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멀고도 험한 뱃길
지구 최남단에 있는 남극은 대륙이에요. 남극의 바다와 육지를 합한 남극권은 보통 남위 60°부터 남극점(남위 90°)까지를 말하지요.
우리나라 세종기지는 서남극에 있어서 남아메리카 칠레를 거쳐서 가지만, 새로 지은 장보고과학기지는 동남극에 있어서 뉴질랜드를 거쳐서 간답니다.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뉴질랜드까지 간 다음, 그곳에서 비행기나 배를 타고 도착지까지 갈 수 있어요. 우리는 기지를 세우는 데 필요한 연구 장비를 많이 가져가야 하기 때문에,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쇄빙연구선인 아라온 호를 타기로 했답니다.
배 위에서 보낼 시간은 8일! 악명 높은 뱃멀미를 어떻게 버틸지 걱정입니다.
아라온, 남위 60°를 넘어라
남극으로 가는 뱃길은 뱃멀미로 유명해요. 남태평양 해류와 남극순환류가 부딪히면서 격한 파도를 만들거든요. 놀이공원에 있는 바이킹을 탈 때처럼 배가 마구 흔들려요. 책상에 올려둔 책과 식탁에 놓인 그릇도 붙잡지 않으니 바닥으로 와장창 쏟아지네요. 배에 탄 연구원과 기자들도 심한 멀미를 겪고 있어요. 배가 도착지에 가까워질수록 방 밖으로 돌아다니는 사람이 줄어들어 유령선을 타고 있는 것 같아요. 모두들 해류가 부딪치는 지역인 남위 60°를 어서 지나가기만을 기다린답니다.
남위 60°를 지나니 얼음이 보이기 시작해요. 바다는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네요. 얼음을 보니 이때서야 남극에 온 느낌이 들어요. 하늘에서는 온 몸이 눈처럼 새하얀 새, 스노우패트럴이 우리를 환영하고 있어요!
하얀 사막 위의 안식처
크라이스트처치를 떠난 지 8일 째. 배 옆을 지나가는 거대한 얼음을 구경하고 있는데, 뱃머리에서 누군가가 크게 외칩니다. “저 멀리 장보고과학기지의 푸른 지붕이 보인다”고요. 저도 달려가 볼래요. 이제 배 여행은 지긋지긋하거든요!
백야와 흑야가 있는 장보고과학기지
장보고과학기지에 도착했을 때는 밤 11시였어요.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바깥이 마치 대낮처럼 환해요! 해가 지지 않는 ‘백야’ 현상 때문이지요.
백야가 나타나는 이유는 지구의 자전축이 기울어져 있고 남극과 북극이 남위 66°, 북위 66°보다 위도가 높기 때문이에요. 남극은 12~2월에, 북극은 6~8월에 백야가 나타나지요. 남위 62°에 있는 세종기지와 달리 남위 74°에 있는 장보고과학기지에서는 백야를 볼 수 있어요.
이와 반대로 겨울에는 해가 뜨지 않는 흑야가 있어요. 한여름인 6~8월에 우리나라는 무더위에 시달리지만 장보고과학기지는 기나긴 밤을 보내야 한답니다. 하지만 아주 멋진 현상도 볼 수 있어요. 바로 ‘오로라’예요! 오로라는 태양에서 방출된 전기를 띤 입자가 지구 자기장에 끌려오면서 대기에 있는 공기 분자와 부딪쳐 빛을 내는 현상이에요. 자기장이 강한 양쪽 극지방에서 많이 보이지요.
올해 처음으로 장보고과학기지에서 겨울을 보낼 월동대원들은 벌써부터 오로라를 볼 기대에 잔뜩 부풀어 있었어요. 아마 우리나라 기지에서 처음으로 보는 남극 오로라가 될 거예요.
눈을 모래처럼 날리는 활강풍을 만나다
남극에 처음으로 발을 내딛은 다음 날, 헬리콥터를 타고 기지에서 20㎞ 정도 떨어져 있는 아델리 펭귄 마을도 가고, 활화산인 멜버른 화산도 보기로 했어요. 부푼 마음을 안고 헬리콥터에 올라 두둥실 떠오르는 순간…, 맙소사! 하늘에 구름이 가득해 멀리 갈 수 없어요. 할 수 없이 다시 기지로 돌아가기로 했답니다.
남극의 날씨는 도무지 예측할 수 없어요. 아라온 호를 타고 오는 동안에도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맑은 날씨였다가 1시간도 지나지 않아 함박눈이 내렸고, 금세 다시 해가 나타났지요. 기지에서도 눈이 내리던 중간에 갑자기 해가 나타났어요. 심지어는 맑은 날씨에 눈이 오기도 하더라고요. 알고 보니 활강풍(카타바틱 윈드)이 눈을 날리기 때문이었어요.
