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여름은 햇빛 하나만으로도 모든 것을 압도한다. 아침부터 돌로 만든 도로가 훅 달아올라 피부깊숙한 곳까지 파고들 것 같지만, 유난히 반가운 날도 있기 마련이다. 테르미니 역 근처에서 햇빛이 만드는 달력을 볼 수 있는 행운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 고대의 달력, 파스티
성당의 달력은 정오가 되어야 볼 수 있기 때문에 우선 근처 작은 마르시모 궁전 국립박물관에 들렀다.이 박물관은 지금의 테르미니역까지 차지했다는 넓디넓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욕장을 발굴하면서 나온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이 중 눈에 띄는 것이 고대 로마의 달력,‘파스티’다. 오래돼 너덜너덜 떨어져나간 달력은 율리우스력이 시행되기 이전의 것과 이후의 것이 동시에 전시돼 있는데, 당시에는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공공장소에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고대 로마에서는 양력과 음력을 동시에 활용해 달력을 만들고, 거기에 종교에 관련된 날짜를 적었다.그래서 조금은 복잡해 보이기도 했다. 어디 아는 내용이 있는지 눈을 크게 뜨고 봤더니, 반갑게도 알파벳 A부터 H까지 계속 반복되는 것과, 맨 아래에 로마 숫자가 보인다.
맨 오른쪽에는 27이 적혀 있는데, 2월과 3월 사이에 적당한 날짜를 끼워 넣던 윤달이라고 한다. 이 수들을 모두 더해 봤더니 365가 훌쩍 넘는다. 어떻게 된 일일까? 당시 로마의 1년은 윤달을 넣는 2월에 속한 날짜에 따라 355일부터 길게는 378일이 되기도 했다. 날짜와 달력에 관한 일은 제사장이 맡았는데, 개인의 이해관계에 따라 1년의 길이가 정해지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 1년의 길이가 들쑥날쑥 일정하지 않으니 달력이 무용지물이었다. 로마의 왕으로 등극한 율리우스가 달력을 개혁한 이유가 이해된다. 그는 1년을 365일로 하고, 4년마다 1일을 추가한 윤년을 시행하는 율리우스력을 발표했다. 곧바로 수정된 파스티를 곳곳에 공표해 새로운 달력에 따라 생활하도록 했다고 한다. 기원전 48년의 일이다.
율리우스력에서 그레고리력으로
율리우스력의 1년은 365.25일이다. 실제 태양의 1년보다 조금 긴 값이다. 물론 당시에도 1년이 정확하게 365.25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너무 작은 오차라 무시해도 큰 문제가 없으리라 판단했는지 달력에는 반영하지 않았다. 하지만 1600년 정도 시간이 흐르자 무시했던 사소한 차이가 종교계에서 큰 문제를 일으켰다. 바로 부활절 날짜다.
부활절은 기독교에서 중요한 행사 중 하나로, 예수님 부활을 기리는 날이다. 부활절은 춘분이 지난 보름달 이후 첫 번째 일요일로 정한다. 즉 부활절 날짜는 태양과 달의 움직임을 함께 고려해 정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먼저 춘분의 날짜가 정확해야 한다.
달력에 따르면 춘분은 3월 21일경이다. 이제 춘분날부터 달을 관찰해 보름달이 지난 첫 일요일을 부활절로 정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1년을 365.25일로 계산하면 128년에 1일 정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이런 율리우스의 오차 때문에 16세기에 이르러 급기야 10일 정도나 차이가 나게 됐다. 달력의 날짜들이 실제 지구의 움직임보다 10일 정도 느려진 것이다. 그 차이를 일반인들도 알아차릴 수 있을정도가 되자 로마 교황청에서는 달력 개혁을 시도했다.
1572년 그레고리우스 13세가 교황으로 즉위하면서 달력 개혁은 속도를 낸다. 달력 위원회의 보고서를토대로 그레고리우스 13세는 1582년 2월 24일에 새로운 달력인 그레고리력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1582년 10월 로마의 달력에는 10일이 없어졌다. 이 발표와 함께 유럽을 중심으로 차차 그레고리력이 시행됐고, 세계적으로 채택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부활절 날짜는 3월 22일과 4월 25일 사이의 보름달후 첫 번째 일요일이라는 것도 함께 공표됐다.
자오선을 가로지르는 햇빛
이제 그레고리력을 믿어도 되는 것일까? 1700년에 교황에 오른 클레멘트 11세는 그레고리력이 믿을 만한지 확인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교회 안에 부활절 날짜를 결정할 수 있는 일종의 천문대를 만들었다. 몇 년간의 측정과 계산을 거쳐 1703년 천문대가 완성됐고, 여기서 만들어진 달력이 산타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에 있다.
이 성당은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기대했던 곳이다. 이유는 바로 바닥에 그려진 45m 길이의 직선 모양의 달력 때문이다. 직선은 성당을 지나는 자오선(남극과 북극을 잇는 대원)의 일부로, 선의 한쪽에는37부터 220까지, 또 다른 쪽에는 20부터 65까지 자연수가 쓰여 있다. 해의 움직임을 이용한 그림 달력이자 해가 남중하는 시각을 알리는 해시계 역할도 하는 선으로, 벽에 뚫린 작은 구멍으로 들어오는 빛이 비추는 곳에 쓰인 숫자를 보면 날짜를 알 수 있는 장치다.
