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는 퍼즐이에요. 게임과 다를 바 없죠.”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의 주인공 앨런 튜링의 대사다. 이 캐릭터의 모델이 된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은 초기 컴퓨터를 개발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암호를 풀어낸 공로로 잘 알려져 있다. 보드게임 ‘튜링 머신’ 속에서 당신은 튜링이 된다. 두뇌를 풀가동해 독일군의 암호를 풀 준비가 됐는가?
편집자 주
소설에 여러 장르가 있듯 보드게임도 여러 장르로 나뉜다. 그중 디덕션(deduction추론) 장르의 보드게임은 플레이어가 자신들의 지적 능력과 판단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도록 유도해 꾸준한 인기를 끌고 있다. 두뇌 싸움은 디덕션 장르의 가장 큰 특징이다. 보드게임 ‘디텍티브’ 시리즈에서 플레이어는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는 단서들을 조합해야 한다. 마치 경찰 수사관이 된 기분으로 범죄의 진상을 밝히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또한 ‘머더 미스터리’ 시리즈에서 플레이어는 명탐정 코난이나 소년탐정 김전일의 주인공이 돼, 살인 사건의 트릭을 밝혀내고 의미심장한 대사를 날려 볼 수도 있다.
한편 디덕션 보드게임의 하위 분야 중 하나인 사회적 추론(social deduction) 보드게임에서 플레이어의 역할은 숨겨진다. 사회적 추론 보드게임의 대표작으로는 1986년 소련 모스크바대 심리학 교실에서 심리학을 가르치던 드미트리 다비도프가 창안한 ‘마피아’ 게임이 있다. 마피아 역을 맡은 플레이어들은 적극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다른 이들을 혼란에 빠뜨려야 승리할 수 있다. 드미트리는 서로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상호작용을 심리학 교실 안에서 시뮬레이션하기 위해 마피아 게임을 개발했다. 이후 마피아 게임은 여러 변주를 거치며 발달했고, 늑대인간 테마의 ‘타뷸라의 늑대’, 서부극 테마의 ‘뱅’ 등 걸출한 대작들을 낳았다.
디덕션 보드게임의 발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테마나 상황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것보다는 추리 과정 자체에 집중하는 보드게임들이 등장한 것이다. 이런 보드게임들은 주어진 정보를 이용해 결괏값을 찾는 과정에 게임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대부분 ‘숫자 야구’라는 간단한 게임에서 파생된 규칙을 지닌 보드게임들이다. 이 게임들에는 공통적으로 상대가 가진 숫자나 정답을 알아내기 위해 질문을 던지고 답이 맞았는지 확인하는 과정을 여러 차례 거친다는 특징이 있다. 대표작으로는 보드게임 ‘클루’ ‘다빈치 코드’ ‘행성 X를 찾아서’ 등이 꼽힌다. 보드게임 ‘튜링 머신’은 이런 특성을 한계까지 밀어붙인 작품이다.
프랑스의 보드게임 디자이너 파비엔 그리델과 요안 레벳은 논리에 따라 작동하는 보드게임을 만들고 싶어 했다. 여기에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의 명성을 곁들이자 멋진 결과물이 등장했다. 튜링의 별명은 ‘컴퓨터 과학의 아버지’다. 복잡한 계산과 논리 문제를 처리하는 ‘튜링 머신’을 개발하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암호를 풀어 연합군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보드게임 튜링 머신의 배경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 벌어지던 20세기 중반이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유럽은, 아니 전 세계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들어갔다. 동시에 통신 기술이 발달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은 점차 정보전으로 변해갔다. 독일은 기계식 암호 장치 에니그마(Enigma)를 개량해 운영했고, 난공불락의 암호 기술로 적군을 농락하며 전투를 유리하게 끌고 갔다. 에니그마를 해독하지 못하면 큰 피해를 입을 것이라 생각한 영국 정부는 앨런 튜링을 기용할 결단을 내렸다.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들은 튜링이 돼 독일의 암호를 해석할 임무를 받는다. 영국 정부의 안내로 당신들은 런던에서 차를 타고 북서쪽으로 2시간 정도를 달려 한 저택에 도착했다. 안타깝지만 아직 전자식 컴퓨터는 개발되지 않았다. 블레츨리 파크 저택에서 플레이어들은 추리력만으로 독일군의 숨겨진 세 자리 코드를 알아내야 한다!
과학 나 대신 계산하는 기계를 만들 수 있을까?
다소 당황스럽게도 컴퓨터라고 부를 만한 것은 꽤 옛날부터 있었다. 기원전 2500년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계산을 돕는 주판이 쓰였다. 컴퓨터라고 부르기엔 약간 민망하지만 계산을 돕는 기계라는 의미로는 중요한 물건이었기에 꽤 오랜 시간 동안 활약했다. 한국에서는 6차 교육과정이 끝나던 2001년까지 초등학교 6학년 교과서에 주판 사용법이 실려 있었다. 아무래도 필자는 공식 교육을 통해 주판을 배운 마지막 세대인 듯하다.
