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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지리적 위치 때문에 은둔의 나라일 수밖에 없었지만, 일본은 일찍부터 바다를 통해 유럽과 교역을 하면서 서양문물을 큰 저항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1543년 표류하던 포르투갈 상선이 일본에 도착하면서 조총 2자루로 시작한 교역은 1590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에도(지금의 교토)에 수도를 정한 군사정권 바쿠후는 유럽의 선진 학문도 수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종교 개종과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1639년부터 1854년까지 216년 동안 유럽과 무역과 외교를 단절했다. 이 시기 일본은 외국과의 교류를 전면적으로 금지했기 때문에 바쿠후의 허락을 받지 않은 유럽인이 일본에 들어오거나 나가는 것은 곧 죽음을 뜻했다.
모두가 즐기는 산가쿠
쇄국 정책이 절정에 달했던 1780년대 무렵, 네덜란드인 티슁은 동인도회사의 고위 간부로 일본에 머물고 있었다. 유럽인은 쇼군으로부터 허락받은 동인도회사의 직원만이 예외로 인정받아 일본에 머물 수 있었다.
교류 단절로 인하여 유럽에서 일본이 점차 잊혀 가던 때, 티슁은 2번에 걸쳐 에도 지역을 여행했다. 그동안 일본 전역에 널려있는 많은 절과 신사를 방문했다. 이 때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일본 전통 수학문제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한 신사의 입구에 있는 건물의 지붕 아래에 매달려 있는 나무판(나무 액자)에 기하 문제가 도형과 함께 적혀 있는 것이 아닌가!
이후 다른 곳을 방문할 때도 유심히 살펴보니 일본인이 ‘산가쿠’라고 부르는 ‘수학문제가 기록된 나무액자’는 도처에 걸려 있었다. 이 산가쿠에는 대체로 여러 도형이 그려져 있었고, 그 문제에 대한 풀이도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더욱 놀라운 건 이런 문제를 만들거나 즐기는 사람이 수학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농부, 아녀자, 사무라이 등도 이런 문제를 즐겨 풀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어떤 문제는 11살짜리 어린이가 만들었다고도 했다. 신분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많은 일본인이 이런 수학 문제에 열정적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었다.
1796년 고향으로 돌아온 티슁은 그동안 자신이 모아 놓은 자료를 바탕으로 유럽에 일본의 수학 산가쿠를 처음으로 소개했다. 이 문제의 수준을 보고 많은 유럽의 수학자들은 깜짝 놀랐다. 지구의 끝에 있는 나라의 수학 수준에 그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나는 이 산가쿠를 찾아 일본으로 여행을 떠났다.
쉽지 않은 산가쿠 찾기
미야기현의 센다이에 있는 하치만구는 일본의 전통적인 신사다. 이곳에 산가쿠가 있다는 자료만 믿고 찾아가 보기로 했다. 때마침 겨울축제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신사는 낮부터 사람으로 붐볐고, 이곳저곳을 둘러보아도 산가쿠는 눈에 띄지 않았다. 생각보다 신사가 넓어서 구석구석을 살펴보는 데 시간이 한참 걸렸다.
모두들 너무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어 누군가에게 산가쿠의 위치를 물어보는 게 미안할 정도였다. 그래도 도움을 청할 사람은 이들밖에 없어 보였다. 그곳의 직원처럼 보이는 몇 사람에게 염치 불구하고 산가쿠에 대하여 물어보아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위치는 물론 산가쿠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짧은 겨울 해가 저물어 가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주위에 소란이 일었다. 겨울 축제(마츠리)가 시작된 것이다. 한겨울에 온통 윗도리를 벗어젖힌(아랫도리도 거의 입은 게 없는) 남녀 무리의 행렬이 먼 아래 언덕길에서 이곳을 향하고 있었다. 깜짝 놀랄 풍경이었다. 그나마 여자들은 상의를 완전히 벗지는 않았지만 춥기는 마찬가지로 보였다.
이 무리의 행렬은 모두 20대 안팎의 젊은이로만 이뤄져 있었다. 누군가의 선창에 따라서 합창하는 무리가 지나면 다른 무리가 오고 그 무리가 지나면 다른 무리가 끊임없이 언덕길을 올라와 신사 안으로 들어갔다. 어디에서 이렇게 많은 젊은 사람들이 오는 것일까?
영화 같은 겨울 축제
밤이 깊어가니 신사 마당에 높이 쌓여 있던 소원 나무판에 누군가가 불을 지폈다. 함께 쌓여 있던 대나무가 ‘뚝, 뚝’ 소리를 내며 사나운 기세로 불에 타오르기 시작하자 반라의 젊은이들은 신사와 불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이들이 멈추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소원을 적어 넣은 종이나 나무를 불덩이에 속으로 던져 넣으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아주 거대한 블록버스터 영화를 한 편 보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나는 분위기에 압도돼 있었다.
