흐멧 씨, 자꾸 옆길로 새지 마시고, 그 사람들, 유럽우주국 사람들을 말씀하시는 거죠?”
“예. 돈 많은 기관 사람들이었습니다.”
“뭘 부탁하던가요?”
“발굴이요.”
“발굴?”
“요란 유적을 발굴하는데 그 발굴팀에 참여해 달라는 거였죠.”
“우주국에서요?”

나는 눈을 들어 말없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에 그를 보며 물었다.
“왜 우주국에서 그런 걸……? 그보다, 어디를 발굴하는 건데요?”
그러자 그가 위쪽을 향해 검지를 세우며 대답했다.
“우주공간이요.”

점심식사를 위해 두 시간 동안 휴식을 취한 다음 다시 그를 불러 조사를 재개했다. 본부에는 오전에 들은 내용에 대한 간략한 요약보고서를 제출한 뒤였다.

“누님들, 우주에 쓰레기가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지구 주변 인공위성 궤도에는 이런저런 파편들이 레이더로 확인할 수 있을만큼 큰 것만 쳐도 8000개가 넘는답니다. 네, 대부분 우주선의 잔해들이죠. 인공위성이나 발사체 같은 데서 떨어져 나온 것들. 자연상태의 파편들이 위성궤도를 돌기는 쉽지 않으니까요. 그러니 이 파편들이 거의 위성에 맞먹는 속도로 궤도를 돌고 있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겠죠. 마하20이 훨씬 넘는 속도로 날아다니고 있다 이겁니다. 이 정도면 페인트 조각 하나에만 부딪쳐도 총알에 맞은 것 같은 상처를 입게 되거든요. 그런데 우주공간이 좀 넓습니까. 그러니 그걸 다 치울 수는 없고 새 인공위성을 띄울 때마다, 쓰레기가 비교적 적어 보이는 곳을 골라서 띄우는 수밖에 없다 이겁니다. 그래서 레이더 기술이 좋아질 때마다 점점 더 작은 파편들까지 궤도 추적을 하곤 했는데, 그 일을 하다 보면 가끔 신기한 것들이 발견되기도 한답니다. 주로 냉전 때 올려놓은 전략무기 파편이나 위험한 방사성 물질 이런 것들인데, 그러던 어느 날 우주국 레이더에 좀 희한한 물건이 포착됐다는 겁니다.”

“그게 뭐였죠?”

“처음에는 점이었답니다. 레이더에 잡힌 작은 점 하나였겠죠. 그런데 이놈은 그 점 단계에서부터 수상하기가 이루 말할 데가 없었다는 겁니다. 정지궤도에 놓여 있었거든요.”

“지구 자전속도와 똑같았다는 말인가요?”

“각속도가 그렇다는 거기는 한데, 아무튼, 네, 그렇습니다. 거의 오차 없이 정확히 똑같았죠. 엔진이 달려있거나 할 만한 크기가 아니어서 어떻게 그 궤도를 그렇게 정확하게 따라갈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는데, 몇 년을 추적해도 마찬가지였답니다.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있었던 거죠. 물론 지상에서 봤을 때 그렇다는 거고, 실제로는 지구가 도는 속도와 똑같은 속도로 돌고 있었겠죠. 그래서 그 점을 발견한 지 대략 8년 만에, 그 궤도 근처에 올라가서 임무를 수행하던 유인우주선 하나를 보내서 그 점의 정체를 확인을 했답니다. 물론 어떤 위험한 물건일지 알 수가 없으니까, 사람이 직접 접근한 건 아니고 멀리서 사진부터 찍었겠죠. 그렇게 이런저런 간접적인 조사를 했는데, 그런데 그 사진이 문제였던 겁니다.”

“왜죠?”

