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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기사] 빈곤한 숲속의 풍요로운 연결, 공진화

     

    네펜데스개구리(Microhyla nepenthicola)

     

    길이    수컷: 약 12.8mm 안팎 암컷: 약 19mm 안팎
    서식지    보르네오섬 북부 저지대 일대
    특징    식충식물인 네펜데스아뿔풀과 공생 관계로 대부분의 시간 동안 항아리 모양의 식충용 잎(포충낭)에서 생활

     

    어릴 적 우리 집에는 ‘보르네오산 원목’이라고 적힌 가구가 있었다. 그래서 내게 보르네오는 마치 어느 신비로운 세계의 이름처럼 들렸다. 두껍고 단단한 나무가 자라는 곳, 거대한 숲이 끝없이 펼쳐진 곳이리란 막연한 상상만 키웠다. 어린 마음에 보르네오는 아마존처럼 멀고도 낯선 공간이었다.

     

     편집자 주 
    동남아시아의 보르네오섬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브루나이의 세 나라가 자리한 지구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이자 열대우림과 생물다양성의 보고입니다. 이번 새 연재에서는 생태학자인 장이권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교수가 보르네오섬 곳곳을 탐사하며 보고 들은 생존과 진화의 경이를 전해 드립니다.

     

    GIB

     

    원목 가구의 고향, 생물다양성의 현장


    생태학을 공부하면서, 보르네오는 멀고 낯선 세계의 이름으로 여겼던 어린 시절과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이제 이 이름은 ‘생물다양성이 세계에서 가장 풍부한 섬’이다. 보르네오오랑우탄, 피그미코끼리, 안경원숭이, 코주부원숭이, 라플레시아와 네펜데스, 그리고 아직도 이름조차 붙지 않은 수많은 생물이 살아가는 거대한 생명의 무대가 바로 보르네오다. 대학원 시절부터 언젠가 반드시 보르네오의 숲을 직접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잊지 않았다. 19세기 영국의 생물지리학자인 알프레드 월리스처럼 말이다. 생태학자로 살면서 보르네오는 늘 마음 한편에 자리한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꿈이 이루어졌다.


    2024년과 2026년, 두 차례에 걸쳐 보르네오를 탐사했다. 어린 시절 원목 가구에 붙은 작은 상표에서 시작된 만남과 호기심이 어느새 생태학자의 연구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막상 보르네오 숲에 들어간 나를 깜짝 놀라게 한 것은 이곳의 희귀한 동물, 거대한 식물만이 아니었다. 이 섬 보르네오의 진짜 비밀은 수많은 생물이 서로 얽히고 의존하며 만들어 낸 특별한 연결, 그 자체였다.


     보르네오의 중간쯤에 적도가 지나가고, 섬 전체에 걸쳐 열대우림이 잘 발달했다. 광대한 면적, 열대 지역의 안정적인 기후, 풍부한 강수량 덕분에 보르네오는 흔히 ‘생물다양성의 보고’라고 불린다. 이 섬 전체에는 1만 5000종이 넘는 식물과 수백 종의 포유류, 조류, 양서류, 파충류가 함께 살아간다.


     
    풍요 속의 빈곤이 연출한 진화 드라마


    하지만 이 풍요로운 숲의 땅속으로 들어가면 의외의 결핍을 만난다.


     열대 지역은 비가 많이 내린다. 풍부한 강수량은 울창한 숲을 만들지만, 토양 속 영양분을 계속 씻어내는 원인이기도 하다. 특히 보르네오섬 사라왁 지역의 넓은 이탄습지는 산성도가 높고 산소가 부족한 토양이어서 유기물이 매우 느리게 분해된다. 낙엽이 쌓여도 식물의 성장에 필요한 토양 속의 질소와 인은 부족하다. 겉보기에 생명이 넘치는 숲이지만, 그 기반은 영양실조 상태인 셈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런 빈약함이 오히려 놀라운 진화를 만들어 냈다. 자원이 풍부하면, 남들과 비슷하게 살아도 생존할 수 있다. 그러나 자원이 부족하면 남들과 다르게 살길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식물들은 곤충을 잡아먹거나, 다른 식물의 몸속에 숨어서 사는 전략을 택하기 시작했다. 또 어떤 동물은 남들이 쓰지 않는 작은 공간을 삶의 터전으로 삼기도 했다. 보르네오섬의 빈약한 토양은 여러 생물이 더 깊게 얽히고 연결되도록 이끈 원동력이다. 

