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집엔 아스트라제네카(AstraZeneca), 화이자(Pfizer), 한미약품 같은 대형 제약사 이름이 새겨진 볼펜과 포스트잇이 많았다. 이때부터 알러지 비염을 달고 살았는데, 콧물이 나고 눈이 가려워도 어머니가 주신 약을 한 알 먹고 잠깐 잤다 일어나면 증상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것이 늘 신기했다. 그렇게 막연하게나마 약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스타트업에서 인공지능(AI)으로 신약을 개발하는 연구자가 됐다.
유기화학에서 양자역학을 거쳐 AI까지
약과 그 작용 원리에 일찍부터 관심이 컸고, 여러 과학 과목 중에서도 화학을 가장 좋아했다. KAIST에 진학해 2학년에 신청할 학과를 고민할 때도 결국 마음이 이끈 대로 화학과에 갔다. 과학고에선 유기화학을 가장 좋아했지만, 화학과 첫 학기에 산신령 같은 아우라가 남다른 교수님의 물리화학 강의를 듣자마자 내 ‘최애’도 물리화학으로 바뀌었다. 물리화학은 수식과 물리학 이론으로 원자, 분자, 재료를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특히 양자역학 수식을 전개하면 교과서의 사진으로만 본 분 광학 스펙트럼까지 설명하게 되는 것이 흥미진진했다.
좋아하는 건 끝까지 파고드는 성격이어서, 양자역학을 더 공부하고 싶어 물리학을 복수전공했다. 대학원에서도 초반엔 양자역학 이론에 근거해 계산 프로그램의 개발 및 신소재 등의 발굴을 연구했다. 하지만 2025년에 100주년을 맞은 양자역학은 말하자면 ‘고인물 학문’이어서 연구자로서 새로운 발견이나 학문적 성과를 이루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2016년 이세돌과 AI 알파고의 대국을 보며 AI에 관심을 가졌다. 마침 계산화학과 AI를 접목하려는 연구들이 증가한 시기였다. 하지만 2016년 무렵엔 삼각형, 사각형, 육각형의 분자들을 다룰 때 어떤 신경망 모델이 적합한지 학계의 합의조차 없었다. AI란 연구 수단이 새로 생겼지만 그에 적합한 사용법은 정리되지 않았던 셈이다.
그래서 분자 구조를 그래프로 표현해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그래프 신경망(GNN·Graph Neural Network)부터 시작했다. 또한 사진이나 문서를 다루는 AI와 달리, 신약개발 분야에서 공개된 실험 데이터는 수천~수만 개 수준에 오류도 많아, 신뢰 가능한 신약개발 AI를 연구했다.
이런 연구를 하며 통계학과에서 AI를 연구 중인 대학 시절 친구와 오랜만에 연락이 닿았고, 이를 계기로 공동 연구를 진행해 두 편의 논문을 함께 썼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란 말처럼 이 시대의 학문적 흐름이 AI로 통하는 까닭에, 수년간 연락이 끊겼던 친구를 로마로 가는 길에서 만난 듯했다. 시대적 변화에 부응하는 AI와 신약개발분야에 비교적 일찍 참여한 것은 내 연구 인생의 전환점이자 큰 행운이다.

AI의 시대에 신약개발을 연구하는 행운
2024년 노벨 물리학상은 AI의 이론적 토대를 닦은 존 홉필드와 제프리 힌턴이, 노벨 화학상은 단백질 구조 예측 AI인 알파폴드를 개발한 데미스 하사비스, 존 점퍼, 데이비드 베이커가 받았다. 2024년은 AI가 과학계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분야임을 인정받은 결정적 시기였다.
2024년 노벨 화학상의 주인공 알파폴드는 개별 단백질 구조를 넘어서서, 인체 속 여러 단백질끼리 생체 신호를 주고받으며 상호작용하는 3차원 구조까지 예측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최신의 알파폴드-3는 단백질-DNA, 단백질-RNA, 단백질-저분자화합물 같은 다양한 형태의 생체 내 분자들 간 상호작용 구조까지 예측해낸다. 이는 앞으로 단백질 수준을 넘어서 세포, 기관 수준의 모델링까지 이어질, 인 실리코(in silico, 실리콘 안에서 일어나는) 생물학적 모델링의 첫 걸음을 뗐다는 의미다.
내가 2021년부터 재직 중인 AI 신약개발 스타트업 갤럭스는 세계적 수준의 AI로 신약 후보물질을 찾는 ‘발굴 프로젝트’를 수행 중이다. 갤럭스에서 나는 약 3년간 저분자 화합물 신약후보물질을 발굴했고, 최근엔 단백질 구조의 예측 및 디자인을 수행하는 프로젝트에 합류했다.
또한 갤럭스에서 정부 과제 지원을 받아 AI로 디자인한 화합물을 합성하고 효능을 파악하는 공동 연구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오스코텍, 서울대와 수행했다. 단백질신약 설계 프로젝트에서도 항체 신약의 내성을 극복하고 더 높은 효능을 보인 후보물질을 AI로 디자인 및 검증하는 데 성공했다. 기존에 알려진 신약 후보물질의 구조 정보가 희박해도 목표 단백질(항원)에 결합할 단백질 구조를 디자인하는 드 노보(denovo) 기술의 고도화를 보여준 사례다.


