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2024 SF스토리 공모전 총 36편의 수상작 중 청소년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한 소설을 지면으로 소개합니다.
0.
너울
「1」 예전에, 여자들이 나들이할 때 얼굴을 가리기 위하여 쓰던 물건. 얇고 약간 거친 검정 비단으로 만든다.
「2」 뜨거운 볕을 쬐어 시들어 늘어진 풀이나 나뭇잎.
「3」 ‘겉모습’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너울
바다의 크고 사나운 물결.
너울
‘너울거리다(물결이나 늘어진 천, 나뭇잎 따위가 부드럽고 느릿하게 자꾸 굽이져 움직이다. 또는 그렇게 되게 하다.’)의 어근.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1.
벽에 설치한 펌프에서 바다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화면에 ‘몽돌’이란 글자가 뜨자 관객석에서 환호가 터졌다. 너울이 손을 올리자 환호는 곧 가라앉았고, 콘서트장에 있는지 고요한 바닷가에 있는지 사람들이 헷갈릴 때쯤 익숙한 선율이 흘러나왔다. 너울은 이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 자신의 음악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바로 이 순간.
노래에 맞춰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흔드는 관객들이 아름다운 밤하늘과 미지의 심해를 연상시켰다. ‘몽돌’이 끝나고 버튼 몇 개를 누르자 마지막 콘서트의 마지막 곡이 나왔다. 어젯밤, 너울이 바다에 나갔다가 작곡한 ‘달빛’이었다. 모든 바다는 각자의 음악이 있다. 5일간 3회만 연 콘서트였지만, 너울은 가는 지역마다 그 지역의 바다에 들러서 작곡한 노래로 콘서트를 마무리했다. 모든 곡이 끝나고 마지막 인사로 허리를 숙이던 그때, 모든 게 잘못됐다.
2.
띵동~. 경쾌한 소리와 함께 너울은 깨어났다.
허리를 숙인 채 고개를 들자 눈앞의 우주와 심해는 사라지고 충전기를 거칠게 뽑는 한울만 보였다. 불안감이 파도처럼 너울을 덮쳤다. “몇 시간 지났어?” 한울은 큰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뻐근한 관절을 움직이며 주위를 둘러보니 모니터에 뜬 날카로운 뉴스 제목들이 보였다. 제대로 말하면, 너울의 시각 센서가 화면의 글씨를 인식했다.
콘서트 마지막 멘트 후 일어나지 못한 가수... 무슨 일이? (더보기)
배신: 기자 A의 너울 콘서트 관람기(1)”
바다를 노래하는 작곡가 너울, 인공지능(AI) 휴머노이드로 밝혀져
그렇게 열심히 쌓아온 것들이 이렇게 한순간에 무너지다니. 공든 탑도 무너지나 보다. 더군다나 기계가 쌓은 건. “그러게 왜 나갔어 지금 말해 봤자 뭐하겠냐만. 이런 걸 할아버지 닮아가지고는”
순식간에 할아버지 얼굴이 떠올랐다. AI 휴머노이드인 너울을 만든 건, 바다를 사랑한 어느 할아버지의 소박한 마음이었다. 작은 마을의 외딴 연구실에서 연구원 한울과 함께 AI 음악을 평생 연구한 할아버지는 바다에서 음악이 들린다고 믿었고, 그 음악을 너울로 실현했다. 너울의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할아버지의 표정을 너울은 잊지 못한다. 비록 음표 몇 개였지만, 그 순간 할아버지와 한울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너울에게 생명을 준 바다가 할아버지의 생명을 앗아갔다. 의사의 만류에도 바닷바람을 꼭 쐬어야겠다던 할아버지는 그 밤에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너울의 메모리에서 자신의 모습을 모두 지우길 바랐지만, 너울은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랬던 바다가, 이번에는 너울의 너울을 가차 없이 벗겨버렸다.
*
자연 음악의 떠오르는 혜성으로 평가되던 너울이 사실 AI였습니다. 현장의 권하린 기자 연결해보겠습니다.
“혜성은 떠오르지 않아. 떨어지지. 아님 돌고 돌든가.” “조용히 해봐. 넌 지금 그런 말이 나와?”
