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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역사를 바꾼 가장 위대한 전쟁 명량

매스미디어


 
임진왜란 6년, 누명을 쓰고 파면됐던 이순신 장군은 일본군에 의해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다. 하지만 그에게 남은 건 전의를 잃은 병사와 두려움에 가득찬 백성, 그리고 12척의 배뿐이다. 이때 일본군은 해적 가문 출신인 구루지마 미치후사를 앞세워 330척의 배를 이끌고 조선의 수도 한양으로 진격하기 위해 명량★에 집결한다. 이순신 장군은 압도적인 수적 열세를 어떻게 극복했을까?

일본군함은 330척이 아니라고?!


<;명량>;은 1597년 음력 9월 16일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이 명량에서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일본군을 무찌른 명량해전을 그린 영화다. 만약 명량해전에서 조선군이 패배했다면 일제강점기가 300여 년은 앞당겨졌을 수도 있다는 의견이 있을 정도로 조선의 역사를 바꾼 위대한 전쟁으로 손꼽힌다.

영화에서 특히 주목할 장면은 이순신 장군이 단 12척의 배로 330척을 보유한 일본 수군을 무찌르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 장면은 이순신 장군이 직접 쓴 일기인 <;난중일기>;의 기록과는 다르다. <;난중일기>;에는 일본군함이 330척이 아니라 130여 척이라고 소개돼 있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사실 영화가 틀렸다고 나무랄 수만은 없다. 130여 척, 330여 척 모두 역사적 기록물에서 나온 수치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의 친필본인 <;난중일기>;에는 일본 수군의 배가 130여 척이라고 소개돼 있지만, 이순신 장군의 조카가 쓴 <;행록>;에는 133척이라고 기록돼 있다. 또한 1785년 윤행임이 정조의 명령에 의해 편찬한 이순신 장군의 전집인 <;이충무공전서>;의 <;난중일기>;에는 330여 척이라고 소개돼 있다. 이보다 앞서 명량해전의 승리를 기념해 세운 ‘명량대첩비’에는 일본군함의 수가 500여 척이라고 적혀 있기도 하다.

이런 차이에 대해서는 이순신 장군의 각종 기록들이 후세에 정리되면서 일본군함의 규모가 다소 부풀려졌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있다. 또 일본군함의 총 규모는 333척이었는데, 이 중 133척만이 전면에 나섰다는 설도 있다.

*명량(울돌목) 오늘날의 전라남도 해남군 화원 반도와 진도 사이에 있는 해협.

전격 비교 명량 VS 난중일기

◎ 명량해전 출격 직전 거북선이 불탔다?!

<;명량>;에서 이순신 장군을 연기한 최민식 씨의 연기가 가장 돋보이는 장면 중 하나는 거북선을 잃고 울부짖는 모습이다. 그런데 이는 실제 역사에서는 없는 장면이다. 배설이 배신한 것은 맞지만, 당시에는 남아 있는 거북선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거북선을 불태울 수 없었다.
또한 배설은 명량해전을 앞두고 안위에게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임진왜란이 끝나고 1년 뒤 권율 장군에게 처형당했다.

◎ 임준영은 죽지 않았다?!
임준영은 영화처럼 죽지 않고 탐방꾼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끈다.

◎ 구루지마는 일본함대 지휘석에서 죽었다?!
영화에서는 화살에 맞은 구루지마가 이순신 장군의 손에 처참하게 살해된다. 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일본함대 지휘석에서 조선군의 화살을 맞아 죽음을 맞이한다.

◎ 백병전은 대장선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백병전은 적군의 배에 올라타서 창이나 칼로 싸우는 전투를 말한다. 영화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탄 배에서 백병전이 일어나는데, 사실은 안위 장군의 배에서 백병전이 펼쳐졌다.

이순신 장군의 최종병기는 판옥선!

이순신 장군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거북선이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의 주력 군함은 판옥선이었다. 판옥선은 일본 수군의 ‘안택선’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안택선은 2층 구조로 되어 있는 군함으로, 1층 구조의 기존의 전투선으로서는 상대하기가 버거웠다. 그래서 판옥선은 3층 구조로 만들었다. 판옥선의 1층 갑판은 전투와 상관없이 군사들이 안전하게 노를 저을 수 있는 공간으로 마련됐다. 2층은 적을 내려다보면서 전투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고, 1층 아래에는 병사들이 휴식할 수 있는 선실이 있었다.

