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수학 사교육은 대학입학시험 문제가 학교 교육과정을 벗어난 데다 학부모가 자녀 교육을 과도하게 사교육에 의존하면서 강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최근 조사에서 공교육도 사교육을 부추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수학사교육포럼*’은 민주당 김춘진 국회의원실과 함께 학교의 수학 시험과 수업(교과 운영)이 선행학습과 사교육을 유발하는지를 조사했다. 즉 서울·경기 지역 사교육 과열지구인 강남, 목동, 중계동, 안양·평촌, 성남·분당, 고양·일산의 18개 중학교와 26개 자율형 사립고(자사고)의 2011학년도 1학기 수학 기말고사 시험지를 입수해 분석했다.
이 조사와 분석에는 수학사교육포럼과 전국수학교사모임, 좋은교사운동에 소속된 현직 수학교사 10여명이 참여했다. 사교육 과열지구에서 18개 중학교를 선택해 조사하게 된 계기는 이곳의 수학 시험 문제가 지나치게 어렵게 출제된다는 제보를 받아서다. 자사고도 최근 교육과정의 자율화 폭이 넓어지면서 경쟁적으로 수학과의 교육과정을 빠르게 마치는 속진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는 제보를 받아 조사했다.
조사 결과 각 학교의 수학 시험과 수업이 선행학습형 사교육을 유발하는 심각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나눠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중학교 50%에서 중1 시험에 고교 문제 출제
조사 대상 18개 중학교 수학 시험 문제를 분석한 결과 크게 두가지 문제점이 발견됐다. 하나는 정상적인 수학 교육과정을 뛰어넘는 문제가 출제되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난이도가‘상’ 수준인문제가 과도하게 많다는 사실이다.
18개 중학교 중 14개 중학교(77.7%)에서 중학교 해당 학년의 교육과정을 뛰어넘는 문제를 출제한 것으로 조사됐다. 많은 학교에서 중학교 교육과정을 벗어나 고1~2 수준의 문제를 출제하고 있었다.
경기 J중학교 3학년 시험지에서는 이런 문제가 71%나 발견됐으며, 심지어 중1 시험에 고교 교육과정의 문제를 출제한 학교도 9곳이나 있었다.
정상적인 수학 교육과정을 뛰어넘는 문제는 예를 들어 중학교 1학년에게 2학년이나 3학년 내용을 알아야 풀 수 있는 문제다. 이런 문제는 해당 학년의 수학 개념만 학습한 학생이 풀기 어렵거나 풀더라도 많은 시간을 써야 겨우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선행학습을 한 학생은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이런이유로 선행학습을 하면 유리하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심어줘 선행학습형 사교육을 유발한다고 볼 수 있다.
전체 54개 수학 시험지(18개 중학교×3개 학년)를 조사하자 난이도‘상’수준의 심화문제를 절반 이상 출제한 시험지도 27개(50%)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나 중학교 수학시험의 선행학습형 사교육 유발 실태가 매우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서울 H중학교 3학년과 경기 Q중학교 2학년은 난이도가 상인 심화문제의 비율이 각각 86%, 96%일 정도로 지나치게 높았다.
난이도가‘상’인 심화문제가 출제되더라도 난이도가 상중하 수준의 문제가 골고루 출제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난이도가 높은 심화문제가 너무 많이 출제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럴 경우 정해진 시험 시간 안에 문제를 풀 수 없어 좋은 점수를 받기 어렵다. 이 때문에 학생들은 사교육으로미리 대비하거나 난이도가 높은 문제 유형을 집중적으로 반복 훈련해야 한다. 즉 사교육을 유발하는 셈이다.
◯◯중학교 3학년 기말고사 21번 문제
x1, x2, …, xn의 평균이 m이고 a, b가 상수일 때, (x1-a)/b, (x2-a)/b, …, (xn-a)/b의 평균을 구하면?
① (m-a)/b ② abm ③ (a-bm)/a ④ a+b ⑤ am-b
학교 수학시험 문제가 어떻게 선행학습형 사교육을 유발하는지 파악하기 위해 한 중학교 3학년의 시험 문제를 살펴보자. 이 문제는 고2 ‘미적분과 통계 기초’ 과정에서 배우는 평균의 성질 ‘E(aX+b)= aE(X)+b’임을 이용하면 쉽게 풀 수 있다. 하지만 중3 과정까지의 교과과정으로 풀려면 상당히 복잡한 계산이 필요하다. 더욱이 상 수준의 난이도 문제가 절반에 가까운 시험에서 이 문제를 복잡한 계산으로 풀면 다른 문제를 풀 시간이 그만큼 부족해진다.
