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재앙으로 지구 생명체 대부분이 사라지는 상황에 문명을 재건하기 위해 딱 한 문장을 남긴다면 ‘이 세상은 원자로 이뤄져 있다’라는 말을 골라야 한다.”
노벨상을 받은 미국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이 남긴 말이다. 이제 인류는 모든 분야에 걸쳐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운석충돌을 앞둔 학자들은 먼 훗날 이 땅에 다시 태어날 지적 생명체를 위해 나라별, 학문별로 최소한의 지식을 5개씩 추려 타임캡슐에 넣기로 결정했다. 긴 회의 끝에 투표 결과가 나왔다. 과연 한국 수학자들은 무엇을 골랐을까?
실제 한국 수학자 152명이 고른 ‘타임캡슐에 담을 수학’을 지금 공개한다. 수학 발전의 길목이 된 개념과 현대 수학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념을 한눈에 엿볼 수 있는 투표 결과를 확인하고, 각 항목을 지지한 수학자에게 직접 그 이유를 들어보자.
수만 년 인류의 역사를 되돌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 그 긴 시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유산은 무엇일까?
수학자들의 선택은 ‘0과 아라비아 숫자’였다. 이는 전체 수학을 100이라고 할 때 99를 200년 안에 이룩하게 한 시작점에 있는 발명품이다. 쉽고 당연하게 쓰던 아라비아 숫자와 0이 얼마나 대단한 도구였길래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한 걸까?
수학 발전엔 항상 좋은 도구가 있었다
지금은 흔히 수학이라고 하면 서양을 떠올리지만, 사실 14세기 초까지만 해도 동양 수학은 서양 수학보다 1000년 더 앞서 있었다. 그 배경에는 서양의 오랜 숫자 체계였던 로마 숫자보다 훨씬 우수한 중국 숫자 표기 도구인 ‘산가지’가 있었다.
로마 숫자는 큰 수를 표현하기도 복잡하고 덧셈, 뺄셈 이상의 연산을 하기 매우 불편했다. 반면 산가지는 사칙연산을 하는데 아주 편리한 도구였다. 1이 1이고 2가 2라는 의미만 통하면 ‘α’라고 쓰든 ‘一’이라고 쓰든 똑같을 것 같지만, 직접 계산해보면 고대 숫자 체계로는 복잡한 연산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기호 자체뿐 아니라 자릿수를 표기하는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산가지를 가진 동양 수학은 2000년간 훨씬 빨리 발전했고, 서양은 오랫동안 숫자가 수로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다만 이미 너무 좋은 기호가 있어 불편함이 없었던 동양은 산가지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근대수학으로 넘어가는데 또 다른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처럼 숫자와 수학의 발전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서양 수학의 증폭제가 된 아라비아 숫자
좋은 숫자를 갖추지 못했던 서양은 오랫동안 수학을 기하로 다뤘다. 미국 버클리대학교 수학과 교수인 로빈 하츠혼이 쓴 ‘기하학:유클리드 기하학을 넘어서’를 보면 1800년대까지 서양에서 방정식을 기하로 풀었다는 설명이 있다.
숫자를 먼저 인식하고 숫자끼리 더하면 쉬운데, 숫자와 미지수를 선분으로 인식한 다음 선분끼리 더하는 방식으로 작도하면서 문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1700년대 말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미지수 x를 선분 자체가 아닌 선분의 길이로 생각해도 된다’는 표현이 처음 등장했으니, 그동안 서양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게 수학을 다뤘을지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기하학으로 수학을 오래 연구하고 이해했던 것이 오히려 후에 미적분의 시대에 이르렀을 때 큰 도움이 됐다. 운동을 표현하는 동적 수학에 기하학적 사고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라비아 숫자는 바로 이 지점에서 기하학과 함께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동안 도형, 기하로만 인식하던 문제를 아라비아 숫자를 통해 풀자 그야말로 작은 점이 폭발하듯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 현대수학의 빠른 발전이 아라비아 숫자 하나만으로 이뤄졌다기보다는, 오래 준비돼 있던 수학적 사고 능력이 아라비아 숫자라는 우수한 기호를 만나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냈다고 볼 수 있다.
1위인 ‘0과 아라비아 숫자’가 아주 명료하게 수학의 기초와 기본 단계를 다지는 개념이라면 2위인 ‘미적분의 기본 정리’는 아라비아 숫자와는 전혀 다른 특징을 보인다. 정리를 이해하기까지 많은 사전지식이 필요하며, 누구나 쉽게 다루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고급 수학’이라는 점에서다.
