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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내 손으로 조선에서 과학 혁명] 진목에서 시작하는 유쾌·상쾌·통계(?) 조선 만들기

학기의 끝이 다가오지만, 공구성의 과학사 현장실습은 종강할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과연 과학사 지식을 활용해 조선을 근대 국가로 만들겠다는 구성의 꿈은 이뤄질 수 있을까요? 이번 수업에서는 구성이 조선의 정확한 인구 조사에 도전합니다. 컴퓨터도 없는 곳에서, 인구 조사를 위해 구성이 꺼내든 묘수는 ‘종이 기계’입니다!

 

 현재환 서울대 학부대학 및 과학학과 교수. 전공은 과학사 및 과학기술학(STS)이다. 과학기술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한국 사회에 뿌리내리기를 희망하며 과학사와 STS의 대중화를 시도하고 있다. jhwanhyun@snu.ac.kr

 

 편집자 주 시간을 되돌려 조선시대에 떨어진다고 해도, 설계도만 있다면 증기기관차를 만들 수 있을까요? 현재환 서울대 교수의 소설 ‘내 손으로 조선에서 과학혁명?!’을 통해 이 물음에 답해보려 합니다. 서양과학사 전공자인 대학원생 공구성이 조선시대로 떠난 강제 현장실습 이야기입니다.

 

 

