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돌아왔다. 미국의 제45대 대통령으로 임기를 채운 도널드 존 트럼프가 제47대 대통령으로 재선된 것이다. 그의 복귀가 과학계와 산업계의 큰 주목을 받는 건 반과학적인 그의 정책 방향 때문이다.
과연 그는 앞으로 4년 동안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이며, 이것이 한국엔 어떤 영향을 미칠까?
기후 | 파리협정 탈퇴 불가피
도널드 트럼프의 재선 가능성을 과학계가 우려했던 가장 큰 이유는 그의 반과학적 태도다. 그는 제45대 미국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절, 기후변화를 “역대 최악의 사기”라고 주장하며 논란을 일으켰다. 또한, 이번 대선 운동에서도 미국의 파리협정 탈퇴를 다시 선언하며 국제사회에서 온실가스 배출 감축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뜻을 분명히 했다. 트럼프는 바이든 행정부가 도입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폐지도 공언했다. IRA는 재생에너지 확대를 위해 수십억 달러를 투자하도록 설계된 미국의 핵심 기후 정책이다.
파리협정은 기후변화를 늦추기 위해 전 세계 195개 나라가 체결한 국제 협약으로, 산업화 이전 대비 지구 평균 기온 상승을 1.5~2℃ 이내로 제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미국이 협정에서 탈퇴할 경우, 다른 나라들의 온실가스 감축 노력이 약화될 가능성이 크다.
국제에너지기구(IEA)가 발표한 2023년 세계 온실가스 배출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의 이산화탄소(CO2) 배출량은 약 45억 톤(t)으로, 전 세계 배출량(374억 t)의 13.1%를 차지하고 있다. 막대한 책임이 있는 미국이 협정에서 이탈한다면, 중국이나 인도와 같은 다른 주요 배출국들도 온실가스 감축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일 가능성이 있다.
또한 지금까지 COP28과 COP29를 통해 구축한 ‘온실가스 배출국들에게 책임을 묻기 위한 처벌적 규제’ 역시 물거품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책임이 큰 나라가 협약을 지키지 않는데 우리가 왜 처벌적 규제에 응해야 하냐는 의견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준이 부산대 기후과학연구소 교수는 “온실가스 배출이 많은 미국이 모범을 보이지 않는다면, 다른 나라들 역시 규제를 강화하기보다는 느슨하게 풀 가능성이 높다”며 우려를 표했다.
그럼에도 한국은 독립적인 기조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박찬수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부원장은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응은 전 세계적인 흐름”이라며 “미국이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한국이 이에 영향을 받을 필요는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오히려 독립적인 기술과 자원을 확보하며 자율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후위기 대응 정책은 지속 가능한 미래를 대비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이유다.
서용석 KAIST 국가미래전략기술 정책연구소장 역시 “미국의 기조와 별개로 재생에너지 확대와 에너지 효율성 강화는 한국의 에너지 자립도를 높이는 핵심”이라고 강조하며, 에너지 기술 개발과 국제 협력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향후 과학정책 방향 예측
Shutterstock, 박주현
연구 예산 | 소폭 삭감 예상…한국에 미칠 영향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과거 행정부에서 강조했던 연구 개발(R&D) 예산 축소 정책이 이번 행정부에서도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는 45대 대통령 임기 당시 국방 관련 R&D를 제외한 모든 R&D 예산을 대폭 삭감한 전례가 있다.
하지만 미국의 R&D 예산 축소가 한국에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박 부원장은 “과거 미국 정부의 R&D 예산 규모와 집행 실적을 봤을 때 민주당 집권 시 예산은 증액되는 경향이 있었지만, 국회의 제약으로 실제 집행액은 크게 증가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반대로 공화당 집권 시에는 예산이 감축되더라도 국회의 조정으로 집행액이 큰 폭으로 줄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실제 연방정부 R&D 예산은 소폭 축소 정도에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의 R&D 예산 축소가 한국에는 새로운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다. 서 교수는 “정부 주도 R&D를 축소한다는 것은 과학기술 개발을 포기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민간 기업 중심의 시장 주도 개발로 전환하겠다는 의미”라며 “우주, 인공지능(AI) 등의 미래 먹거리 산업을 기업이 주도적으로 이끌도록 하며 각종 규제를 완화하는 정책을 추진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규제 완화는 대기업뿐만 아니라 스타트업이나 중소기업에도 진입 장벽을 낮춰 더 많은 한국 기업이 미국 시장에 진출할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제조 | 위기의 반도체…기회를 만들어야
전문가들은 트럼프의 귀환이 한국 과학계에 미칠 영향보다 산업계에 미칠 영향을 더 크게 우려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아메리카 퍼스트’를 핵심 기조로 내세우는 만큼, 미국 중심의 과학기술 정책을 강화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이 발표한 보고서 ‘트럼프의 귀환, 한국이 직면한 과학기술 혁신의 위기와 기회’에서도 미국이 자국 중심의 기술 공급망을 구축하고 동맹국들에는 기술 협력보다는 통제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이 정책의 중심에는 제조업이 자리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상징적인 분야는 반도체다. 2022년 바이든 행정부는 반도체 산업 육성법(CHIPS 법)을 시행했다. CHIPS 법은 1990년대 세계 반도체 생산량의 약 37%를 차지했던 미국의 영향력이 2022년 기준 12%까지 축소된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제정된 법안으로 해외 거대 반도체 기업에 보조금을 줘 미국 내 반도체 제조시설을 확대하고, 동맹국들에게도 미국 중심의 공급망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는 법이다.