특히 이 문제는 아래첨자를 쓰는 기호‘xn’으로 학생들의 기를 죽인다. 이 기호는 고등학교 2학년‘수학Ⅰ’의 수열 단원에서 처음 나온다. 인지발달 수준 이상의 기호나 문자는 외국어보다 내용을 어렵게 받아들이게 한다. 현재 교육과정으로 보면 중학교 3학년 통계 단원의 학습목표는‘중앙값, 최빈값, 평균의 의미를 이해하고, 이를 구할 수 있다’이다. 학교 시험은 교육목표를 적합하게 달성할 수있도록 돕거나 평가하는 수단이어야 하는데, 예시로 든 문제는 교육목표의 달성을 알아보기에는 지나치게 어려운 문제로 볼 수 있다.
자사고 52%가 1학년 수학을 1학기에 마쳐
자사고 수학 시험에서도 크게 두 가지 문제점이 발견됐다. 하나는 고등학교 1학년‘수학’교과과정을절반인 1학기에 마치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학교 2학년에서 개설된 교과목과 다른 교과목의 내용이 시험 문제로 출제되는 현상이 발견됐다는 사실이다.
고등학교 1학년 수학 교과과정을 절반인 1학기에 마친 학교는 자사고 27개 과정(25개 학교 중 고1부터 계열을 나눈 경우를 추가) 중에서 무려 14개(52%)였다. 이 비율은 일반고 22개에서 전혀 나타나지않은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일반고 22개는 자사고와 비교하기 위해 임의로 선정해 추가로 조사했다.
이런 교육과정 운영이 불법은 아니다. 하지만 1년 동안 배울 과목을 절반인 한 학기에 마칠 경우 선행학습으로 미리 대비하지 않은 학생들에게 많은 학습 분량은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온다. 중학교까지혼자서 학교 공부를 정상적으로 소화한 학생이라도 자사고에 가는 순간부터 혼자 극복하기 어려운 환경에 처해 선행학습형 사교육 시장으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학생들은 자사고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선행학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심지어 일부 자사고는 빠른 진도를 이유로 들며 학생들에게 입학 전에 선행학습을 하고 올 것을 권유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개설 교과목은 수학Ⅰ인데 시험은 수학Ⅱ에서 나오는 것처럼 고등학교 2학년에 개설된 교과목과 다른교과목의 내용이 시험 문제로 출제된 학교는 조사대상 13곳(서울 12개, 경기 1개) 중 8곳(62%)이나 됐다. 이들 대부분은 시험 문제가 교육과정에 편성된 교과목보다 상위 교과목에서 출제된 것으로 조사됐다. 고교 교과목 순서는 따로 정해진 것은 없지만 여기서는 상식적으로 운영되는 관례에 따라 판단했다. 어떤 자사고는 수학Ⅰ을 개설하고선‘수학Ⅰ’과‘수학Ⅱ’의 전체내용을, 심지어‘기하와 벡터’에서 4/5정도를 시험 문제로 출제하기도 했다.
이 중에서 2학년 1학기에 수학을 2과목이나 개설한 자사고도 8개로 나타났다. 한 학기에 2과목이 개설된다면 두 학기에는 4과목, 즉 1년 동안 수학을 4과목이나 배워야 한다. 이럴 경우 1학년 때보다 훨씬 센 강도로 수학을 공부해야 한다. 학생들이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수학적인 사고를 막는 선행학습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 맨 앞자리의 사람이 어떤 이유에선지 일어서서 영화를 보기 시작한다. 그런데그 뒷줄에 있는 사람들이 차례로 일어나 서서 보기 시작하면 결국 극장 전체의 사람이 모두 서서 영화를 보게 된다. 하지만 그들을 앉게 하면 모두가 원래대로 편하게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 선행학습을 말할 때 소개되는 비유다.
선행학습은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다. 초등학교 수학은 산술적인 사고력, 중학교는 대수적인 계산력이 중심이다. 인생에 도움이 되는 수학적인 사고는 초등학교에서 주로 배운다. 그런데 초등학교 4, 5학년부터 수학적인 사고를 하지 않고 중학교 내용을 선행한다면 아이들은 사고력을 더 키우기가 어렵게 된다. 더욱이 다수의 학생들이 선행학습으로 수학에 흥미를 잃게 된다.
