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미트리 알렉세예비치 페트렌코
1992년 1월 2일, 신년의 샴페인 향이 입안에서 가시기도 전에 페트렌코 대령은 근무지로 향했다. 6시 22분에 집에서 나와 6시 47분 지하철을 타고 루뱐카역까지 간다. 역에서 루뱐카광장까지 걷는 데 14분. 오차 범위 대략 2분. 루뱐카광장에 들어서서 3분간 보폭을 맞춰 걷는다. 그럼 7시 17분에 검문소 앞에 서게 된다.
“오늘도 정확히 7시 17분입니다.”
검문소에 지루하게 앉아 있는 옐친이 말을 건다. 술 한 모금 못 마시면서 늘 보드카 한 병은 비운 듯 어물대는 발음이 특징이다.
“옐친. 또 술 마셨나?”
“아닌 거 아시잖습니까아, 새 부서 발령이시군요.”
페트렌코가 내민 키 카드를 슬롯에 꽂은 옐친은 모니터를 확인하고 말한다. 대령은 옐친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목소리를 낮춘다.
“새 부서에 대해 아는 거 있나?”
“두 가지죠, 대령님. 첫째, 제까짓 게 뭐라고 알겠습니까. 둘째, 안다 해도 제까짓 게 뭐라고 발설하겠습니까.”
“자기 자신에 대해 자신감을 좀 가지지 그래.”
손목시계를 본 페트렌코는 잽싸게 키 카드를 가로챈다.
보통 때라면 옐친과 수다를 좀 더 떨어도 됐을 시간이다. 하지만 오늘 그는, 9년간 매일 그래왔듯 2층에 위치한 개인 사무실로 들어서는 게 아니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야 한다.
새 부서로의 발령은 1월 1일이었던 어제 갑자기 결정된 사안이다. 서재에 설치된 비상 전보망이 울렸다. 전보망은 지난 9년간 총 아홉 번 울렸는데, 다섯 번은 단순 오류였고 세 번은 중대 안보회의였다. 그리고 한 번은 1983년 9월 26일, 잠재적 핵발사가 감지됐다는 소식이었다. 아내는 놀라 입을 틀어막고 아들을 껴안았다. 페트렌코는 총알처럼 서재에 들어서다 고양이 깔롬의 꼬리를 밟았다. 신년부터 집안의 평화를 작살낸 전보의 내용은 이러했다.
1월 2일 루뱐카 본부 출근 시 Д4번 통로 엘리베이터를 탈 것.
탑승 전 모든 금속 물질을 몸에서 제거할 것.
당장 전쟁이 난 건 아닌가 보군. 페트렌코는 뒤늦게 들어온 아내와 아들을 포옹하며 안심시켰다. 잠시 이어진 포옹 끝에 아내는 말했다. “당신이 그냥 은퇴했으면 좋겠어, 어디 한적한 시골 가서 살게. 저런 전보망 같은 거 없는.”
“나라고 안 가고 싶을까.” 페트렌코는 싱긋 웃는다. “하지만 15년은 기다려야 해. 그때까지 나는 정시 출근을 해야 하고. 정시 출근을 하려면 슬슬 자야겠지.”
약간 질린 듯이 바라보는 아내를 뒤로 하고 페트렌코는 칭얼대는 아들을 껴안으며 서재를 나섰다. 나서기 직전, 갑자기 생각이 나 아내에게 이렇게 외친 건 덤이다. “아. 이리나, 금속 재질이 없는 옷들 좀 꺼내 다려주겠어?”
정확히 7시 21분, 페트렌코가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는다.
엘리베이터는 상승과 하강 버튼이 전부다. 혀에 쇠맛이 감돈다. 어딘지 비린 냄새도 난다.
‘전보가 울린 것 치곤 너무도 평화롭군. 신무기 시연인가?’
시계를 확인한다. 하강 20초째.
‘타는 사람도 없고. 무슨 부서인지도 모르고. 지옥에 끌려가는 기분이 흡사 이러려나.’
하강 1분째.
‘지구 중심까지 가겠어.’
하강 2분 30초째.
‘아, 이리나가 라디오 고쳐달라고 했지. 지난 주말에도 못 고쳤네.’ 이후로도 하강이 계속된다.
“빌어먹을 엘리베이터 같으니.” 하강 4분 7초에 결국 참지 못한 페트렌코가 나직이 중얼거린다.
