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물에 잘한다, 곡물이 자란다
한적한 시골길, 느닷없이 초가 두 채와 대나무 다리가 보입니다. 지금까지 단단한 다리만 건넌 사람은 삐걱삐걱 대나무 다리 소리가 무섭게 들릴지도 몰라요. 조심조심, 느리게 걷게 되는 모습이 사뭇 잘 어울리는 이곳은 ‘사완본딘 농장’입니다.
사완본딘은 ‘땅 위의 천국’이라는 뜻입니다. 무릉도원에선 복숭아를 먹지만, 이곳은 꽃이 먹거리입니다. 테이블이 하나뿐인 사완본딘 속 작은 카페에서 우리는 꽃을 먹었습니다. 농장을 만든 ‘또’가 꽃을 끓인 차만이 아니라 간식으로도 꽃을 줬거든요. 어떤 꽃은 신맛이 났고 어떤 꽃은 달았습니다. 태국은 식물이 무럭무럭 자라는 열대기후니, 꽃이 먹거리인 것도 당연합니다.
카페에서 한량 같은 시간을 보낸 우리는 또를 따라 농장을 둘러봤습니다. 또는 화학비료 없이 풀을 발효시켜 좋은 흙을 만들고 커피콩 껍질과 쌀겨로 비료를 만듭니다. 농장에 있는 꽃과 풀을 따서 차를 우리고, 음식을 담는 도자기 그릇도 직접 빚지요.
농장을 둘러보고 떠날 때까지 강아지 두 마리가 우리를 따라다녔습니다. 주인 없는 두 강아지는 자신에게 음식을 나눠주는 사완본딘에 아예 눌러 앉아버렸답니다. 인간과 자연이 함께 살아가는 사완본딘을 보면서 우리도 한뼘 자랐겠죠?
카렌족의 논과 한가로운 녹차밭
땅과 함께 사는 건 때로 손이 많이 가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치앙라이의 또 다른 농장 ‘타이거랜드’에서 탐사대는 쌀 껍질을 깠습니다. 태국의 고산족 중 하나인 카렌족이자 농장의 주인인 크리스가 방법을 가르쳐줬지요.
크리스는 카렌족 양식으로 지은 집에서 농장과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머무는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 닭에게 모이를 주고 채소를 따고 쌀을 키우는 일을 체험합니다. 탐사대는 리듬에 맞춰 방아를 찧은 다음 쌀과 껍질의 무게 차이를 이용해 쌀을 분리해냈답니다.
노동으로 지쳤을 때 가면 좋을 곳은 ‘추이 퐁’이라 불리는 녹차밭입니다. 추이 퐁의 주인은 40년 동안 산 중턱에서 녹차를 생산했고, 2년 전부터는 자녀가 더 큰 농장을 만들어 치앙라이의 명소가 됐죠. 녹차로 만든 차, 빵, 아이스크림을 마시듯이 먹은 정예원 대원은 “좋은 환경에서 자라서 그런지 모든 메뉴가 맛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신과 함께한 현대 예술
태국은 색깔이 화려했습니다. 열대기후라 1월인데도 녹색이 가득하고 꽃도 화려했죠. 사원과 왕궁은 금색으로 치장이 되어 있고 패션용품도 강렬한 색감이 특징인 에스닉풍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온통 하얀색이라 ‘화이트 템플’로도 불리는 사원 ‘왓 롱 쿤’이 눈에 띄었습니다(40쪽 참조). 치앙라이의 화려한 색감 사이에서 홀로 무채색을 하고 있거든요. 이 사원은 치앙라이의 불교 예술가인 찰름차이 코싯피팟이 21년째 만들고 있는 사원입니다. 찰름차이는 사원을 부처에게 바치면 자신이 지은 죄를 씻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탐사대는 뜨거운 더위에도 긴 바지를 입고 사원에 입장했습니다. 예를 지키기 위해 짧은 바지는 금지돼 있거든요. 먼저 지옥을 상징하는 다리를 건넜습니다. 다리 아래에는 지옥에서 괴로워하는 영혼의 손이 아우성치고 있습니다. 다리를 건너면 현세가, 그 다음엔 극락이 펼쳐집니다. 현세는 지옥보다 낫고, 극락은 깨달음의 공간이에요.