이처럼 판옥선과 안택선은 그 층의 규모는 달랐지만, 기본적으로는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안택선에는 선실만 없을 뿐 1, 2층의 쓰임은 같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판옥선이 임진왜란 해전에서 백전백승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첫째, 판옥선은 360° 회전이 가능한 ‘평저선’이다. 평저선은 배 바닥이 평평한 배를 일컫는다. 이럴 경우 선체의 저항이 커서 속도가 느리고 파도를 헤쳐 나가는 능력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수심이 얕고 밀물과 썰물의 변화가 심한 서해안과 남해안에서는 평저선이 큰 힘을 발휘한다. 썰물에도 균형 잡기가 쉽고, 평평한 바닥을 이용해 제자리에서 360° 회전이 가능할 정도로 방향 전환도 쉬워 전투 상황에 맞게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의 안택선은 배의 바닥이 뾰족한 ‘첨저선’과 평저선의 중간 형태였다. 첨저선은 배의 속도는 빠르지만, 수심이 얕은 곳에서는 균형 잡기와 방향 전환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이런 이유로 명량해전에서는 판옥선이 더 유리했다.

둘째, 판옥선은 소나무로 만들어 튼튼하다. <;명량>;에서 이순신 장군은 마지막 전술로 ‘충파’를 사용한다. 충파는 배를 부딪쳐 적군의 배를 공격하는 전술이다. 그런데 이 장면을 보면 거의 같은 크기의 배를 들이박는데, 판옥선은 멀쩡하고 일본군함인 안택선과 세끼부네는 산산이 부서진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배를 만드는 주재료에 있다. 일본군함인 안택선과 세끼부네는 배를 정교하게 만들기 위해 가공하기 쉬운 삼나무나 전나무를 사용했다. 사실 안택선은 일본 전국시대 봉건영주들이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크고 멋지게 만든 배일뿐 전투를 위해 튼튼하게 만든 배가 아니었다. 하지만 판옥선은 삼나무나 전나무에 비해 강도가 센 소나무를 이용했다. 실제로 소나무의 굴곡강도는 526~977kg/㎠에 달해 일본의 삼나무보다 1.36~1.75배 더 튼튼하다.

셋째, 판옥선에서는 화포를 쏠 수 있다. 조선군은 활과 화약 무기 같은 원거리 무기 사용에는 능숙했지만, 칼과 창 같은 단거리 무기 사용에는 서툴렀다. 따라서 조선군이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어 나가려면 배 안에서 화포를 쏠 수 있어야 했다. 판옥선은 소나무로 튼튼하게 만들어 배에서 화포를 쏴도 끄떡없었다. 하지만 일본군함인 안택선과 세키부네는 화포를 쏠 때의 충격을 이길 만큼 튼튼하지 않았다.
 

명량해전 당시 울돌목 조류의 비밀을 풀다!

명량해전을 승리를 이끌 수 있었던 비결 중 또 하나는 이순신 장군이 울돌목의 거센 조류를 잘 활용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시 울돌목의 조류는 어땠을까?

지난 2010년 국립해양연구소는 명량해전 당시 울돌목의 조류를 재현해냈다. 연구팀은 진도 울돌목에서 2009년 11월부터 6개월 간 수평 초음파 유속계를 사용해 바닷물의 속도를 관측했다. 그리고 관측 결과를 토대로 ‘조화분해법’을 이용해 400여 년 전 조류를 예측했다.

여기서 조화분해법이란, 관측된 밀물과 썰물로부터 진폭과 지각을 구해 특정 시간의 조류를 예측하는 수학적인 방법이다. 이때 진폭은 밀물과 썰물 때의 수위 차의 12이다. 또한 지각은 밀물과 썰물을 일으키는 천체가 그 지역의 자오선을 통과한 후, 해수면이 가장 높아질 때까지의 시간을 각도로 표시한 것을 말한다.

국립해양연구소의 조류 예측 결과와 난중일기 토대로 밝혀진 당시 교전 상황을 결합하면, 당시 울돌목에서 일어났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재현할 수 있다.
 

1597년 음력 9월 16일 오전 6시 30분 경 바닷물은 썰물에서 북서방향으로 흐르는 밀물로 바뀌었다. 이 밀물을 타고 일본함대는 전남 해남의 어란진을 출발해 울돌목으로 진격해 오고 있었다. 이때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은 전투 준비를 마치고 우수영 앞바다로 출전했다.
11시 경, 드디어 조선군과 일본군이 맞닥뜨렸다. 당시 조류의 흐름은 일본군의 진격 방향과 일치해 조선군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또한 이순신 장군의 대장선을 제외한 나머지 장수들이 이끄는 배는 일본군의 수에 겁을 먹고 500~800m 떨어진 곳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투가 시작되고 이순신 장군이 선봉에 서서 맹활약을 펼치자 조선군의 사기가 급속도로 올랐고, 전투 시작 1시간 30분만에 뒤에 있던 군함들이 전투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물의 흐름도 남동 방향의 썰물로 바뀌어 조선군에게 유리했다.
반면 일본군함은 역류에 갇혀 어려움을 겪었다. 일본군함은 배의 방향을 바꾸려고 여러 차례 노력했지만, 울돌목은 수심이 얕고 실제 배가 향할 수 있는 폭도 좁아, 균형을 잡는 것마저 쉽지 않았다. 또 크고 작은 암초가 거센 물살에 부딪히면서 소용돌이가 생겼는데, 여기에 휘말려 애를 먹었다.
이에 유리한 해류를 탄 조선군은 오후 1시 경 화포를 쏘고 충파 전술을 쓰는 등 총공세를 퍼부었다. 그러자 일본 진영은 군선이 많은 것이 오히려 독이 되어 자기편 군선끼리 서로 부딪히기 시작했다. 이런 혼란 속에서 전투의 총사령관인 도도 다카토라가 부상을 당했고, 군감인 모리 다카마사는 물에 빠졌다가 구조되었다. 결국 일본군은 선봉장이던 구루시마 미치후사가 죽고, 군함 30여 척이 물속에 가라 앉아 최소 1800여 명의 전사가 나자 2시경 항복했다.
조선군과 일본군은 약 4시간 가량 대치하다가 6시 56분 썰물에서 밀물로 물의 흐름이 바뀌자 일본군은 밀물을 타고 퇴각했다.

