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질문
자리가 운명을 결정한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주어진 역할과 책임감이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의미인데요. 일부 세포에게도 해당되는 얘기입니다. 발달 초기의 배아에서는 세포의 물리적인 위치가 세포의 운명을 결정하거든요.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이 이뤄지면 수정란은 세포 분열을 시작합니다. 세포 하나의 수정란이 분열해서 배아 안에 2개의 세포가 생기고, 이것이 다시 분열을 통해 4개의 세포, 8개의 세포가 됩니다(오른쪽 그림 1). 이렇게 발달 초기에 만들어진 배아 속 세포를 ‘난할구’ 또는 ‘할구(blastomere)’라고 부릅니다.
초기 배아의 특별한 발달 방법
그런데 초기 배아의 세포 분열은 조금 특별합니다. 일반적인 세포 분열은 분열로 만들어진 딸세포가 분열 전 모세포의 크기만큼 자란 뒤에 일어납니다. 반면 초기 배아의 경우, 배아의 전체적인 크기를 유지하기 위해 분열 뒤에도 난할구는 커지지 않습니다.
또 신기한 건, 8개의 난할구가 생긴 뒤에는 배아에서 더 이상 동그란 모양의 세포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난할구들끼리 다닥다닥 붙어버리기 때문입니다(아래 그림 1). 놀랍게도 난할구들이 팔을 뻗는 것처럼 세포막을 길게 뻗어 옆 세포를 끌어안는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doi: 10.1038/ncb2875
단단히 붙은 난할구들은 분열을 거듭하며 ‘상실배(morula)’가 됩니다. 상실배는 뽕나무 열매(‘오디’ 또는 ‘상실’이라고 부름)의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입니다. 블랙베리와 유사하게 생겼습니다. 상실배는 이후 중간에 빈 공간이 생기고, 그 안이 물로 채워지면서 ‘배반포(blas tocyst)’가 됩니다. 인간의 배아로 치면 수정 뒤 5일째 되는 날입니다.
영양막이 될까, 내세포 집단이 될까
상실배가 배반포로 되는 과정은 배아 속 난할구들에게 중대한 선택의 순간입니다. ‘영양막(trophoblast)’으로 분화할 것인가, ‘내세포 집단(inner cell mass)’으로 분화할 것인가 하는 결정이죠.
영양막은 배아를 직접 이루지는 않지만 태반이라는 배아 발달에 중요한 배아 밖 조직을 만들어 내는 세포입니다. 내세포 집단은 장차 배아의 모든 기관과 조직으로 분화합니다. 이런 수많은 분화의 시작은 배반포때 난할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수정 뒤 5일차에 하는 결정치고는 아주 중요한 결정입니다.
초기 배아 속 난할구들은 무엇을 근거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까요? 그동안 다양한 모델들이 제시됐는데요. 많은 연구에서 세포의 위치가 큰 역할을 한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분화 결정을 내리기 전 세포의 위치를 살펴보면 비교적 바깥쪽에 위치한 세포의 경우 영양막으로 분화할 가능성이 컸고, 반대로 안쪽에 위치한 세포의 경우 내세포 집단으로 분화할 가능성이 컸던 것이죠.
그럼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세포의 상대적인 위치가 어떻게 세포의 운명을 바꿔놨을까요? 또 세포는 자신의 위치를 어떻게 인지하는 걸까요?
과학자들은 세포들이 위치에 따라 처한 환경이 다르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가령 바깥쪽에 있는 세포는 세포막의 한 부분이 배아 바깥쪽을 향해 있습니다. 그 결과 노출된 세포막으로 신호가 전달돼 ‘Yap’이라는 단백질을 핵 안으로 들여보냈습니다. Yap 단백질은 영양막 분화에 필요한 유전자를 발현시킵니다.
doi: 10.1016/j.devcel.2009.02.003
게다가 영양막 분화에 필요한 단백질들은 내세포 집단으로 분화할 때 필요한 유전자의 발현을 막습니다.
반면 안쪽에 위치한 세포의 세포막은 다른 세포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비좁은 출근길 지하철에 탄 사람들처럼요. 이런 세포들은 주변 세포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Yap 단백질을 변형시킵니다. 그 결과 Yap 단백질이 핵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영양막 분화에 필요한 유전자도 발현되지 않습니다. 대신 내세포 집단으로 분화할 때 필요한 유전자가 발현됩니다. 여기서 만들어진 단백질은 영양막으로 분화할 때 필요한 유전자의 발현을 억제합니다.
두 번째 질문
아빠는 하나, 엄마는 둘?
