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vin Weiner
먹이를 기다리는 호랑거미과의 둥근 거미줄. 좌우로 펼쳐진 흰색 띠장식이 눈에 띈다. 오늘날 띠장식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편집자 주
두 명의 미국 네브라스카대 거미행동생태연구실 연구원들이 총 6화에 걸쳐 여덟 개의 다리를 가진 신비의 곤충, 거미의 비밀을 설명합니다. 아이린 헤버츠 네브라스카대 생물학과 교수가 감수했습니다.
어느 날 마블코믹스 ‘스파이더맨’의 광팬인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의 상상력으로 거미줄을 얼마나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지를 잘 그려낸 것 같아서 참 재밌어.” 친구와 스파이더맨의 주인공, 피터 파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거미 연구자가 보기에 스파이더맨의 거미줄 활용법은 그렇게 다양하지 않다.
거미줄은 거미목을 대표하는 특징 중 하나다. “거미줄을 만들지 않는 거미도 있다”는 설명은 오해의 소지가 크다. 모든 거미가 거미줄로 둥근 거미집을 짓지 않을 뿐, 모든 거미목의 생물들은 어떤 형태로든 거미줄을 만들고 이용한다. 거미줄의 주성분은 ‘피브로인’이라는 단백질이다. 거미의 배안에 있는 실샘에 있을 때 피브로인은 액체 상태다. 거미 배 끝에는 거미줄이 뽑혀 나오는 돌기인 ‘방적돌기’가 있는데, 피브로인이 이 방적돌기의 비좁은 출구를 지나 공기 중으로 나오면, 삼차원 구조가 재배열되면서 고체 상태의 실이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거미줄의 활용은 무궁무진하다. 5만 2000여 종에 달하는 거미목의 종 다양성 및 행동 다양성의 진화만큼이나 거미줄의 진화 및 다양성 또한 상상 이상이다. 심지어 한 종의 거미도 상황에 따라 다른 종류의 거미줄을 만들어 활용한다.
거미줄은 거미들에게 일생의 동반자다. 탄생부터 죽음까지 거미들은 거미줄을 쓰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다양한 종류의 거미들이 삶에서 거미줄을 얼마나 다양하고 능동적으로 사용하는지, 거미의 일생을 따라가 보자.
탄생 | 거미줄 안에서 태어나다
거미줄은 거미에게 탄생의 요람이다. 모든 거미는 거미줄 안에서 태어난다. 겨울을 나고 알에서 태어난 새끼들은 곧 엄마가 지어준 ‘두꺼운 천막 지붕’을 만나게 된다. 지붕의 정체는 알집이다. 알집은 거미가 만들 수 있는 가장 질긴 거미줄 구조물로, 방적돌기에서 점성이 없는 거미줄을 최대 이틀 동안 수천수만 번 알무더기 위에 덧대어 만든 것이다. 알집은 공기가 통하면서도 외부는 소수성, 내부는 친수성을 띤다. 소수성은 물과 잘 섞이지 않는 성질, 친수성은 물과 잘 섞이고 친화적인 성질이다. 그래서 알집은 내부의 알이 마르지 않으면서도 비바람에 젖지 않게, 겨우내 얼어 죽지 않게 보호한다.
새끼들은 이 알집 안에서 홀로 독립할 수 있을 정도로 몸이 단단해질 때까지 형제들과 함께 지낸다. 독립 준비가 되면, 단단해진 엄니로 어미의 작품을 차근차근 찢어 밖으로 나온다.
닷거미류들은 새끼들이 알집에서 나온 뒤로도 일정 시간 이상 어미가 곁에서 새끼를 돌본다. 이때 어미가 알집 근처에 새끼들이 오갈 수 있는 확장된 거미줄을 짓기도 하는데, 이것을 ‘보육 거미줄(Nursery web)’이라고 부른다. 어미는 새끼들이 독립 이전에 공격당하지 않도록 촉각을 곤두세워 지킨다.
Kevin Wiener
왕거미류의 알집. 가장 두껍고 내구성이 높은 거미줄을 덧대어 사람 손으로도 쉽게 찢을 수 없는 요람을 만들어 태어날 새끼들을 지킨다.
독립 | 거미줄을 타고 멀리 날아가다
대부분의 거미는 독립생활을 하는 포식자다. 어제의 형제도 조금만 더 자라면 나를 잡아먹을 수 있다. 때문에 서로 최대한 멀리 퍼지는 것이 생존과 먹이 경쟁 측면에서 유리하다. 독립을 준비하는 거미는 꽁무니를 공중으로 치켜들고,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가볍고 가느다란 거미줄을 여러 가닥 뿜어낸다. 이 거미줄은 작은 거미들이 패러글라이딩하듯 날 수 있게 해준다. 바람과 거미줄이 받는 정전기장이 거미줄을 위로 치솟게 만들면, 새끼 거미는 하늘을 날고 착지할 때까지 비행한다. 이런 분산 행동은 끈 달린 풍선(balloon)을 놓쳤을 때 날아가는 모습과 비슷해 영어로는 ‘벌루닝(ballooning)’이라고 부른다.