오전 7시 25분 20초. 빌어먹을 엘리베이터 때문에 늦을 줄만 알았던 페트렌코는 안도의 한숨을내쉰다. 하지만 그를 반긴 건 보통의 핵벙커나 작전실 입구가 아니다. 허름한 납문 하나만 덩그러니 있는, 흡사 아파트 지하실이다. 납문에 적힌 문구를 읽은 페트렌코는 피식 웃음 짓는다.
Кочегарка(보일러실)
‘보안 한 번 끝내주는군.’
대령이 끙 소리를 낸다. 납문 옆에 있는 슬롯으로 키 카드를 밀어 넣은 대령은 열이 받아 보일러가 되고 있다. 난 그저 7시 30분까지 새 근무지로 출근하고 싶을 뿐인데. 빌어먹을 수뇌부 놈들, 대체 이게 다 무슨 짓들인지. 느릿느릿 열리는 문틈으로 몸을 구겨 넣어 보일러실로 들어선다.
보일러실의 쇠맛은 비교 불가한 지경이다. 침뿐 아니라 온몸의 액체란 액체가 전부 철분으로 대체된 기분. 혈액을 타고 납탄이 흐르는 듯한 강한 불쾌감이 든다. 납문은 언제 누가 닫았는지도 모르게 조용히 닫혀 있다. 손잡이를 돌리지만 열리지 않는다. 페트렌코는 손목시계를 확인한다. 7시 26분 16초.
“처음으로 정시 출근을 못하게 생겼군. 이런! 빌어먹을! 철문 하나! 때문에!”
문을 발로 차지만 소용은 없다.
2평 남짓한 밀폐된 보일러실은 책상, 침대, 서랍 하나가 전부다. 늙은 관리인 한 명이 폐병을 얻어가며 건물 온도를 책임지고 있겠지, 생각하며 페트렌코가 방을 살핀다. 서랍 위로 성경 하나와 톨스토이 단편집 하나, 그리고 보르시가 남은 접시 하나가 놓여 있다. 대령은 빠르게 방을 살피며 이상한 점을 두 가지 눈치채는데, 하나는 보일러실 주제에 보일러에 관련된 기계 장치가 단 하나도 없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책상 위에 놓인 허름한 보일러실과는 어울리지 않게 깔끔한 인쇄 문서 한 장이다.
전출명령서. 루뱐카 본부의 보안 책임자에서 보일러실 관리자로. 이름은 드미트리 알렉세예비치 페트렌코. 그 옆에는 사인을 위한 볼펜 하나가 반듯이 놓여 있다.
‘네’/‘아니오’의 드미트리 알렉세예비치 페트렌코
오만가지 생각이 도탄(跳彈)된 탄두처럼 대령의 머릿속을 헤집는다. 이른 만우절 장난인가? 아직 꿈을 꾸는 건가? (아야! 꼬집은 뺨이 아프다.) 혹시 내가 밉보인 장성이 있던가? 말렌코프? 예슬로프? 맨 위에 이 명령서의 총책임자가 적혀 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 페트렌코는 현기증이 나 침대에 걸터앉는다. 와중에도 대령은 손목시계를 확인한다. 정시 출근까지 앞으로 남은 시간은 1분 20초 남짓. 그때, 그에게 끝내주는 생각이 하나 떠오른다. 아니, 떠오른다기보다 다른 모든 생각을 압도하는 형태로 머릿속을 짓누른다. 곧 페트렌코가 페트렌코에게 명령한다.
잘 생각해, 페트렌코. 지금 당장 이 전출명령서에 동의하는 사인을 해.
그러면? 그러면 자네는 보일러실 관리인이 돼.
그러면? 근무지가 이 보일러실이 되는 거야.
그러면? 이 멍청아! 정시 출근을 할 수 있는 거라고!
흠. 말은 험해도 충분히 합리적인 생각이다. 설사 이 납문을 열 수 있더라도 사무실까지 돌아가려면 엘리베이터를 타야만 한다. 4분 20초짜리 엘리베이터를. 정시 출근과는 안녕이다. 정시 출근과 안녕이라면 이 세상과도 안녕뭐라고? 이 세상과 안녕? 너무 멜로드라마처럼 생각하지 말자고. 페트렌코가 정신을 가다듬는다. 고작 정시 출근 기록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루아침에 보안 책임자에서 관리실 인부가 되라고?
그래야 할 걸?
아니, 난 적어도 왜 이 명령이 내려졌는지 알아야겠는데.
그래서, 대통령이랑 한판 할 꺼야?
필요하다면.