네. 현 시각 소규모의 사람들이 너울의 작업실 앞으로 모여들고 있습니다. 팬들과 취재진, 개인 방송 진행자 등인데요. 작곡가 너울은 지난 토요일 밤, 콘서트를 마치고 인사하던 중 전원이 꺼져 정체가 탄로났습니다. 사람이 아닌 AI 휴머노이드였던 건데요. 너울의 음악을 좋아했던 팬들은 황당하다는 반응입니다.”
제가 들으면서 많이 위로도 받았는데 그게 AI 음악이라니 너무 배신감 들고
TV에서도, 작업실 밖에서도 화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울은 빨리 밖으로 나와라!” 문을 쿵쿵 두드리며 소리치는 사람도 있었다. “에휴, 안 되겠다. 이 사람들이 최소한의 예의는 있어야지.” 한탄하며 나가는 한울을 너울은 막지 않았다. 경찰을 부르겠다고 으름장 놓는 한울의 목소리를 끝으로 바깥은 조금 잠잠해졌다.
3.
콘서트가 끝난 다음 날, 인터넷에서 너울의 영상은 공유되고 또 공유되었다.
“유명해져서 좋겠네. 하하.” 한울이 마우스를 던지듯 내려놓으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음원 사이트에 ‘너울’이란 이름으로 실험 삼아 여러 음악을 올리다가 한 곡이 유명해진 게 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그 곡은 할아버지와 너울의 고향인 윤슬 마을의 바다에 가서 작곡했다. 할아버지는 마을과 바다의 이름을 사랑했다. 할아버지와 바다에 가는 날마다 할아버지는 항상 윤슬과 몽돌의 뜻을 설명해줬다. 너울은 감탄하는 자신의 모습에 뿌듯해하는 할아버지가 좋아서, 윤슬 해변에 가기 전에는 항상 그 단어들의 뜻을 메모리에서 지우고 새로 들었다.
몽돌 해변에는 모래 대신 돌이 가득해서 파도와 몽돌이 부딪히는 소리가 참 좋았다. 그 좋은 소리를 음악으로 만들었으니, 안 좋을 수가 없었다. ‘몽돌’은 알음알음 알려졌고 사람들이 한 번씩은 들어본 곡이 되었다. 그 곡 이후로 너울의 음악을 기다리는 팬들이 조금씩 생겼고, 1년 후 너울은 적자를 예상하면서도 콘서트를 진행했다. 한울은 가급적 대중에게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너울은 자신을, 자신의 음악을, 그리고 할아버지를 응원하는 사람들과 함께, 한 공간에서 음악을 즐기고 싶었다. 그렇게 열심히 준비한 콘서트의 결말이 이렇다니.
많지도 적지도 않았던 그 팬들이 올린 콘서트 후기와 영상은 인터넷에서 아슬아슬한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자극적인 기사 제목들은 사람들을 홀리기에 충분했고, 처음엔 무관심했던 사람들도 너울이 ‘몽돌’의 작곡가란 것을 알고 난 후에는 원색적인 비난을 더한 글들을 올렸다.
“어떡할 거냐, 이제.” “나도 글을 올려야지.” “뭐?” 예상 못한 대답에 한울은 놀란 듯했다. 너울은 노트북을 켰다.
4.
너울과 한울이 그날 밤을 꼬박 새워 쓴 글은 인터넷상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너울의 음악에 대한 진정성을 담은 사과와 다짐은 사람들의 마음을 다시 돌려놓았다. 물론, 그 많던 비판이 한순간에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욕설과 분노가 가득한 비판 대신, 음악 산업 전반에서의 AI 음악에 관한 건전한 논의가 이어졌다. 너울과 한울은 꽤 오랜 대화를 나눈 후 결정을 내렸다.
“그럼, 음악을 다 저작권 없이 배포하자는 거야?” ”응. 이때까지 낸 것들이랑 앞으로 낼 것들 모두.” “그래라 그럼.”
*
며칠 만의 평화로운 밤, 너울은 간만에 작업 의자에 앉았다. 한울은 그런 너울을 힐끔 보고는 조용히 자리를 피해주었다. 너울이 작업할 땐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편이 좋았다. 너울은 귀 모양 청각 센서의 버튼을 누르고 작업을 시작했다. 창문을 열자 빗소리가 자박자박 들려왔다. 빗소리를 한참 듣다 소리의 포커스를 미세하게 다른 곳으로 옮기자 별들의 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이걸로 해야겠군. 별들의 소리를 메인으로, 빗소리를 화음처럼 담아야겠다.