Courtesy Library of Congress

근대로 넘어오면서, 인구는 국력을 좌우한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인구 조사는 국가의 상황을 확인하고 국가 정책에 참고가 되는 중요한 자료였다. 미국 뉴욕에서 인구 조사 중인 조사원을 그린 19세기의 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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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습 프로이센의 종이 기계로 삼정의 문란을 해결한다고? “아, 미치겠다! 차라리 논문을 읽고 말지!” 밤 9시, 연구실 구석에 앉은 대학원생 공구성은 노트북을 붙잡고 씨름 중이었다. 노트북 화면에 떠 있는 것은 ‘2학기 재미난 과학사 학부강의_조교_출석체크_최종_최최종_수정_검토.xlsx’라는 제목의 엑셀 파일. 수업에 출석한 학부생의 수를 세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지만, 이상하게도 100명 정도 되는 출석생 숫자는 셀 때마다 달라졌다. “아, 드디어 끝이다!” 졸린 눈을 비비며 숫자를 세길 30분 더, 마침내 일을 끝낸 구성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아… 컴퓨터가 있는 지금도 어려운데, 옛날엔 도대체 어떻게 호구조사를 했냐?” “계수표(Zählkarte)로 했습니다.” 며칠 전, 과학사 저널 클럽 시간. 학과 휴게실의 긴 탁자 위에는 형광펜 자국이 번진 복사 논문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이번 주에 읽은 논문은 19세기, 독일의 전신이었던 프로이센에서 어떻게 인구 조사를 한 건지 파헤친 연구였다. “논문 저자인 외르첸(Christine von Oertzen)은 1860년대 프로이센 통계국이 규격화된 개인별 종이 쪽지, 즉 계수표와 가내 수작업 분업망만으로 서구에서 가장 정밀한 인구 데이터를 구축했다고 설명합니다.” 말투 때문에 끌로드AI라는 별명을 가진 선배 하나가 안경을 고쳐 쓰며 운을 떼었다. “계수표가 뭔데?” 그러자 구성의 동기가 설명했다. “개인의 정보를 카드 한 장에 담은 게 계수표인데, 프로이센인들은 계수표 더미를 쌓아 무게를 다는 방식을 썼다고 해. 그 수작업 인프라 전체가 일종의 거대한 ‘종이 기계(Paper Machine)’였다고 하더라고.” 그렇다. 꼭 컴퓨터나 엑셀 없이도 옛사람들은 나름대로 정확한 호구 조사를 해냈다. 이 기억을 떠올린 구성은 엉뚱한 상상의 나래를 펴기 시작했다. “잠깐… 저거라면 조선에서도 돌릴 수 있어! 조선 후기가 왜 민란으로 무너졌겠어? 호구 파악이 엉망진창이라 아전들이 죽은 사람이나 젖먹이에게도 세금을 매겼잖아. 규격화된 한지 쪽지와 수작업 분류망을 쓰면, 민란을 막을 수 있지 않겠어?” 그때 귓전에서 익숙하고도 얄미운 산신령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흠흠, 종이 쪽지로 인간의 머릿수를 세어 조선을 구하겠다는 그 기특한 망상, 내가 친히 시험해 주마. 가보거라, 19세기의 삼남으로!”  과제 종이 기계의 도입으로 통계조선 달성하기 “박 안핵사 대감! 우병사 백낙신의 가렴주구에 분통이 터진 백성들이 또다시 관아 앞마당에 멍석을 깔았사옵니다!” 시끄러운 고함에 번쩍 눈을 뜬 구성은 진주목 관아의 집무실 한복판에 앉아 있었다. 여기저기 핏자국과 그을음이 보였다. 밀려오는 기억을 정리해 보니, 지금 구성이 빙의한 육신은 연암 박지원의 손자이자 북학파의 명신 박규수였다. 때는 1862년 여름, 가혹한 수탈에 견디다 못한 진주 농민들이 민란을 일으키자 철종이 박규수를 안핵사로 급파했다. 그사이 민란의 불길이 삼남 전체로 번져 나가자, 다급해진 조정은 박규수의 건의를 받아들여 한양에 임시 개혁 기구인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고 그를 실무 당상으로 발탁해 사태 수습의 권한을 위임한 상황이었다. 상황 파악을 위해 구성은 관아 서고에 쌓인 진주목의 호적대장부터 펼쳤다. 