     

    라플레시아(Rafflesia arnoldii)

    꽃 지름    1m 안팎
    꽃 무게    11kg 안팎
    서식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일대 열대우림
    특징    세계에서 가장 큰 꽃을 피우는 것으로 잘 알려진 기생 식물로, 꽃에서 나는 썩은 고기 냄새로 파리를 유인해 꽃가루를 옮김
        사진은 냄새에 이끌린 파리와 초파리들이 모여서 꽃가루를 옮기고 있는 라플레시아꽃의 안쪽을 확대한 것


    식충식물 속에서 평생 사는 개구리 


    이 연결의 첫 주인공은 네펜데스개구리(Microhyla nepenthicola)다.


    2024년 보르네오섬 북부의 말레이시아 사라왁주 쿠칭에서 열린 세계양서류학회에 참석했다. 낮에는 학술 발표, 토론이 이어졌고 밤이면 학회 참가자들은 쿠칭의 공원, 아니면 도시 인근의 열대우림으로 향했다. 우리는 원주민의 안내를 받아 쿠칭 시내에서 15km 정도 떨어진 숲을 탐사했다. 목표는 네펜데스개구리였다. 이 개구리는 몸길이가 겨우 1cm 남짓이다. 그러나 이 개구리의 특별함은 크기만이 아니다. 사는 장소야말로 많은 사람이 이 개구리를 찾는 이유다.


     네펜데스개구리는 벌레잡이통풀속(Nepenthes)의 대표적인 식충식물인 네펜데스 안에서 산다. 네펜데스는 영양이 부족한 토양에서 살기 위해 잎을 항아리처럼 바꿨다. 곤충을 꽃향기로 유인하고, 항아리 안으로 떨어지면 소화액을 분비해 질소와 인을 얻는다.


    그런데 우리가 찾은 네펜데스는 조금 달랐다. 보르네오의 저지대 숲에 흔한 네펜데스아뿔풀(Nepenthes ampullaria)이었다. 숲 바닥의 둥글고 통통한 항아리들 속에는 곤충보다 낙엽이 훨씬 많았다. 이 종은 곤충을 적극적으로 노리기보다 낙엽을 모아 영양분을 얻는다. 식충식물이라기보다 숲의 유기물을 모으는 작은 그릇에 가깝다.


    비가 내리는 밤, 손전등으로 항아리 하나하나를 들여다봤다. 열대우림의 밤은 생각보다 훨씬 어둡다. 불빛이 닿는 곳만 존재하는 것 같다. 처음에는 모든 항아리가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계속 살펴보자 네펜데스 하나하나가 작은 생태계였다. 항아리들은 저마다 낙엽만 가득하거나, 모기 유충이 헤엄치거나, 작은 거미가 가장자리에 집을 짓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항아리 안에서 작은 그림자가 움직였다. 빛을 비추자 네펜데스개구리가 재빨리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네펜데스아뿔풀이 네펜데스개구리를 품을 때 얻는 이익은 확실치 않다. 올챙이나 개구리의 배설물에서 양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늘 물이 고여 있고 알과 올챙이를 노리는 포식자는 거의 없는 네펜데스의 항아리는 네펜데스개구리에게 최상의 장소다.
    더 놀라운 장면은 2026년에 찾아왔다. 세멩고 야생생물 보호구역 인근에서 다시 네펜데스를 조사하고 있었다. 그때 한 항아리에서 네펜데스개구리의 올챙이를 발견했다. 다른 항아리에는 알도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네펜데스개구리의 성체뿐 아니라 알, 올챙이까지 이 생물의 전 생활사를 한자리에서 관찰했다. 그 순간, 개구리에게 이 작은 항아리는 그저 은신처가 아니라, 개구리의 산란장이고 유치원이며 그의 일생을 함께하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양이 부족한 토양에서 네펜데스가 자신을 위해 만든 작은 물웅덩이가, 결과적으로 개구리에게 진화적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장이권의 탐험 노트: 공진화

    공진화란 서로 연결된 생물들이 오랜 시간 동안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함께 진화하는 과정이다. 위의 사진처럼 네펜데스개구리가 올챙이 때부터 성체가 된 후까지 네펜데스아뿔풀에서 사는 공생 관계, 또는 장내 미생물과 그 숙주 동물의 관계가 공진화의 예다. 공진화에서 한 종의 변화는 다른 종의 변화를 이끌고, 그 변화가 다시 상대 종의 진화에 영향을 준다. 보르네오의 숲은 이러한 공진화의 연결이 수없이 얽혀 만들어 낸 거대한 무대다.