할아버지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별들이 숨 쉬는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별들이 숨을 쉬다가 어느 순간 더 이상 숨을 내뱉지 못하게 되면,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무시무시한 존재가 된다고 했다. 오늘 별 소리도 참 좋은데. 할아버지도 함께 들으면 어땠을까. 그렇게 다른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데모 버전의 곡이 완성되었다. 쓰면서 한 생각 때문인지, 조금 슬프게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이제 들어보며 여러 소리의 화음과 피치를 적절하게 조절하면 됐다.
5.
“잠시만요. 제가 이해가 어려워서요. 그러니까 너울의 기술로 음악 만드는 로봇을 바닷가에 설치하고 싶으시다는 건가요?” 한참 심각하게 통화하던 한울은 자신을 향한 너울의 눈빛을 느끼고 대충 얼버무리며 전화를 끊었다.
“대충 무슨 일인지는 알겠지?” “응.” 너울은 인공신경망으로 몇 개의 시뮬레이션을 돌려보고 꽤 괜찮은 제안이라고 판단했다. 우리 윤슬 마을의 몽돌 해변과 여러 바다의 아름다운 음악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들려주는 것이 할아버지의 오랜 꿈이었기에, 쉽게 내린 결정이었다. 다만 작은 걱정은 한울이었다. 한울은 감정이 얼굴에 투명하게 드러나는 사람이다. 지금 한울은 기대와 걱정이 어린 눈빛으로 깊은 생각에 빠져있었다.
“넌 어떤데?” “응?” 한울은 훅 들어온 질문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뭐 걱정되는 거 있어? 생각이 많아 보이네.” “넌 좀 무섭지 않아?” “뭐가?” “너를 닮은 기계가 바닷가마다 세워지는 거.”
“그래도 설치되면 사람들이 몽돌 해변을 더 자주 찾지 않을까? 그게 할아버지가 원하신 거 아니야?” “그렇긴 하지. 나도 고민이다~.” 한울은 기지개를 쭉 켜고는 가방에 물과 공책을 주섬주섬 챙겼다. 너울은 한울이 뭘 하려는지 바로 알아채곤 자신의 메모리를 만지작거렸다. 예전부터 생각할 일이 많을 때, 둘은 몽돌 해변에 가곤 했다. “가자.”
*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정자에 앉고서도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닷바람이 솔솔 불어오자, 한울은 너울의 무릎을 베고 기분 좋게 누웠다. “아이, 참. 딱딱해.” 할아버지는 너울에게 폭신한 무릎을 만들어주지 않았다. 벌떡 일어나서 머리를 벅벅 문지르는 한울을 모른 척하며, 너울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한울을 바라보았다.
“윤슬이랑 몽돌, 뜻이 뭐야?” “또?” 퉁명스럽게 답하는 한울이었지만 너울은 속으로 잠자코 초를 세고 있었다. “4 3 2” “윤슬은 햇빛이나 달빛이 비쳐 반짝이는 잔물결, 몽돌은 모가 나지 않고 둥근 돌이라는 뜻이야. 너 때문에 내가 다 외웠다.” “우와. 그런 뜻이구나!” “몇 번째로 듣는 거야? 화내는 거 아니고 진짜 궁금해서.”
“오늘이 87번째. 그래도 매번 새로운 걸.” 기억을 매번 지웠다가 다시 새롭게 받아들이는 너울이, 한울은 조금 부러웠다. “저기 해 진다!” 정자에서 보는 일몰은 항상 예술이었다. 지는 해가 뿜는 은은한 노란빛, 그리고 윤슬. 파도가 밀려오는 소리, 돌이 자르륵 굴러다니는 소리와 함께 하노라면 한 편의 좋은 영화를 본 듯한 여운이 밀려왔다.
“결정했어?” “한참 노을을 바라보던 너울이 물었다.” “응. 하자.” “정말?” “그래 이 좋은 거 우리만 볼 순 없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해에 할아버지의 웃는 얼굴이 겹쳐 보이는 듯했다.
6.
네. 여기는 윤슬 마을의 몽돌 해변입니다. 보시는 것처럼 이 해변에 전국 최초로 ‘노을’이 설치 중입니다. 이 ‘노을’은 AI 너울을 본뜬 노래 생성 AI인데요. 엇, 지금 노래를 만들고 있는 것 같네요! 다 같이 들어볼까요?