우리가 갖는 수많은 형질은 엄마와 아빠로부터 받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됩니다. 눈은 엄마를 닮고 코는 아빠를 닮고, 얼굴 하나만 보더라도 부모의 유전자가 복잡하게 얽혀 있죠. 그러나 철저히 엄마의 영향만 받는 형질도 있습니다.
달팽이의 껍질이 소라껍데기처럼 나선형이라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다 같은 나선형이 아닙니다. 어떤 것은 시계 방향으로, 어떤 것은 반시계 방향으로 돌고 있습니다. 조금 엉뚱하게 들리겠지만, 이런 차이는 오늘날 새로운 수정란을 만드는 기술의 시초가 됐습니다.
1920년대 초, 달팽이 껍질의 나선 방향을 연구하던 유전학자들은 달팽이를 여러 대에 걸쳐 관찰하던 중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대부분의 형질은 수컷(아빠)과 암컷(엄마)으로부터 받은 유전자의 우성, 열성에 따라 결정되는데, 껍질의 나선 방향만큼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습니다. 수십 년 뒤 껍질의 나선 방향은 오로지 암컷의 유전자형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원인은 난자 안에 들어 있던, 그래서 배아가 물려받게 된 단백질이었습니다. 엄마가 어떤 유전자를 갖고 있는지에 따라 그에 맞는 단백질이 만들어지고, 이 단백질이 난자에 축적돼 배아 발달 초기에 나선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었죠
엄마가 준 난자 속 미토콘드리아
난자 속 단백질 외에 엄마의 형질을 그대로 물려주는데 관여하는 또 다른 세포 구성 요소가 있습니다. 세포 소기관, 미토콘드리아가 바로 그것입니다. 미토콘드리아는 세포에서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역할을 합니다. 핵은 대부분의 세포에서 세포 하나 당 한 개뿐이지만, 미토콘드리아는 세포 하나에 여러 개 존재합니다.
흔히 유전물질이라고 하면 핵에 있는 염색체를 떠올리는데요. 미토콘드리아도 자신만의 DNA를 갖고 있습니다. 염색체에 비하면 그 길이가 아주 작아서 A4용지 6페이지에 염기서열을 모두 적을 수 있는 수준이지만, 여기에 돌연변이가 생길 경우 미토콘드리아의 기능이 저하되고 세포가 충분히 에너지를 만들어내지 못해 결국 사망에 이릅니다.
대표적인 예가 ‘라이 증후군(Leigh syndrome)’입니다. 라이 증후군은 세포 속 미토콘드리아의 60~70%에 돌연변이가 생긴 경우 발병합니다. 가장 좋은 치료법은 배아 발달 초기에 돌연변이 미토콘드리아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과학자들은 이른바 ‘세부모 기술’을 고안해냈습니다.
세부모 기술, 건강한 남아 탄생
멕시코 ‘새희망출산센터’의 의사 존 장이 이끄는 연구팀은 36세의 A씨에게 세부모 기술을 적용했습니다. A씨는 미토콘드리아 돌연변이 때문에 8개월짜리 자식과 6살 난 아이를 라이 증후군으로 잃었습니다. 이유를 모르는 유산도 4번이나 겪었습니다.
연구팀은 먼저 건강한 여성 공여자로부터 정상적인 난자를 제공받아 핵을 제거했습니다. 그리고는 A씨의 난자에서 핵을 추출해 핵이 제거된 건강한 난자에 넣었습니다(위 사진). 연구팀은 이 난자를 이용해 인공수정을 했고, A씨에게 착상시켰습니다. 그 결과 2016년 4월 6일 건강한 남 자 아 이가 탄생했습니다.
doi:10.1016/j.rbmo.2017.01.013
태어난 아이는 염색체를 준 엄마 A씨와 아빠, 건강한 미토콘드리아를 물려 준 난자 공여자까지 세 명의 부모가 있는 아이라고 해서 큰 화제가 됐습니다.
하지만 세부모 기술이 아직 완벽한 수준은 아닙니다. A씨의 난자로부터 핵을 옮기는 과정에서 A씨의 미토콘드리아도 일부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배아가 갖고있는 미토콘드리아의 약 5%가 A씨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 미토콘드리아가 훗날 문제를 일으킬까요? 좀 더 두고 봐야 알 것 같습니다.
최영은_yc709@georgetown.edu
미국 바드대에서 생물을 전공하고 하버드대에서 발생학 및 재생생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외우는 과학이 아닌 질문하는 과학의 즐거움을 나누고 싶어 과학교육에 발을 담그게 됐다. 현재 미국 조지타운대 생물학부에서 유전학, 발생학 등을 가르치며 새로운 대학 과학교육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