     
    작은 확률을 뚫고 피어나는 큰 꽃


    보르네오섬이 진화시킨 생태계의 연결을 다시 만난 곳은, 2026년 2월 말레이시아 보르네오섬의 구눙가딩 국립공원이다. 이번에 찾아간 보르네오의 생물은 세계 최대의 꽃으로 알려진 라플레시아였다.


    우리는 라플레시아를 거대한 꽃으로 기억한다. 이 꽃이 완전히 펼쳐지면 지름이 1m 가까이 된다. 그런데 라플레시아는 잎도, 줄기도, 뿌리도 없다. 광합성도 하지 못한다. 포도과 식물인 테트라스티그마(Tetrastigma spp.)의 조직 속에 숨어 살며 영양분을 얻어 낸다. 


    라플레시아의 삶은 긴 기다림이다. 라플레시아 씨앗은 숙주 식물에 침투하고 무려 수년 동안 보이지 않는다. 이후 꽃봉오리가 형성되고서도 8개월 이상 성장한다. 하지만 이 긴 시간을 견뎌도 대부분은 밖으로 꽃을 피우지 못한다. 가이드인 안토니아는 구눙가딩의 숲 여기저기로 우리를 안내하며 다양한 연령대의 꽃봉오리들을 보여줬다. 그는 이들 대부분은 꽃을 못 피울 것이라고 말했다.


    다람쥐가 어린 라플레시아 봉오리를 갉아 먹는다. 이때 난 작은 상처로 병원균이 침입하면 봉오리가 죽는다. 흰개미가 꽃 속 조직에 파고들어 성장을 방해한다. 폭우는 봉오리 주변의 흙을 쓸어내고 조직도 손상시켜 부패를 부추긴다. 숲을 헤집는 멧돼지가 봉오리도 짓밟거나 먹어 치워 수년을 준비한 개화를 한순간에 망친다. 숲속 곳곳의 무수한 라플레시아가 꽃 피울 확률은 20%도 되지 않는다.

     

     

    생존 경쟁의 빈틈을 채운 공진화의 힘  


    우리가 만난 가장 큰 라플레시아 꽃은 개화한 지 9일째였다. 붉은 꽃잎은 이미 힘을 잃은 채 축 늘어졌고, 꽃 중앙에 수많은 파리가 모여들었다. 이 꽃은 썩은 고기 냄새로 곤충들을 유인한다. 사람의 후각에는 아주 불쾌하지만 파리에게는 더없이 매력적인 신호여서, 파리들이 이 꽃 사이를 오가며 꽃가루를 옮긴다. 라플레시아 꽃보다도 이 꽃을 둘러싼 관계들이 더 흥미로웠다. 라플레시아는 숙주 식물 없이는 살 수 없다. 화분을 매개하는 곤충이 없으면 번식도 할 수 없다. 번식의 결과인 씨앗이 새 숙주에 침투하지 못하면 다음 세대도 없다. 이 거대한 꽃은 보르네오의 생물들과 연결돼야만 살 수 있다.


    영양이 부족한 토양에서 식충식물이 진화했고, 그 식충식물은 개구리의 삶터가 됐다. 어떤 식물은 기생 전략을 선택해 다른 식물 속에서 살아간다. 곤충들은 이 기생 식물들의 번식을 돕는 핵심이 됐다. 보르네오 숲의 생물들은 생존 경쟁과 함께, 서로 의존하고 이용하며 때로는 새로운 생태적 공간까지 만들어서 공존해 왔다. 이처럼 생물들이 다양한 연결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그 관계 속에서 함께 적응하고 변화해 가는 과정을 공진화(coevolution)라고 한다.


    우리는 보르네오에서 개구리와 꽃을 잇는, 보이지 않는 망을 만났다. 이 연결망이야말로 어린 시절부터 상상했던 원목가구의 보르네오섬이 간직한 진정한 비밀인 듯하다. 

     

     장이권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교수. 진화적인 관점에서 동물의 행동과 생태를 연구하고 있으며, 특히 소리를 이용해 의사소통하는 곤충, 개구리, 새 등의 연구에 관심이 많다. 일반 시민들과 연구자가 협업하는 시민과학에도 오랫동안 적극적으로 동참해 오고 있다. 저서로 ‘지금 자연은’ ‘하마는 왜 꼬리를 휘저으며 똥을 눌까’ 등이 있다. jangy@ewh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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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년 7월 과학동아 정보

    • 장이권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교수
    • 사진

      이원재
    • 에디터

      라헌
    • 디자인

      이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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