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 뛰어, 뛰어! 소리 질러!”
2022년 11월 27일 저녁 6시 홍익대 클럽 거리에 있는 한 클럽을 찾았다.
가수 故신해철을 기리는 직장인 록밴드 ‘렉스트(R.EX.T)’의 첫 단독 공연이 한창이었다. ‘서태웅! 서태웅!’이라고 외치는 관객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니 무대 위를 휘젓고 다니는 한 남성이 보였다. 바로 렉스트의 보컬리스트 서태웅. 딱 붙는 바지를 입고 손목에 주렁주렁 검은 팔찌를 낀 채, 찰랑이는 긴 머리를 휘날리며 열창 중이었다.
그런데 이날 관객들에게 공연이 끝날 때까지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 있다.
서태웅 보컬리스트가 실은 수학자, 서검교 숙명여자대학교 수학과 교수란 사실이다.
서검교 교수의 부캐는 록밴드 보컬리스트다. 취미지만, 본업 그 이상이다. 대학 시절부터 무려 25년 넘게 보컬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그가 처음 품었던 꿈도 록밴드 가수였다.
“충격적이었어요. 세상에 이런 음악이 있다는 사실에 소름 돋았죠.”
서 교수는 록음악을 처음 접한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대학교 1학년 때 친구 카세트 플레이어로 들은 미국 록밴드 ‘본 조비’, ‘메탈리카’의 음악이었다. 강렬한 악기 소리와 답답한 세상에 저항하는 듯한 고음은 중고등학교 시절 즐겨 듣고 부르던 노래와는 완전히 딴 세계에 있는 음악 같았다. 록음악에 마음을 빼앗긴 서 교수는 대학교 2학년 때까지 학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매일 음반 가게를 돌며 좋은 록음악을 찾아 들었다.
한 눈 팔던 대학생도 학업으로 돌아오는 시기라는 3학년이 되자, 그는 오히려 본격적으로 록밴드 보컬리스트로 데뷔하기로 결심했다. 본 오디션만 50개, 결과는 모두 탈락이었다. 자취방에서 홀로 기타 치며 연습한 게 전부였으니 실력이 출중할 리 없었다.
“‘세상이 내 실력을 몰라주는구나’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탈락해도 좌절하지 않고 계속 도전했던 이유예요. 무작정 소속사를 찾아가 ‘노래 한번 불러 보겠습니다’라고 한 적도 많아요. ‘나가주세요’라고 하면 ‘언제 다시 오면 되나요?’라고 할 정도로 절박했어요. ‘이번에 떨어지면 깨끗이 포기하자’라고 생각한 오디션에서도 탈락하자 가수가 되겠다는 마음을 겨우 접었어요(웃음).”
데뷔의 꿈만 포기했을 뿐 수학자가 된 뒤에도 성대 결절에 3번이나 걸렸을 정도로 음악을 포기하지 않았다. 여러 밴드에서 꾸준히 공연했고, 2017년 故신해철 팬카페를 통해 밴드 렉스트를 직접 만들면서 음악에 더 몰입했다.
이쯤 되면 ‘수학자가 아니라 가수 아니야?’라고 질문이 나올 수 있지만, 그는 우리나라 수학자가 일생에 한번 타기 어려운 상을 여러 개 탔을 만큼 연구 성과도 뛰어나다. 도대체 이 ‘완벽한 이중생활’의 비결은 무엇일까. 서 교수에 따르면 틈새 시간 공략하기다.
“저는 경기도 용인시에 살고 있어요. 대중교통으로만 학교까지 왕복 4시간이 걸려요. 그 시간을 허투루 낭비할 수도 있지만, 재정비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소중하게 써요. 광역버스에서 수학에 집중하는 시기에는 논문을 읽고, 음악에 몰입할 때는 노래를 들으며 ‘이 부분은 어떻게 부르지?’, ‘어떻게 편곡할까?’를 계속 생각하죠. 광역버스에서 내려 지하철로, 지하철에서 내려 마을버스로, 마을버스에서 내려 학교로 가는 사이사이 계속 뛰어가면서 발성 연습을 해요. 이렇게 연습해야 무대에서 뛰면서 노래를 부를 때 호흡을 제대로 할 수 있거든요.”
설마 하는 마음으로 수학과 밴드 활동의 공통점을 묻자 서 교수는 ‘저항정신’이라고 답했다. “믿기 어렵겠지만 수학에 록밴드의 기반인 저항정신이 있다”면서, “처음 수학을 할 땐 여러 이론과 정리를 배우면서 시작하지만, 더 나아간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기존 한계와 틀을 깨기 위해 저항하며 연구를 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수학을 연구하다 보면 여기에만 지나치게 몰입해 새로운 생각을 못하는데, 음악을 하며 생각을 잠시 딴 데로 돌린 뒤 연구를 다시 하면 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해요. 밴드 활동을 할 땐 수학자란 자아에 영향 받고 싶지 않아서 ‘서태웅’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