기자는 옆으로 살짝 비켰고, 노을을 향해 카메라가 줌인했다. 잠시 삐빅 거리던 노을은 이내 1분 정도 되는 멜로디를 만들어냈다. 너울의 것만큼 좋은 곡은 아니었지만, 관광객들이 듣고 신기해하기에는 충분했다. 단순하더라도 자신만의 곡을 만들어 직접 이름까지 붙일 수 있다는 점이, 관광객을 끌어들일 매력으로 생각됐다.
“너울 씨, 한울 씨. 노래 끝나면 카메라가 아까 연습한 대로 자연스럽게 멘트해주시면 됩니다.” 기자가 속삭였다. 뻘쭘하게 서있는 둘과 달리, 기자는 익숙하게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곧 카메라가 기자와 너울, 한울을 비췄다.
“우와, 눈을 감고 들어도 바다가 훤히 보이는 것 같네요. 노을이 처음 설치된 특별한 날인 만큼 귀한 분들도 이 현장에 오셨는데요, 힘들게 모셨습니다. 이번 프로젝트에 큰 도움을 준 너울, 한울 씨입니다. 감흥이 어떠신가요?”
“저희의 음악이 이렇게 상용화되다니 정말 기쁩니다. ‘노을’ 프로젝트를 계기로 많은 분이 윤슬 마을에 오시면 좋겠어요.” “맞아요, 일몰이 특히 예쁘거든요. 다들 오셔서 아름다운 바다도 보시고, ‘노을’로 노래도 만들어보세요. 자신이 만든 노래에는 직접 제목도 붙일 수 있답니다.” “그럼 지금 이 곡, 너울 씨가 직접 제목을 붙이신다면요?”
“흠... (잠시 고민하는 척을 해본다. 할아버지는 너울에게 연기력은 주지 않으신 게 확실했다.) 저희 마을의 예쁜 이름을 따 ‘윤슬’이 좋겠네요.” “이야, 역시 작곡가는 뭔가 다르네요. 이렇게 우리나라 첫 ‘노을’을 함께 확인해봤는데요. 앞으로 ‘노을’은 전국의 바다에 추가 설치될 계획입니다. 지금까지 YBC 뉴스, 권하린입니다.”
*
집에 돌아와 너울은 말없이 충전기를 꽂았고, 한울은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와. 왜 이렇게 힘드냐.” 둘은 오늘 첫 노을이 설치된다는 연락을 받고 살짝 들러서 구경만 하려 했지만, 기자는 기자였다. 관계자와 함께 저 구석에 있던 둘을 매의 눈으로 찾아낸 기자는 물 흐르듯 모든 것을 진행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뉴스는 끝났고 너울과 한울의 손에는 기자의 명함이 들려있었다. 명함 속 고양이의 눈빛이 왠지 얄미웠다. “다음 노을 설치식부터는 가지 말자.” 너울이 벽에 기대어 앉으며 말했다. 한울도 끄덕, 아니 끄덕끄덕끄덕 격하게 고개를 움직였다.
저녁 8시쯤, 둘은 TV 앞에 나란히 앉았다. “YBC 맞지?” 굳이 보고 싶진 않았지만, 혹시 이상하게 방송될지 몰라서 확인은 해야 했다. 이미 언론과 대중의 무서움을 맛본 터였기에. 뉴스가 끝나며 노을이 만든 ‘윤슬’이 다시 흘러나왔다. “잘한 짓인지 모르겠다.” “너무 걱정하지 마. 뉴스도 떴으니 사람들도 많이 올 거야. 저 곡도 제법 좋잖아.” 이게 안심시키는 건지, 달래는 건지. 그래도 한울은 너울의 말이 사실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7.
