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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 당시 고등과학원의 박사후연구원이었던 이종필 고려대 전기전자전파공학부 연구교수가 ‘백북스’ 독서클럽 모임에서 입자물리학을 주제로 강의를 했을 때였다. 뒤풀이에서 박용태 백북스 서울 모임 회장이 이 교수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우리가 일반상대성이론의 중력장방정식을 직접 수학으로 풀어 볼 수 있을까요?” 이 교수는 “불가능하다”는 말 대신에 “고등학교 수학부터 다시 해야 할 수 있다”고 답했다.
“얼마나 걸릴까요? 일반상대성이론 100주년이 되는 2015년까지 어떻게든 배울 수나 있을까요?” 사실 고등학교 수학부터 일반상대성이론까지는 까마득히 먼 길이었다. 수학을 잘 모르거나 잊고 살아온 사람이라면 엄두도 못 낼 일이다. 그런데도 회원들은 그 자리에서 이 교수에게 직접 가르쳐 달라고 간절히 요청했다. “혹시 다음 달부터 바로 수학 공부를 시작할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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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언어, 수학
일반인을 대상으로 일반상대성이론을 쉽고 재미있게 쓴 교양과학책이나 강연은 당시에도 많았다. 백북스 회원 대부분은 이미 그렇게 일반상대성이론을 여러 번 접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들은 왜 하필 수학으로 일반상대성이론을 풀고 싶었을까? 그 이유를 묻자 초등학교 교사인 홍경화 씨는 이렇게 답했다. “한 단계 더 도약하고 싶은데 수학이 걸림돌이었어요. 사실 저한테는 수학이 외국어 같았거든요. 하지만 쉽게 풀어 쓴 교양과학책은 일종의 번역책이나 마찬가지잖아요. 수학이라는 원어로 자연을 직접 이해하면서 그 생생함을 느끼고 싶었어요.”
이 교수에 따르면, 수학은 자연을 이해하는 언어다. 물리학자로서 수학으로 자연의 원리와 질서를 이해하는 일은 굉장히 즐겁다고 했다. 하지만 수학을 접할 일이 없는 비전공자들은 이런 기쁨과 환희를 느낄 기회가 없다. 그들은 수학이 아닌 말이나 글을 통해 과학을 받아들인다. 평소 과학 대중화에 관심이 많은 이 교수는 그런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과학을 알리는 게 논문을 한두 편 더 쓰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그였다.
결국 이 교수는 백북스 회원 중 신청자를 대상으로 2009년 한 해 동안 한 달에 한 번, 5시간씩 총 12번의 수학 강의를 진행했다. 고등학교 수학부터 미적분, 그리고 대학 수학과 물리학을 거쳐 일반상대성이론의 중력장방정식까지를 푸는 과정이었다. 이 교수의 ‘수학아카데미’ 강의에는 일반인 58명이 신청했다. 수학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중 전 과정을 수료한 사람은 22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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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황당한, 그리고 아름다운 도전
이 교수에게나 수학아카데미 수강자들에게나 주위의 시선이 곱지는 않았다. “동료 물리학자들이나 교수님들께 ‘아인슈타인 만들기 프로젝트’에 관해 말하면 다 미쳤다고 했어요. 그 시간에 논문이라도 하나 더 쓰라고요. 대부분은 이해를 잘 못했죠.” 이 교수는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불편한 마음이 들었던 건 홍 교사도 마찬가지였다. “쓸 데 없는 걸 뭐 하러 하냐고 하니까 굳이 모임 밖에서는 이야기를 안 하게 되더라고요.”
회를 거듭할수록 내용은 점점 어려워졌고,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들은 더 많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남을 수 있었던 건 알고자 하는 열정과 꿋꿋한 의지 덕분이었다. 어떻게 버텼냐는 질문에 전직 방송PD인 박용태 회장은 이렇게 답했다. “자연과학은 진입장벽도 높고 우리 같은 일반인들이 혼자서는 절대 못하잖아요. 전문가를 통하지 않고서는 수학으로 제대로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 여기고 임했죠.”
