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멘트 바닥에 밥그릇만 덩그러니 놓인 동물원이 우동수비대 조사 결과 다수 발견됐습니다. 이런 나쁜 동물원은 사라지면 좋겠지만, 그러면 그 안에 살던 동물은 어디로 가야 할까요? 해외에는 동물원이 제대로 돌보지 못하거나 개인이 포기한 야생동물을 구조해 보호하는 곳이 있습니다. 이를 ‘생추어리’라고 하죠. 지난 9월 미국 콜로라도 주의 ‘더 와일드 애니멀 생추어리’에 다녀왔습니다.
우동수비대란?
우리동네 동물원 수비대(우동수비대)는 전문가와 시민이 함께 행복한 동물원을 만들기 위해 동물원 복지 조사를 하는 시민과학 프로젝트입니다. 1기는 2~5월 활동했고, 2기는 7~9월 활동했습니다.
한국 사자 해롱이,네가 왜 미국에 있어?
생추어리엔 한국에서 쉬이 볼 수 없는 초원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널리 펼쳐져 있었습니다. 생추어리 대표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동물들의 거주지 사이를 가로질러 사자가 사는 곳 앞에 도착했습니다. 철창 너머 풀이 모래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풀숲에 몸을 숨긴 사자 두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해롱이 가족이 미국까지 입양 간 이유
사자가 풀숲에 몸을 숨기는 당연한 장면이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일부 한국 동물원에서 사자는 시멘트 바닥에 살기 때문입니다. ‘더 와일드 애니멀 생추어리(TWAS)’의 패트릭 크레이그 대표가 숫사자 다크와 암사자 해리를 소개했습니다.
“다크와 해리는 한국에서 왔어요.”
2015년, 서울 어린이대공원에 살던 다크와 해리는 사육사를 물었습니다. 사육사가 동물사를 청소하는 동안 굳게 잠겼어야 할 내실이 열린 탓에 일어난 사고였지요. 이후 다크와 해리는 전시 공간에서 쫓겨나 8평 콘크리트 방에 갇혔습니다. 이듬해 해롱이가 태어나 2살이 될 때까지도 해롱이 가족을 받아주는 곳은 한국에 없었지요. 결국 사자 가족이 안락사될 위기에 놓인 2018년, 발만 동동 구르던 동물단체 ‘동물자유연대’는 해외 여러 곳에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중 TWAS가 응답을 줬죠.
“해롱이네가 처음 왔을 땐 작은 우리에 뒀어요.”
TWAS가 구조한 동물을 작은 우리에 두는 건 뜬장●이나 시멘트로 이뤄진 좁은 공간에 살던 동물이 갑자기 넓고 폭신한 땅으로 오면 두려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크레이그 대표는 “평생 배에만 살던 사람이 땅을 밟는 순간과 비슷하다”며, “구조된 동물들은 우리에서 나온 뒤 걷고 넘어지길 반복하다 마침내 뛴다”고 말했습니다. 다크와 해리 역시 며칠 훈련 끝에 2만 평에 가까운 거주지에 적응했습니다.
●뜬장 : 동물의 배설물을 쉽게 처리하기 위해 구멍이 뚫린 바닥을 쓰는 우리.
다리 절뚝이는 해롱이, 그래도 달린다
문제는 해롱이었습니다. 크레이그 대표는 “해롱이는 처음 두세 달 동안 아예 걷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해롱이를 보기 위해 다시 차를 타고 이동했습니다. 해롱이의 거주지에 도착하자, 해롱이가 기자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여전히 걸음걸이가 이상했습니다. 뒷다리가 불편한 모양이었죠.
헤롱이는 8평 콘크리트 방에서 자라며 걷는 근육을 충분히 발달시키지 못했습니다. 더 심각한 건 비타민A 결핍이었습니다. 크레이그 대표는 “사자는 성장기에 비타민A가 부족하면 뇌가 채 자라기도 전에 두개골이 붙어버린다”며, “좁은 두개골에서 신경계가 자라며 손상을 입어 다리에 장애를 얻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해롱이는 엄마, 아빠와 떨어졌습니다. 덩치가 큰 아빠와 장난을 치다 다칠 것을 우려한 TWAS의 결정이었지요.