그 말은 곧 사실이 됐다. 노을이 설치되고 몽돌 해변에는 사람이 넘쳐 났다. 너울의 팬들부터 관광객, 그리고 궁금해서 구경하러 온 윤슬 마을 사람들까지. 모두 노을 앞에 길게 줄을 서서 자신의 차례가 되면 노래를 만들고, 제목을 짓고, 즐거워했다. 특히 가족이 많았다. 아이들의 손에 끌려온 부모는 항상 심드렁한 표정이었지만 노래를 만들고 뛸 듯이 좋아하는 아이를 보면 열에 열은 모두 흐뭇한 표정이 됐다. 노란 오리 튜브를 타고 동동 떠다니는 아이, 선글라스를 끼고 모래찜질하는 소년, 돗자리에 앉아 서로의 입에 김밥을 넣어주는 연인, 정자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노부부까지. 항상 고요했던 바다는 이제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지난 3개월 몽돌 해변의 방문객이 그 전 10년보다 30배는 많았다. 노을을 반대하던 다른 지역들도 서로 먼저 설치해달라며 아우성쳤다. 어떤 지역은 웃돈을 얹어 주겠다며 한울에게 전화도 했다. 그때마다 한울은 단칼에 거절하며 그 지역을 설치 예정 명단 맨 아래로 끌어내렸다.
“뭐해? 설마 또?” “응. 이번엔 한우를 준다더라. 괘씸해서 놔둘 수가 없었어. 큭큭.” 한울은 웃으며 율무차를 들이켰다. “아잇, 뜨거. 그래서 우리 몇 곳 설치됐지? 많아지니 세기가 힘드네.” “계획은 39곳. 지금까지 설치된 건 13곳이야. 딱 3분의 1.” “지금 보니 많긴 하네.” “가보고 싶은 곳 있어? 어떤 해변엔 낮에는 팝송, 밤에는 재즈가 나온대.”
“특이한 해변 많더라. 바람이랑 파도가 세서 락만 나오는 곳도 있대. 좀 더운 곳에서는 하와이 같은 노래가 나오기도 하고.” “내일 뭐 없지? 특이한 곳들 리스트 쭉 뽑아서 돌아보자.” “그래, 봐둔 곳 많으니까 기대해!”
8.
“여기는 사람이 좀 적은가 봐.” 세 번째 해변이었고, 막 오후가 된 무렵이었다. 식당에 간 사람들 덕에 해변은 한산했다. 앞에 간 두 해변에선 사람이 너무 많아서 다가가지도 못하고, 허탕을 치고 온 차였다. 그늘막이 씌워진 노을 주위에는 서너 명이 줄을 서있었다. 옆에 걸어둔 헤드폰을 쓰고 행복해하는 사람도 있었고, 바다로 카메라를 향하는 사람도 있었다. “저 정도면 가도 되겠다.” 너울과 한울은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뒤, 차에서 내렸다. 처음엔 이렇게 다니는 게 어색했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바에는 이 차림이 낫다는 걸 깨닫는 중이었다.
“진짜 해파리가 내 눈앞에 떠다니는 것 같았어. 너도 빨리 해봐! 사진 찍어줄게.” 이용자가 헤드폰을 벗으며 말하자 옆에서 아이스 커피를 마시던 그 친구는 기다렸다는 듯 빨대를 마지막으로 쪽 빨고는 노을에 달려들었다. 바다에 오면 사람들의 반응을 직접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다. 모든 바다에 고유의 음악이 있다는 할아버지의 생각을 사람들이 점점 이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후 차례가 된 너울과 한울이 노을에 다가서자, 옆에 놓인 컵이 보였다.
“저기요! 커피 두고 가셨어요!” “네? 저희 거 아닌데요.” “정말요? 아까 드시고 계셨던 것 같은데.” “그래서요? 다 먹은 거예요.” “그걸 왜 여기 두고 가세요.” “옆에 안 보여요? 다른 사람들도 다 두고 갔는데 왜 저한테만 그래요.”
“그래도 치우셔야죠.” “아휴 참 귀찮게 하시네. 알았어요. 차에 짐만 싣고 가져갈게요.” 그 말을 끝낸 여자는 크게 한숨을 쉬며 멀어졌다. 너울의 청각 센서로는 그 여자가 자신의 친구들과 수군거리는 소리가 훤히 들렸지만, 한울이 못 들은 것 같아 굳이 말하지 않았다. 한울의 욱하는 성격을 자극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뻔했다.
“쓰레기통이 멀긴 하네.” 괜히 먼 곳을 보며 말하는 너울에게 한울은 찌릿, 눈을 흘기곤 쓰레기통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쓰레기통은 저 멀리, 겨우 보이는 거리에 있었다. 노을에서 그 먼 쓰레기통에 이르는 시야에 너무 많은 쓰레기가 들어와서 더 거슬렸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플라스틱 컵과 빨대, 휴대용 방석, 찌그러진 맥주 캔, 찢어진 비치볼을 보고 화가 치밀다가, 갑자기 무서웠다. “여긴 사람도 적은데 이러면 다른 곳들엔 얼마나 많을까.”
