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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셈법 같은 나라

연월기 작업에 문제가 생겼다.

“쇳물에 불순물이 들어간 것 같구먼.”

그동안 애써 만든 쇠붙이들이 휘거나 부식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지?”

“재료를 구하는 과정에서 누군가 몰래 불순물을 넣은 게 분명하구먼.”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어떤 놈인지 꼭 잡아 내야 해. 놈을 잡기만 해 봐. 그냥!”

천복과 장도사는 가슴을 치며 애통해했다. 황산사는 말이 없었다.

“황산사! 말 좀 해 보시오. 어찌 한 마디 대꾸도 안 하시오.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밝혀 내야 하지 않겠소.”

 분을 삼키지 못한 장도사가 고래고래 소리쳤지만, 황산사는 한 마디 대거리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오는 보았다. 입술을 꼭 깨물고 선 황산사의 두 손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황산사는 누가 한 짓인가를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순간, 지오는 공주의 말을 떠올렸다.

“연월기 만드는 일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대신들이 많아. 어떤 음모로 연월기 작업을 방해할지 모르니 조심해야 해. 특히 영의정 정대섭의 사람들을 각별히 조심하도록 해.”

백성과 임금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황산사라 해도 확실한 증거도 없이 영의정과 맞설 수는 없는 노릇일 터. 황산사도 분한 마음을 애써 삭히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할 수 없지 않소. 모든 걸 다시 시작합시다!”

황산사는 힘차게 소리치며 천지관의 분위기를 바꾸려고 애를 썼다. 공주가 천지관으로 별식을 보내온 것도 순전히 이 일 때문이었다.

“공주님께서 보내신 겁니다. 수라간에 부탁하여 특별히 만든 것이니, 먹고 힘을 내시라고 하셨습니다.”

공주의 명을 받고 온 상궁의 손엔 묵직한 보퉁이가 들려 있었다. 보퉁이에선 고소한 냄새가 솔솔 풍겼다. 인절미였다. 쫄깃쫄깃한 인절미엔 콩고물이 포실포실했다. 인절미를 본 순간, 여기저기서 군침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세상에! 공주님께서 보낸 떡을 다 먹어 보다니……. 한 입만 먹어도 힘이 불끈 솟겠는걸.”

장도사가 너스레를 떨자, 모두들 웃으며 인절미를 집어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오는 조용 했다.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인절미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왜……, 왜 그러느냐?”

황산사가 의아한 눈길로 지오를 보는 순간, 지오의 눈동자로 차오른 눈물이 주룩 흘렀다. 지오는 더듬더듬 말을 잇기 시작했다.

“인절미는…… 누나가…… 우리 누나가 …….”

2년 전 봄 어느 날, 지오의 누나는 잔치가 벌어진 김초시 집으로 품팔이를 갔다. 보리죽으로 이어 가던 끼니조차 떨어진 지 이틀이나 지난 참이었다.

“이따가 맛난 거 많이 가져올 테니, 여기서 기다려, 응? 금세 다녀올게.”

누나는 철없이 따라나선 지오를 마을 입구에 버티고 선 천하대장군 앞에 앉히며 말했다. 지오는 멀어지는 누나를 향해 소리쳤다.

“누나! 인절미 가져와. 꼭~!”

지오는 유난히 인절미를 좋아했다. 고픈 배를 움켜잡은 채 종일 누나를 기다리는 건 지루하고 힘든 일이었지만, 인절미를 먹을 수만 있다면 참을 만했다. 그날따라 한낮은 유난히 길었고, 오후가 되어도 해는 더디게 졌다. 들꽃을 엮어 누나에게 줄 꽃목걸이를 세 개나 만들어도 누나는 오지 않았다.

해가 먼 산으로 꼴깍 넘어가고서도 한참을 기다려서야 누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 멀리 산등성이 내리막길에서 잰걸음으로 걸어오는 누나가 보였다. 지오는 누나보다 누나의 가슴에 안겨 있는 보퉁이가 더 반가웠다.

“인절미다!”

지오의 고함 소리에 누나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 때였다.

“다각다각 다다다다, 히이이잉!”

말발굽 소리가 누나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지오는 성큼 깨금발을 했다. 순간, 지오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산등성이로 말 한 마리가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지오는 고함을 쳤다.

“누나! 위험해.”

말 위엔 갓을 쓴 선비가 타고 있었지만, 앞선 누나를 미처 보지 못한 눈치였다. 말의 속력은 전혀 줄어들 줄을 몰랐다. 뒤늦게 알아챈 누나가 뒤를 돌아보았을 땐 이미 늦은 뒤였다. 말은 누나를 덮치며 달려 나갔고, 누나의 가슴에 안겼던 보퉁이가 하늘을 날았다. 쓰러진 누나 위로 꽃잎처럼 떨어지던 인절미……. 곁두리로 나온 것조차 먹지 않고 꼬깃꼬깃 싸서 들고 온 누나의 인절미가 누나의 마른 어깨 위로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노란 통고물가루가 푸슬푸슬 흩어지고 있었다.

누나는 삼일 밤낮을 앓다가 눈을 감았다. 약 한 첩 써보지도 못했고, 어디다가 하소연 한번할 수 없었다.

“양반네 말이었다며? 관아에 알려 봤자, 소용 없어. 괜히 양반을 능멸한다며 곤장만 맞지.”

말을 타고 달려온 선비를 처벌하도록 관아에 호소하려는 지오를 마을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말렸다.

