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번째 생일 앞둔 러셀 인터뷰 ■
1959년 영국.
기자 : 버트런드 러셀 경. 마지막으로 질문을 하나만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찍고 있는 이 인터뷰 영상이 마치 바다에 던져진 유리병 속 편지처럼 수천 년 뒤 우리 후손에게 발견된다면, 당신이 인생에서 배운 교훈 중 어떤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나요?
러셀 : 두 가지를 말하고 싶군요. 하나는 지성, 다른 하나는 도덕과 관련이 있습니다. 지성부터 말하자면, 당신이 어떤 분야를 공부하거나 어떤 철학을 숙고할 때 오직 이 질문만을 염두에 두십시오. 무엇이 진실이고, 진실이 시사하는 진리는 무엇인가? 절대로 당신의 개인적 바람이나 사회적 편익에 휘둘리지 말고, 오로지 진실만을 추구하십시오.
도덕과 관련해서는 매우 단순합니다. 사랑은 지혜롭고, 증오는 어리석습니다. 사회 구성원 간 연결이 가속화되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누군가는 내가 듣기 싫은 말을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하지요. 그것이 우리가 함께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만약 우리가 함께 살기를 바라고, 함께 죽기를 원치 않는다면 우리는 반드시 타인에게 관용을 베풀고 타인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이 지구에서 인류가 앞으로 살아가기 위한 핵심 조건입니다.
■ 진솔한 열정과 사랑으로 인류 대한 학자 ■
2023년 대한민국.
수학동아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어느덧 2023년의 끝입니다. 이와 함께 러셀의 삶을 다룬 이 연재도 끝나네요.
러셀의 소년기부터 노년기를 좇으며 우리는 그가 삶과 종교에 대해 느낀 회의, 그가 경험한 사랑, 인류에 대한 연민, 수학이 그에게 안긴 위안과 좌절, 그리고 세계대전이라는 혼란스러운 시기를 거치면서 겪은 고뇌와 선택을 알아봤습니다. 러셀은 자신의 생애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 바 있습니다.
러셀답게 익살스러운 회고록이지만, 지난날에 대한 씁쓸함이 묻어나오는 글이기도 합니다. 그는 수학, 철학, 평화 운동, 어느 하나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수학을 순수 논리학으로 환원하려는 그의 시도는 그를 <;수학 원리>;라는 괴물과 고군분투하는 끔찍한 나날로 내몰았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실패였어요. 수학의 토대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만들었던 공리에서 문제점이 계속 발견됐고, 게다가 구축한 체계가 너무 복잡해져 러셀도 이해하기 어려울 지경이었거든요. 급기야 러셀은 <;수학원리>;를 함께 집필했던 영국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와의 사이가 나빠지고 나아가 아내와도 이별할 정도로 대인관계가 크게 흔들립니다.
그 와중에 철학적으로 운명인 줄 알았던 제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에게 학문적 배신을 당합니다. 동시에 그의 철학에서 영감을 받아 형성된 빈 학파는 내부적으로는 철학적 모순으로 인해, 외부적으로는 나치당에 의해 와해되고 말았습니다.
한편 제1차 세계대전 동안 그가 개진한 평화 운동은 전쟁을 막는 데 역부족이었으며, 오히려 러셀이 제2차 세계대전을 지지하고 나설 때 사람들이 그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부메랑이 됐습니다.
그럼에도 제게는 러셀의 탐구생활을 연재할 만큼 그를 존경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러셀의 삶의 가치나 성공의 크기가 아니라 러셀이 얼마나 진솔한 열정과 사랑으로 세계와 인류를 대했는지에 있습니다. 러셀은 후자에 있어 절대로 굴하지 않는 의지를 보여줬습니다. 수학이 그의 손아귀에서 달아나고, 역사가 그를 좌절시키고, 대중이 그를 손가락질할 때도 그는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를 위해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러셀을 불세출의 천재나 성인군자가 아닌, 실패와 결함으로 얼룩져 있지만 그것을 모두 받아들이고 극복하고자 투쟁하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 마주할 수 있습니다. 그의 삶이 증명하는 불완전함의 위대함, 부조리의 아름다움이야말로 진정한 러셀의 역설입니다.
■ “내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기꺼이 다시 살 것이다” ■
앞서 러셀이 자신의 생애를 익살스럽게 표현한 회고록을 보여드렸습니다. 이제 그가 진실된 마음으로 적은 회고록을 소개합니다.
러셀은 그렇게 삶을 마쳤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삶을 살아야 할 차례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혼란스럽고 부조리하지만, 때로는 아름답고 때로는 따뜻한 세계를 마주할 차례이지요. 아직 무엇을 위해 살겠다는 목표나 열정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세계에 대한 호기심, 주변 사람들의 소중함, 그리고 인류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않는다면 설령 실패와 좌절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더라도 분명 여러분에게는 무릎을 털고 일어나 다시 달릴 수 있는 의지와 용기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먼 미래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때가 되면 여러분도 러셀처럼 삶을 회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기꺼이 다시 살겠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