장부를 넘기던 그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게 호적이야, 아니면 소설책이야?” 한양 조정에 보고된 공식 장부에는 진주목에 3000가구가 있다고 기록됐다. 그러나 구성이 높은 곳에서 진주목을 둘러보니, 대충 봐도 실제로 독립된 살림을 꾸리는 집은 6000가구가 훌쩍 넘어 보였다. 오차가 발생한 이유는 이랬다. 당시 조정은 고을마다 무조건 군포 몇 필, 쌀 몇 섬을 바치라며 세금 총액을 일방적으로 할당해 내려보냈다. 이에 대응해 지방 수령과 아전들은 실제 주민 수와 관계없이 서류상으로만 가구 수를 쪼개고 합친 편제호를 만들어 올렸다. 그저 나라에서 먼저 정해놓은 세금 목표치에 숫자를 억지로 꿰어 맞추려고 한 일이었다. 장부에서 사라진 나머지 3000가구들은 고을의 힘 있는 양반들이 “우리 집 행랑채에 얹혀사는 곁방살이 식구”나 “우리 집안에 딸린 머슴”처럼 식솔로 이름을 올려 가혹한 군포 세금을 면제받거나 피할 수 있게 도운 이들이었다. 그 대가로 아전들은 장부 밖으로 빼돌린 이 수많은 비공식 인구에게서 뇌물을 챙겼다. 반면 기댈 곳 없는 가난한 백성들은 죽은 조상과 갓난아기의 몫까지 얹어 막대한 세금을 내야 했다. 구성은 속에서 뜨거운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을 느꼈다. “제대로 된 통계조사로 탐관오리들의 은닉 장부를 발가벗기자!” 하지만 전국 팔도를 한꺼번에 조사하는 것은 재정도 인력도 턱없이 부족해 엄청난 반발을 부를 것이 뻔했다. 이제 구성은 알고 있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유교라는 방화벽을 뚫을 대의명분포(大義名分砲)와, 조선시대의 현실에 맞는 시범사업이라는 것을. 이를 갈며 한양에 올라온 구성은 비변사 당상들과 호조판서, 선혜청 당상관들이 모인 자리에서 기품 있는 목소리로 웅변했다. “대감들, 삼남의 백성들이 낫과 횃불을 든 까닭이 진정 국가의 법이 부족해서이옵니까? ‘주례(周禮)’에 이르기를 호구는 국역의 근원이라 하였거늘, 지금 향리와 토호들이 중간에서 장부를 농간하여 왕토의 백성 절반을 호적 밖으로 빼돌리고 있사옵니다! 조정의 재정이 부족하여 팔도를 당장 다 살필 수는 없으나, 민란의 진원지인 진주목 한 고을에서 시범적으로 호구실사를 시행하여 환곡과 군포의 거짓 장부를 바로잡고자 하옵니다. 이는 수령칠사의 “호구증 부역균(戶口增 賦役均)”의 도리를 세우고, 백성의 실상을 살펴 기근과 역병을 구제하고자 전하께 누락 없는 백성을 바치는 중요한 의례이옵니다!” 민란 진원지에서의 시범 조사라는 현실적인 규모와 성리학적 애민이라는 웅장한 도덕적 명분 앞에, 비변사의 수구 대신들도 감히 반대하지 못하고 시범 시행을 윤허했다. ‘좋아, 대의명분은 통과했다!’ 다음은 시범사업 차례였다.   보고서 문란의 도구가 된 통계 전권을 쥐고 진주로 내려온 구성은 즉시 프로이센식 종이 기계를 가동했다. 그는 호적대장이라는 두껍고 조작하기 쉬운 책자 대신, 1인당 1장씩 배정되는 규격화된 한지 쪽지인 개별 계수표 수만 장을 찍어냈다. 오직 이름, 실제 나이, 성별, 그리고 밥을 지어 먹는 거처만을 단순화한 기호로 적도록 했다. 문제는 현장 조사와 집계 인력이었다. 진주 토호들의 위세가 서슬 퍼런 마당에, 동네 사정을 잘 아는 서당 훈장이나 몰락 양반들에게 조사를 맡겼다간 문중의 압력에 굴복해 은닉 인구를 도로 지워 버릴 게 뻔했다. 과거 현장실습 때도 인간의 이해관계를 얕봤다가 쓴맛을 보았던 구성은 순진하게 굴지 않았다. 토호들의 압력을 차단하기 위해 구성은 현장 채록과 내부 집계를 분리하는 블라인드 분업 체계를 짰다. 가택을 방문하는 현장 채록은 연고가 없는 관군과 외지 군관들에게 맡겨 토호들의 입김을 원천 차단했다. 관아 너른 마당의 집계 작업에는 몰락 양반 부녀자와 서당 학동들을 투입하되 출신 면과 작업 구역을 교차 배치했다. 이들은 오직 점과 선으로 암호화된 성별과 나이 기호만 확인하고 바둑판 궤짝 속으로 계수표를 던져 넣는 단순 분류만 반복했다. 다른 조가 저울로 무게를 달아 교차 검증하는 시스템 덕에 보복이나 눈치 볼 틈 없이 수만 장의 카드를 기계 부품처럼 착착 분류해 냈다. 