활강풍은 남극에서만 부는 독특한 바람이에요. 남극은 중심으로 갈수록 고도가 높아지는데, 산꼭대기에서 차갑게 식은 공기가 산등성이를 타고 낮은 해안가로 밀려오면서 바람을 일으키지요. 활강풍은 보통 초당 5m 정도로 불지만 심할 때는 초당 수십m가 넘기도 해요. 제가 있을 때는 무려 초당 30m를 기록하기도 했답니다.
활강풍이 눈과 만나면 힘이 더 세져요. ‘하얀 사막’인 남극은 평균 강수량이 수십㎜도 채 안 될 만큼 건조하고, 기온도 낮아서 눈 알갱이가 흙처럼 단단히 얼어요. 활강풍이 불 때에는 이 눈이 함께 휘날리지요. 사막에서 모래폭풍이 부는 것처럼 보여요. 얼굴에 맞으니 꽤나 아파요. 앗, 활강풍이 또 불어오네요. 저기에 있는 바위 뒤로 숨어야겠어요!
남극의 신기한 동식물을 만나다
연구원들을 부지런히 따라다니면서 재미있는 동식물을 만나기로 했어요. 스쿠아(남극도둑갈매기)를 연구하는 김정훈 연구원과 지의류를 연구하는 김지희 연구원과 함께 조사에 나섰지요. 남극에는 얼음과 돌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정말 신비로운 곳이네요!
남극의 매 ‘스쿠아’와 남극 신사 ‘황제펭귄’
장보고과학기지 주변은 온통 돌밭이에요. 발목까지 덮는 등산화를 신고 크고 작은 돌과 바위를 디디면서 돌아다니는데, 어떤 돌덩이들이 살아 움직이는 게 아니겠어요? 돌과 색깔이 비슷한 스쿠아의 새끼였어요!
스쿠아는 여름 동안 새끼 2마리를 키우는 남극의 사냥꾼이에요. 암수가 한 번 짝을 이루면 한 쪽이 죽거나 병들지 않는 이상 계속 부부로 살아가지요.
김정훈 극지연구소 책임연구원은 10년 째 스쿠아를 연구하고 있어요. 장보고과학기지에서는 근처에 스쿠아가 얼마나 살고 있는지 조사하지요(왼쪽 사진).
세종과학기지 근처에 사는 스쿠아는 크릴새우와 어린 펭귄을 먹고 사는데, 장보고과학기지 근처에 사는 스쿠아는 ‘실버피시’라는 물고기를 먹고 산대요. 우리도 새끼 스쿠아가 토한 먹이에서 실버피시를 보았어요.
조사를 마칠 무렵, 독일 과학자들이 운영하는 곤드와나 기지 옆에서 만나보기 힘든 남극의 주인을 발견했어요. 작은 빙하에 우뚝 서 있는 황제펭귄이지요. 우아하고도 늠름한 모습이에요! 목덜미에 있는 노란 무늬가 정말 예쁘네요.
남극의 숨은 주인, 지의류
남극에서는 푸른 풀을 볼 수 없어요. 나무는 더더욱 볼 수 없지요. 산을 쳐다봐도 하얀 눈이 매끄럽게 덮여 있을 뿐이에요. 남극에서 꽃이 피는 식물은 남극좀새풀과 남극개미자리, 딱 두 종뿐이에요. 하지만 이 식물들도 장보고과학기지에서는 볼 수 없답니다.
그래도 이곳에 숨은 주인이 있어요. 바위에서 자라는 균류와 조류의 공생체, 지의류예요. 바위를 보고 있으면 검은 얼룩이 보이는데, 이들이 바로 남극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움벨리카리아와 부헬리아예요. 장보고과학기지 근처 바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답니다. 이들 외에도 노랗거나 흰 다양한 지의류가 있어요.
김지희 극지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지의류가 사는 환경을 알기 위해 로거라는 연구 장비를 설치했어요. 로거는 온도와 습도를 재고, 광센서가 달려 있어서 1년 동안 지의류가 자라는 환경을 조사할 거예요.
그 자료들을 모아 아직까지 비밀에 쌓여 있는 장보고과학기지 근처의 환경에 대해서 자세히 분석할 예정이에요. 특히 환경에 민감한 지의류를 조사하면 장보고과학기지 근처의 환경은 어떤 특성이 있고 어떻게 변하는지 알 수 있답니다.
지붕이 푸른 장보고과학기지는 정말 아름다워요. 희다 못해 푸르게 빛나는 눈과 잘 어울리지요.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인데, 자꾸 기지 쪽을 돌아보게 되네요. 이번에는 미국 맥머도 기지의 도움으로 비행기를 타고 뉴질랜드까지 가기로 했어요. 올 때에는 8일이나 걸렸던 길을 단 8시간만에 가는 거죠. 발길을 떼는 제 뒤로 범고래 떼가 남극을 잊지 말아달라며 몰려왔어요. 거대한 얼음과 흰 눈으로 덮인 이곳을 저는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지금까지, 남극에서 오가희 기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