그런데도 많은 수학자가 미적분의 기본 정리를 ‘꼭 남기고 싶은 수학’으로 꼽은 것은 미적분의 기본 정리가 수학사에 그야말로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아니, 수학사가 아니라 인류 역사 전체의 지각변동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의 법칙을 설명하는 유일한 언어
흔히 미분과 적분을 ‘미적분’이라고 부르며 하나로 묶인 반대의 개념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미분은 변화율을 나타내는 방법, 적분은 넓이를 구하는 방법으로 이 둘은 자연스럽게 엮이지 않는다. 미적분학의 기본 정리는 이런 미분과 적분을 하나로 엮어주는 정리다. 이는 수학의 판도뿐 아니라 다른 모든 과학 분야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현재 자연의 법칙을 설명하는 거의 모든 정리는 미적분학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복잡한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스토크스 정리’나 ‘그린의 정리’도 모두 미적분학의 기본 정리에서 나왔고, 미적분의 기본 정리 하나만 있으면 증명할 수 있다.
익명으로 의견을 남긴 한 수학자는 “미적분은 수학 세계에 역동성을 불어 넣은 개념이자, 자연의 대법칙을 읽어내는 언어”라며, “인류의 선사시대 이후 역사를 고대-중세-근대로 나눈다면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갈 때 수학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정의 근간이 되었던 개념은 미적분의 기본 정리”라고 밝혔다.
또 이지운 KAIST 교수는 “다른 개념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언젠가 찾을 것 같지만 미적분의 기본 정리는 인류사에 손꼽히는 세기의 천재가 나타나지 않으면 영원히 찾기 힘들지도 모른다”며, “미적분학의 활용도를 볼 때 다음 세대를 위해 타임캡슐에 넣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여러 수학자가 미적분의 기본 정리를 지지한 것은 물론, 다른 항목을 고른 경우에도 “미적분의 정리가 끌리지만 최소한의 정보로만 설명하기 어려워 다른 것을 택했다”며 미적분을 향한 미련을 보이기도 했다.
김영욱 고려대학교 교수에 따르면 수학의 발전에 꼭 필요한 2가지 조건은 ‘좋은 수단’과 ‘좋은 이론’이다. 좋은 기호 없이는 아무리 훌륭한 아이디어가 있어도 이를 실현하기 어렵고, 좋은 이론을 개발하지 않으면 최고의 도구가 있다 해도 학문을 발전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적은 표수 차로 독보적인 1, 2위를 다툰 두 항목 ‘0과 아라비아 숫자’와 ‘미적분의 기본 정리’가 수학의 발전에 필요한 이 두 가지를 정확히 충족한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결과다.
파인만이 ‘모든 물질은 원자로 이뤄져 있다’라는 말을 남겨야 한다고 말했듯, 고대인에게 ‘지구가 둥글다’고 말해줄 수는 있다. 이것은 ‘현상’이고 그 자체로 사실이니까. 하지만 수학은 조금 다르다. 수학에서 1은 그냥 1이라는 대상이 아니라 다른 수와의 연산, 관계 사이에서 비로소 의미를 지니는 개념이다. 그래서 ‘아무것도 남기지 않겠다’를 고른 수학자들은 어떤 개념에 이르는 논리를 스스로 찾지 않는 한, 1 자체를 남기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조건이 많아지면 이 조건을 만족하는 것은 그보다 작은 부분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많은 말을 남길수록 적은 것을 발견할 것’이라는 생각을 극한으로 보내면 결국 ‘모든 것을 남기는 방법은 아무 말도 남기지 않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는 거다.
이 답은 ‘최대한 많은 대상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가 남기는 조건들의 집합으로 공집합을 택한다’는 지극히 수학적인 생각이 드러나는 항목인 동시에, ‘다소 이상적’, ‘후손에게 무례’, ‘우리가 고대 유물과 문명을 조사하면서 지적으로 더 풍부한 삶을 누리는 것처럼 새로운 생명체도 우리가 남긴 것에서 뭔가 알게 되고 흥미를 느낄 것’이라는 반대 의견도 많았던 재미있는 항목이기도 하다.
a2+b2=c2. 직각삼각형의 세 변의 길이 사이의 관계를 나타낸 ‘단순하고도 우아한’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아마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정리 중 하나일 것이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고른 수학자들은 쉽고 편리하면서 그림만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을 타임캡슐에 넣을 이유로 꼽았다.
박부성 경남대 교수는 “도형의 성질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수학적인 의미가 있고, 정사각형의 넓이가 한 변의 길이의 제곱이라는 점에서 ‘길이’와 ‘넓이’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고 곱셈과 덧셈이라는 연산도 보여준다”며,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타임캡슐에 담을 가장 적절한 개념이라고 말했다.