한 달 반 동안 부녀자들과 학동들의 손을 거쳐 집계된 결과는 기대 이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진주목의 실제 거주 인구는 공식 호적에 올라 있던 수의 두 배를 훌쩍 웃돌았다. 현대 기준으로 보기엔 빈틈이 제법 보이는 결과였지만, 관아가 날조한 가짜 장부의 허구성을 까발리기에는 차고 넘쳤다. “오차를 감안하더라도 관아 장부 밖으로 누락된 실제 인구가 공식 호적보다 배 이상 많습니다. 이제는 소수의 빈민들에게만 고을 전체의 세금을 부과하던 총액제의 악습을 끊어내야 합니다!” “허허… 박 영감, 참으로 귀신같은 재주요.” 비변사 당상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음산하게 웃었다. “진주 한 고을에서만 누락된 인구가 이토록 쏟아져 나왔단 말인가! 전하의 교화 밖으로 도망쳤던 자들이 이리 많았다니, 나라의 곳간을 채울 복이 넝쿨째 굴러온 셈이구려.” “…예? 호판 대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무슨 말이긴! 그동안 삼남에서 걷히지 않아 생긴 군포와 환곡의 결손분이 얼마요? 진주목에서 이렇게 많은 숨은 장정이 쏟아져 나왔으니, 당장 진주목의 응역호(납세 가구)를 배로 늘리면 되겠소!” “안 됩니다! 이건 조세를 걷기 위한 조사가 아니라 고을의 실정을 살피는 휼민의 점검일 뿐이라고 몇 번을 말씀드렸습니까! 여기에 세금을 매기면 백성들은 다 죽습니다!” 구성이 사색이 되어 소리쳤지만, 호조판서는 콧방귀를 뀌었다. “박 영감이 부역균이라 하지 않았소? 군역을 면해주고 환포를 탕감해 주자고 이 난리통에 사람을 셌단 말이오? 호조 곳간이 바닥났는데 그런 한가한 소리가 나오시오?” 후기 숫자 말고 현실을 보라 호조판서의 콧방귀와 함께 판이 뒤집혔다. 조정은 인구조사 결과를 들이밀며 진주목의 군포와 환곡 총액을 두 배로 후려쳤다. 많은 백성들에게 호적 누락은 살인적인 총액 수탈 속에서 마을 전체가 짜고 쳐서 숨통을 틔워 둔 관행화된 생존선이었다. 그런데 안핵사라는 자가 와서 세금과 무관한 조사라며 안심시키더니, 그 결과를 구실 삼아 진주목 전체에 배로 불어난 세금 올가미를 씌워버린 꼴이 된 것이다. “관아 놈들이 기어코 우리 목구멍을 째러 왔다!” “박규수 그 간악한 놈이 우리를 팔아넘겼다!” 죽창과 횃불이 다시 타올랐다. 이름과 집이 낱낱이 털려 빠져나갈 구멍조차 사라진 백성들은, 제 손으로 가옥을 불태우고 지리산 골짜기로 야반도주했다. 통계조선의 유토피아가 와르르 무너졌다. 피 묻은 격문이 뒹구는 텅 빈 집무실에 주저앉은 구성의 등 뒤로 익숙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영감… 왜 또 이 꼴입니까? 통계 자체는 오차를 감안해도 기가 막히게 뽑혔다고요!” 산신령이 곰방대로 바닥을 ‘탁’ 치며 껄껄 웃었다. “쯧쯧, 숫자가 딛고 선 현실은 보지 못했느냐? 조선 백성들에게 호적 누락은 가혹한 수탈 속에서 살아남으려 친 실낱같은 방어막이었거늘, 착취에 눈이 먼 권력자들이 통계를 얌전히 개혁에만 이용할 줄 알았더냐?” 산신령의 지팡이가 구성의 이마를 툭 건드렸다. “중앙의 수탈을 제어할 시스템도 없이 숫자만 덜컥 던져줬으니, 네놈의 잘난 데이터가 백성의 목을 조르는 올가미가 된 게지. 허나…” 산신령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기계 만능주의를 버리고 현실화할 수 있는 종이 도구와 분업망을 택한 점, 그리고 성리학적 명분론을 뚫고 은닉 데이터를 실증해 낸 솜씨는 제법이었다. 이번에도 성적은 B+다.” 구성은 덤프트럭에 치이고, 똥물을 뒤집어쓰며, 뱃멀미로 토하거나 얼굴에 먹 칠갑을 하고도 정신을 못 차린 맑은 눈의 광인이었다. 뇌세포 한 톨이라도 정상이었다면 현장실습은 물론이고 애초에 지옥 같은 대학원에 원서를 들이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바들바들 떨리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두고 봐라, 산신령 영감탱이. 다음 번엔 칼 갈고 A+ 받아서 이 강제 실습 당장 종강시키고 만다!” 