멍청한 생각에 더 시간 낭비하지 말고 빨리 펜 들어.
‘아니오’의 드미트리 알렉세예비치 페트렌코
‘아니, 엿 먹어. 난 이 나이 먹도록 보일러에 대해 아는 것도 없다고.’ 전출명령서를 주머니에 쑤셔 넣은 페트렌코는 순간 가벼운 어지럼증을 느끼고 주저앉는다. 잠겼던 것처럼 납문은 열릴 때도 소리 없이 열린다. ‘문 뒤에 누가 있나?’ 페트렌코는 전출명령서를 더 깔끔하게 접어 다시 주머니에 허겁지겁 넣는다. 엘리베이터에 조심스럽게 오른다.
대령의 숨이 가빠진다. 7시 30분까지 10초. 9초. 8초초가 10분 같고 10분은 영원처럼 느껴진다. 시간. 대령 자신의 존재도 이 카운트다운에 갇힌 채 엘리베이터에서 영원히 내리지 못하리란 기분이 든다.
3초. 2초. 1초삐- 삐-.
상승 39초째, 결국 7시 30분이 지나버린다. 초등학교부터 거진 43년의 정시 출근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은 고작 잠긴 보일러실 문 때문에 물거품이 됐다. 그런데 그 순간 오히려 공황은 사라지고 상쾌해진다. 평생 자신의 다리를 강제로 움직여오던 모터가 떨어진 기분, 그러니까 대령은 비로소 자기 발로 선 기분이 된다.
‘무슨 전산 오류라도 있는 건가. 그렇다면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책임을 묻겠어.’
상승 2분 12초째, 지상에 가까워질수록 쇠맛도 사라지고 숨통이 트인다. 분노도 조금씩 옅어진다.
‘하. 퇴근하면 라디오나 고쳐야겠어.’
페트렌코를 1층에서 맞이한 건 네 명의 요원과, 필사적으로 시선을 피하는 옐친이었다. 복장과 무장 상태를 볼 때, 이곳에서 근무하는 KGB 요원임을 알기는 어렵지 않다.
“대령님. 저희를 따라와 주시죠.”
“내가 왜 자네들을 따라가야 하나?”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대령님을 신문실로 안내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저항시에 강제력을 쓸 권한도요.”
“누구로부터?”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예’의 드미트리 알렉세예비치 페트렌코
‘끝내주는 생각이야!’ 정시 출근을 위해 전출명령서에 사인한 페트렌코의 눈앞에서 보일러실 전체가 책상을 회전축 삼아 회전하기 시작한다! 페트렌코는 중심을 잡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바닥에 주저앉는다. 굉음과 함께 180도 회전한 보일러실은 이내 잠잠해진다. 그러고 나서야 결코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허름한 납문이 스르르 열린다. 이제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갈 방법은 없다.
페트렌코가 조심히 문지방을 넘자마자 손목시계가 울린다. 삐- 삐-. 7시 30분.
‘후. 오늘도 정시 출근 성공이군. 여기가 새 근무지가 맞다면 말이야.’
시계에서 눈을 뗀 그는 그대로 나자빠진다. 회색의 보일러실이 아닌 콤스몰스카야역에 맞먹을 만큼 장려한 지하 광장. 붉은 색조의 고급스런 벽지와 금빛 샹들리에 아래에 진수성찬이 차려진 탁자와 가죽 소파가 보인다.
짝, 짝, 짝. 박수 소리에 페트렌코는 한 번 더 까무러칠 뻔한다.
“마지막 출근을 성공적으로 마친 걸 축하하네, 드미트리 알렉세예비치 페트렌코 대령. 보일러실로 가라니 분명 의심도 들고, 화도 났을 거라. 그럼에도 자네는 소련을 믿어줬어. 자네의 충성심은 두고두고 기억될 걸세.”
낯익은 목소리가 보일러실, 아니 지하 궁전을 가득 메운다. 어제 신년 방송에서 들은 목소리,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목소리가 어딘가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흐른다.
“자네의 전출식이자 은퇴식에 온 걸 환영하네. 나는 자네 중 자네가 이곳에 올 걸 확신했어. 부조리한 명령을 따라준 데 대한 우리의 선물이 바로 이 보일러실이야.”
예슬로프의 목소리가 바통을 받는다. 예슬로프 중장,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페트렌코의 상사였던 그는 늘 스위스 시계만큼 정확하고 시베리아 벌판만큼 냉혹한 군인이었다. 그랬던 예슬로프가 부드럽게 말한다.