비록 목적지를 정하기는 힘들겠지만 새끼 거미는 거미줄을 타고 최대 100km 이상 이동하며, 4km 상공에서 발견된 적도 있다. 알프스산맥에서 가장 높은 마터호른(4.478km)와 비슷한 높이다.
Rick Malad
먼지거미류의 먹이 찌꺼기로 장식된 위장 거미줄. 먹이와 포식자들 모두에게 숨어버린 먼지거미의 위치를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사냥 | 사냥과 보관을 동시에
흔히 사람들이 거미의 사냥을 떠올릴 땐 운 나쁜 먹이가 거미줄에 매달린 모습만 상상하지만, 그에 앞서 거미는 거미줄로 더 능동적이고 복잡한 사냥 작업을 한다.
예를 들어, 먼지거미류는 사냥에서 자신에게 희생당한 먹이의 빈 껍데기를 버리지 않고 다음 사냥에 사용한다. 빈 껍데기를 손질하고 거미줄로 엮어 세로로 장식하는데, 자신 또한 이 껍데기 사이에서 세로로 정렬한 채 쉰다. 이는 훌륭한 위장 전략이다. 거미를 보고 거미줄을 피하려는 먹이와 거미를 노리는 포식자 모두 진짜 거미가 어디에 있는지 도통 알아채기 힘들다.
또한 먼지거미류는 큰 먹이가 거미줄에 걸렸을 때 다리로 거미줄을 몸쪽으로 당겨 튕기는 행동을 하는데, 이런 행동은 먹이가 점성이 있는 거미줄에 더 얽히게 만들어 사냥 성공률을 높이기 위함이다.
거미줄은 거미들의 냉장고이기도 하다. 거미는 대개 자신의 몸과 비슷한 크기의 먹이 하나로 1~2주 이상을 살 수 있다. 따라서 배부른 거미들은 먹이를 독니로 제압 후 거미줄로 포장해 붙여놓는다. 이는 먹이의 건조를 막고, 외부에서 곰팡이 포자 등의 유입을 막아 거미가 잡은 먹이에서 최대한의 영양소를 얻을 수 있도록 돕는다. 심지어 특정 종에서는 먹이를 포장하는 거미줄에 박테리아의 성장을 방해하는 항생물질이 있다는 연구도 있다(다만 해당 연구는 최근 반박 연구가 나오며 갑론을박이 활발하다). 사냥에 쓰이는 거미줄의 사용은 훨씬 기상천외하지만, 3월호에서 더 자세히 소개하겠다.
성장 | 안전한 탈피의 일등 공신
거미는 어느 시점이 되면 탈피해야 한다. 거미가 단단한 외골격 안에서 자라기 때문이다. 탈피의 순간에도 거미줄은 큰 역할을 한다.
탈피는 거미의 삶에서 반복해 찾아오는 가장 큰 위기의 순간이다. 거미는 길게 수 시간이 소요되는 탈피 동안 움직일 수 없으며, 새로 만들어진 외골격은 몸이 마르기 전까진 젤리처럼 취약한 내구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거미들은 탈피가 시작될 때 제각기 정해진 자세를 취하고 있어야지만 무사히 탈피를 마칠 수 있다.
거미줄은 이런 탈피의 과정을 안전하게 만들어준다. 대부분의 거미는 탈피 이전, 알집보다는 내구성이 조금 떨어지는 거미줄 침낭을 만들고 그 안으로 들어간다. 안에서 입구를 거미줄로 막은 후 탈피를 시작한다. 공중에 거미줄을 치는 거미들은 탈피 시작 전에 거미줄로 하늘을 향해 누운 자세를 고정한 뒤 탈피하는데, 이는 중력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체력을 덜 쓰며 아래로 몸을 빠져나오는 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 공중 그물을 치지 않고 돌아다니며 사냥하는 배회성 거미들은 땅 위에서 탈피할 때 최대한 평평한 지면이 필요한데, 두꺼운 거미줄 매트를 만드는 것으로 이를 해결한다.
4.0 Don Loarie(W)
스라소니거미류의 탈피. 옷걸이 모양의 거미줄에 탈피 껍질이 거꾸로 걸려 있는 것이 보인다. 중력을 이용해 힘을 덜 들이고 옛 몸에서 아래로 새 몸이 빠져나온다.