이순신 장군의 필승 전술, 일자진과 학익진

명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쓴 첫 번째 전술은 일자진이었다. 조선군은 백병전에 서툴렀기 때문에, 배를 일렬로 세우는 일자진 진형을 이룬 뒤 먼 거리에서 일본군함을 향해 화포를 쐈다. 하지만 머지않아 일본군함이 조선군함의 코앞까지 밀고 들어왔다. 일본군은 어떻게 해서든지 백병전을 벌여야 승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순신 장군은 한산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던 학익진 전술을 구사한다.

영화에서는 일자진 전술만 소개했지만 <;난중일기>;를 보면 학익진 전술을 구사한 것을 알 수 있다. 학익진은 학이 날개를 편 모양과 같은 모습으로 진형을 이루는 것을 일컫는다. 이순신 장군은 이 전술을 명량해전보다 앞서 있었던 한산도 전투에서 사용해 큰 승리를 거둔 바 있다. 하지만 명량해전에서 학익진 전술을 그대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일본군함에 비해 조선군함의 수가 턱없이 적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은 ‘날개를 접은 학익진’ 전술을 사용하기로 한다. 조선군함 모두가 옹기종기 모여 원형으로 진형을 이루면 일본군함이 조선군함을 원 모양으로 에워싸도록 만든 것이다. 이는 마치 학이 날개를 접은 모양과 같았다.

이순신 장군은 조선군함의 대형을 원 모양으로 유지한 채 수시로 여러 방향으로 움직여 일본군함을 혼돈에 빠뜨렸다. 일본군함은 물살이 거세 균형 잡기도 쉽지 않은 상태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조선군함을 따라가다가 자기편끼리 부딪히고 말았다. 조선군은 이를 기회로 삼아 일본군을 향해 화포로 무차별 공격을 했고 결국 승리했다.
 

이순신 장군이 쓴 날개 접은 학익진이 가능했던 이유에는 수학이 있다. 원래 화포를 쏘기 위해서는 적선이 사정거리 안에 있어야 한다. 따라서 화포를 쏠 때는 정확하게는 아니더라도 대략적인 거리를 계산한 뒤 화포를 쏜다. 즉, 계속해서 배를 움직이면서 화포를 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날개 접은 학익진의 경우에는 조선군과 일본군의 형세가 원의 방정식을 따르기 때문에 군함을 움직이면서도 화포를 쏠 수 있었다.

왜 그런지 자세히 살펴보자. 조선의 수군을 원의 중심이라고 하고, 일본 군함 중 가장 바깥쪽에 있는 군함을 이어 원주라고 하자. 그러면 조선군과 일본군의 형세를 원의 방정식으로 나타낼 수가 있다. 즉 조선군의 위치인 원의 중심을 (a, b), 반지름을 r이라고 하면 원의 방정식은 (x-a)²+(y-b)²=r²이 된다. 그런데 원의 방정식에서는 중심의 위치가 바뀌어도 반지름은 변하지 않는다. 즉 조선군함이 어떻게 움직여도 일본군함이 사정거리 안에 있기 때문에 화포를 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순신 장군이 이런 수학적인 원리를 알고 전술을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당시에는 군함마다 ‘도훈도’라는 말단 관리가 타서 뱃길이나 군사 물품 수 등을 계산했다. 한서대 수학과 이광연 교수는 “당시 도훈도는 산학자였다”면서, “화포를 쏘기 위해 사정거리를 계산하고 전투에 필요한 계산을 도훈도가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에서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비결에는 수학과 과학의 원리가 녹아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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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9월 수학동아 정보

  • 조가현 기자
  • 도움

    이광연 교수
  • 사진

    CJ엔터테인먼트
  • 기타

    국립해양조사원 변도성 박사의 <조화분해법을 이용한 19세기 이전 고조석 및 고조류 추산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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