이로 인해 한국의 반도체 기업들은 미국 내 공장 설립을 서둘러 진행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이미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에 약 170억 달러(약 22조 원)를 투자해 반도체 공장을 건설 중이며, SK하이닉스도 미국 내 제조시설 구축을 검토하고 있다. 문제는 트럼프가 지원금은 축소하고 관세 부과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2024년 10월 25일, 팟캐스트에 출연해 “(미국으로 수입되는 반도체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면, 그들이 미국에 와서 반도체 공장을 지을 것”이라며 보조금은 축소하고 관세로 통제하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박 부원장은 “국내 기업들의 투자는 장기적으로 미국 시장에서 입지를 강화할 수 있지만, 초기 투자 비용과 운영 효율성 문제로 인해 단기적으로는 큰 부담이 될 수 있다”며 “트럼프 정부가 들어서기 전 삼성전자나 SK 하이닉스 등 한국 기업들은 빠르게 보조금 협상을 마무리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자국의 제조업을 부흥시키려는 미국의 반도체 공급망 개편은 다른 방식으로도 한국 반도체 산업에 영향을 줄 수 있다. 2023년 미국 상무부는 첨단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장비를 중국으로 수출하지 못하도록 막는 규제를 발표했다. 이는 미국 뿐 아니라 동맹국 기업들에게도 적용됐다. 서 교수는 이에 대해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으로서는 미국의 기조를 따를 수밖에 없지만, 현실적으로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주요 수출 시장은 중국과 그 동맹국들”이라며 “이로 인해 발생하는 손해는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 대책을 마련해야 할까? 서 교수는 미중 갈등 속에서 반사이익을 노릴 수 있는 전략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미국 내 반도체 고객들과의 접근성을 강화하고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고객군을 확보하는 전략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박 부원장은 또 다른 방안으로 미국의 국가반도체기술센터(NSTC) 등에서 지원하는 R&D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제안했다. NSTC는 미국 정부가 반도체 산업 혁신을 위해 설립한 연구 개발 허브로, 기업과 학계, 연구소 간의 협력을 통해 차세대 반도체 기술 개발을 지원한다. 박 부원장은 “한국 기업들이 이와 같은 프로그램에 참여할 경우, 첨단 기술 협력 기회를 확보할 뿐 아니라 글로벌 반도체 기술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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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22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린 과학행진 현장. 지구의 날에 열린 이날 시위에선 당시 대통령이었던 트럼프의 반과학주의적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인력 | 바람 앞의 등불, 한국의 과학 인재 유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약 1100만 명에 달하는 불법 이민자들을 모두 추방하고, 합법적 이민의 폭도 줄이겠다는 강경한 이민 정책의 뜻을 내비쳤다. 그렇다면 한국 인재들의 미국 정착도 어려워질까?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그럴 가능성은 작다”고 입을 모은다.
미국 의회는 2024년 10월 9일 ‘E-3 비자 쿼터’에 한국을 추가하는 내용을 따로 발의하며, 전문직 인재 영입에는 적극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E-3 비자 쿼터는 특정 국가 출신의 전문직 종사자들에게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취업할 기회를 제공하는 비자 제도로, 이전까지는 호주 국적자들만을 대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서 교수는 “(미국이 비자 제도를 개편한 것은) 제조업 부흥을 목적으로 한국의 반도체 인재들을 영입할 목적으로 해석된다”며 “이는 단순한 인력 문제가 아니라, 국가 기술 주권과 경쟁력의 문제”라고 설명했다.
인재 유출은 한국 과학기술 생태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기술 개발 과정에서 중간 단계의 연구가 유출되면서, 기술 완성도와 산업 경쟁력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박 부원장은 “(한국은) 기술 유출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인재 유출에 대해서는 비교적 안일하게 대처하는 경향이 있다”며, “연구 흐름을 모두 이해하고 있는 인재들의 유출은 사실상 기술 유출과 다를 바 없다”고 경고했다. 이어 그는 “해외에서 활동하는 한국 출신 인재를 국내로 다시 유치할 정책적 노력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 대책을 마련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공통으로 연구자들이 일하고 싶은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서 교수는 “글로벌 협력을 통해 국내 연구자들에게 해외와 비슷한 수준의 연구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며, “국가 차원에서 기술 주권을 강화하고 인재 확보를 위한 전략적 투자가 꾸준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KIOST
트럼프 대통령은 2017년 취임 이후 기후 모니터링을 담당하는 미국 해양대기청 (NOAA)의 예산을 약 17% 삭감할 것을 제안했다. 이후 삭감 폭이 조정됐으나 예산 변동으로 연구 프로그램도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사진은 한국 KIOST와 NOAA가 2017~2023년 서인도양 열대 해역을 공동 연구 중인 현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