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개의 칸으로 나뉜 격자무늬의 세계가 있다. 한 쪽에는 백을 상징하는 종족이, 다른 한쪽에는 흑을
상징하는 종족이 서 있다. 두 종족은 계급별로 정해진 위치에 서서 전쟁을 준비한다. 긴장감 넘치게
대치된 상태에서 백의 보병 하나가 움직이면서 전쟁은 시작된다. 이들의 목표는 단 하나. 상대방 왕을 잡는 것이다. 어느 한 쪽이라도 상대방 왕 목전에 이르면 승리의 의미로 말한다. “체크메이트.”
체스는 보드 위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다. 그래서 실제 전쟁 모습과 닮아 있다. 영화 ‘세기의 매치’는 냉전 시대를 배경으로 두 명의 체스 천재가 실제로 벌였던 대결을 다룬 영화다. 냉전 시대는 2차 대전 끝나고 옛 소련이 붕괴될 때까지 세계가 자유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으로 나뉘어 대립하던 시기를 말한다.
이렇게 팽팽하게 대립된 상황에서 체스계는 소련 선수들이 독점하고 있었다. 여기에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미국 선수가 소련 선수들을 하나씩 이겨나가며 국가적으로 대립하는 모습은 실제 시대 상황과 닮아 있다. 미국의 체스선수 바비 피셔와 소련의 보라스 스파스키가 보여주는 체스 경기는 냉전 시대의 미국과 소련의 상황을 체스판 위로 가져온 듯한 느낌을 준다.
Rfe3과 Bcg5는 암호문?
주인공 바비 피셔는 알파벳과 숫자 조합을 입으로 말하며 체스 기물★을 움직인다. 체스에서 사용하는 이 암호는 뭘까? 체스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물이 움직이는 판 바깥쪽에 조그맣게 숫자와 알파벳이 쓰여 있는데, 이 숫자와 알파벳을 이용해 만든 규칙이다. 어떤 규칙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기물★ 체스를 할 때 사용하는 말을 지칭하는 용어
체스 판은 총 64칸으로 흰색칸과 검정색칸이 하나씩 교차돼 있다. 세로줄은 파일(file)이라고 하고, 가로줄은 랭크(rank)라고 한다. 파일은 알파벳a~h로 읽고 랭크는 1부터 8까지의 숫자로 읽는다. 어떤 지역의 위치를 나타낼 때 위도와 경도를 이용하듯이 체스 기물의 위치는 파일과 랭크를 이용해 나타낸다. 예를 들어 백 킹의 위치는 e파일 1랭크에 있으니 e1이라고 표현해 위치를 나타낸다.
첫 번째에 대문자 알파벳은 무엇을 나타낼까? 파일과 랭크로 표현한 위치에 서 있는 기물을 뜻한다. 각 기물을 영문명의 이니셜로 표현한다. 왕, 여왕, 주교, 기사, 그리고 전차의 영어 표기로 순서대로 킹(King), 퀸(Queen), 비숍(Bishop), 나이트(Knight), 룩(Rook)의 이니셜이다. 나이트의 이니셜은 K지만 킹과 겹쳐서 N으로 쓴다. 보병을 뜻하는 폰(Pawn)의 이니셜은 생략하고 위치만 표기한다.
이제 위의 암호를 풀 수 있다. 첫 번째 Rgf3은 ‘g파일에 있는 전차(룩)를 f파일 3랭크로 이동했다’는 뜻이며, 두 번째 Bcg5는 ‘c파일에 있는 주교(비숍)를 g파일 5랭크로 이동했다’는 뜻이다.
나이트로 체스판을 채울 수 있을까?
체스는 기물마다 이동하는 방향과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다르다. 나이트는 이동할 때 앞에 있는 기물 하나를 뛰어 넘고 대각선으로 이동한다. 비숍은 대각선으로만 이동한다. 체스에서는 이것을 기물의 행마법이라고 말한다. 기물이 움직이는 방법이라는 뜻이다. 기물의 움직임에는 공통점도 있고 차이점도 있다.
나이트를 제외한 모든 기물은 다른 기물을 뛰어 넘을 수 없다. 룩은 앞뒤좌우, 십자 방향으로 기물이 없는 한 마음껏 움직일 수 있고, 비숍은 대각선 방향으로 움직인다. 비숍도 룩처럼 이동 경로에 길을 막는 같은 팀 기물이 없으면 움직이는 범위에는 제한이 없다. 킹과 퀸은 앞뒤좌우에 대각선방향까지 모든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단, 킹은 어느 방향으로든 한 칸씩 밖에 움직이지 못하지만, 퀸은 한 방향이라면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다.