소통 | 짝짓기와 의사소통의 도구
사냥과 탈피를 거듭해 성체에 이른 거미의 숙명은 단연 번식이다. 거미줄은 성숙한 암수가 서로를 찾아 나서는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많은 거미는 거미줄로 집을 짓지 않고 돌아다닐 때도 항상 자신이 지나간 경로의 지형지물에 거미줄을 남기는데, 성숙한 암컷 거미는 이 거미줄에 자신의 성페로몬을 남겨 둔다. 수컷 거미들은 거미줄에 묻은 페로몬을 쫓아가기만 해도 구애와 짝짓기를 할 암컷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거미 연구자들이 수컷 거미의 구애 행동을 실험실에서 관찰하고자 할 때, 가장 자주 쓰이는 방법이 성숙한 암컷 거미를 먼저 관찰통에 풀어 일정 시간 동안 배회하며 바닥에 거미줄을 남기게 하고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이후 수컷 거미를 집어넣으면, 수컷은 실제로 암컷이 없어도 근처에 암컷이 있음을 확신하며 구애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거미줄은 그 자체로 거미의 귀이자 확성기이기도 하다. 거미줄로 집을 짓는 많은 종은, 암컷의 거미줄을 찾아간 수컷들이 줄에 특정 패톤의 진동을 만드는데 이것이 구애 신호다. 여러 마리의 수컷이 근처에서 경쟁 중이라면, 암컷은 거미줄을 귀 삼아 나름의 기준으로 자신에게 이득을 가져다줄 수컷의 구애만을 받아줄 것이다. 그리고 그 수컷과 짝을 지어 알을 밴 암컷은, 곧 자기 자식들이 부화할 때까지 그들을 지켜줄 알집을 짓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새끼 거미가 거미줄 안에서 탄생할 것이다. 거미의 일생은 거미줄 위에서 돌고 도는 것이다.
Dialogue
“미국도 한국도 거미 연구 네트워크는 좁고 작아”
이항: 흔히 얽혀있는 거미줄을 공동체나 네트워크에 비유하잖아. 너는 미국에서 자랐으니 미국 거미학계를 잘 알지?
정화: 응, 난 미국거미학회(AAS) 직원도 겸하고 있으니까! 우리 분야 자체가 워낙 작다 보니 회원은 500여 명밖에 없지만.
이항: 500명 ‘밖에’ 없다니!
정화: 왜?
이항: 한국에는 거미 연구자가 정말 적어. 거미를 주력으로 연구하는 교수님들도 한 손에 꼽아.
정화: 정말? 어떻게 그렇게 적을 수가 있지?
이항: 한국의 현대적 자연과학의 역사가 짧기 때문인 거 같아. 한국전쟁 이후에서야 과학기술에 투자를 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거미학에 연구비가 나오기 어려웠을 거야. 난 대학에 갈 때까지 동료 거미학자를 한 명도 못 만나본 것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살았어.
정화: 그렇구나. 그렇다면 네가 참 별종인 셈이네.
이항: 그렇진 않아! 비록 적은 수일지라도 내 또래의 한국 거미 연구자분들이 정말 재밌는 연구를 하고 계셔. 동굴통거미의 진화, 의갈목의 분류, 늑대거미의 복잡한 의사소통 등.
정화: 너무 흥미로운 주제다. 나도 처음 미국거미학회를 알게 되고 농발거미의 사회적 행동을 연구하는 린다 레이어 미국 코넬대 교수님을 뵀을 때, “세상에 이런 걸 연구하는 분도 계신다니!”라며 놀랐어.
이항: 미국의 거미 연구자들을 보면서 나야말로 정말 많이 놀랐지. 그런데 “미국에서 이런 걸 연구한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싶을 때도 많지 않아?
정화: 당연하지. 내가 연구하는 닷거미는 거미 연구자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편인데도, 번식 생태에 대한 정보가 너무나도 부족해.
이항: 내가 연구하는 깡충거미 종도 북미에서 애완동물로 팔리는 종인데, 번식 생태는커녕 연중 출현 시기에 대한 정보도 없어서 내가 직접 알아내야 했어. (세상에나!)
저자 설명
박이항: 미국 네브라스카대 거미행동생태연구실 연구원. 한국에서 노린재류의 진화생태로 석사학위를 받고, 현재 깡충거미류의 의사결정을 주제로 박사학위 연구 중에 있다. ypark15@huskers.unl.edu
서정화(Jillian Kurovski): 미국 네브라스카대 거미행동생태연구실 연구원. 미국에서 거미류의 계통분류와 군집생태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현재 닷거미류의 암컷 주도 짝선택을 주제로 박사학위 연구 중에 있다. 한국 태생으로, 생후 8개월에 미국으로 입양됐다. jkurovski2@huskers.unl.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