“기계가 아니었거든요. 금속 재질도 아닌 것 같았고, 돌로 된 무언가처럼 보였다는데, 아무튼 우주선 부품처럼 보이지는 않았답니다. 그보다는, 주사위처럼 보였죠. 아주 천천히 자전을 하는 작은 정육면체였는데, 그 여섯 개의 면에 뭔가 그림 같은 게 그려져 있더라 이겁니다. 사진이 자세하지 않아서 확대해서 봐도 한계가 있었다는데, 그래서 몇 달 후에 다시 우주선 한 대를 접근시켰답니다. 첫 만남 때보다 좀 더 가까이요. 그리고 그 전 사진보다 좀 더 자세한 사진을 찍었는데,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지상 우주국에서 긴 탄성이 터져 나왔다지 뭡니까.”

“아는 물건이었나요?”

“아니요, 다들 처음 본 물건이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걸 뭐라고 불러야 할지는 알 수 있었거든요.”

“뭐였죠?”

“유물이요. 누가 봐도 어느 고대문명이 남긴 유물처럼 보였다 이겁니다. 인공물이 틀림없었다는 거죠. 그 정육면체 모양 하며, 여섯면에 새겨져 있는 부조의 질감 하며. 누님들, 이게 무슨 말씀인지 잘 감이 안 오시겠지만, 인공물이 그런 데 떠 있다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거든요. 차라리 태양계 끝에서부터 날아온 돌멩이 파편이었다면 이해가 됐을 겁니다. 가끔 지구에 충돌한 소행성 파편이 다시 그 높이까지 튀어 올라가는 경우가 없지 않거든요. 정지궤도를 돈다는 건 여전히 이상한 일이긴 하지만, 지구 나이 사십 몇 억 년이 지나는 동안 그런 우연이 딱 한 번쯤 발생한다고 해서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냥 놀라운 일이지,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게 돌로 만들어진 인공물일 경우에는 전혀 다른 문제가 되는 겁니다. 문명이 생긴 이후에 그런 충돌이 발생했다면 인류는 벌써 멸종했을 게 틀림없으니까요. 그러니 그런 건 별로 있을 법한 일이 아니었죠.”

“누가 장난으로 갖다 놓은 걸 수도 있지 않나요.”

“역시 멋진 제복을 입은 누님다우십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도 우선 가능할만한 기록을 전부 조사를 했답니다. 예전 유인비행 기록들을 다 살펴봤다는 말입니다, 누님. 그런데 겹치는 궤도가 없었다는 겁니다. 물론 알려지지 않은 비밀 임무가 있을 수도 있지만, 아주 가능성이 큰 경우는 아니고, 게다가 설명하기 어려운 이상한 점이 하나가 더 있었거든요.”

“뭐죠? 그리고 부탁인데, 뜸들이지 말고 그냥 말씀하세요.”

“예, 그러죠, 누님. 뜸들이지 않고 말씀을 드리자면, 아, 이건 농담입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첨단기계를 가지고 내부를 조사해 봤더니 내부가 비어 있더라는 겁니다.”

“비어 있어요?”

“그 정육면체가 일종의 빈 상자 같은 모양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건 그 다음입니다. 그 비어있는 정육면체 안에 또 다른 무언가가 들어있었다는 겁니다. 이번에는 정사면체였죠. 그러니까, 정삼각형 네 개로 된 입체도형이 들어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정사면체의 각 면에는 또 다른 그림이 부조로 새겨져 있었고요.”

“그게 가능한가요?”

“그러니까 그게 문제였습니다. 그런 건 불가능하거든요. 왜냐하면 그 바깥쪽 정육면체 어디를 봐도 균열이나 봉합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으니까요. 다시 말해서 한 번도 깨졌다가 다시 붙은 적이 없는 완전한 한 덩어리의 돌이었다는 겁니다. 밀실이었던 거죠. 어떻게 정육면체 안에 정사면체를 넣었을까. 일주일간의 토론 끝에 지상팀은 결국 이런 결론을 내렸답니다. ‘저건 인간의 기술로 만들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외계인이 만든 거라는 말씀인가요?”