“정확히 15초 후에 건배사를 올리지. 탁자 위에 마련된 아무 샴페인 잔이나 들게.”
은퇴하기 15년은 이른 페트렌코가 눈을 두어 번 깜빡인다. 그리고 명령에 따른다.
“자네의 처음이자 마지막 출근을 축하하지. 소련의 영원한 영광을 위하여!”
띵! 잔과 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진다.
‘아니오’의 드미트리 알렉세예비치 페트렌코
신문실에 들어온 건 예슬로프 중장이다. 아무리 장교급을 신문한다 해도 중장이 이 자리에 있는 건 새를 잡자고 대공포를 쏘는 격이다. 페트렌코의 손은 자동인형처럼 올라가 상급자에게 경례한다. 그러나 예슬로프의 냉혹한 눈빛에는 실망의 기색이 역력하다.
“앉게나.”
하지만 페트렌코는 이미 앉아 있다. 그는 잠시 엉덩이를 의자에서 떼더니 다시 붙인다. 어떤 상황에서도 명령을 수행하려는 군인 정신이자, 그럼에도 부조리한 상황에 불만을 표하는 최대한의 반항이기도 하다.
“자네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고 있나?”
“보일러실에 다녀왔습니다.”
페트렌코는 중장을 놀리지 않는다는 걸 강조하려고 진중한 목소리로 말한다.
“바로 그걸세. 자네는 자네 중에 충성심 없는 자네란 뜻이지.”
‘이게 무슨 개소리입니까?’ 페트렌코는 주머니에서 전출명령서를 꺼내며, 이 생각을 조금 부드럽게 바꿔 말한다.
“전출명령서에 대해 감히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물어볼 게 뭐 있나? 소련이 자네에게 전출을 명했고, 자네는 불복했네.” 페트렌코의 눈가에 주름이 잡힌다.
“적어도 전출의 이유는 알고 싶습니다.”
“이유? 이유가 필요하다고? 꼭 필요하다면 알려주겠네.”
예슬로프 중장은 책상 위로 서류 한 뭉치를 내민다. 500페이지도 넘어 보인다.
‘나는 떳떳해. 좌천될 죄 따위 지은 적 없다고.’
페트렌코는 되뇌며 첫 장으로 넘긴다. 이해할 수 없는 수식과 과학 용어들이 그를 반긴다. 대령은 흘깃 예슬로프를 쳐다본다. 중장님, 서류뭉치를 잘못 가져오신 게 아닐지요. 중장은 아무 말도 없이 뭉텅이로 페이지를 넘겨준다. 70페이지가 넘어서야 페트렌코에게 익숙한 정보가 보이기 시작한다.
너무 익숙한 정보였다는 게 문제다. 9년 동안 그가 탔던 모든 교통편 번호, 갔던 모든 장소와 머물렀던 시간은 물론, 극장의 좌석 번호와 아내와 잠자리에 든 시간까지 적혀 있다. 페트렌코는 경악한다. 분노보다도 두려움에 이성이 마비된다.
‘저 안에 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실수가 있는 건 아닌가?’
예슬로프는 먹이감의 간을 보듯 서류를 뒤적이다가 어느 페이지에서 멈춘다.
“1984년 3월 1일. 루뱐카 동무들과 회식을 했네. 기억나나?”
8년 전 회식이 기억날 리가하지만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자기 사진과 무슨 메뉴를 먹었는지 순서대로 적힌 메모를 반박할 수는 없다. 내가 취해서 몹쓸 말을 했던가? 대령의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흐른다.
“그날 자네는 인사불성이었네. 회식은 새벽 4시 반에 끝났고 인당 보드카를 세 병은 비웠어. 다음날, 회식에 참석한 열두 명 중 넷이 결근했고 일곱은 지각했네. 자네는 정확히 7시 30분에 사무실에 앉았어. 어떻게 일어났나?”
“그저, 그. 정시 출근을 하기 위해 눈을 떴을 뿐입니다?”
예슬로프가 말없이 사진을 보여준다.
‘말도 안 돼!’
KGB 요원들이 고주망태가 된 대령을 업는 사진(오전 6시 22분), 차에 싣는 사진(6시 47분), 대령을 업은 상태로 검문소를 통과(7시 17분)한 사진,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 사무실 의자에 엎드려 자고 있는 자기 사진(7시 30분 00초). 마지막 사진 뒷장에는 임무 완수라고 작게 적혀 있다.