물론 노을을 설치하며 관광객이 몰려들 때의 쓰레기도 신경이 쓰였다. 사람들이 놀러 오면 쓰레기가 생기는 건 당연했다. 각 지역 담당자와 연락해 추가로 쓰레기통을 설치했지만, 그 많은 쓰레기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임을 한울은 이제야 깨달았다. 울상이 된 한울을 보고, 너울은 자신이 나중에 담당자들에게 연락하겠다며 우선 그를 노을 앞에 앉히고 헤드폰을 씌워주었다. 너울에 떠밀려 화면을 몇 번 터치하자 노래가 들렸고 한울은 눈을 감았다. 바닷속에서 헤엄치는 몽글몽글한 해파리가 생각나는 곡이었다. 몽환적이지만 약간은 슬픈.
9.
띠링띠링~. 익숙한 벨 소리가 한울의 단잠을 깨웠다. 까슬까슬한 스웨터에 파묻힌 얼굴을 들고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너울은 익숙하게 한울의 핸드폰을 가리켰다. “여보세요.”
“네. 안녕하세요. 몽돌 해변 노을 담당자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게 오류인지도 잘 모르겠고요. 사실 노을이 요즘 생성하는 노래가 모두 슬프고 어두운 단조입니다.”
전화 너머의 담당자는 자신이 말하고도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터뜨렸다. “한번 직접 오셔서 보셔야 할 것 같은데, 지금 괜찮으신가요? 노을 사용은 막아둔 상태입니다.” “네, 일단 갈게요. 30분 내로 도착할 거예요.”
*
“대체 뭐가 문제지? 허, 참.” 현장에 가서 직접 보니 한울도 헛웃음이 나왔다. 프로그램상의 오류는 없었고 노래도 분명 잘 생성했다. 그게 대부분 슬픈 노래라는 것이 문제였다. 약 10곡을 생성해봤지만, 결과는 모두 비슷했다.
“혹시 다른 지역에서는 이런 연락이 없었나요?” “네.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왜 이러지?” 한울은 노을을 둘러싼 벨트 차단봉을 열고 나왔다. 노을을 사용할 수 없다는 공지에 관광객들은 이미 모두 돌아갔고, 윤슬 해변은 예전처럼 한적했다. 예전과 다른 거라곤 동글동글한 돌들 위를 드문드문 뒤덮은 쓰레기뿐이었다.
“이상하네.” 너울이 자신의 청각 센서를 톡톡 두드리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거기 있지 말고 저것 좀 봐줘. 난 도저히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나도 이상해. 아니, 바다가 이상해.” “뭐?” “바다에서 슬픈 소리만 들려.” 그 말에 한울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는 여전히 반짝반짝 아름다웠다.
“괜찮아 보이는데?” “바다가 반짝반짝하지?” “응. 예쁘기만 한데?” “너무 반짝거리는 것 같지 않아?” 한울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눈빛으로 너울을 바라봤다. 그러나 너울의 시각 센서는 바다에 고정되어 있었다. 뭔가를 확대해서 보는 것 같았다. “가까이 가서 한번 봐.” 어리둥절한 한울은 바다로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다가갈수록 얕은 수면 아래에서 뭔가가 보였다. 플라스틱 생수병, 일회용 컵, 과자 비닐. 겨울이라 해가 일찍 지는 바람에 아이러니하게도 한울은 지는 해의 노란 빛이 바닷물에, 아니 바다 밑의 쓰레기에 반사되어 아름답고도 기괴하게 빛나는 광경을 봤다. 모든 상황이 밀물처럼 쏴아, 너울이 일며 이해됐다.
“다 쓰레기 때문이야. 바다가 점점 병들어가고 있어. 겉보기엔 그렇지 않지만.” 어느새 다가온 너울이 말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떡해... 어떡해 정말...” 꽉 막힌 가슴을 퍽퍽 쳐봐도, 숨을 계속 크게 내쉬어봐도 목이 막혔다. 바람은 또 왜 이렇게 찬지. 한울과 너울을 이곳으로 부른 담당자도 옆에서 바다를 허망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만 돌아가자. 감기 걸려. 아프면 아무것도 못 바꿔.” 한울 곁에 한참 서있던 너울이 말했다.