“우스우시죠? 유럽우주국에서도 그런 생각을 했던 모양입니다. 과학자들이 잔뜩 모여 있는 곳이었으니 당연히 의심을 했겠죠. 그래서 예산을 좀 들여서 반대되는 증거를 찾기 시작했는데, 그러다 제 존재를 알게 됐다고 하더라고요.”

“어떻게요?”

“그 직육면체에 새겨져 있는 그림이요. 그날 검은 옷을 입고 헬리콥터를 타고 온 사람들이 저한테 맨 처음 내민 것도 그 그림이 찍혀 있는 사진이었는데, 그게 그 사람들을 제 발굴 현장까지 오게 만든 거였습니다.”

“요란 문자였군요.”

“그렇습니다, 누님. 그건 요란 문자였습니다. 제가 아직 모르는 글자이기는 했지만, 분명 요란 문자였습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죠. 틀릴 리가 없거든요. 왜냐하면 요란 문자의 구성 방식이…….”

“자세한 건 나중에 말씀하시고, 그 다음은요?”

“아, 예. 그 다음은, 발굴팀에 합류하라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거액을 제시했고요?”

“거금이었죠. 저는 일단 지상팀에 합류했습니다. 당연히 그랬겠죠. 그러면서 우주국 돈으로 요란 유적연구도 병행할 수 있게 해줬는데, 그야말로 저한테는 꿈만 같은 조건이었거든요. 그래서 연구진행이 훨씬 빨라졌습니다. 일단 조수를 다섯 명이나 둘 수 있었으니까요. 저는 거의 문자 해독에만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16개월정도가 지났을 때는 대략 90퍼센트 이상의 문자를 해독할 수 있었고요. 지구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요란 문자들이 다시 반짝반짝 빛을 낼 수 있게 됐다는 말입니다. 저 때문에요. 오로지 저로 인해 반짝이는 글자들을 보면서 저는 너무나도 행복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 일이 닥칠 줄은 꿈에도 모르고요.”

“그 일이라면?”



그가 말을 끊고 담배를 요구하는 바람에 청취가 잠시 중단되었다. 나는 다급한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고 침착하게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잠시 후 내가 방으로 돌아오자, 그가 차분한 얼굴로 다시 말을 이었다.

“그건 정말로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죠. 저로서는 너무나 수치스러운 일이기도 했고요. 제가 그런 끔찍한 일에 연루됐다니.”

“무슨 일이었나요?”

“우주국에서 그 유물을 발굴해 오기로 한 거였습니다. 조사를 하기 위해서요.”

나는 공감의 의미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초원 한가운데에 외롭게 서 있는 빌게 카간의 비석을 생각해 보세요. 고대 투르크 문자로 새겨져 있는 위대한 칸의 찬란한 역사를요. 아니, 그 역사는 잊으시고 그냥 그 글자를 떠올려 보십시오. 키 큰 나무 한 그루조차 없는 고요한 들판에, 밤이면 별들이 마치 우주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끝없이 펼쳐지고, 그 아래 세워진 육중한 비석의 세 면에는 빛을 잃은 글자들이 조용히 자신을 읽어줄 누군가의 시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의미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는 순간, 초원 저 끝까지 닿을 만큼 밝은 빛을 ‘반짝’하고 일제히 내뿜기 위해서요. 그렇게 조용히 숨을 죽이고 수백 년을 말없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군가 발견해 주기를 기다리면서.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누군가가 나타나 그 비석을 뿌리째 뽑아다 트럭에 실어버렸다고 생각해 보세요. 정말 끔찍하지 않습니까, 누님들. 그 비석이 있어야 할 자리는 바로 그 평원이거든요. 왜냐하면 그 비석을 그 오랜 시간 속에 파묻어 놓은 건 두텁게 쌓인 흙먼지가 아니라 인적 없이 고요한 초원의 고독이었으니까요. 그 유물위성도 그랬습니다. 사실은 더했죠. 우주는 정말이지, 초원이나 망망대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한없이 넓고 또 적막한 곳 아니겠습니까. 그 물건은 바로 그곳에 놓여 있었던 겁니다. 그것도 정지궤도에 말이죠. 더 놀라운 건, 그 유물의 안쪽과 바깥쪽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서서히 자전을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절대 뽑아내서는 안 되는 물건이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 아름다운 회전을 한낱 무지한 인간들의 손으로 흩트려 놓을 수 있단 말입니까.”

