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예습
잠 깨려 세수하다 떠오른 공중보건 개혁안
공구성은 화장실 세면대의 찬물을 틀어놓은 채 멍한 표정으로 손을 갖다 대고 있었다. 수업을 듣다 잠이 쏟아지는 걸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정신을 차리러 나온 것이다.
“어제 밤새 꼬박 독서 노트를 썼더니 멘탈이 바스러지겠네…. 어?”
구성은 정면 거울 앞 귀퉁이에 붙은 낡은 코로나19 예방수칙 스티커를 발견했다. “손 씻기, 기침 예절, 마스크 착용… 코로나 끝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붙어있담.” 찬물로 세수를 해도 현생의 수업 내용보다는 앞으로 찾아올 회귀 퀘스트에 대한 생각이 먼저 피어올랐다.
“그래, 생각해 보니 공중보건 개혁은 스킬트리를 안 탔네? 지난번 채제공 때도 내가 빙의하기 몇 년 전이긴 했지만, 전국에서 홍역 유행으로 수십만 명이 죽어 나가고, 문효세자까지도 홍역으로 사망해 난리도 아니었잖아.”
갑자기 누가 뒤에서 어깨를 두드렸다. “흐아암, 교수님은 독서 과제를 왜 이리 많이 내주시냐. 클로드도 못 쓰게 하시면서… 나도 눈꺼풀이 무거워서 나왔다. 근데 채제공이니 빙의니 또 뭔 웹소설 헛소리를 혼자 중얼거리냐?” 친구가 하품을 쩍 하며 말했다.
“야, 우리 시대도 기후위기랑 팬데믹이 문제인데, 조선시대도 똑같지 않았겠어? 위생 문제 해결로 인구를 폭발시키고 건강한 백성들을 양성하는 게 근대화물 웹소설의 필수 스타팅 포인트 중 하나라고. 그나저나 교수님이 읽을거리로 준 책에 대한 설명 들어보니까 나 완전 거꾸로 읽었던데, 하….”
수업 과제에 대한 푸념보다 웹소설에 찌든 친구의 그럴듯한 설명이 공구성의 구미를 당겼다. “오오, 회귀하며 나도 모르게 키워 온 마음속 유교 드래곤이 포효한다! 위생 개혁이야말로 진정한 위민(爲民) 정신이라고!”
“아, 얘는 진짜 왜 자꾸 이래.” 숨을 돌리고 강의실에 착석한 구성은 굳은 다짐이 무색하게 몇 분 지나지 않아 다시 꾸벅 졸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조선시대로 떠나는 현장실습이 시작됐다.
과제
함정 피해서 공중보건 개혁으로 건강조선 기틀 닦기

밖에서 본가 하인이 부르는 소리에 번쩍 눈을 뜨니, 공구성은 머리를 벼루에 처박은 채 엎어져 있었다. 얼굴은 온통 먹 칠갑이었다. “아, 진짜 스폰 위치 한번 더럽네! 똥 냄새나던 염초 실습 때 다음으로 최악이잖아.” 구성이 투덜대며 눈에 보이는 천 조각으로 얼굴을 닦았다. “킁킁, 이거 걸레인가, 냄새가….”
“사또, 이원풍이라는 의원이 홍진(紅疹·홍역의 옛 표기)에 대해 나눌 말씀이 있다며 당도하였사옵니다.”
“흠흠, 내가 의관을 정제할 터이니 조용히 대화할 수 있게 책방으로 들라 일러라. 세숫물도 좀 떠오고.” 몇 번 양반으로 회귀했다고, 이제는 아랫사람을 부리는 폼이 제법 자연스러워진 구성이었다.
구성은 세수를 하며 머릿속에 밀려오는 빙의 대상의 정보를 재빠르게 동기화했다. “그래, 나는 유의(儒醫·선비 출신 의사) 홍욱호이고, 이원풍은 마진(麻疹·홍역의 또 다른 옛 표현) 전문 의원이구나. 이원풍은 역관 출신 중인이지만 ‘나’와 같은 내의원 소속 의약동참을 지낸 뛰어난 의원이지. 신분은 달라도 의학으로는 뜻이 통하는 베프였어. 마침 같이 홍역 임상 실무서를 쓰던 중이었네? 홍역도 호흡기 감염이니까 마스크랑 손 씻기 내용만 책에 쓱 끼워 넣으면 끝이잖아? 이번 퀘스트 난이도 실화냐? 꿀 빨겠…! 어흠, 이 의관, 어서 오시오.”