이 일본의 겨울축제는 이후 일본에 대한 가장 강력한 기억으로 내 머리에 남아있게 되었다. 그날 저녁 묵고 있던 집의 주인 유코 씨에게 내가 본 장면을 이야기했다. 유코 씨는 자기도 이곳에 오랫동안 살았지만 TV에서밖에 보지 못한 장면을 내가 본 것이라며 내가 운이 좋았다고 즐거워해 주었다.
이날 나는 도저히 산가쿠를 찾아낼 수 없었다. 이 절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은 것은 한참 후였다. 이름이 같은 다른 신사에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산가쿠를 찾지 못했다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 집 주인은 다음날 일본 3대 절경의 하나인 마츠시마 해변에 가 보자고 제안했다. 마침 휴일이어서 온 가족이 함께 나섰다.
이 날 내가 본 아름다운 해변은 그로부터 2달 뒤에 완전히 지구에서 사라져 버렸다. 2011년 3월에 발생한 쓰나미로 이 지역은 완전히 지도가 바뀌었다. 3일 동안 머물렀던 유코 씨 집도 승용차가 바닷물에 쓸려나갔고, 가족은 전기, 수도가 한동안 작동되지 않는 고통을 겪었다. 인근의 원자력 발전소에서 누출된 방사선의 피해를 제외하고도 이미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의 피해를 입은 것이다. 이후 한국 TV에서 이곳 뉴스를 볼 때마다 이 아름다운 곳에 대한 기억으로 항상 마음이 아팠다.
산가쿠의 유래와 현재
1639년 에도 바쿠후에 의하여 쇄국 정책이 시작되기 전에 일본에는 이미 유럽의 ‘유클리드 기하학’이 들어와 있었다. 유클리드 기하학은 모든 과학적 사고의 기본으로 여겨질 만큼 논리적인 학문이었다. 도덕성만 강조하던 유교나 불교의 지식을 벗어난 일본의 지식인들도 이 새로운 논리적 학문에 호기심을 가지고 깊게 빠져들었다.
그런데 쇄국 정책이 시작되자 상황이 바뀌었다. 더 이상 이 새로운 학문을 가르쳐 주는 외국인은 없었다. 이때부터 그들은 서양에서 받아들인 수학을 바탕으로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수학을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유럽과는 철저하게 차단된 상태에서 일본 지식인들은 독자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기하 문제를 만들고, 이 문제를 풀면서 지적인 만족감과 논리적 사고력의 한계를 시험했다.
지식인의 이 오락은 곧 바로 일반 대중 사이로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이를 나무 액자에 새겨 종교적인 목적으로 봉헌했다. 이후 교토에서 찾아 낸 산가쿠의 설명문에 따르면,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한 신에 대한 감사와 ‘풀 수 있으면 풀어 보라’라는 자신들의 능력 과시가 봉헌의 목적이었다. 또 현대에 만들어 봉헌한 산가쿠도 있었다. 여기에는 ‘이 문제를 풀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한다’라는 축문이 쓰여 있었다. 문제를 만들거나 풀면서 신에게 자신의 소원을 비는 관습이 있는 것이다. 마치 교회에서 헌금을 하듯 그들은 수학 문제를 신에게 바쳤다.
일본이 다시 서양에 문을 열면서 에도 시대는 끝나고 현대화가 급속하게 진행됐다. 그러면서 일본의 전통이 많이 사라져 갔다. 산가쿠도 같은 운명을 겪었다.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인들은 이 수학 문제를 잊어 버렸다. 신사나 절에 걸려 있던 산가쿠는 단순한 장식품 취급만 받았다. 때로는 이를 떼어 내어 불쏘시개나 건물의 보수 목재로 사용하기도 했다.
많았던 산가쿠의 대부분은 이런 식으로 파괴되고, 현재 남아있는 것은 900개 정도다. 다행히도 산가쿠가 사라지기 전에 일부나마 내용을 수집하고 책으로 만들어 수학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사람이 있었다. 후지타카겐으로, 1790년에 제1권, 1806년에는 제2권을 만들어 출판했다.
대중이 즐긴 훌륭한 수학 유산
프린스턴 위클리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미국 프린스턴대 물리학과 강사이자 퓰리처상 수상 후보인 로스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산가쿠는 예술의 대상이면서도 종교적 봉헌물로 제작된 대중의 수학 기록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는 유일한 창조물이다.”
이쯤에서 풀이까지는 아니더라도 산가쿠를 구체적으로 몇 문제 정도 들여다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산가쿠에 등장하는 문제는 주로 원에 접하는 도형에 관한 문제다. 이런 문제는 유클리드 기하학을 기본으로 하는 서양의 기하학에서는 매우 낯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