주판이 등장한 후 오랜 시간이 흘러 1642년이 되자 프랑스의 수학자 블레즈 파스칼은 세계 최초로 기계식 수동 계산기를 발명했다. 파스칼은 세금 징수를 위해 계산에 씨름하던 아버지를 돕기 위해 기계를 만들었다. 이 기계는 톱니바퀴의 회전 비율을 이용해 덧셈과 뺄셈을 할 수 있었고, 반복적으로 작동시키면 곱셈도 가능했다.

이후 1822년 영국의 발명가 찰스 배비지는 다항함수를 계산할 수 있는 ‘차분기관’을 설계했다. 차분기관은 로그함수나 지수함수도 다항함수로 근사한 다음 계산할 수 있기 때문에 수학적으로 이용할 가치가 높았다. 배비지가 살던 시절에는 복잡한 함수 계산을 전부 사람이 해냈다. 이들은 계산(compute)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계산수(computer)라고 불렀다. 사람 대신 계산하는 기계를 개발한 배비지는 최초의 ‘기계식’ 컴퓨터를 개발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예산이 부족했던 배비지는 실물 차분기관을 완성해 보급하지는 못했다.
앨런 튜링이 활동하던 1930년대에도 컴퓨터는 계산수, 즉 인간을 일컫는 말로 계속 쓰였다. 학자들은 종이와 연필만 가진 사람이 철저하게 지시에 따라 행동해 계산할 수 있는 범위가 어느 정도일지 궁금해했다. 물론 이 궁금증은 학자적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계산은 지겹고 지루한 작업이기 때문에 편하게 자동으로 계산하는 기계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어떤 계산이 기계적으로 가능하고 불가능한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 1936년 튜링은 계산하는 기계를 대표할 수 있는 이론적인 계산 모델을 설계했고, 자동이라는 영어 단어 automatic의 앞 글자를 따서 ‘a-machine(에이-머신)’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우리는 이 에이-머신을 바로 ‘튜링 머신’이라고 부른다. 튜링 머신은 크게 네 가지 장치로 구성되어 있다. 일정한 간격으로 칸이 그려진 무한한 길이의 ‘종이 테이프’와, 이 테이프의 특정 칸에 적힌 값을 읽는 장치인 ‘헤드’가 있다. 튜링 머신에서 일어나는 일은 ‘상태 기록기’에 기록된다. 마지막으로 ‘행동표’는 읽은 기호에 따라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규칙이 적힌 종이를 말한다. 튜링 머신은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계산 과정을 모사해 이를 통해 어떤 문제들이 계산적으로 해결 가능한지 알 수 있게 했다. 튜링 머신의 테이프는 훗날 컴퓨터의 구성 요소인 RAM으로 구현됐다. 튜링의 유산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셈이다.
최초의 튜링 머신은 정해진 행동표에 적힌 한 가지 종류의 계산만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양한 계산을 원하는 대로 수행할 수 있는 컴퓨터는 행동표가 고정되어 있어서는 곤란했다. 보편 튜링 머신은 테이프의 일부분에 다른 행동을 적어 새로운 행동표를 만드는 식으로 작동해 다양한 계산을 해낼 수 있다. 현재 쓰이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컴퓨터는 보편 튜링 머신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튜링 머신의 개념은 오늘날 거의 모든 계산을 사람 대신 컴퓨터가 처리할 수 있게 하는 기반이 됐다.
한편 튜링이 해독하기 위해 분투했던 독일군의 암호는 에니그마로 만들어진다. 에니그마로 만들어진 문서들은 3개의 회전자를 이용해 암호화된다. 에니그마 내부에서는 알파벳 개수인 26개의 톱니를 가진 첫 번째 회전자가 한 바퀴를 돌면 두 번째 회전자가 한 칸 도는 식으로 암호화 과정이 일어났다. 회전자가 3개인 에니그마로 같은 배열의 암호를 다시 만들기 위해선 암호화할 문장을 입력하는 도구인 키보드를 1만 7576번 눌러야 했다. 게다가 독일은 에니그마를 계속 개량했고, 1942년엔 회전자를 8개까지 늘리고 그중 4개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암호화 방식을 280배 더 어렵게 만드는 기염을 토했다.
튜링과 동료 암호해독팀은 계산을 빨리해 낼 수 있는 기계를 만들었다. 튜링과 동료들의 암호 해독을 주제로 한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의 포스터에도 등장하는 이 기계는 암호 해독 ‘폭탄’ 봄베(Bombe)라고 불렸다. 독일군의 사소한 실수로 얻은 실마리와 봄베의 빠른 계산 속도를 이용해 튜링은 결국 에니그마의 암호를 해독해 낸다. 해독된 정보를 토대로 영국은 독일군의 보급로를 차단할 수 있었다. 이때 만들어진 봄베는 개량을 거쳐 최초의 디지털 컴퓨터인 ‘콜로서스’가 됐고, 이후 여러분도 잘 알고 있는 컴퓨터의 시대가 열린다.

게임 숨겨진 세 자리 코드, 해답 찾아 검증을 반복하자!
