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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헤이그 특사 이상설

한국 근대 수학의 선구자


헤이그 특사로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 이상설이 집필한 수학교재 <;수리>;의 원본이 최근 오랜 수소문 끝에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고문서 틈에서 발견돼 세상에 공개됐다. 이 책은 19세기 말에 쓰인 수학책으로, 한국의 전통 산학과 오늘날 배우는 현대 수학의 연결고리와 같다. 불꽃같은 독립운동가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 근대 수학의 선구자이기도 했던 보재 이상설의 삶을 광복 70주년을 맞아 되짚어 보자.

 

 

이상설의 수학책 <;수리>; 세상에 드러나다!

고종황제의 특사로 헤이그 만국평화회담에서 대한제국의 독립을 항변했던 이상설은 수학에도 남다른 애정과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물로 몇 권의 수학책을 남겼다. 그 중 <;수리>;는 19세기 말에 쓰인 책으로, 오랫동안 수학계에서는 잃어버린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인 1984년, 윤병석 인하대 역사학과 교수가 쓴 <;이상설전>;에 수학책이라는 설명 없이 <;수리>;의 표지가 실렸다. 독립운동을 연구하는 누구도 그 책의 표지가 19세기 우리의 수학책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2009년 필자는 <;이상설전>;에서 <;수리>;의 표지를 확인하고 그 책이 이상설 선생의 수학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필자는 오랫동안 이 책을 간절하게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지인에게서 충남 예산 근처에 있는 수당기념관 관장 이문원 중앙대 명예교수가 이상설의 유품 일부를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해 여름 과천의 국사편찬위원회 고서들 사이에 있던 <;수리>;의 필름을 구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수리>;의 원본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다 마침 2015년 KBS에서 기획한 광복 70년 특집 다큐멘터리 ‘이상설, 불꽃의 시간’ 제작에 참여하면서 수리의 원본을 찾는 일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KBS 관계자 및 대학생 자원봉사자가 수당기념관의 모든 사료를 뒤지는 사투를 벌였고, 마침내 독립기념관장을 역임한 이문원 수당기념관장의 도움으로 2015년 7월 성남의 한국학 중앙연구소에서 여러 책 사이에 끼어 보관된 <;수리>; 원본을 찾게 되었다. 이로서 100년여 동안 전설로만 내려오던 <;수리>;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근대 수학의 선구자

이상설이 쓴 <;수리>;는 총 130여 쪽으로 이뤄져 있다. 대부분 한자로 쓰여 있지만 비례, 방정, 기하원본 등 근대 수학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의 전반부는 당시 청나라에서 들어온 서양 수학을 집대성한 <;수리정온>;을, 후반부는 초보적인 산술에서 다루지 않은 서양 근대 수학의 내용을 공부한 내용이 자세히 정리돼 있다. 이는 중국을 통해 서양 수학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직접 서양 근대 수학을 도입한 사례다.

특히 <;수리>;에는 사원술(전통 산학에서 미지수가 여러 개인 고차방정식을 푸는 방법으로, 4개의 미지수(원) 천원, 지원, 인원, 물원의 4차 방정식 해법이다.)에 해당하는 개념을 최초로 서양식 연산 기호를 사용해 대수적으로 정리한 의미 있는 업적이 들어 있다. 또한 조선의 전통 산학에 구면삼각법, 세제곱근 해법 같은 서양 근대 수학의 내용을 더했다. 이는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합병한 1910년보다 이전에 서양 근대 수학을 도입했다는 증거다.

이상설은 <;수리>; 편찬 외에도 한국 수학계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대표적으로는 당시 대한제국의 행정기관이었던 학부(대한제국의 행정기관으로 학교 정책과 교육에 관한 사무를 맡아 처리했다. 오늘날의 교육부에 해당한다.)의 요청을 받아 1900년 7월 최초의 한국 근대 수학 교과서인 <;산술신서>; 1권을 발간했다. <;산술신서>;는 저자가 확실한 최초의 근대 수학교과서다. 우리 현실에 맞게 국한문 혼용으로 쓰였으며, 교사를 배출하는 한성사범학교에서 예비교사 교육용 교과서로 쓰였다. <;산술신서>;는 1900년 이후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우리말 수학책의 모델이 됐다. 담은 수학 내용의 수준 측면에서도 초등학교 입문 수준인 대부분의 수학책보다 높다. 순환소수, 나머지 정리, 합동식, 수열, 지수법칙 등 간단한 수론이 담겨 있고, 그 증명과 이를 요구하는 문제도 있다.

또한 이상설은 1895년부터 1896년까지 성균관장을 역임하면서 우리나라 교육과정에 최초로 수학과 과학을 필수과목으로 포함시켰다. 이것은 수학교육을 전문가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하게 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와 같이 이상설은 한국에서 최초로 교과과정에 대중을 위한 근대 수학을 도입하고, 최초로 수학교재를 쓰고, 또 본인이 직접 수학을 가르쳤다. 이상설을 한국 근대 수학의 선구자라 부르는 이유다.




 
근대 학문 도입에 앞장선 희대의 천재

이상설은 어려서부터 총명해 20대 초반에 이미 율곡 이이와 견줘도 될 만큼의 학자라고 칭송받을 정도로 높은 경지의 학문을 이뤘다. 그는 신구학문에 통달한 희대의 천재이자, 해외 독립운동의 발판을 마련한 독립운동계의 마당발이기도 했다. 1894년에는 25세의 나이로 조선왕조의 마지막 과거시험인 대과에서 높은 성적으로 급제해 세자를 가르치는 세자시독관이 되었다. 이승만과 김구도 같이 시험을 치르고 낙방한 조선의 마지막 대과 과거에서 이상설이 급제한 것이다.

과거에 합격한 이상설은 조선 말기 재무행정을 관장하던 관청인 탁지부 재무관을 맡았으나 벼슬에 진출하지 않고 혼란한 시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한동안 더 학문에 전념했다. 이후 성균관 교수 겸 관장을 맡으며 성균관에 교수임명제, 입학시험제, 졸업시험제과 같은 근대적인 제도를 도입했다.

이상설은 중국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일본어에 능통해 서양의 앞선 제도와 과학기술을 이해하기 위한 일에 앞장섰다. 이번 <;수리>;의 원본 발굴 과정에서 함께 발견된 <;화학계몽초>;와 <;백승호초>;, 그리고 <;식물학>;은 이상설이 서양의 근대 화학과 물리학을 공부하며 쓴 책이다. 이로써 한국과학사에서도 이상설의 의미가 다시 부각되고 있다.

1880년대 중반부터 일제에 강제 합병되던 1910년 사이에 우리말로 된 60여 권 이상의 근대 수학 교재가 나왔고, 그 책으로 근대 수학을 가르치고 배웠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일본이 1910년 이후 우리나라에 전수한 가감승제 정도의 수학 내용보다 이미 수준이 훨씬 높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큰 의미가 있다.

광복 70년을 맞이한 뜻 깊은 해에 헤이그 특사이며 독립운동가로만 익숙했던 이상설이 근대 수학을 깊이 이해한 선각자이고, 특히 한국의 정규 교육과정에 최초로 수학을 필수과목으로 도입했으며, 근대 수학 교과서를 최초로 쓴 탁월한 수학 교육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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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수학동아 정보

  • 이상구 교수
  • 진행

    장경아 기자
  • 일러스트

    강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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