불교 세계관에서 인간은 죄를 지으면 죄의 종류에 따라 8개 지옥에 나눠 떨어집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환생해 윤회의 고리에 들어가죠. 반대로 덕을 쌓으면 윤회를 하지 않아도 되는 극락에서 살 수 있습니다. 왓 롱 쿤은 2070년에야 완성될 계획입니다. 50년 뒤에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네요.
까만 집과 파란 사원
왓 롱 쿤과 대립쌍으로 꼽히는 곳이 있습니다. 태국의 예술가이자 2014년에 세상을 떠난 타완두차니가 집으로 쓰던 ‘반담 미술관’입니다. 온통 까만 건물로 가득찬 반담은 우리말로 ‘검은 집’이라는 뜻입니다. 타완의 아들은 “화이트 템플을 지은 찰름차이는 천국에 갈 것이고 아버지는 지옥에 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검정색은 지옥을 상징하기 때문이죠.
탐사대가 반담에 들어서자 정말 지옥이 펼쳐진 것 같았습니다. 가구와 건물엔 악마의 뿔처럼 생긴 장식이 있고 지붕은 찌를 듯이 뾰족해요. 죽은 동물의 가죽과 뼈도 가득합니다. 독특하고 아름다우면서도 끔찍하고 찜찜한 기분이 들죠.
마지막으로 들른 치앙라이의 사원은 ‘블루 템플’로도 불리는 ‘왓 롱 수아 텐’입니다. 해가 넘어갈 때 이곳에 도착해 푸른빛이 더욱 강렬하게 보였습니다. 왓 롱 수아 텐의 건축가는 찰름차이와 타완모두에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왓 롱 쿤과 반담에서 본 장식을 모두 관찰할 수 있었답니다.
산 위에서 사는 사람들
차가 구불거리는 산비탈길을 오르자 대원은 모두 멀미를 호소했습니다. 그래도 올라간 보람이 있었죠. 태국과 미얀마, 캄보디아가 만나는 산 도이 퉁은 지금까지 본 어떤 산보다도 활기찼습니다.
이곳은 30년 전만 해도 살기 힘든 곳이었다고 합니다. 태국 국적이 없어 땅으로 가지 못하고 생계가 막막했던 소수민족이 나무를 팔아 생계를 잇는 바람에 산은 녹색이 아닌 흙색을 띄었죠. 내다 팔기 위해 마약의 재료인 양귀비를 재배하다가 마약에 중독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탐사대가 찾아갔을 때 도이 퉁은 숲으로 가득하고 차와 커피가 유명하며 유기농 채소가 신선한 곳이었습니다. 가까운 매 파 루앙 정원은 꽃과 나무로 활기가 넘쳤고요. 극기훈련에 가까웠던 ‘공중다리 산책 공원’ 빼고는 모두 ‘힐링’되는 것들로 가득했죠. 도이 퉁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탐사대는 도이 퉁의 전시관에서 이유를 알았습니다. 푸미폰 전 국왕의 어머니인 스리나가린드라 대비가 도이 퉁에서 말년을 보내기로 하면서 시작한 ‘도이 퉁 프로젝트’ 때문입니다. 대비는 소수민족에게 국적을 주고 교육과 보건 서비스를 보장했습니다. 양귀비 대신 차와 커피를 재배하도록 도왔죠. 왕족과 주민이 힘을 합쳐 일궈낸 땅이 지금의 도이 퉁입니다. 대비가 세상을 떠난 지금도 주민들은 대비의 생일인 9월 20일이면 손님에게도 음식을 나눠준다고 합니다.
도이 퉁 외에도 치앙라이와 그 주변에는 고산족이 사는 산마을이 많습니다. 탐사대는 태국에서 가장 많은 고산족인 카렌족이 사는 마을과 세 번째로 많은 고산족인 아카족이 사는 마을에 다녀왔습니다. 카렌족 마을에서는 코끼리에게 먹이를 줬고, 아카족 마을에서는 전통적인 흙집을 살펴봤습니다. 고산족과 가까워지기에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자연과 함께 건강하게 사는 법을 고민하는 귀한 시간이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