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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은 불과 열 걸음 정도 아래서 외쳤지만, 소년에겐 마치 땅 속 수백 미터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았다. 저 계단을 내려가면 다신 이 땅 위로 올라오지 못할 것처럼 두려웠다.
“찬이야, 뭐하니? 얼른 내려와!”
깊은 어둠 속 삼촌이 소리쳤다. 소년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희미하게 보였던 계단이 사라지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조심스레 발길을 한 걸음 아래로 옮겼다.
‘사각’
채 녹지 않은 눈의 차가움이 발바닥부터 전해졌다. 왈칵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날카로운 종이에 손이 베이거나 눈 앞에서 놓치는 버스처럼 불행은 일상의 틈을 파고든다. 대부분의 불행은 딱 그쯤에서 멈춘다. 그런데 가끔 아주 날카로운 불행이 모든 걸 깨뜨리는 일이 생긴다. 한달 동안 찬이와 가족에게 일어난 일이 바로 그랬다.
그날 따라 유독 자욱했던 아침 안개가 제일 먼저 찬이네 가족을 파고 들었다. 아빠가 출근길에 가벼운 접촉사고를 낸 것이다. 거기까진 괜찮았다. 하지만 이번 불행은 거기서 만족하지 못했다. 보험회사 직원은 안개 때문에 사고지점이 잘 안 보인다고 했다. 답답한 마음에 아빠는 차 밖으로 나가 기다렸다. 안개와 출근길, 두 가지 변수는 아빠뿐 아니라 도로 위 운전자 모두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뒤따라 오던 차량이 아빠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그대로 돌진해 버렸다. 오랜 시간의 수술이 이어졌지만 아빠는 끝내 찬이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아파트 대출, 보험금, 생활비를 걱정하는 친척들의 목소리가 아빠가 떠난 집을 채웠다. 엄마는 어떻게든 아빠와 만들어 놓은 가족의 모습을 지키려고 남아있는 힘을 쥐어 짰다. 걱정하는 목소리는 이내 잦아들었고 엄마의 힘겨움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삼촌이 나선 건 그때였다. 다들 찬이 가족의 불행에 대해 한 마디씩 거들 때 홀로 침묵을 지키던 삼촌이었다.
“찬이는 당분간 제가 데리고 있을게요.”
수수께끼 삼촌
찬이에게 삼촌은 수수께끼 같은 존재였다. 이름과 나이 말곤 어디에 사는지 무엇을 하는지 찬이는 삼촌에 대해 어느 것 하나 알지 못했다. 명절이 아니면 만날 일도 없었고, 아빠랑 엄마도 삼촌에 대해선 별 다른 말이 없었다. 다만 어린 시절, 가끔 찾아오던 삼촌을 항상 나무라던 아빠의 모습과 그때마다 유난히 지쳐 있던 삼촌의 얼굴은 찬이의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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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이가 기억하는 삼촌의 또 다른 모습도 ‘수수께끼’다. 가끔 만날 때마다 삼촌은 찬이에게 수수께끼를 냈다. 말장난에서 스도쿠까지 삼촌의 수수께끼는 다양했다. 삼촌은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절대 답을 알려주지 않았다. 찬이가 아무리 졸라도 소용없었다. 미처 풀지 못한 문제는 숙제로 남겨뒀다.
어느 해 설날 삼촌은 찬이에게 작은 책을 선물했다. 책은 삼촌이 직접 쓰고 그린 수수께끼로 가득했다. 찬이는 삼촌이 준 선물에 푹 빠졌다. 엄마 몰래 잠도 안 자고 수수께끼를 풀다 혼난 적도 여러 번이었다. 책에는 답이 없었기 때문에, 한 문제를 풀기 위해 며칠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처음엔 한치 앞도 안 보이던 수수께끼도, 자꾸 바라보니 길이 보였다.