“이제 해롱이는 달리기도 해요. 생각도 못한 변화예요. 달리는 모습이 말과 비슷하지만, 분명히 달립니다.”
달리는 해롱이를 위해 TWAS는 최근 해롱이의 거주지를 넓은 곳으로 옮겼습니다. 또래의 암사자 베아트리체와 말카가 함께 사는 곳이지요. 세 사자는 함께 뒹굴고, 쫓고, 쫓기며 지낼 예정입니다. 크레이그 대표는 이날 새로운 거주지에 해롱이의 영어 이름 ‘Haeryong’를 써 넣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생추어리가 있었다면, 해롱이가 장애를 얻기 전에 지낼 곳을 찾을 수 있었을까요?
미국의 나쁜 동물원, 문 닫을 수 있는 이유는?
미국에는 샌디에이고 동물원처럼 좋은 동물원도 있지만, ‘로드사이드 주’, 다시 말해 ‘길거리 동물원’이라고 불리는 열악한 동물원도 많습니다. 지난해 화제가 된 다큐멘터리 <;타이거킹>;의 주인공이 운영했던 동물원도 그중 하나지요. TWAS는 타이거킹의 동물원에서만 127마리의 호랑이와 사자, 곰을 구조했습니다.
나쁜 동물원, 사라질 수 있는 이유
나무 그늘 아래 호랑이가 몸을 일으켰습니다. 호랑이는 어슬렁 어슬렁 움직이더니 철창 바로 앞까지 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어흥!’ 큰 소리를 냈지요. 크레이그 대표는 “아직 두 살이 채 안 됐다”며 카밀라와 컬리, 그레이시를 소개했습니다.
이들 호랑이는 ‘타이거킹’이라 불리는 악명 높은 동물원 운영자에게서 구조됐습니다. 타이거킹은 새끼를 번식시킨 후 관람객과 사진을 찍는 방식으로 돈을 벌었습니다. 1년에 70~100마리씩 생겨난 새끼는 4~5개월이 지나면 관광객 가까이 보내기엔 위험해졌지요. 그러면 다른 로드사이드 주에 팔리거나, 좁은 우리에 갇혔습니다. 당시 1살이던 카밀라와 컬리, 그레이시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어미 4마리와 새끼 10마리가 있었는데, 모두 비타민 결핍 등 영양 실조 상태였어요. 타이거킹이 먹이를 주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정부가 동물을 구조해달라고 저희에게 연락한 거죠.”
TWAS는 타이거킹의 동물원에서만 호랑이와 사자, 곰을 총 127마리 구조했습니다. 원래 0.3평짜리 작은 우리에서 지내던 카밀라와 컬리, 그레이시는 지금 1만 8천 평 거주지에 살고 있습니다. 다른 호랑이 하나를 포함해 총 4마리가 함께 살지요.
크레이그 대표는 19세이던 1980년 처음으로 동물원에서 야생동물을 구조한 뒤 40년째 생추어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나쁜 동물원에서 동물을 몰수하려는 정부와 동물을 과잉 번식해 안락사하려는 동물원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활동이 알려지며 시민들의 후원이 이어졌지요. 덕분에 지금까지 수천 마리의 동물을 구했습니다.
동물원과 생추어리의 차이가 뭐냐는 질문에 크레이그 대표는 “임무”라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동물원의 첫 번째 임무는 교육입니다. 각 동물이 어떤 야생 환경에서 사는지, 야생을 어떻게 보전할지 등을 교육해야 합니다. 반면에 생추어리는 구조와 보호가 첫 번째 임무입니다. 갈 곳이 없는 야생동물을 죽을 때까지 돌보는 곳이지요.
크레이그 대표는 생추어리 위를 높이 가로지르는 ‘야생으로의 1마일’ 다리를 가리키며, “동물원과 달리 관람객은 높은 다리 위에서만 동물을 볼 수 있다”며, “이는 사람의 시선이 동물에게 압박감을 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습니다. TWAS는 관람객을 받지 않던 방침을 바꾸며 이 다리를 지었습니다. 구조가 필요한 야생동물이 왜 생겨나는지 교육해야만 나쁜 동물원에서 동물이 고통받고, 생추어리가 구조하는 고리를 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크레이그 대표는 “교육 받은 사람들은 구조가 필요한 동물을 보면 생추어리로 전화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생추어리가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나라 동물카페에 흔한 라쿤이 TWAS에도 있었습니다. 라쿤 ‘제이크’는 10년 넘게 생추어리에 살며 13살을 맞았습니다. 라쿤의 수명은 15년이니, 할아버지가 다 됐지요. 우동수비대 조사 결과, 한국에서 제 수명을 살 거라 추정되는 동물원 라쿤의 비율은 4%에 불과했습니다.