햇빛이 들어오는 구멍은 어디 있을까? 성당에 들어서자마자 벽을 살펴보니 아치 모양에 흠집이 나 있는 곳으로 햇빛이 들어오는 작은 구멍이 눈에 들어온다. 그 높이는 무려 20.35m다.
성당에 간 날짜는 8월 1일 오후 1시 경. 햇빛이 자오선 근처에 떨어졌다. 하지가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햇빛이 바닥에 비친 모양은 거의 원에 가까웠다. 지켜보는 동안 바닥에 비춘 빛은 차츰 자오선 쪽으로 이동했다.
1시 15분을 살짝 넘기자 햇빛은 자오선을 표시한 금속 띠 위를 반대편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 빛은숫자 45와 24를 비췄다.
해를 이용한 달력 만들기
자오선을 그리는 일은 간단하다. 막대를 땅과 수직이 되도록 꽂은 다음, 정오를 피한 적당한 시각에 그림자의 끝을 표시하고 원을 그린다. 하루에 이 원 위에 그림자의 끝이 오는 시각은 두 번뿐이므로,그 때를 기다려 한 번 더 그림자를 잰다.
오른쪽 그림과 같이 ∠AOB의 이등분선을 그린 것이 자오선이다. 이 때 그림자의 끝을 정확하게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막대 끝에 작은 구멍을 뚫어 그 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빛의 위치를 확인하면 오차를 줄일 수 있다. 매일 12시가 되면 자오선 위로 막대의 그림자가 생긴다.
그렇다면 자오선 옆에 쓰인 숫자는 어떤 의미일까? 지구는 공전궤도면과 약 23.5°기울어져 공전하므로 태양의 고도는 매일 달라진다. 북반구를 기준으로 여름에는 태양의 고도가 높아 그림자의 길이가 짧고, 겨울에는 반대로 태양의 고도가 낮아져 그림자의 길이가 길어진다.
성당의 벽에 작은 구멍을 뚫어 해시계가 12시를 가리킬 때 그 점을 표시한다. 이 점은 자오선 위에 있으며 그 위치는 매일 달라진다. 로마의 산타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은 위도 41.54°, 동경 12.129°에 있다. 이 위치에서 해의 남중 고도가 하지에는 71.3°, 동지에는 24.4°다. 자오선 위에 쓴 숫자 24는 남중고도이고, 45는 해의 남중고도에 따른 탄젠트 값이었다.
탄젠트를 이용한 달력 만들기
자오선의 숫자는 θ = 90°-(남중고도)일때, tanθ의 값에 100을 곱해 정수로 만든 값이다.
① 1년 중 해가 가장 높이 뜨는 하지일 때 100×tan(90°-71.3°)≒34
② 1년 중 해가 가장 낮게 뜨는 동지일 때 100×tan(90°-24.4°)≒220
따라서 성당 바닥의 자오선에는 34부터 220까지 숫자가 기록돼 있다. θ의 값은 20부터 65까지, 다른한 쪽에는 tanθ값이 34부터 220까지 자연수로 쓰여 있는 것이다. 이 숫자를 이용해 성당 게시판에 있는 표를 읽으면 날짜를 알 수 있다.
성 베드로 광장의 자오선
작은 구멍으로 들어오는 햇빛만으로 달력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새롭다. 막대와 햇빛만 있다면 가능한 일이니, 또 다른 자오선이 어딘가에 그어져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로마의 광장에는 *오벨리스크들이 서 있는 경우가 많다. 혹시나 바닥에 자오선이나 시각을 표시하는 돌이라도 놓여 있지 않을까하는 마음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성 베드로 성당의 쿠폴라에 올라 주위를 살피니 로마 시내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런데 여기서 뜻밖의 자오선을 발견했다. 가까이 보기 위해 쿠폴라에서 내려와 바닥을 찾아보니, 7개의 하얀색 원이 직선 위에 드문드문 놓여 있다.
이 직선도 자오선이구나! 광장 한가운데에 서 있는 오벨리스크의 그림자를 기준으로 만든 이 자오선은 분수대를 관통해 그 길이가 꽤 길다. 자오선 위에 41m의 오벨리스크의 그림자가 오는 시각이 바로해시계로 12시다. 직선을 따라 원을 하나씩 살펴보니, 원 안에 날짜가 쓰여 있다. 원 위에 오벨리크스의 그림자 끝이 떨어지는 곳이 날짜인 것이다.
오벨리스크에서 가장 가까운 원에는 하지인 6월 22일, 가장 먼 원에는 동지인 12월 22일,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원 안에는 각각 2개의 날짜가 적혀 있다. 간단한 달력인 셈이다. 이런 자오선은 로마의 산타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이나 성 베드로 광장 외에도 유럽 각 지역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여행할 기회가 생긴다면 또 다른 자오선을 찾아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지 않을까.
*오벨리스크
고대 이집트 왕조 때 태양신앙의 상징으로 세워진 기념비로, 대부분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 다른나라에게 약탈당해 옮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