그 해 여름이 끝나갈 무렵, 마침내 찬이는 책에 담긴 수수께끼를 모두 풀었다. 그때부터 정답을 확인해 줄 삼촌이 오는 추석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삼촌은 오지 않았다. 그 다음 설날에도 이어진 추석에도 삼촌은 오지 않았다. 삼촌을 기다리던 찬이에겐 컴퓨터가 생겼다. 삼촌의 수수께끼 책은 자연스레 찬이의 서랍 저 깊은 곳에 잠들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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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날 일은 언젠가 일어난다
“찬이야, 당분간 삼촌이랑 있을 수 있지?”
엄마에겐 찬이와 동생을 지킬 힘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고 그러려면 둘 모두를 데리고 있긴 힘들었다. 엄마는 그 시간 동안 찬이를 맡아 줄 사람이 삼촌뿐이란 걸 알았다. 찬이 가족에게 닥친 불행을 안타까워하는 사람은 넘쳐났지만, 그 불행을 함께 하겠다고 나선 사람은 삼촌이 유일했다. 엄마는 삼촌이 찬이를 맡아 주는 동안 동생과 함께 고향으로 내려가 가족이 살 터전을 마련하기로 했다.
결론이 나자 그 다음은 순식간에 이어졌다. 당장 그날 밤부터 찬이는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삼촌이 사는 곳은 찬이의 방보다 작다고 했다.
“꼭 필요한 것만 챙기렴. 나머지는 엄마가 꼭 갖고 있을게.”
엄마는 쉽사리 짐을 챙기지 못하는 찬이를 안심시켰다. 옷, 교과서같이 당장 필요한 것만 챙겼는데도 더 이상 가져갈 수 없는 양이 돼 버렸다.
어젯밤 찬이는 내일부터 누울 수 없는 침대에 누웠다. 특별히 믿는 신은 없었지만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왜 갑자기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겼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문득 오래 전 삼촌이 해 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찬이야, 머피의 법칙이라고 들어봤니?”
“아니, 그게 뭐야?”
“왜 양말을 신으려고 꺼내면 항상 짝이 안 맞고 주머니 속 이어폰은 항상 꼬여 있잖아. 그런 것처럼 안 좋은 일만 계속해서 생기는 걸 ‘머피의 법칙’이라고 해. 삼촌 친구 중엔 아이스크림을 먹다 이가 빠져 병원에 가던 길에, 떨어진 핸드폰을 줍다 빠진 이랑 핸드폰이 모두 하수구에 빠진 사람도 있어.”
“우와, 그 사람 진짜 불쌍하다.”
“꼭 그렇게 만은 볼 순 없어. 그건 그냥 확률에 불과해. 삼촌은 일어날 일은 언젠가 일어난다고 생각해. 단지 그게 언젠지 아무도 모를 뿐이지.”
“피, 그게 무슨 말이야.”
안개 낀 날 가벼운 접촉사고가 났는데 보험회사 직원이 사고지점을 못 찾아 기다림에 지친 운전자가 차문 밖으로 나갈 확률은 얼마나 될까? 조건에 조건이 붙으면 확률은 점점 떨어진다. 누구도 이런 일이 자기 가족에게 일어날 거라곤 쉽게 상상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아무리 확률 낮은 사건이라도 수 많은 경우에서 한번쯤은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확률은 무섭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라는 변명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그 동안 운이 좋았을 뿐이다. 하지만 어린 찬이가 확률의 무서움을 받아 들이기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도 그날 밤 찬이의 귓가엔 ‘일어날 일은 언젠가 일어난다’는 삼촌의 말만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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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이분의 일층
삼촌은 들썩거리는 찬이를 한 동안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아니면 그냥 가서 안아 줘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오늘 저녁 찬이를 데려가는 길에는, 그냥 없었던 일로 할까 하는 생각마저 했다. 하지만 찬이의 빈 서랍에 속에 남겨진 ‘수수께끼 책’이 흔들리던 마음을 다잡아 줬다. 오래 전 찬이에게 한 약속이 떠올랐다.
“다음 설날엔 삼촌이랑 같이 풀어 보자.”
