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5, 12월 부산에서 개최
2024년 12월 1일, 세계 플라스틱의 운명이 한국 부산에서 결정됩니다. ‘국제 플라스틱 협약’을 완성하기 위해 세계 각국의 정부 부처, 플라스틱 산업계, 환경단체에서 온 관계자 3000여 명이 부산에 모여 회의할 겁니다. 이 회의의 이름은 국제 플라스틱 협약을 위한 제5차 정부간협상위원회(INC-5)입니다. 국제 플라스틱 협약은 플라스틱 오염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플라스틱 산업계뿐 아니라 사회 전반의 변화를 이끌어낼 것으로 기대를 모읍니다. ‘파리 협정 이후 가장 중요한 환경 협약’으로 꼽히는 국제 플라스틱 협약과 INC-5의 핵심 쟁점을 과학동아가 정리해 드립니다.
국제 플라스틱 협약? 부산에서? 갑자기?
실제로 국제 플라스틱 협약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온 지는 만 3년이 지나지 않았어요. 2022년 3월, 케냐 나이로비에서 열린 제5차 유엔환경총회(UNEA)에서 ‘플라스틱 오염에 관한 구속력 있는 국제협약’을 만들기로 논의한 게 출발점입니다. 협약의 계기는 더 이상 플라스틱으로 인한 해양 오염 문제를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는 국제사회의 공감대였습니다. 썩지 않는 플라스틱 폐기물이 해양을 오염시키면서 태평양에는 ‘플라스틱 섬’이 생기고, 해양생물들이 생존에 부정적 영향을 겪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버려진 플라스틱이 분해되면서 생긴 미세플라스틱은 인간의 건강까지도 위협하죠.
국제사회가 처음 세운 목표는 5번의 정부간협상위원회를 통해 2024년까지 법적 구속력을 갖춘 협약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첫 번째 회의인 제1차 정부간협상위원회(INC-1)가 2022년 12월 우루과이에서 열렸고, INC-2가 2023년 5월 프랑스에서, INC-3은 2023년 11월 케냐에서 열렸습니다. 하지만 2024년 4월 캐나다에서 열린 INC-4에서도 별다른 진전은 없었고, 협약은 아직 초안까지만 완성된 상태였습니다. 세부 항목은 아직도 조율하고 있는 단계죠. 11월 25일부터 12월 1일까지 대한민국 부산에서 진행될 INC-5의 중요성이 더 커지는 이유입니다.
‘플라스틱 생산 감축’ 앞에 두 쪽이 난 세계
이번 국제 플라스틱 협약은 원유에서 플라스틱의 원료를 추출하는 것부터 플라스틱 생산, 사용, 폐기 단계까지 플라스틱의 생애 전 주기를 다룹니다. 그래서 각 부문마다 각국의 입장이 달라요. 특히나 각국의 입장이 첨예하게 충돌하는 단계가 바로 ‘플라스틱 생산’입니다.
플라스틱 오염 문제를 해결하려면 애초에 플라스틱 생산 자체를 감축해야 한다 vs. 재사용 및 재활용을 확대하는 방향으로도 충분하다. 두 의견으로 나뉜 거죠. 특히나 플라스틱 생산 감축을 주장하는 국가들은 ‘우호국 연합(HAC)’을 형성해 공동의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르완다와 노르웨이, 캐나다, 페루, 독일, 세네갈, 영국, 프랑스, 그리고 한국이 속해 있죠.