1 1871년 프로이센 인구 조사에서 사용된 계수표. 간단한 정보를 요약한 표를 통해 프로이센은 인구 조사를 빠르고 정확하게 시행할 수 있었다.

2 호구단자. 조선시대, 호주가 자기 집의 상황을 적어 관에 제출한 문서다. 이 호구단자는 1825년(순조 25년) 전북 부안현의 호주 김용관의 것으로, 아내, 어머니, 어린 아들, 29명의 노비에 관한 내용이 기록됐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 후기의 화가인 김홍도가 그린 풍속화인 ‘벼타작’. 열심히 타작하는 농민들 뒤로 편한 자세로 구경 중인 양반이 보인다. 조선 후기, 국가 재정을 뒷받침하는 세 요소를 ‘삼정’이라 불렀다. 이 제도가 흔들려 조선 사회 내부의 불만이 쌓이던 현상을 ‘삼정의 문란’이라 부른다.

 

현재환 교수와 소설 뜯어보기

조선의 호적과 인구 조사 조선 시대에 호적은 3년마다 한 번씩 작성됐습니다. 국역(군역·부세)을 징발하기 위한 기초 장부였습니다. 18세기 이후 군현 단위로 세액을 고정하는 총액제(비총제)와 면리 단위의 공동납이 정착되자, 관아는 배정된 호총을 맞추기 위해 실제 거주 가구가 아닌 장부상의 편제호를 중심으로 호적을 관리했습니다. 이러한 부세 중심의 호정은 1896년 9월 ‘호구조사규칙’ 제정으로 전환점을 맞습니다. 그러나 실제 거주 단위인 자연가가 호구조사에 전면적으로 반영된 것은 1906년 통감부의 경찰력을 동원한 실지조사 이후였습니다. 그리고 1922년 조선호적령 제정을 통해 신분 관계를 근대적으로 파악하려는 시도가 본격화됐습니다. 다만 일제강점기 동안 도입된 이 제도는 대한민국 초기 민법으로도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호주제가 2005년의 헌법불합치 결정을 거쳐 2008년에 가족관계등록제도로 대체되기 전까지 가부장적 질서를 강제하는 가족법상 불평등의 근원이 됐습니다. 컴퓨터 이전의 정보 혁명: 종이 기계와 인구 통계 흔히 우리는 정보화와 정보 혁명이 20세기 전자식 컴퓨터의 출현 때 일어났다고 상상합니다. 그러나 독일의 역사학자 크리스틴 폰 외르첸은 1860~1870년대 프로이센의 인구조사가 이미 현대적 데이터 혁명의 핵심 조건을 완성했다고 주장합니다. 프로이센 통계국은 두꺼운 장부에 사람들을 줄줄이 적던 과거의 방식 대신 개인 한 사람의 정보를 규격화된 한 장의 종이에 담는 계수표라는 종이 도구를 창안했습니다. 이 종이 카드는 이동 가능한 데이터 매체였으며, 수작업 분업망을 통해 분류·집계되는 거대한 ‘종이 기계’로 작동했습니다. 프로이센의 사례에서 데이터 처리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전자기계 장치가 아니라 정보를 개별화·추상화해 조작할 수 있게 한 종이의 물질성과 분류 체계라는 지적·물적 인프라였습니다.

 

 공구성의 노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글들 Christine von Oertzen, “Machineries of Data Power: Manual versus Mechanical Census Compilation in Nineteenth-Century Europe,” Osiris 32, 2017. 이유진, “19세기 말·20세기 초 정부의 호구 파악과 관리” 사학연구 제154호, (2024). 권내현, “조선 후기 호적, 호구의 성격과 새로운 쟁점” 한국사연구 제135집,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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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글

    현재환 서울대 학부대학 및 과학학과 교수
  • 에디터

    이창
  • 만화

    신성호
  • 디자인

    박주현, 이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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