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인류라는 종을 뜻하는 이 표현은 18세기 스웨덴의 자연사학자이자 의사, 칼 폰 린네가 만들었다. 그는 종과 속을 붙여 쓰는 ‘이명법’을 만들어 처음으로 근대적 생물 분류 체계를 확립한 학자로 알려졌다. 그의 분류법은 이후 생물학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어떤 영향이었을지, 린네의 삶 속으로 깊이 들어가보자.
칼 폰 린네
1707. 5. 23. ~ 1778. 1. 10.
1707년 5월 23일 스웨덴 제국의 웁살라 근교에서 태어난 칼 폰 린네는 ‘자연의 체계(Systema Naturae)’라는 저서를 통해 근대 분류학의 기초를 놓았다. 특히 1758년도 ‘자연의 체계’ 제10판은 현대적인 생물 분류 명명법의 출발점으로 평가받는다. 이런 업적에도 불구하고 린네는 ① 독실한 종교인으로써 신이 창조한 생물의 종이 고정불변한다고 믿는 한계를 보였다는 비판이 있다. 또한 ② 인류를 피부색에 따라 분류하면서 인종을 과학적 분류 대상으로 잘못 정의했다는 비난도 받는다. 다른 한편으로 린네는 ③ 자연사 지식이 급격히 팽창하던 시기에 수많은 정보를 처리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고안한, 최초의 ‘빅데이터 과학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의혹 1. 생물종이 변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무엇보다 잘 알려진 린네의 업적은 생물 분류학이다. 그는 방대한 자료를 기반으로 기존의 분류 체계를 정리해 분류학이 학문으로 자리잡도록 기여했다. 린네는 생물 분류의 가장 기본 단위로 ‘종(species)’을, 그리고 비슷한 형태의 종들을 모아 ‘속(genus)’으로 묶고, 이를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와 같은 이명법으로 분류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후대 과학사학자들은 린네가 독실한 신자였고, 그래서 신이 고정된 형태를 가진 종을 창조했다고 믿었으리라 분석하기도 했다. 린네가 가진 ‘생물의 종은 변하지 않는다’는 개념이 이후 진화론이 등장하는 데 큰 장애물이 됐다는 의미다.
사실 린네는 종의 고유한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는 한 종이 어떻게 다른 종과 구별돼 다뤄질 수 있는지를 탐구하고 싶어했다. 당시 유럽은 근대 국가가 수립되고 전세계적으로 식민지가 늘면서, 전에 알려지지 않던 새로운 종류의 생물에 대한 정보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던 상황이었다. 린네는 이 정보의 홍수 가운데서 종의 수와 이름들을 줄이고 싶어했다. 종에 관한 그의 설명은 종교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동기보다는 위와 같은 정보 과부하의 상황에서 종과 변종(varieties)을 구별하는 기준을 만들려는 노력 가운데 등장한 산물이었다.
종과 변종을 구별하기 위해 린네는 자연사학자들 가운데 처음으로 종을 ‘서로 번식해 생식력 있는 자손을 낳을 수 있는 개체들의 집합’으로, 특정 장소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스스로 번식하는 대상으로 정의했다. 변종은 토양이나 기후와 같은 특정 상황에서 만들어진 종 내의 차이였다. 이와 같은 정의와 분류를 통해, 린네는 17세기까지 대체로 개별 생물 개체의 차원에서 이해되던 생물의 특성을 종의 생식과 연관지어 사고하게 만들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린네가 종을 생식의 주요 단위로 자리매김시키지 않았다면 후대에 진화와 유전에 대한 질문 자체가 등장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또 린네는 생식 과정과 연관해서 종이 변화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다. 1750년대에 이르러 린네는 야생 환경은 물론 자신의 정원에서 수많은 변종들이 번식해나가는 것을 꾸준히 발견했다. 이 모습을 본 그는 다른 식물종 간의 교배를 통해 변종, 나아가 ‘새로운 종’이 등장할 가능성에 대해 추론했다. 1759년에는 최초로 통제된 교배 실험을 수행해 멘델의 완두콩 교배 실험으로 이어질 실험의 전통을 열기도 했다. 이와 같은 배경 가운데 린네는 1764년 ‘식물의 속’ 제6판에서 “항상 자신과 유사한 형태”를 낳는다는 이전의 종에 대한 정의에서 ‘항상’이라는 단어를 삭제하며 종의 변화 가능성을 유연하게 생각하는 태도를 보였다. 린네에게 종은 완전히 불변하는 개념은 아니었던 것이다.
![](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article/Contents/202411/1732347102-8c623f2d-7103-43cf-8c01-16874c1d71bc.png)
1 칼 폰 린네가 쓴 ‘자연의 체계’ 중 일부. 식물의 암술과 수술의 형태를 토대로 식물 전체를 24가지 종류로 분류했다.
식물 세밀화는 독일에서 활동한 식물학자 게오르크 에레트의 작품.
2 스웨덴 웁살라에 남아있는 린네 식물원. 린네는 1741년부터 이곳에서 다양한 식물을 키우고 분류학 연구를 진행했다.
의혹 2. 인간을 인종으로 분류하는 오류를 범했다?
린네는 1735년 ‘자연의 체계’ 초판에서 사람속(Homo)을 동물계의 안트로포모파(Anthropomorpha, 오늘날의 영장목)에 위치시켰다. 그리고 인간을 유럽인(백색), 아메리카인(홍색), 아시아인(갈색), 아프리카인(흑색)으로 구별해 언급했다.