반대편에는 ‘플라스틱 지속 가능성을 위한 국제연합(GCPS)’이 서 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 중국, 바레인, 쿠바, 이란 등 산유국과 플라스틱 생산 산업이 잘 발달한 국가들이죠. 이처럼 석유화학업계와 이를 주력 산업으로 삼고 있는 국가들이 특히나 ‘플라스틱 생산 감축’에 부정적입니다. 지난 INC-4에 참가한 석유화학업계 로비스트의 수는 무려 196명. 유럽연합(EU)에서 파견한 정부관계자들의 수(180명)보다 많았습니다. INC-4가 진전 없이 종료된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시 화석연료에서 추출한 ‘1차 플라스틱 폴리머(PPP)’에 대한 조항을 두고 HAC와 GCPS가 첨예하게 대립했습니다. 생산 감축 쪽인 페루와 르완다는 2040년까지 전 세계 1차 플라스틱 폴리머 사용량을 2025년 수준에서 40% 감축하자는 야심 찬(?) 목표를 제안했습니다.
세계 4위 석유화학산업 생산국, 한국은 어떻게 해?
INC-5가 다가올수록 한국 정부의 고민은 깊어져만 갑니다. 한국은 세계 4위의 석유화학산업 생산국으로, 플라스틱의 원료 추출, 생산, 사용, 폐기 모든 과정에 깊이 관여하는 국가입니다. 이 협약으로 인해 사회의 많은 부분이 변화할지도 모릅니다. 만약 플라스틱 생산 감축에 대한 조항이 들어간다면 국내 석유화학기업들은 이에 따라 사업 방향성을 바꿔야 할 거고요, 이들의 석유화학단지가 위치한 전남 여수나 울산의 노동자들이 영향을 받을 수도 있죠. 생분해성 플라스틱을 연구하는 연구기관에 더 많은 연구비가 지원될 수도 있을 겁니다. 플라스틱 재활용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면 관련 규제가 더 강화될 거고요.
그래서 김경민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9월 24일 국회 토론회 ‘INC-5 앞둔 국제 플라스틱 협약, 우리나라 정부의 대응 전략 점검과 과제를 모색한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탄소중립이라는 의제는 사실 손에 잘 잡히지 않죠. 그래서 국제 플라스틱 협약은 탄소중립을 이루기 위한 방안을 구체적으로 정부 규제에 녹여낼 수 있는 최초의 사례가 될 겁니다. 국내에선 환경부 외에도 해수부, 외교부, 기재부 등 다양한 부처가 함께 대응해야 할 부분입니다.”
INC-5는 늘 환경문제에서 국제사회의 결정을 따르는 후발주자의 역할을 맡았던 한국이 주도적으로 판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전환점이기도 합니다. 세계 4위의 석유화학산업 생산국이 플라스틱 이슈에서 조용히 있어선 안 되니까요. 국내외 환경단체들은 이제 한국이 목소리를 내야 할 차례라고 말합니다. 그린피스, 녹색연합, 서울환경연합 등 국내외 환경단체 15곳이 모인 ‘플’뿌리연대는 8월 한국 정부에게 “플라스틱 협약의 쟁점이 되는 플라스틱 생산 감축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라”고 질의했습니다. 플뿌리연대는 보도자료를 통해 “관계부처 모두 외교적 전략 노출을 이유로 구체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그래도 천천히, 정부도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11월 4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김완섭 환경부 장관은 “일부 국가에서 플라스틱 관리(재활용)를 주장하는데, 관리가 안될 게 뻔한 플라스틱 문제를 그렇게 넘겨서는 해결이 안 된다”면서 “플라스틱 생산을 감축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기사를 쓰는 지금도 국제 플라스틱 협약이 정말로 부산에서 성안될 수 있을지에 대해선 말이 갈립니다. 김 장관도 간담회에서 INC-5에서 협정문이 채택될 가능성이 높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을 내비쳤죠. 한편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플라스틱을 많이 만드는 나라 중 하나인 미국이 다가오는 INC-5에서 플라스틱 생산 감축에 한 표를 던질 거라는 소식이 8월 로이터를 통해 전해져 희망이 보이기도 합니다. 12월호를 받아보는 여러분은 그 결말을 아시겠죠?
과학동아도 부산 현장에서, 또 서울 사무실에서 계속해서 플라스틱 오염 문제를 보도하려고 합니다. 앞으로 이어질 기사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