두 번째 줄에 나열된 폰은 앞으로만 나아갈 수 있다. 앞으로 한 칸씩만 움직일 수 있는데, 처음 시작점에서 움직일 때만 두 칸까지 움직일 수 있다. 기물을 잡을 때는 폰만의 특징이 있다. 다른 기물은 이동 경로에 있는 상대방 기물을 잡지만 폰은 대각선 앞 방향에 위치한 기물을 잡는다. 오히려 바로 앞에 있는 기물은 잡을 수가 없다.
나이트는 특이한 행마법을 지닌 기물이다. 유일하게 기물을 뛰어넘을 수 있다. 한 번에 총 두 칸을 움직일 수 있는데, 앞뒤좌우로 한 번 움직이고 같은 방향의 대각선으로 한 번 더 움직인다. 앞뒤좌우 방향에 기물이 있든지 없든지 상관없이 뛰어넘을 수 있다. 이렇게 체스는 기물마다 고유한 특징과 개성이 있어 매력있는 게임이다.
각 기물이 가진 독특한 특징 때문에 체스 기물의 행마법은 수학자들에게 관심거리가 되기도 했다. 그 중 한 예로 ‘기사의 여행’이라는 문제가 있다. 기사의 여행 문제는 체스 기물 중 나이트에 대한 수학 알고리즘 문제로, 해밀턴 경로 문제의 한 사례다. 해밀턴 경로 문제는 모든 꼭짓점을 한 번씩만 밟고 지나가는 경로를 말한다. 해법은 무수히 많다.
기사의 여행도 나이트의 행마법에 따라 체스판의 모든 칸을 한 번씩만 밟고 지나가는 방법을 찾는 문제다. 나이트가 모든 칸을 지나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면 닫힌 여행이라고 하고, 그렇지 않으면 열린 여행이라고 한다.
필승법칙이 있는 체스?!
체스는 백을 쥔 사람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체스는 백이 유리한 게임이라고 한다. 실제 통계적으로도 백의 승률이 60%정도로 앞선다. 이유가 뭘까?
체스는 결과적으로 킹을 체크메이트하는 게임이다. 그래서 킹과 가까운 거리로 기물을 움직이는 게 유리하다. 체스에서 첫 수를 두는 것을 ‘체스오프닝’이라고 하는데, 경우의 수는 수백 가지가 넘는다. 수많은 체스오프닝 중 킹과 최단 거리를 이룰 수 있는 유리한 고지는 정중앙이기 때문에 대부분 중앙으로 이동하는 체스오프닝을 선호한다. 먼저 시작하는 백에게 중앙을 선점할 수 있는 기회가 먼저 오니 체스는 먼저 시작하는 백에게 유리한 게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체스에도 필승법칙이 있을까? 한 경기에서 마지막 체크메이트의 순간부터 거꾸로 체스의 기보를 보면 체스의 필승법칙을 찾을 수 있을까? 체스는 두 명이 번갈아 가면서 순차적으로 진행하는 게임이기 때문에 이론상으로 역방향 추론이 가능하다. 하지만 영화 대사에서도 나오듯 체스는 단 네 번의 움직임만으로 이미 3000억 개가 넘는 경우의 수가 생긴다. 즉 현실적으로 기보를 추론해 필승법칙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바비 피셔는 일반 체스 전략이 거의 분석됐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새로운 체스 두는 법을 고안해냈다. 바로 피셔960이라는 체스 게임이다. 첫 번째 줄에 있는 8개 말의 위치를 임의로 바꿔 놓고 시작하는 것이다. 단 두 가지 조건이 있다. 두 개의 비숍 중 하나는 어두운 칸, 하나는 밝은 칸에 두고 킹을 기준으로 룩은 양쪽에 하나씩만 있어야 한다. 이 때 만들어질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총 960개라서 피셔960이라고 이름 붙였다.
바비 피셔는 매 수를 둘 때마다 150수 이상을 앞서 생각했다. 보리스 스파스키는 한 수를 두는 데 평균 3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체스를 두는 방식은 전혀 다르지만 체스 천재라는 사실은 확실한 두 사람의 긴장감 넘치는 대국의 결과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