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람이 부는 길목, 커다란 풍차 밑에 알록달록한 색실이 놓인 작은 공장이 눈에 띈다. 공장 안을 들여다보니 알록달록한 목도리와 함께 예쁜 가구도 보인다. 공장 이름은 ‘바람 뜨개질 공장’. 풍차와 색실, 바람과 공장은, 대체 무슨 사이일까?
바람에 따라 길이가 달라지는 목도리
‘바람 뜨개질 공장’의 주인은 네덜란드가 고향인 디자이너 메럴 카르호프다. 카르호프는 ‘바람’으로 예쁜 색색의 작품을 만든다. 그런데 바람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색도 없는데, 어떻게 작품을 만들까?
비밀은 그녀가 직접 만든 ‘풍차 재봉기’에 있다. 풍차 원리를 이용해 바람의 힘으로 바늘이 움직이는 재봉기다. 바람이 잘 부는 옥상에 있는 커다란 풍차 재봉기는 바람을 만나면 슬슬 움직이기 시작한다. 풍차가 움직이면, 재봉기에 달아 놓은 실몽당이에서 실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올라온 실은 바퀴 모양의 둥근 바늘에 감기면서 뜨개질 원리에 따라 천이 된다. 이 천은 목도리가 되기도 하고, 나무 의자의 폭신한 방석 부분이 되기도 한다. 어떻게 바람으로 천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
“제가 디자인한 목도리를 많이 만들어서 여러 사람들에게 선보이고 싶었어요. 그런데 많은 양을 만들려니 기계가 필요했고, 이왕이면 그 기계는 환경오염과 거리가 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다 문득 네덜란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풍차를 떠올렸고, 자연스럽게 바람 에너지를 사용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평소에 대체에너지에 대한 관심도 많았거든요.”
카르호프는 풍차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재봉기를 설계했다. 바람으로 날개를 돌려 얻은 에너지로 뜨개질을 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결과는 성공! 바람으로 목도리를 완성했다.
그녀의 목도리는 언제 만든 제품이냐에 따라 길이가 모두 다르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은 길이가 길고, 유난히 바람이 적게 부는 날은 길이가 짧다. 인위적인 게 싫어서 그대로 상품화했다. 각 목도리 뒷면에 몇 분 동안 만들었는지, 언제 만들었는지 꼼꼼하게 적혀 있다.
점점 과감해지는 새로운 시도
카르호프는 18살에 처음 디자인 공부를 시작했다. 맨 먼저 이탈리아의 페루자로 유학을 가서 ‘프레스코화’를 공부했다. 프레스코란 벽화로 그리는 방법의 하나로, 16세기의 유명한 화가 미켈란젤로가 그린 ‘천지창조’가 대표적 프레스코화다.
다시 네덜란드로 돌아와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디자인 학교인 디자인 아카데미 아인트호벤을 다녔다. 졸업과 동시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작은 스튜디오를 차렸다. 그때부터 자신의 작업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처음에는 목도리와 같은 간단한 제품을 주로 만들었다. 목도리는 가로 길이가 일정해서, 실 색깔과 디자인만 결정하면 여러 개를 만드는 게 쉬웠다. 이런 독특한 제작 방법이 세상에 알려지고, 주목을 받자 카르호프는 더 과감해졌다. 만들 수 있는 범위를 넓히기로 했다. 가구를 만들고 싶었다.
바람으로는 가구 전체를 만들 수 없었다. 그래서 나무로 만든 의자나 소파의 방석 부분과 침대 덮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탄생한 가구는 지난 2010년 이탈리아에서 열린 밀라노 가구 박람회에 등장하면서 세계인을 놀라게 했다. 그 뒤로 가구를 원하는 고객이 늘어 그녀의 풍차 재봉기도 대수가 늘었다.
자연을 생각하는 마음, 실에도 담아
카르호프의 작품이 눈길을 끄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실’에 있다. 은은하면서 알록달록한 실의 색감이 특히 매력적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실도 자연에서 얻은 재료로 염색하기 때문이다. 카르호프는 주로 자연 건조 방식으로 실을 염색하는데, 말리는 시간을 꼼꼼히 기록해 같은 계열의 색이라도 채도★를 다르게 조절한다. 실은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만들어 사용한다. 모두 환경을 생각해서다.
이런 염색 방식은 실뿐만 아니라 물감을 만들 때도 사용한다. 카르호프가 색칠한 도자기 세트를 보면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모두 ‘노란색’이지만, 알고 보면 말리는 시간이 모두 다른 노란색이다. 함께 어울려 더 빛난다.
“2010년 2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머물 때였는데 항구도시인 베네치아의 물 색깔이 매일 변한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됐어요. 그래서 한 달 동안 매일 같은 자리에서 같은 시간에 달라지는 물 색깔을 촬영했어요. 한 달 뒤 사진을 한 자리에 모아서 보니, 확실히 물 색깔이 매일 변하더라고요. 그래서 컴퓨터로 사진 속 물 색을 분류해서 정리했어요. 색 이름은 촬영 날짜로 했지요. 저는 이 색을 이용해 스카프를 만들었어요. 평소에도 되도록 자연이 준 색깔을 작품에 담으려고 해요.”
카르호프의 작품은 모두 자연으로 시작해서 자연으로 끝난다. 작품을 만드는 재료부터 만드는 방법까지 자연을 거스르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공장에 앉아 바람을 온몸으로 느낄 때 가장 행복하다는 메럴 카르호프가 앞으로 선보일 새로운 작품을 기대해 본다.
채도★ 색의 맑고 탁한 정도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