한국 생추어리, 사육곰부터 시작한다!
현재 우리나라에 생추어리라 할 만한 곳은 충남 서천의 ‘국제적 멸종위기동물 보호센터’가 유일합니다. 불법 반입된 멸종위기종만을 보호해, 갈 곳 없는 야생동물을 구조하는 역할을 하기엔 역부족이죠. 다행히 시민단체 ‘곰보금자리프로젝트’가 내년 여름 반달가슴곰 생추어리를 경기 고양에 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생추어리에 입주할 곰 13마리를 만나러 갔습니다.
못 걷고, 빙빙 돌고…. “조금만 버티자”
강원 화천의 한 농가, 테이블에 사람 대여섯 명이 모여 앉았습니다. 달콤한 마시멜로를 넓게 펼쳐 쓰디쓴 알약을 10개 가까이 올린 뒤 김밥처럼 말고 있었지요. 유식(U6)이라는 반달가슴곰을 위한 약이었습니다. 유식이는 두 줄으로 이뤄진 우리 중 위쪽(UP)의 여섯 번째 칸에 살아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곰보금자리프로젝트 소속 박정윤 수의사는 “유식이가 관절염을 심하게 앓아 약으로 삶을 겨우 버티는 중”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미 곰 두 마리가 올해 이 농가에서 세상을 떴습니다.
이 농가는 이른바 ‘사육곰’ 농장입니다. 1980년대 초 곰의 쓸개가 건강에 좋다는 속설이 퍼져 있던 시절, 반달가슴곰을 사육해 쓸개를 얻는 농장들이 생겼습니다. 곰이 사는 환경은 열악했습니다. 화천 농가도 크기가 2평 남짓하고 시멘트 바닥으로 이뤄진 우리 12개에 사육곰 13마리가 살았지요. 그러다 농장주가 사육곰을 생추어리에 보내기로 약속한 뒤, 곰보금자리프로젝트 활동가들 십여 명이 매주 방문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육곰이 건강하게 살기엔 역부족입니다. 유삼(U3)이는 시멘트 바닥 탓에 발바닥이 불어터져 피가 묻어나왔습니다. 발이 아플 텐데도 곰들은 우리를 빙빙 도는 정형행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멸종위기종인 반달가슴곰의 농장 사육을 금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지만, 최태규 수의사는 “사육곰 농장이 불법 시설이 되면 곰이 갈 곳이 없다”며, “생추어리를 만드는 게 먼저”라고 말했습니다.
곰보금자리프로젝트는 화천 사육곰 13마리를 내년 여름 입주시키는 것을 목표로 경기 고양에 생추어리를 만들고 있습니다. 울창한 숲 500~600평에 올라갈 구조물과 물웅덩이를 둘 예정이지요. 물론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정부 허가와 주민 동의를 얻어야 하고, 먹이 비용도 마련해야 하지요. 최태규 수의사는 “야생동물을 잡아먹는 시대가 끝나간다는 걸 느끼고, 생추어리 건립에 힘을 보태주면 좋겠다”며, “생추어리를 확장해 더 많은 곰과 다른 야생동물도 구조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곰을 돌보는 활동이 마무리되는 3시쯤, 자동급식기 설치에 성공했습니다. 입이 짧아 살이 충분히 찌지 못한 유팔(U8)이를 위한 거지요. 원래 곰은 야생에서 하루종일 먹지만, 유팔이는 사람이 주는 몇 시간만 먹이를 먹어왔습니다. 활동가들은 유팔이가 야생과 비슷한 형태로 먹어 살이 찌고 겨울잠을 자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곰들은 내년에 생추어리로 갈 수 있을까요? 아직 정처를 찾지 못한 사육곰은 전국에 368마리가 남아있습니다.
●정형행동 : 동물이 스트레스를 받아 목적 없이 지속해서 반복하는 행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