“페트렌코, 소련은 오직 자네가 출근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네.”
‘예’의 드미트리 알렉세예비치 페트렌코
“자, 샴페인을 한 잔 더 마시게.”
멍하니 잔을 바라보던 페트렌코는 이상한 점을 눈치챈다. 아까 마신 샴페인이 잔에서 줄지 않은 것이다.
한 모금을 더 마신 대령이 혀로 굴려본다. ‘맛있군.’ 분명 혀에서 목으로, 목에서 위장으로 넘어가는 샴페인이 느껴진다. 하지만 잔은 아직도 가득 차 있다. 신기술인가? 페트렌코는 이번엔 혀를 콱 씹어본다.
‘아야. 아프군.’ 꿈은 아니다. 샴페인을 더 마신다. 취기가 올라오지만 역시 잔은 줄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책과 비디오를 모았네. 예술과 음식도 모았지. 여가에 관한 거라면 닥치는 대로 모았어. 보일러실 안에 있는 건 전부 다 자네 꺼야. 페트렌코, 자네는 모든 걸 누릴 자격이 있네.”
음, 보일러실 직원 복지가 이렇게 끝내주는 줄 알았다면 진작 올 걸 그랬잖아. 뭐, 자격이 있다면 사양하지 않고. 대령은 보드카를 비운다. 보드카는 잔 안에 그대로 있다. 와인을 비운다. 와인은 그대로 가득 차 있다.
예슬로프는 아랑곳없이 녹음된 말을 전한다. “자네는 묻겠지. 지금 농담하시는 겁니까? 나는 농담하는 법을 모르잖나. 나는 자네의 은퇴가 소련을 구하리라고 진심을 다해 말하고 있어”
‘은-퇴? 지이금? 하지만 나는 더 일하고 시픈데. 나는 언제까지고 정시에 출근하고 싶다고.’ 대령은 알딸딸해져 납문으로 돌아온다. 열릴 생각이 없는 납문을 발로 힘껏 걷어차 본다. 아야, 아파라.
“일찍이 제국은 가능한 한 많은 우주의 가능성들을 엿봤네. 하지만 소련이 살아남는 우주는 많지 않았어. 1991년 12월을 기점으로, 우리와 인접한 우주들 속에 소련은 더는 남아 있지 않았지.”
영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중장을 무시하고 가죽 소파에 앉아 와인을 마신다. 한 잔, 두 잔, 네 잔, 여덟 잔와인잔을 땅바닥에 내리꽂는다. 잔이 깨지고 와인이 튄다. 미지근한 와인이 가죽 구두를 흠뻑 적신- 눈을 감았다 뜨기도 전에 탁자 위로 와인 잔이 돌아와 있다. 가죽 구두는 젖은 적이 없다. 대령은 그제서야 벌떡 일어선다.
“우리는 절박하게 무엇을 바꿔야 소련이 사라지지 않을지 계산하기 시작했네. 그러다 소련이 멸망한 우주들의 단 한 가지 공통점을 찾았지. 멸망의 날은, 어떤 형태로든 자네가 정시 출근에 실패한 날이라는 것. 소련의 존속과 자네의 정시 출근은 곧 필요충분관계에 있다는 결론을 도출했다네.”
‘아니오’의 드미트리 알렉세예비치 페트렌코
“지금 농담하시는 겁니까?”
“내가 농담이란 걸 아는 사람인가?” 예슬로프가 서류철을 닫는다.
“전출을 택한 또 다른 자네는 포상으로 멋진 은퇴를 즐기겠지. 충성심이 부족한 자네는 여기서 쭉 일해야 하네.”
또 다른 내가 있고 그 녀석은 은퇴했다고? 예슬로프 중장, 어디 많이 아픈 걸까? 페트렌코는 실소를 겨우 참는다.
예슬로프는 서류를 챙기며 일어날 채비를 한다. “이제 전출은 없을 걸세. 자네의 기밀 취급 등급도 강등될 거야.”
페트렌코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단지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 당장이라도 퇴근해 아내와 아들을 껴안고, 하루 종일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라디오를 고치고 싶을 뿐이다.
“실망이네, 페트렌코 대령.” 예슬로프가 혀를 찬다.
‘예’의 드미트리 알렉세예비치 페트렌코
‘나가야 해. 나갈 거야.’ 대령이 비틀거리며 주변을 살핀다.