또한 “특정한 하나의 삼각형이 아닌 모든 직각삼각형에 대해 성립한다는 것에서 수학이 보편타당한 지식을 다룬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라고 설명했다. 단순히 기하의 성질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증명’이라는 수학의 핵심 아이디어에 다가갈 수 있게 할 거라는 뜻이다.
기하학자인 김영욱 교수는 “평면에서의 ‘거리’라는 개념도 피타고라스의 정리 덕분에 생겼다”며, 피타고라스의 정리 없이는 기하 문제는 ‘아무것도 못 푼다’고 거듭 중요성을 강조했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오늘날 편하게 사용하는 개념이지만 처음 증명했을 때는 세상을 뒤흔들 만큼 충격적인 발견이었다. 그래서 세상 모든 수를 자연수의 비로 나타낼 수 있다고 믿었던 피타고라스학파가 한동안 무리수의 존재를 숨겼다고도 한다.
그 자체로도 유용하지만 ‘직교한다’는 성질,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등 더 어려운 수학으로 일반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타임캡슐 수학의 유력 후보다. 신에게 제사를 지냈을 정도로 놀라웠던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새로운 생명체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해진다!
일대일 대응은 뭔가를 논리적으로 따지는 방법을 보여주는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다. 두 집합의 모든 원소가 각각 상대편 집합의 정확히 한 원소와 짝을 짓는 것을 ‘일대일 대응’이라 하고, 원소의 개수를 비교해 집합을 구분한다. 이 논리에서부터 집합론이 시작되고 더 나아가 20세기 추상 수학을 발전시킨 ‘구조’에도 이를 수 있다.
근대까지 수학이 다뤘던 건 ‘구체적인 대상’에 관한 연산이었다. 눈에 보이거나 만지거나 셀 수 있는 것들을 구체적인 대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집합론이 발전하면서 20세기 수학은 추상적인 대상을 다루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람이 있다. A에게는 수많은 속성이 있다. 키나 성격, 나이, 취미 등등 말이다. 하지만 추상 수학에서는 A의 다른 성질은 전혀 보지 않고 오직 한 가지 성질만 본다. 속성을 지닌 것들의 모임을 C라고 할 때 ‘A가 C에 속한다’는 관계만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내가 원하는 속성의 특징만 뽑아서 볼 수 있다.
A는 한국인이고, 중학생이고, 어제 넘어졌고, 방탄소년단을 좋아하고,… 등등 수많은 특징이 있는 존재지만 ‘A는 한국 사람들의 집합에 속해있어’라고 한정하면 한국 사람의 구조를 연구할 수 있는 것이다.
‘다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는 말처럼, 바라보고자 하는 대상을 정확히 정의할 수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구조는 막연하고 무한한 추상 수학의 세계에서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게 했고, 그 첫 번째 시작에는 일대일 대응이 있었다. 일대일 대응을 고른 수학자들은 이와 같은 논리를 이해하면 훨씬 더 높은 수학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 캡슐, 제작완료! 개폐장치를 닫습니다.
이로써 한국 수학자가 고른 수학 타임캡슐이 완성됐다. 수학 발전의 도화선이 된 ‘0과 아라비아 숫자’부터, 근대수학의 문을 연 ‘미적분의 기본 정리’, 수학의 본질을 엿볼 수 있었던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가장 실용적인 도형의 성질 ‘피타고라스 정리’, 그리고 20세기 추상 수학을 가능하게 한 ‘일대일 대응’까지. 수학사의 핵심 지점들을 잘 드러내는 결과가 꼽혔다. 다른 나라에서는 어떤 타임캡슐을 만들까? 한국의 결과와 비슷할까? 혹은 나라별로 다른 특징을 보일까. 어차피 가상 상황인데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2018년 7월, 미국 로체스터대학교 수학자 팀은 지구 종말에 관한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인류 문명이 언제까지 존재할지 인구 증가와 기후 변화를 바탕으로 수학 모형을 세워 계산한 것이다. 이 연구에 따르면 천천히든 갑자기든 현 인류는 반드시 종말을 맞는다고 한다. 물론 그 전에 기후문제나 인구 문제를 해결하면 결과는 달라지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가상일지라도 언젠가는 진짜 타임캡슐을 만들어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그때는 지금 항목들을 이길 수 있는 더 엄청난 정리와 개념이 발전해 있지 않을까? 종말이 오는 것은 달갑지 않지만 그런 아름다운 수학 발전이 오는 날은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