“그려, 그려. 괜한 일 벌이지 말고, 볕 좋은 곳에 누이 시신이나 잘 묻어라. 양반 아닌 것은 사람도 아닌 세상이잖느냐. 상것이 어디 사람이더냐. 개나 소만도 못한 것이 상것이지.”

누나는 결국 뒷산 진달래 무리 옆에 묻혔다. 그 해 봄, 진달래 빛이 유난히 붉었던 것도 누나의 핏물 때문이었으리라. 지오는 이렇게 믿었다.

누나의 이야기를 끝낸 지오의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었다.

“그날 아침 누나를 보내지만 않았어도……, 인절미를 가져오라고 잔치 집에 보내지만 않았어도 누나는 죽지 않았을 거예요. 내가 말을 조금만 일찍 발견했어도…… 누나는 안 죽었다고요. 난 꼭 연월기를 타고 과거로 갈 거예요. 그래서 누나를 구해낼 거라고요.”

지오는 황산사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황산사님! 꼭 갈 수 있는 거죠? 누나를 살려 낼 수 있는 거죠? 그렇죠?”

지오의 눈물은 천복과 장도사도 울렸다. 천복과 장도사는 시선을 발끝으로 떨구며 목구멍까지 올라온 울음을 꿀꺽 삼켰다. 황산사가 연월기의 설계도를 집어든 건 그때였다.

“걱정마라, 지오야. 반드시 너를 누나가 살던 세상으로 데려가 주마. 무슨 일이 있어도 연월기를 성공시켜서 누나를 살려 내자꾸나.”

천복도 사흘째 내려놓았던 다듬망치를 다시 잡았다.

“그려. 다시 시작해 보자고.”

장도사는 인절미를 두 조각이나 입에 넣으며 소리쳤다.

“일단 이거나 먹고 시작하자고. 허기가 져서 힘을 쓸 수가 있어야지. 사흘을 굶었더니, 뱃가죽이 등에 가 붙었네. 자, 모두들 인절미 먹고 힘부터 내자고.”

장도사의 너스레에 천지관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인절미로 배를 채운 야장들도 다시 일을 시작했고, 천지관엔 다시 망치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지오가 방 한 모퉁이에서 먼지만 쌓여가던 산학 책을 펼쳐든 것은 그날 밤이었다. 주로 산학 셈과 설계도로 꾸며진 산학 책은 읽기에도 쉬웠다.

한 성이 있다. 아랫부분의 폭은 4장, 윗부분의 폭은 2장, 높이 5장, 그리고 길이가 126장 5척이라 한다면 부피는 얼마가 되는가?*

“쳇! 이 정도야 누워서 떡먹기지.”

지오는 웬만한 셈 문제는 숨도 쉬지 않고 척척 풀어 냈다. 모르는 글자들은 황산사가 가르쳐 주었다. 쉽게 풀리지 않는 문제도 황산사의 도움을 받으면 금세 풀 수 있었다. 하지만 지오의 관심을 끈 산학 책은 따로 있었다. 우주의 모습과 별자리, 달과 해의 움직임을 들려주는 책들이었다. 그런 산학 책 속엔 첨성대와 석굴암, 다보탑 등의 설계도도 그려져 있었다. 그들의 크기나 배치, 비례 관계 등도 셈법으로 자세하게 계산되어 있었다. 산학 책을 보노라면 세상 모든 것이 셈으로 이루어진 느낌이었다.

‘작은 돌탑 하나도 치밀한 계산을 거쳐 비로소 만들어지는구나. 그러니까 셈만 잘 하면 어떤 것이라도 만들 수 있는 거야.’

지오는 산학이 신비롭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어쩜 산학이란 옛날이야기 속에 나오는 산신령의 도술법이나 요술법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금과 황산사가 산학을 발전시키려고 애쓰며 연월기를 만들려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황산사에게서 배운 글자들을 혼자의 힘으로 읽을 수 있게 되었을 무렵, 지오는 산학 책 한 귀퉁이에서 이런 문장을 발견했다.


(夫天之理, 始於數也. 故以數可以造和世上, 豫見未來.)
하늘의 이치는 수에서 나온다. 수를 이용하여 세상을 조화롭게 만들거나, 미래를 예측하는 일을 할 수 있다.

지오는 이 문장을 입 속으로 읊조리고 또 읊조렸다.

‘그래. 수처럼 조화로운 것은 없을 거야. 모든 숫자는 조화롭고 소중해. 아무리 작은 숫자라도 그것을 무시하고 빼버리면 계산이 틀려 버리지. 생명이 있는 사람에게조차 양반이니, 상것이니 하며 무시하고 천시하는 인간 세상과는 달라. 세상이 셈법과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더하는 만큼 늘어나는 셈처럼 노력한 만큼 능력을 인정받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어. 똑같이 나누어지는 셈법처럼 누구나 고르게 나누어 가지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어.’

지오는 문득 연월기를 타고 가게 될 미래의 세상을 그려 보았다.

‘어쩜 미래는 그런 세상일지도 몰라. 셈법과 같은 세상! 그래! 그런 나라를 만들고 싶어. 내 눈으로 그런 나라를 보고 싶어.’

지오가 연월기에 관한 이야기를 적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연월기의 계획도를 그려 넣고, 연월기와 관련된 사건들을 한지에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지를 묶어 책을 만든 뒤, 겉장에 ‘연월기록’이라고 썼다. 연월기록이 두꺼워질수록 지오의 생각도 깊어 갔다. 지오의 나라도 마음 속에서 점점 커져만 갔다.


* ‘한국 수학사(김용운·이소라 저)’ 내용을 인용함
 

셈법 같은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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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수학동아 정보

  • 이향안 교수
  • 장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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