또 선행학습으로 알려진 사교육에 거품이 있다. A라는 학생이 학원을 다니며 선행학습을 한다. 이 학생이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낸다면 그 이유를 선행학습으로 생각하는데, 사실은 시험 때 이뤄지는 특별 수업일 가능성이 크다. 보통 학원에서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기간에는 선행학습을 중단하고 내신시험 준비를 한 달 정도 진행한다. 이때 1000~2000개의 기출문제와 예상문제를 뽑아 암기를 시킨다. 시험 범위는 50쪽 내외여서 시험 문제가 학원에서 암기시킨 문제와 겹칠 가능성이 높다. 자연히 문제를 열심히 외운 학생에게 시험이 유리해진다.
선행학습으로 수학 교과과정을 1~2년 앞당긴 학생들은 학교 시험 범위를 1~2년 전에 공부한 셈이 된다. 따라서 시험 성적이 잘 나왔다면 그때 공부한 실력이라기보다는 한 달 동안 집중해서 진행한 암기 학습의 결과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런데도 선행학습의 결과로 포장되고 있다. 한 학원 관계자는“수학에서 선행학습이 2000년대 들어와 유행하지 않았으면 대치동이나 강남 학원들이 거의 문을 닫았을 것”라고 말했다.
중학생이 선행학습을 하는 원인은 고등학교에서 진도를 빨리 나가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고등학교에서 3년간 배울 내용을 1년 또는 2년 안에 마치다 보니 성실한 학생도 중학교에서보다 두 배나 빠른진도를 감당할 수 없어 중학교에서부터 선행학습을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고2까지 선행학습으로 혜택을 봤다고 하더라도 고3이 되면 선행학습이라는 개념이 사라진다. 고3 수능 시험에서는 시험 범위가 너무 넓어 예상문제를 암기해서 시험을 보는 방식이 통하지 않게 된다. 그동안 공부한 것을 모두 묻는 순간 선행학습은 무기력해지고 만다. 그런데 이때 학생의 점수가 나쁘면 문제를 그동안의 잘못된 선행학습으로 돌리기보다 학생 탓으로 돌리기 때문에 선행학습의 거짓 신화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수능 시험도 선행학습 부추겨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지난 5월 전국의 초중고 학생 32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에 따르면 조사대상 학생의 76%가 수학 과목에서 선행학습을 하고 있었다. 중학생은 무려 83%나 선행학습을 했다.
이렇게 심각한 수준의 수학 선행학습이 공교육의 교육과정과 시험 문제에서 비롯되고 있음이 이번 조사로 확인됐다. 중학교의 시험문제가 고교 교육과정에서 출제되고, 학생과 학부모의 선호도가 높은 자사고에서 수학 진도를 빠르게 나가 중학교 또는 그 이전 단계에서부터 선행학습형 사교육에 의존하게 만드는 현실이 조성되고 있다. 선행학습형 사교육의 폐해는 선행학습의 특성상 사교육을 받을 당시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고3이 돼 수능 모의평가의 결과를 받는 순간 드러난다. 하지만 모든 책임은 학생에게만 돌아간다.
선행학습에는 정부도 책임이 있다. 수능 시험 범위가 고3 1학기 정도까지로 나와야 하는데, 11월에 보는 수능시험에서 12월까지 정상적인 교육과정으로 배워야 할 내용인 고3 전 과정에서 나오니 최소 2개월, 적어도 1학기는 일찍 배워야만 수능 시험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것이 조금 더 당겨져 2학년 말까지 3학년 과정을 마치도록 관행이 돼 버렸다. 게다가 경제력이나 권력 등 힘 있는 학부모의 요구를 학교장이나 이사장이 수용하고, 이에 맞춰 수학교사도 어쩔 수 없이 따르다 보니 학교에서의 선행학습이 당연해지고 있다.
이제 국민 모두가 지혜를 모아 공교육을 정상화하는 데 힘써야 한다. 교육과학기술부와 각 시도 교육청 등 교육 당국은 수학 시험 문제에 대한 전수 조사를 시행하고, 선행학습형 사교육을 유발하는 중·고교의 시험 운영이 정상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대책을 마련하는 한편, 지도·감독 체계를 수립해야 한다.
수학교육을 담당하는 학자나 교사는 여러 개념을 무의미하게 꼬아서 만든 암기식 수학 시험의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정답이 하나만 나오는 오지선다형이나 단답형 문항, 즉 결과 중심의 평가를 줄이고 수학적인 사고력을 묻는 과정 중심의 평가와 다양하면서도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드러내는 문항을 개발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수학사교육포럼은 바람직한 수학 평가 문항 개발이라는 주제로 포럼을 개최해 이런 움직임에 동참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