보드게임 튜링 머신에서 플레이어는 숨겨진 세 자리 코드를 알아내기 위해 암호 해독에 전념하는 경험에 푹 빠질 수 있다. 다른 여러 디덕션 게임과 다르게 보드게임 튜링 머신에서 플레이어는 서로 질문을 던지고 답을 듣지 않는다. 대신 준비된 가상의 기계에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 가상의 기계는 논리적인 결과를 검증하는 검증기 카드 4~6개로 구성되어 있다. 플레이어들은 이 검증기 카드에 적힌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유일한 세 자리 코드를 찾아내면 된다. 문제는 플레이어들은 이 검증기 카드의 조건을 모른다는 점! 플레이어는 각 검증기 카드의 검증 조건을 알아내기 위해 일단 숫자 세 개를 골라 임시 코드를 만들어야 한다. 임시 코드를 만들기 위해선 1에서 5까지 숫자를 세 개 선택해 순서대로 나열해 두면 된다. 그리고 각 숫자에 맞는 펀치 카드(▲, ■, ●)를 가져와 잘 포개 겹친다. 3가지 색의 펀치 카드를 제대로 겹쳤다면 작은 구멍이 1개 남아있게 된다.
이제 플레이어는 첫 번째 라운드에 서로 다른 검증기 카드에 최대 3번까지 질문을 할 수 있다. 검증기 카드 옆에 놓인 테스트 카드를 겹친 펀치 카드에 가져다 댄다. 이때 테스트 카드 모서리에 적힌 ▲, ■, ● 기호가 모두 보이게 겹치는 것이 바로 질문하는 방법이다. 여러분은 겹친 펀치카드의 구멍으로 테스트 카드에 적힌 통과(V) 또는 실패(X)를 확인할 수 있다.
플레이어는 질문에서 얻은 결과를 다른 플레이어가 볼 수 없도록 가림막 뒤에서 열심히 분석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때 기록지의 각 칸에는 사용한 코드를 적고 검증기 테스트 결과를 기록해 둘 수 있어 유용하게 쓸 수 있다. 고민이 끝났다면, 다른 플레이어들과 모여 자신이 진짜 코드를 찾았는지 못 찾았는지 확인하는 단계를 거친다. 만약 아무도 진짜 코드를 알아냈다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면 다음 라운드로 넘어간다. 다음 라운드를 시작할 때 다시 임시 코드를 만들어 질문을 더 해볼 수 있기 때문에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만약 진짜 코드를 알아낸 사람이 한 명 이상 나왔다면 정답을 확인한다. 정답을 맞힌 사람이 둘 이상이라면 질문을 적게 한 사람이 승리자가 된다. 그러니까 질문할 때는 꼭 기록지에 어떤 질문을 했는지 자세히 적어 두는 것이 좋다. 반면 정답을 확신했지만 틀린 경우라면, 그 사람은 게임에서 제외되고 남은 사람들끼리 게임을 이어간다. 확실하지 않으면 승부를 걸 때 조심해야 한다!
팁 최적 플레이 인원이 1명이라니!
정말 놀랍게도 세계 최대의 보드게임 커뮤니티 ‘보드게임긱(boardgamegeek)’에서 제공하는 보드게임 튜링 머신의 최적 플레이 인원은 1명이다. 원래대로라면 최대 4명까지 동시에 플레이할 수 있지만, 여럿이 모여 플레이할 때에는 몇 가지 불편한 점들이 따른다. 이 게임의 각 라운드는 모든 플레이어가 동시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 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가끔 내가 사용하고 싶은 펀치 카드를 다른 사람이 이미 쓰고 있어 곤란한 경우가 생긴다.
그러나 눈치 볼 필요는 없다. 당황하지 말고 다른 플레이어가 질문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받아서 사용하면 된다. 게다가 각자 해야 하는 일이 명확하기 때문에 게임의 승리를 위해 다른 사람을 견제할 필요는 없다. 안타깝게도 튜링 머신 보드게임은 소위 말하는 벽겜(플레이어들이 각자 ‘벽 보고 있듯이’ 개인적으로 하는 게임)이며, 왁자지껄한 보드게임을 원했던 사람에게는 ‘노잼’이라는 평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동시 진행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사람이나 혼자서 한계를 시험해 보고 싶은 사람을 위해 게임 제작자들은 친절하게도 1인 모드를 마련해 뒀다. 플레이어는 규칙서에 적힌 QR 코드를 스캔해서 기계와 한 판 붙어볼 수 있다. 기계를 이기기 위해서 플레이어는 더 적은 수의 질문을 던져 진짜 코드를 찾아내야 한다.
튜링 머신 보드게임의 규칙서에는 20개의 문제만 수록되어 있다. 대신 웹사이트에는 약 700만 개 이상의 어마어마한 문제가 수록되어 있어 언제나 새로운 게임을 경험할 수 있다. 게다가 검증기 카드를 늘려 더 혼란에 빠지는 익스트림 모드, 어떤 검증기에 어떤 검증기 카드가 놓이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하는 나이트메어 모드도 있다. 여러분의 두뇌를 풀 가동해 볼 준비가 됐는가? 무궁무진한 즐길 거리를 제공하는 튜링 머신 보드게임에 도전해 한계를 시험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