더 많은 사람을 위한 연구와 교육의 꿈
나의 가장 큰 동기 부여는 ‘재미, 흥미’다. 어릴 때부터 좋아하는 과목에 몰입해 가장 잘하고 싶어한 너드, 괴짜에 가까웠다. 감사하게도 과학고 시절에 이런 너드에 가까운 적성을 키워주는 경시대회, 올림피아드, 연구활동 프로그램 등이 다양했고, 여기서 좋은 성과를 보여서 KAIST에 입학했고, 대통령과학장학금을 받았다. 좋아하는 것을 하다보니 좋은 결과도 얻은, 억수로 운이 좋은 사람인 셈이다.
좋아하는 AI와 신약개발을 연구하는 지금의 내 꿈은 “나와 우리 회사가 AI로 디자인한 후보물질이 신약이 되는 것”이다. 현재 AI를 적극 활용해 발굴한 신약 후보물질 중 개발이 가장 빠른 사례는 임상 2상 중이며 저분자 화합물 신약이다. 아직 갤럭스는 임상 단계의 후보물질이 없다. 하지만 항체와 같은 단백질신약을 발굴하는 우리 회사의 AI 기술은, 노벨 화학상을 받은 데이비드 베이커 미국 워싱턴대 교수 연구팀과 견줘도 손색이 없다. 이 기술로 발굴한 신약이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으면, 과학자로서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일 것이다.
꿈이 하나 더 있다면 대학 등에서 교육 활동을 하는 것이다. 과학고 시절부터 누군가에게 가르쳐주는 것을 좋아했고, 대학원생 때도 10학기 동안 조교 생활을 했다. 특히 ‘인공지능과 화학’이란 과목을 지도교수님과 개설해 강의와 튜토리얼을 준비했다. 이때 친해진 학부생들 중 현재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박사과정 중인 한 명과는 여러 편의 논문을 함께 썼다. 내가 가르친 학생이 MIT에 유학을 가서 세계적인 연구자로 청출어람했다는 데 기쁨과 자부심을 느낀다.
앞으로 더 잘 되기 위한 굴곡의 순간들
어릴 적부터 생각한 신약 연구를 하고 있지만, 진로에 대한 고민이나 방황이 없진 않았다. 박사과정 2년차에 첫 논문을 쓴 후, 드디어 논문을 출판했다는 기쁨보다 내 연구가 자랑스럽지 않다는 허무감이 먼저 들었다. 정말 감사하게도 지도교수께선 “힘들면 몇 달 놀고 쉬어라, 네가 다시 연구에 흥미가 생기면 그때 열심히 해라.”라고 말씀해주셨다.
또한 양자역학에서 AI로 연구 주제를 바꿀 때도 지도교수께선 흔쾌히 수락하시며, 연구실의 동료, 선후배들과 스터디를 해보라고 지원해 주셨다. 나름의 고민과 방황도 많았지만 지도교수님 덕에 AI 연구를 비교적 일찍 시작했기에, 돌아볼 때마다 운이 참 좋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의 행복한 연구 생활, 그중에서 자부심을 느끼는 연구 업적들이 오롯이 내 능력으로만 이룬 것이 아니라고, 슬럼프를 겪어도 “이번엔 운이 좀 나빴네. 앞으로 더 잘 될 거야.”라고 되새긴다. 과학자를 꿈꾸며 학업에 애쓰는 독자들이 굴곡을 맞을 때, 마냥 어려워하기보다 앞으로 좋은 일이 있으리란 긍정에너지를 갖고, 좋은 결과로 이어지면 도와주신 주변 분들께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길 바란다.

나만의 과학동아 활용법
Q.과학동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기사가 있나요?
집에서 ‘과학동아’를 정기구독했는데 어린 시절엔 그 내용을 모두 이해하긴 어려웠지만, 매달 공룡, 우주, 신약, 나노 신소재의 기사들을 접하며 발전해가는 과학에 호기심을 가진 기억이 난다.
Q.과학동아를 실제로 어떻게 활용하고 있나요?
현 시대의 과학기술 트렌드를 살펴보기엔 과학동아만한 매체가 없는듯하다. 두 살배기 아이가 조금만 더 크면, 어린이과학동아부터 구독해 함께보며 과학기술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내 아버지가 그러셨듯 말이다.
Q.과학동아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다들 과학을 재미있게 공부했으면 한다. 과학자의 꿈을 키워온 지난 20년 동안 신약, 나노 신소재, AI가 등장했듯 끊임없이 새 연구주제가 탄생한다는 점이야말로 과학의 가장 큰 매력이다. 과학자는 기존의 지식에서 새로운 기술과 지식을 창출해 세상을 바꾸는 데 일조한다. 그 변화의 가장 큰 원동력은 재미와 호기심이다. 작은 호기심으로 작은 성취를 쌓으며 재미를 느끼면, 결국 세상을 바꾸는 성취에 이르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