홍역은 홍역 바이러스에 호흡기가 감염돼 발생하는 급성 호흡기 감염병이다. 고열, 기침과 함께 온몸에 붉은 발진이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요즘에야 예방접종을 통해 쉽게 예방할 수 있다지만, 전염성이 높아 과거에는 마을에 한 사람만 감염돼도 빠르게 마을 전체에 병이 퍼지곤 했다. 홍역을 퍼트리는 존재를 ‘홍역귀’라는 귀신으로 인식했을 정도다. 1707년 4월, 평안도에 홍역으로 인한 사망자가 1만여 명 발생하고, 1730년에는 한양 인구가 20만 명이던 시절에 1만 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이렇듯 한번 퍼지면 피해가 막심하니 조선 사람들이 홍역에 관해 이렇게 심각하게 반응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사랑방에 마주 앉은 이원풍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홍 현감,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먼저 지난번 물난리에 유실되었다며 탄식하셨던 저희의 ‘마진휘성’ 한 질과, 요새 의원들 사이에 비기로 돌고 있다던 홍진 의서 ‘마과회통’을 어렵사리 구하여 가져왔습니다. 저자가 뉜지는 명확지 않습니다.”
공구성은 실학박물관에서 국내 최초로 우두법을 소개한 정약용의 책으로 마과회통이 전시되어 있던 게 떠올랐다. 정약용이라면 당대 최고의 셀럽일 테니, 그의 이름과 서학의 위명을 빌려 공중보건 수칙의 권위를 높여야겠다 싶었다.
“오오, 다산 정약용의 책이구려! 마침 우리가 새로 쓰려는 홍진신방을 위해 내 서학의 책들을 읽고 궁구하다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원풍의 안색이 파랗게 질리며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 현감! 무부무군(無父無君)을 주장하는 역도와 그 사학(邪學)을 입에 올리시다니요…! 소인은 방금 아무것도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요!”
아뿔싸. 순조 즉위 후 천주교를 탄압하는 신유박해(1801년)가 터져 일가가 몽땅 유배 가고 목이 날아가는 마당에 정약용과 서학을 찬양하다니. 입 한번 잘못 놀렸다가 로그아웃당할 뻔한 치명적 실수였다. 산신령 영감탱이가 지난 번 도량형 개혁 주차 회귀 때 미터법으로 함정 문제를 낸 것이 떠올랐다. 영감탱이 가만 안 둬!
관악산 산신령을 저주하며 구성은 황급히 태세를 전환했다. “크흠흠! 역시 이 의관은 현명하오. 흐핫핫핫! 그 사특한 학문 따위는 참고할 게 하나도 없지! 아무렴, 그렇고말고. 으흐흠, 그나저나 최근에 궁구해 보건대, 홍진 같은 역병을 막기 위해서는 각자 양생을 잘하는 것뿐만 아니라 남에게 병을 옮기지 않는 방도도 필요하지 않겠소? 예를 들어 사람들이 붐비는 저잣거리를 다녀오면 흐르는 물에 손을 씻는다거나, 코와 입을 두터운 면포로 단단히 가리고 나간다거나….”
이원풍이 현감 어른이 드디어 노망이 났나 싶은 표정을 지었다. “예? 가뜩이나 가물어 물도 부족한데 그 귀한 물로 손을 왜 씻습니까? 코와 입은 또 무슨 연유로 가리고요? 한여름에 숨통을 틀어막아 몸의 화기(火氣)가 치솟으면 도리어 병이 나지 않겠습니까? 아니, 무엇보다 그것들이 당최 홍진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요?”
공구성은 이원풍의 홍진 발병 원인에 관한 일장 연설을 들으며, 세균의 개념조차 없는 세계관에서 공중보건의 ‘상식’을 주입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달았다.