인종을 피부색에 따라 뚜렷이 구별되는 본질을 가진 유형들로 제시했다는 점 때문에 린네는 인종을 과학적 분류 대상으로 잘못 정의했다는 비난을 받는다. 린네가 인종이란 개념을 과학적으로 정의해 후대 인종차별 정책을 뒷받침하는 기반이 생겼고, 이것이 많은 비극을 낳았다는 종류의 비판이다.
그런데 린네는 본인의 저서에서 분류한 네 인간 집단을 ‘변종’이라고만 언급했을 뿐, 실제로 ‘인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당시의 다른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린네는 피부색의 차이 등은 기후의 산물로, 키나 체중 같은 다른 개체마다의 ‘우연적인’ 신체적 특성만큼이나 가변적이라고 생각했다. 즉, 같은 종이지만 어떤 기후대에서 사느냐에 따라 피부색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린네는 식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간 변종들을 서로 거주하는 기후의 차이에서 나타난 환경적, 우연적 산물로 이해했다. 린네가 사람을 네 집단으로 구별한 것은 그가 식물의 다양성을 연구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라는 네 대륙을 지리적 분류로 삼아 인간의 다양성에 대한 탐구를 진행하려는 것으로, 사대륙 분류를 발견적 도구로 도입한 것에 가까웠다.
사실 인종이라는 용어는 그가 50대의 장년이 된 1760년대가 돼서야 처음 스웨덴에서 등장했다. 비록 1758년 출판된 ‘자연의 체계’ 10판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백인우월주의적인 설명들이 담기기는 했다. 그러나 이후의 판본들에서 다시 피부색과 집단과의 연관성은 달라졌고, 백인과 아메리카인의 위계 또한 역전됐다. 린네에게 있어 인간의 분류는 이 정도로 유동적이었다.
린네가 언급한 사람속의 네 변종을 각 집단들이 뚜렷이 구별되는 아종(subspecies)이며 생물학적인 견지에서 본질적으로 다른 인종들이라고 해석하고, 이와 같은 믿음을 널리 퍼뜨린 것은 린네가 아니라 임마누엘 칸트와 같은 19세기 후대의 학자들이었다.
의혹 3. 최초의 빅데이터 과학자였다?
린네는 직접 스웨덴을 여행하거나 세계 각지로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본인이 관리하던 웁살라 식물원에 최대 2000종의 식물을 배양했다. 그는 수집한 식물 표본들을 세심하게 비교하고 꼼꼼하게 설명하고 기록했다. 더 나아가 린네는 스웨덴의 토양과 기후에 적합한 외국 식물을 수입하거나, 값비싼 외국산 수입 식물을 대체할만한 토착 식물을 발굴해 스웨덴을 상업 제국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겠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린네는 표본만으로는 알 수 없는 특정 동식물의 의학적, 경제적 용도에 대한 다양한 정보들도 기록하고 정리해야 했다. 연구 경력 초기 린네는 목록, 도표, 표와 같은 2차원적 배열에 식물에 관한 정보를 배치하는 방식으로 정보를 축적했다. 여기에 더해 유럽 도서관에서 18세기 말에나 널리 쓰인 색인 카드와 같은 기술도 선구적으로 도입했다.
린네는 자연사학자 중에서 거의 최초로 동일한 저작을 여러 판본으로 출판하는 활동을 벌였는데, 이도 부분적으로 데이터 정리 기술의 산물이었다. 예를 들어 초판에서 11쪽의 소책자에 불과했던 ‘자연의 체계’는 린네 사후에 출간된 13판에 이르러서는 10권 6300쪽에 달하는 거대한 저작이 됐다.
이렇게 많은 정보가 담길 수 있었던 것은 린네와 동시대 자연사학자들이 ‘자연의 체계’를 새 자료를 축적하기 위한 플랫폼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책을 인쇄하면 뒷장은 여백으로 남아 있었는데, 린네는 이 빈 면을 해당 식물종에 관해 추가된 새로운 정보를 모으는 데 활용했다. 린네는 다른 분류학자들이 책에 실린 생물에 대한 새 정보를 보내오면, 빈 면에 그에 관한 새로운 주석을 달았다. 그리고 해당 정보가 빈 면을 가득 채우면 내용을 수정한 새 판본을 발행했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책의 규모가 커졌고, ‘자연의 체계’는 당대 생물 정보가 집대성된 분류학 저작으로 우뚝 섰다.
재밌는 점은 위와 같은 린네의 노력이 정보의 홍수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한 것들이지만, 이들이 다시금 효율적으로 데이터를 축적할 수 있는 플랫폼이 되면서 새로운 정보 생산을 촉진하고 또 다른 정보 과부하의 시대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1933년 대영도서관이 소장한 린네 출판물 서지 목록에 따르면, 린네의 저작은 재판본, 해적판, 번역본 및 수정본들을 포함해 거의 3800권에 달했을 정도였다.
후대의 자연사학자들은 린네가 고안한 데이터 처리 기술들을 받아들여 수많은 데이터들을 생산하고 처리함으로써 자연사를 일종의 정보 과학과 유사하게 만들었다. 그의 연구 활동과 성취가 오늘날의 빅데이터 과학의 선구처럼 보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article/Contents/202411/1732347167-69b4151e-edfe-4394-be6c-06f5fb785fe9.p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