최고령 수강자 박인순 할머니의 가족들도 처음에는 “그렇게 알아듣기도 어려운 걸 왜 하느냐”고 했었다.
“사람들마다 물어봐요. 그 어려운 걸 배워서 뭘 할 거냐고. 근데 난 그런 게 없어. 그냥 재미있어서 하는 거야. 내가 뭐 방정식을 줄줄이 풀고 그러진 못해요. 근데 위대한 학자의 사고 과정이 보이고, 뭔가 그 안에서 명쾌한 답을 유도해 나가는구나 싶은 느낌이 드는 거야. 어려운 것보다 재미있는 게 더 커진 거지. 또래 친구들이 관심 있어 하는 명상이며, 뭐며 난 하나도 재미가 없다니까.”
수줍게 웃는 박 할머니의 모습은 마냥 행복해 보였다. 이제는 가족들도 손주들 수학 걱정은 덜었다는 반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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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정말 아인슈타인이 됐을까
당시 수강했던 사람들 중 몇몇은 자발적으로 수학 학습 모임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이들은 이 교수의 강의노트를 모아 교재로 만들고, 강연 당시 촬영해 두었던 동영상을 돌려보며 공부한다. 모임을 이끌고 있는 한의사 김제원 씨는 이 교수의 책에 쓴 후기에서 “2년 반 동안 복습한 끝에 우리는 마침내 중력장방정식을 풀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물론 이 모임도 처음에는 8명으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단 4명만 남았다. 박 할머니도 그 중 한 명이다. 책꽂이 한 편에서 교재를 꺼내 보여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한텐 이게 제일 보물이야. 벌써 첫 번째 책은 다 떨어졌고, 지금 이것도 다 뜯어져서 혹시 한 장이라도 잃어버릴까 봐 비닐에 싸놓은 거예요. 나를 위해서 세 사람이 헌신해 주니까. 내가 해간 거라곤 열심히 복습한 것밖에 없지, 뭐.”
“정말 이 교수님 수업을 듣고 아인슈타인이 되셨나요?” 기자가 묻자, 박 회장은 멋쩍게 웃어 보였다. “아직은 멀었죠. 그래도 조금이나마 맛보긴 한 것 같아요.” 수학 아카데미 사람들의 눈빛은 여전히 호기심에 가득 차 보였다. 이 교수는 조심스럽게 답했다. “2009년 수학아카데미만 놓고 본다면 실패겠죠. 하지만 그 뒤로 학습 모임을 통해 중력장방정식을 풀게 된 분들도 있으니까 어느 정도 성과를 봤다고 할 수 있겠죠?”
“정말 수학을 알고 나니 세상이 달라 보이던가요? 그 새로운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요?” 기자의 질문에 박 할머니는 가까이 다가와 이렇게 답했다.
“속지 않고 사는 세상. 그거야. 요즘에는 정보가 너무 많아서 뭐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가 없잖아요. 근데 이제는 그런 정보를 비판적으로 볼 수 있게 됐거든. 우스갯소리지만 예전엔 요리도 대충 감으로 했는데, 지금은 온도나 양이나 정확히 재서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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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민 아인슈타인 만들기 프로젝트
이 교수는 일반상대성이론 발표 100주년인 올해 당시를 회고하며 1년 동안의 강의를 <;이종필의 아주 특별한 상대성이론 강의>;라는 한 권의 책에 담았다. 또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중력장방정식 강의를 동영상으로 만들고 있다. 첫 시간, 이 교수는 이렇게 입을 뗐다. “이 강의는 수학을 전혀 모르시는 분, 또는 고등학교 때 수학을 열심히 했지만 지금은 수학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분도 수학으로 물리학을 이해하고, 수학으로 일반상대성이론의 중력장방정식을 풀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로 기획됐습니다.” 이 동영상 강의는 오는 9월부터 한국형 온라인 공개강좌 ‘케이무크(K-MOOC)’에서 제공할 예정이다. 이 교수의 전국민 아인슈타인 만들기 프로젝트는 이렇게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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