“반대했나요?”

“아니요, 반대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제가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그 유물이 우주선 화물칸에 실려 있었을 때였으니까요.”

그는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서 그 물건을?”

“예, 누님. 2년이 걸렸습니다. 다시 그 궤도에 올려놓을 준비를 하기까지요. 그리고 그 두 개의 입체도형을 원래 자전속도대로 정교하게 돌아가게 만들 장비를 갖출 때까지. 뜻이 맞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제가 연구책임자였고 그 유물을 탈취해 오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뒷일은 장담할 수 없었죠. 그래도 저는 그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주동자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런 게 아니었어요. 지휘체계가 있는 조직이 아니었거든요. 그냥 인간으로서 옳다고 생각한 것을 실천에 옮긴 사람들의 모임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제 책임이 컸습니다. 그건 꼭 성공해야 하는 계획이었다고요.”

“메흐멧 선생님. 선생님은 지금 코스모마피아가 계획한 미사일 테러의 주요 용의자로 의심받고 있습니다. 유인 우주정거장을 공격하기 위해 허가되지 않은 미사일 발사를 시도한 중요한 범죄에 가담한 혐의를 받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공격이라니요! 그건 유럽우주국이 우리를 모함하기 위해 퍼뜨린 거짓말이라고요. 저를 보세요, 누님. 저는 그냥 고고학자라고요. 제가 뭐가 아쉬워서 유인 우주정거장을 공격하겠습니까. 저는 어디까지나 평화주의자입니다. 코스모마피아라니! 제가 그 유물위성을 제 자리에 갖다놓으려고 마음먹은 결정적인 계기도 바로 그 로쿰에 새겨진 평화주의 때문이란 말입니다. 어떻게 제가 감히 테러를 하겠습니까.”

“로쿰이요?”

“우리끼리 그 유물을 부르는 애칭이었습니다. 네모나게 생긴 터키 과자…….”

“거기에 그런 메시지가 새겨져 있었나요?”

“예, 누님. 그러니까 로쿰 안쪽에 들어있던 그 정사면체에 새겨진 글자 말입니다, 제가 그 글자를 해독해서 저와 생각이 비슷한 연구팀에게 제일 먼저 전달을 했거든요. 그 순간 그 사람들이 모두 마음을 먹게 된 겁니다. 물론 저도 마찬가지였고요.”

“뭐라고 쓰여 있었나요?”

“그게 말이죠, 누님, 제 말을 꼭 믿으셔야 됩니다. 이건 학자로서의 제 양심을 걸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관련 자료는 얼마든지 공개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단계도 빠짐없이 설명해드릴 수 있다고요. 제가 6년을 헤맨 요란 유적과 그 주변 로마 도시유적의 상품내역에서 찾아낸 첫 번째 단서에서부터 제일 마지막 순간, 그 정사면체에 새겨진 글자들을 완전히 해독해내던 순간까지, 그 반짝이는 글자들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제가 제 동료들을 감동시킬 수 있었던 건 바로 그런 확신 때문이기도 했으니까요.”

“뭐라고 쓰여 있었나요?”

“이런 말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행성의 중력권 안에서 침략이나 전쟁 행위를 완전히 포기할 것을 약속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누구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구인이 아닌 건 분명합니다. 지구인을 표시할 때는 그런 글자를 쓰지 않거든요. 이건 지구인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훨씬 포괄적인 의미라고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지구보다 훨씬 더 넓은 세상의 시민이라는 뜻으로 말입니다.”

“저 밖에 있는 누군가라는 말씀이신가요?”