“현감께서도 익히 아시다시피, 홍진은 운기(運氣)가 불순해지며 천지를 떠도는 천행여기(天行癘氣)가 원인 중 하나입니다. 거기에 태아 시절 비장과 폐에 쌓여 있던 태독(胎毒)이 더해지지요. 체내에 쌓인 열이나 심장의 화기가 폐를 뜨겁게 달구면, 독기가 피부와 모공으로 쫓겨 올라와 붉은 발진이 돋는 것입니다. 피부와 털을 주관하는 장기인 폐에 태독과 사기(邪氣)가 영향을 주어 일어나는 병리 현상인데, 입만 가린다고 막아지겠습니까?”
몸과 환경의 관계, 그리고 병인론 자체가 과학사학자 토머스 쿤이 이야기한 패러다임의 공약 불가능성 그 자체였다. 어디서부터 실타래를 풀어야 할지 까마득해진 공구성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허어… 내 오늘 몸이 편치 않아 흰소리가 많은 것 같소. 멀리까지 찾아와 주어 고마우나 홍진신방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합시다. 어서 들어가 쉬시오.”
보고서
마스크는 커녕 한 사람도 설득하지 못하다니
축객령(마음에 들지 않는 손님을 돌려보낼 때 하는 명령)을 내린 후 앞에 놓인 마과회통을 노려보며 머리를 쥐어뜯던 공구성은 서가에 꽂힌 의서들로 시선을 옮겼다.
“지금까지의 회귀 교훈은 결국 그 시대 장인과 학인들의 지식과 패러다임을 이해하고, 그들의 언어로 대화하라는 거였지. 좋아, 내 안의 한의학 스위치를 켠다.” 그 후로 며칠 동안 양지 현감 관아 책방의 호롱불은 꺼질 줄 몰랐다.
얼마 뒤 공구성은 이원풍에게 자신만만하게 서신을 보냈다.
“내 일전에 받은 마과회통을 읽어보니 과연 훌륭하더이다. 특히 천행여기를 막기 위한 벽온(辟瘟, 전염병을 막다) 요법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소. 홍진이 유행할 때는 집 마당이나 우물가에 창출(한약재)과 소똥을 항시 태우고, 웅황(한약재)이나 참기름을 태워 냄새를 피워 강력한 양의 기운을 내 악한 기운을 벽예(辟穢, 흩어버리고 쫓아내다)해야 한다고 하오. 비록 홍진과 온역이 구별된다고 하지만, 구암(허준) 선생이 편찬한 ‘신찬벽온방’(1613)을 보아도, 온역을 앓는 집에서는 나쁜 기운이 생겨나고 이 기운을 코로 맡으면 경맥에 흩어져 병이 옮는다고 하지 않았소? 구암 선생 역시 온역 환자를 마주할 때 호흡을 주의하라 하였소. 그렇다면 아예 면포로 가리개를 만들어 코와 입을 가린다면 사기의 침입을 막을 수 있지 않겠소? 유행 시기에 안면 가리개를 쓰게 한다면 능히 전염을 막을 것이니, 이를 홍진신방에 꼭 넣었으면 하오.”
“야, 이 정도면 나 조선시대 의원 패치 완벽하게 된 거 아니냐? 아버지가 주말마다 드라마 허준 재방송 보실 때 옆에서 64부작 강제 정주행한 짬이 이렇게 쓰일 줄이야. 후훗.” 구성은 한의학을 답습한 자신의 흠잡을 데 없는 논리 전개에 취해 답신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의 자신감은 이원풍의 답장을 읽고 처참히 박살 났다.
“소인, 현감의 혜안에 놀랄 따름입니다. 허나 홍진이란 무릇 아해들이 앓는 병이온데 안면 가리개는 어찌 어른들까지 써야 합니까? 무엇보다 천행여기가 태독을 만나 홍진이 일어날 때, 폐는 피부 전체를 관장하므로 땀구멍과 모공으로도 사기가 쉴 새 없이 드나듭니다. 코와 입만 답답하게 틀어막는다고 기운이 안 통하겠습니까? 도리어 체내의 화기가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해 태독이 들끓어 아이들이 숨통이 막힐 것입니다. 함부로 구멍을 틀어막아 독을 가두지 말고, 맑은 약초로 속열을 서늘하게 다스리며 기운을 바깥으로 순환시켜 빼내는 것이 의리(醫理)에 합당합니다.”