*
그때 보고 그냥 넘기지만 않았어도. 쓰레기통 추가 설치는 무슨. 한울은 집에 오는 내내, 또 집에 도착해서도 자책했다. “뭔가 해야 해. 이대로 두면 다 없어지고 말 거야.” 한울이 결연하게 말했다. 너울은 기다렸다는 듯 생각해둔 해결책을 말했다. “저 현상이 다른 바다들로 퍼지기 전에 이 상황을 알려야 해. 우리가 지금 몽돌 해변을 깨끗이 청소해도, 관광객들은 계속 올 거야. 시뮬레이션 돌려본 바론 이 일을 가장 효과적으로 알릴 방법은 이거야.”
너울은 종이를 내밀었다. “뭐? 쓰레기?” “아, 뒷면이네. 여기.” 뒤집힌 종이의 얄미운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10.
다음 코너입니다. 전국 바다에 설치되어 엄청난 인기를 끌던 노을들이 요즘 슬픈 노래만 생산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YBC 뉴스에서 단독 취재했습니다. 현장의 권하린 기자 연결합니다.
네. 이곳은 윤슬 마을의 몽돌 해변입니다. 인파로 붐볐던 며칠 전과 달리 한적한 모습인데요. 노을이 정지된 것이 그 이유입니다. 노을에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기자는 노을의 화면을 몇 번 톡톡 두드린 후 카메라에 손짓했다. 곧 노을은 기묘하게 불쾌한 음악을 들려줬다.
이렇게 노을에선 요즘 슬프고 불쾌한 음악만 생성됩니다. 노을 설계자이자 너울의 공동 개발자인 한울 씨의 설명을 들어보겠습니다. “네. 확인해본 결과, 노을의 자체적 프로그래밍에는 오류나 문제가 전혀 없었습니다.”
아. 그러면 문제가 뭔가요? “노을은 바다의 소리를 음악으로 바꿔주는 기계입니다. 노을에 아무 문제도 없는데 이런 음악이 생성되는 걸 보면 바다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이 가능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조사 결과 몽돌 해변은 쓰레기로 심각하게 오염된 상태였습니다. 자료화면 보시죠.
이미 찍어둔 여러 쓰레기의 모습들이 확대되어 화면을 가득 채웠다. 과자 부스러기가 붙어있는 비닐, 찢어져서 버려진 튜브, 누군가 먹다 남긴 음료수병, 일회용 나무젓가락과 플라스틱 수저. 마지막 장면은 파도와 모래가 만나는 경계를 따라 쌓인 엄청난 플라스틱이었다. 화면 속 바다는 번쩍번쩍 기분 나쁘게 빛났다. 이후 여러 전문가의 분석이 이어졌다. 관점은 달랐지만, 결론은 비슷했다. 바다가 오염되었다는 것. 한울이 애절하게 외쳤다.
지금부터라도 바꿀 수 있습니다. 노을에서 아름다운 멜로디가 다시 나올 수 있을 때까지 바다 정화 운동이 진행되니 도움을 주실 분들, 그리고 자원봉사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아래 전화번호로 연락 부탁드립니다!
오늘부로 전국의 노을이 사용 중단될 예정입니다. 환경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을 가지면서, 바다가 건강해지는 날, 윤슬 해변에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YBC 뉴스, 권하린입니다.
뉴스를 최대한 빨리 내보내고 싶었지만, 방송 일정을 맞추는 동안, 상태는 더욱 나빠졌다. 이제 몽돌 해변의 노을이 생성한 음악은 못 들을 지경이었다. 다른 해변에서도 슬픈 분위기의 노래가 생성된다는 소식이 속속 이어졌다.
“유튜브에도 업로드해주시는 거죠?” “당연하죠. 방송 나가고 이대로 업로드될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잘 풀릴 거예요.” “그래. 저 많은 쓰레기에도 끝이 있을 거야. 우리 열심히 청소해 보자.” 한울은 또다시, 너울의 말이 사실이면 좋겠다고 되뇌었다.
하희연
2006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현재는 부산 예문여고 문학감상글쓰기부에서 활동 중이다. 동아사이언스와 과학동아가 주최한 2024 SF스토리 공모전의 청소년 부문 소설 최우수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