큰 약속을 지킨다며 가족을 힘들게 한 자신이 정작 조카와 쌓은 작은 믿음조차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이 너무 부끄러웠다. 수수께끼 책을 챙겨 자신의 코트 안쪽에 넣었다.
삼촌은 두 손에 든 찬이의 가방을 내려놓고 ‘수수께끼 책’을 찾아 꺼냈다. 터벅터벅 계단을 올라가 아직도 울음이 멈추지 않은 찬이 곁에 섰다.
“찬이야, 삼촌이랑 내려가서 수수께끼 풀까?”
찬이는 힐끔 책을 쳐다봤다. ‘이런 분위기에 수수께끼라니.’ 갑자기 헛웃음이 나왔다. 들썩이던 등도 조금은 진정됐다. 삼촌이 꽁꽁 얼어버린 찬이의 손을 꼭 잡았다.
“자 이제부터, 하나씩 세면서 내려가는 거다. 자 하나!”
“스물 아홉!”을 마지막으로 계단은 끝났다. 삼촌과 찬이는 거대한 유리문 앞에 섰다. ‘용문지하상가’라는 글씨가 문에 들어왔다. 삼촌이 조심스레 유리문을 열었다. ‘휘이잉’ 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지하상가의 온기가 느껴졌다.
“자…, 여기서 이쪽으로.” 지하상가에 들어가서도 삼촌의 방까지는 한참이나 걸어가야 했다. 스쳐 지나며 힐끗 본 게 다였지만, 지하상가는 생각보다 넓고 사람도 많았다.
“어때, 위에서 봤던 거랑 많이 다르지? 땅 위 사람들은 땅 아래 이런 세상이 있다는 걸 잘 모르지. 자 이제 다 왔다.”
삼촌은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고 쓰인 철문을 힘껏 열었다. 방금까지와는 또 다른 풍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지하상가가 시장이라면 여긴 공원 같았다. 쉽게 상상은 안 가겠지만, 찬이 눈에 보인 녹색과 꽃의 풍경은 분명 땅 위의 어떤 공원에도 뒤지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한 겨울. 땅 위 공원엔 얼어버린 땅과 앙상한 나무만이 가득했지만 이곳엔 푸르름과 꽃 향기가 가득했다.
“오…, 이 아이가 자네 조카인가?”
“네, 아저씨 오늘은 일찍 들어오셨네요. 찬이야 인사 드리렴.”
찬이 앞에 희끗한 머리가 조금 벗겨진 남성이 서있었다. 안경 사이에 비친 눈빛이 날카롭고 앙 다문 입술이 굳세 보였다. 할아버지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그렇다고 아저씨라고 하기엔 나이가 있어 보였다.
“안…, 안녕하세요.”
“오…,그래…, 난 오 선생이다. 원래 이름은 따로 있지만 여기선 다 오 선생으로 부른단다. 삼촌이 아직 여기 소개는 안 해줬지?”
“아저씨도 참… 그건 천천히 하면 되죠. 자, 찬이야 여기로….”
삼촌을 막아서고 오 선생이 말을 이어 갔다.
“아니 아니지…, 여기가 어딘지부터 알아야지. 찬이야. 여긴 지하 이분의 일층이란다.”
찬이는 주위를 천천히 둘러봤다. 공간의 크기는 교실보다 조금 큰 정도였다 중앙에는 방금 자신의 시선을 사로잡은 정원이 있었고 벽면엔 이끼가 가득했다. 왼쪽 구석에는 보일러가 씩씩 끓고 있었고 오른편엔 쇼파와 TV, 냉장고가 갖춰진 나름 ‘거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그런데 여긴 아무나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란다. 시험을 통과해야만 이 곳의 주민이 될 수 있단다. 삼촌에게 들으니 너가 수수께끼를 꽤나 잘 푼다지? 자, 그럼…. 특별히 너에겐 수수께끼를 내도록 하겠다. 잠시만 기다리렴.”
오선생은 말을 끝마치기가 무섭게 맞은 편 벽으로 다가갔다. 놀랍게도 그 벽은 그냥 벽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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