“보일러실은 우리가 만든 항상성 우주일세. 아까의 선택에 따라, 자네는 페트렌코로부터 떨어져 나온 하나의 가능성일세. 가장 충성스러운 가능성이지. 보일러실은 사진기처럼 그 가능성을 하나의 상태로 고정시켰어.”
대령은 탁자가 철제인 걸 확인하고 음식들을 쏟아낸다. 온 세상의 산해진미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진다.
“자네의 상태는 보일러실에 정시 출근한 순간 박제됐다는 뜻이네. 우주의 눈에 자네는 늘 정시 출근 중이겠지. 눈치챘을지 모르겠네만 보일러실의 음식은 영원히 떨어지지 않고 그 무엇도 닳지 않을 거야자네도 마찬가지고.”
그는 탁자를 끌고 와 다리로 납문의 경첩을 노린다. 한 번, 두 번, 탁자를 들어 있는 힘껏 경첩을 내리친다.
“하지만 걱정 말게. 그 안엔 자네를 출근시키기 위해 기를 쓰는 상사도, 우주도 더 이상 없네. 핵전쟁이 발생해도 반드시 안전을 보장하지. 보일러실 안의 자네는 비로소 자유라네. 11분 정도는.”
경첩의 작은 흠집을 보고 입꼬리가 올라가던 찰나, 페트렌코가 낸 흠집은 눈 깜짝할 사이에 존재한 적도 없게 된다. 페트렌코는 팔목이 부러질 때까지 납문을 두드리고 또 두드린다. 부러진 팔목은 금방 아까의 상태로 돌아오며 납문도 마찬가지다. 지쳐버린 대령은 다시 가죽 소파로 돌아온다. 대령을 놀리듯 뿅 하고 탁자가 대령 앞에 나타난다. 함께 생긴 음식에는 모락모락 김이 올라온다. 페트렌코는 멍하니 포크를 바라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자 자신은 아직도 소파에 앉아 있다. 피가 튀긴 흔적도 없이 멀쩡한 소파다.
“자. 이제 설명은 접어두고, 부대 시설을 말해줄 차례군. 서재는 복도 기준 왼쪽 두 번째 방일세.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어, 이 방은 역사상 그 어떤 도서관보다도 방대한 장서를 자랑하네. 약 5200만 권의 책이 비치돼”
‘아니오’의 드미트리 알렉세예비치 페트렌코
1992년 1월 3일, 페트렌코 대령은 근무지로 향했다. 6시 41분에 느적느적 나와 7시 4분 지하철로 루뱐카역까지 간다. 역에서 루뱐카광장까지 걷는 데 21분. 루뱐카광장에 들어서서 약 4분간 걷는다. 7시 29분에 검문소 앞에 선다.
“대령님!” 옐친이 벌떡 일어난다.
“옐친. 죽은 사람이라도 보고 있는 표정이군.”
옐친은 입만 우물대고 있다. KGB 요원들에게 끌려갔다가 멀쩡히 돌아온 페트렌코와 지각 1분전에 검문소에 들어선 페트렌코. 어떤 게 더 믿기 힘든 일인지 알 수가 없다.
대령이 키 카드를 건넨다. 옐친이 모니터를 확인한다. “아이전 사무실로 복귀하셨군요.”
“지금으로선.” 옐친이 재빨리 키 카드를 돌려주지만 받지 않는다. 지긋이 옐친을 바라보며 서 있을 뿐이다.
“대령님, 저. 시간이, 곧 근무 시작입니다만”
삐- 삐-. 그제서야 페트렌코는 키 카드를 받고, 옐친에게 싱긋 웃어주고는 느릿느릿 계단을 오른다.
사무실에 앉은 페트렌코는 보일러실에서 (영원히) 은퇴를 만끽할 또 다른 페트렌코를 향해 중얼거린다.
“부러운 친구.”
어젯밤 그는 결국 아내와 아들을 껴안았고, 적어도 라디오를 고치는 시늉은 할 수 있었다. 어딘지도 모를 독방에 갇혔다가 아무도 모르게 사라질 수 있었다 생각하면, 아니, 이제 이런 생각도 그만두자. 이곳에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기가 더 쉽다. 지하 벙커 어딘가, 그의 지각이 초래할 파장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소련 수뇌부는 환호한다. “전쟁에서 승리했다! 소련은 영속한다!” 페트렌코에게 그 소리가 들릴 리 없다. 그는 신문을 펴 오늘의 낱말 퍼즐을 푸는 걸로 새로운 출근 첫 날을 맞이한다.
최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