그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꼭 그런 누군가를 지칭한다는 확신은 없습니다. 단지, 지구인을 전부 포함하는, 지구보다 훨씬 넓은 범위의 어떤 보편적인 존재들을 지칭한다는 말밖에는…….”

그는 말끝을 흐렸다. 아마도 참담한 실패로 돌아간 로켓 발사계획 때문인 것 같았다. 그들이 쏘아올린 그 로켓은 그들의 소중한 유물위성 ‘로쿰’을 실은 채로 발사 52초 만에 공중폭발을 하고 말았다. 파편이 바다 위로 흩뿌려지는 바람에 그 유물위성을 되찾을 방법은 이제 영영 없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폭약을 실은 탄두가 끝내 발견되지 않는다면 테러를 감행했다는 혐의야 벗을 수 있겠지만.’



청취 보고서를 본부에 제출하고, 집으로 돌아가 일찍 잠을 청했다. 머릿속에서는 사진으로 본 그 유물위성의 모습이 지구를 배경으로 뱅글뱅글 돌아가고 있었다.

‘그럼 그게 지구의 표지판이라도 된다는 건가? 근처에 들른 외계 여행자가 알아볼 수 있도록 정확한 위치에 갖다 놓은 표지판 같은? 그런데 왜 그렇게 작은 거지? 하긴 더 컸으면 훨씬 일찍 사람들의 눈에 띄었겠지. 그랬으면 좀 더 일찍 논란이 일어났을 거고. 그나저나 그 사람, 거짓말 같지는 않았는데. 계획적인 테러를 계획할 사람 같지는 않았어. 무슨 일일까. 유럽우주국은 왜 그런 무모한 욕심을 부린 거지? 그리고 그 사람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나라도 그 유물위성을 제자리에 갖다 놓는 일에 동참하지 않았을까. 우주국 직원 수백 명이 연루된 미사일 테러라니, 그 많은 사람이 불법 로켓발사에 동의한 건 그런 정도의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리고 아나톨리아에 있다는 요란 유적지들. 쓸데없이 넓은 광장이, 그것도 똑같은 각도로 자리 잡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설마 무슨 우주선 이착륙장 같은 걸 암시하는 건 아니겠지. 이착륙장이라. 유럽우주국 요원들이 헬리콥터를 타고 메흐멧을 찾아갔을 때도 어쩌면 그 이착륙장을 이용했을지도 모르지. 그런 게 있으면 확실히 편하기는 할 테니까.’

그렇게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수많은 생각들 사이에 아무도 모르게 잠 하나가 끼어들었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잠이 들어 있었다.

화들짝 놀라 잠이 깨 보니 시계가 새벽 3시 4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창 쪽을 바라보니 그 시간에 어울리지 않는 밝은 빛이 창문을 넘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내 잠을 깨운건 웅웅거리는 듯한 낯선 소리였다. 마치 하늘 전체가 울리는 듯한, 방향을 종잡을 수 없는 소리.

거의 벌거벗은 채로 침대를 빠져나와 무언가에 홀린 듯 창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웅성거리듯 소란스러운 하늘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딱 눈이 시리지 않을 정도로 은은한 푸른 빛을 내뿜는,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원반 모양의 비행체가 거리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꽤 높은 위치에 매달린 듯 가만히 떠 있었다.

중립행성 표지판이 내려진 지 2년 몇 개월. 표지판을 다시 원래 위치에 갖다 놓으려는 사람들의 마지막 시도가 로켓 발사 52초 만에 실패로 돌아간 뒤 사흘이 지난 어느 날 새벽에 일어난 일이었다. 내 시계에 찍힌 시간으로 오전 3시 43분 몇 초. 평화조약이 갓 해제된 태양계 세 번째 행성 지구를 공격하기 위해 대기권 아래로 내려온 외계우주선 서른일곱 대가, 일제히 첫 번째 포격을 개시하던 순간이었다.

2013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글 배명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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