서신을 팍 구겨버린 공구성이 뒷목을 잡았다. “아니, 땀구멍으로 바이러스가 왜 들어가! 드라마 ‘킹덤’에서는 다들 천 쪼가리 잘만 가리고 다니던데! 고증 붕괴 실화냐! 아씨, 나 안 해! 사극 다 망해버려라!” 씩씩대며 서안을 엎어버리려는 찰나, 허공에서 익숙한 헛기침 소리와 함께 수염을 쓰다듬는 산신령이 나타났다.
“허허… 그래도 냅다 현대 의학의 잣대만 우겨넣던 과거와는 달리, 조선 학인들의 세계관 내에서 설명하려고 애쓰는 꼴을 보니 아주 허투루 구른 건 아닌가 보구나. 이전에 김석문을 만났을 땐 서양 천문학을 성리학적 우주론으로 풀려는 걸 이해 못 하고 화병으로 죽으려 하더니, 이번엔 제법 그들의 패러다임 안에서 소통하려고 애쓰는구나. 비록 실패했지만, 그 시대의 문법을 존중하려 한 점을 가상히 여겨 노력상으로 C학점을 주마. 다음번엔 진짜 공중보건이 뭔지 제대로 보여주거라.” 산신령의 얄미운 웃음소리와 함께 눈앞이 다시 흐릿해지며 짙은 어둠이 밀려왔다.
“아니, 잠시만요! 이거 의학사 수업이었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의대나 한의대에 갔지!” 공구성이 허공을 향해 처절하게 핏대를 세웠다. 어둠 속에서 이미 사라졌나 싶었던 산신령의 시큰둥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날도 더운데 서책방에 처박혀 붓대나 굴리더니 배가 불렀지. 다음번엔 아주 현장에서 제대로 굴러봐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아닙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의학사에 뼈를 묻을 소명 의식을 품고 있었습니다!”
현재환 교수와 소설 뜯어보기
한반도에서 마스크는 언제부터 사용했을까?
퓨전 사극 등을 보면 전염병이 돌 때 의원과 의녀들, 그리고 포졸들이 코와 입을 가리고 돌아다니는데, 실제로 이랬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조선을 포함한 동아시아에서는 전염병을 온역으로 이해하고, 역병을 유발하는 사기(邪氣)가 코와 입으로 침입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습니다. 정약용 역시 진료 시 환자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방향을 주의하라고 권고했죠. 그러나 코와 입을 직접 천으로 가리는 행위는 하지 않았습니다. 사기는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있는 비말 같은 현대적 개념이 아니라 서구에서 근세까지 전염병을 유발하는 더러운 기체로 여기던 ‘미아즈마(miasma, 瘴氣)’에 가까운 것으로, 코와 입만 꽉 틀어막아서는 땀구멍 등 피부로 들어오는 사기의 체내 침투를 막을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한반도에서 일반인들 사이에서 전염병 예방을 위한 마스크 착용이 본격화된 것은 1918년 스페인 인플루엔자 팬데믹 이후입니다. 1920년대가 되어서야 오늘날과 비슷한 의미로 마스크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고, 독감이 유행할 때 마스크를 쓰는 관행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공기 감염을 일으키는 홍역 바이러스는 일반 면 마스크로 완전히 차단할 수 없지만, 소설적 상황상 구성이 면 마스크를 고안해 내는 것으로 작성했음을 밝혀둡니다.
| 공구성의 답답함에 공감하고 싶을 때 딱 좋을 글들
오재근, “조선 의원 이원풍(李元豊)의 마진 의서,『마진휘성(麻疹彙成)』연구,” 대한한의학원전학회지, 2022.
신동원, “조선 후기 전염병에 대한 정약용의 대응 방식,” 다산학, 2022.
Jaehwan Hyun and Sungook Hong, “Technology and Posthuman,” Cambridge History of Technology, 20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