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에서 탐험하려는 목적지가 멀수록 연료와 식량을 재충전할 수 있는 공간이 더욱 필요해진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우주정거장이 개발되는 것은 물론 도시 자체를 움직여 우주를 방랑하는 시대가 펼쳐질지 모른다.
인류가 우주로 눈을 돌리면서 필연적으로 등장한 개념이 우주식민지이다. 지구라는 요람에서 벗 어나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우주 환경을 극복해가며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개척하는 이야기는 SF의 본령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주제를 통해 끊임없이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려는 인간 의 진취적 본성을 느낄 수 있을 뿐 아니라, 광활한 우주에서 닥치는 외계 생물이나 낯선 환경 속 에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곰곰히 생각할 수 있다. 우주식민지의 개념은 이제까지 SF 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변천해 왔을까.
우주개척의 전초기지 - 21세기에는 우주양로원 현실화될 듯
우주정거장의 개념은 이미 19세기말부터 소설에 등장했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상세하게 묘사된 우주정거장은 '로켓의 아버지'라 불리는 러시아의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에 의해 처음 등장했다. 그는 1896년부터 1920년까지 장장 20여년에 걸쳐 집필한 '지구 밖으로'라는 저서에서 식량 공급을 위한 온실에서의 식물 재배, 거대한 거울을 이용한 지구와의 통신, 또 자전을 통해 인공중력을 만 들어내는 방법 등 오늘날 친숙한 아이디어의 상당수를 고안해냈다. 이 책은 SF소설이라기보다 일종의 가상 논픽션 형식의 저작이다.
한편 우주정거장이 SF에서 친숙한 소재로 부각된 것은 1949년 미국의 윌리 레이가 펴낸 '우주의 정복'이라는 논픽션이 계기였다. 세밀한 그림까지 포함된 이 교양과학서는 당시의 SF작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쳐, 이후의 SF 작품에서 우주정거장은 보편적인 소재로 다뤄지기 시작했다.
1950년대 즈음 SF에 등장하는 우주정거장은 더 먼 우주로 여행하기 위해 잠시 거쳐가는, 글자 그 대로 정거장의 의미가 강했다. 장거리 우주선은 어느 정도 큰 규모로 만들어져야 한다. 이런 우주 선은 지구보다 중력이 훨씬 작은 우주궤도에서 조립하는 것이 경제적으로나 효율 면에서 월등하 게 유리하다. 물론 장거리 여행에서만 우주정거장이 유용한 것은 아니다. 영화 '2001년 우주의 오 디세이'에서 묘사됐듯이, 이용자들이 충분히 많을 경우 달 여행을 위해 우주정거장을 이용하는 것 이 여러모로 효율적이다.
정거장이 아닌 거주지로서의 우주정거장 역시 진지한 검토의 대상이 돼 왔다. 우주정거장은 무엇 보다 양로원으로 더없이 좋은 곳이다. 지구 표면보다 중력이 작기 때문에 거동에 필요한 근력 소 모가 훨씬 적으며, 공기를 비롯한 모든 환경이 엄격하게 통제되므로 호흡이나 식사와 같은 모든 조건이 오염물질로부터 거의 완벽하게 차단된다. 아마 21세기 전반기에는 우주양로원이 현실화될 것이다.
우주를 떠도는 방랑 도시 - 몇세대 생종할 수 있는 주거 시설 갖춰
우주정거장은 지구 궤도상에 고정된 것이기 때문에 지구로부터의 물자 보급이 쉽게 이뤄진다. 하 지만 먼 우주를 여행하는 우주선은 어디에든 착륙해서 식민지를 개척하기 전까지 그 안에서 자급 자족으로 생활을 영위해야 한다. 그래서 나온 개념이 세대우주선이다.
세대우주선이란 우주선 안에서 몇세대가 이어지도록 장기간 우주여행을 할 수 있는 대규모 우주 선을 뜻한다. 이 방법은 현재의 인류가 먼 우주로 여행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다.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우주선을 만들기는 사실상 불가능하고, 또 블랙홀이나 웜홀을 이용해 먼 우주로 순식간에 이동한다는 개념은 확실히 검증되지 않은 가설에 불과하다. 살아있는 인간을 동면 상태 에 두었다가 긴 시간 뒤에 다시 깨우는 일도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따라서 현재의 과학기술 수 준으로 몇십광년 이상의 머나먼 우주를 여행하려면 탑승자들이 우주선 안에서 살아가는 방법밖에 없다. 우주선 자체가 소규모의 우주도시가 되는 것이다.
세대우주선의 아이디어 역시 치올코프스키가 처음으로 창안했다. 그는 먼 미래의 인류가 생존을 위해 우주로 일종의 '노아의 방주'를 보내야 하며, 이 방주는 수천년 간 여행을 계속해야 할 것 이라고 생각했다.
치올코프스키의 생각을 바탕으로 방랑우주선이나 우주방랑도시 같은 아이디어가 탄생했다. 외부 의 도움 없이 자급자족이 가능하려면 이 우주선들은 거대한 규모를 갖춰야 한다. 그래서 인공적 으로 우주선을 만들지 않고 소행성 하나를 통째로 우주선으로 개조하는 아이디어도 등장했다. 내 부를 파내서 거주구역을 만들고 추진기관을 달아 소행성 자체가 우주선이 되도록 만든다는 생각 이다.
한편 지구의 도시들이 통째로 우주로 날아간다는 발상도 나왔다. 이 우주도시의 발상은 미국의 SF작가 제임스 블리쉬의 연작물 '우주도시'(1952-1962) 때문에 널리 알려졌다.
소설의 배경은 21세기 초.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강대국들은 국제 정세와 국내의 여러 문제들로 긴 장이 팽팽한 상태다. 이 즈음 반중력과 노화억제제와 같은 획기적인 과학기술이 잇달아 개발돼 인류는 지구의 굴레에서 벗어나 우주로 도약하는 계기가 마련된다.
새롭게 개발된 스핀디지라는 반중력기관은 외부와 완전 격리된 독립적인 에너지장을 만들 뿐 아 니라 상대성이론의 적용에서도 벗어나 초광속운동을 실현시킨다. 게다가 기관의 효과는 질량이 클수록 더 증폭되기 때문에, 결국 지구상의 모든 도시들이 지반과 함께 떠올라 거대한 우주선이 돼 우주로 날아간다. 그래서 도시들은 각종 기술과 물자를 교역하면서 우주를 떠돌아 다니게 되 고, 이후 1천년이 훨씬 넘도록 은하계 문명의 축을 이룬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에서 구사된 과학 기술적 이론들은 비록 허구적인 내용이지만 그 자체로는 매우 정교한 논리 전개를 담고 있어서, 과학적 논리의 치밀함에 비중을 두는 '하드 SF'에서는 고전으로 꼽히는 걸작이다.
한편 로버트 하인라인의 장편 '우주의 고아들'(1963)은 세대우주선에서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을 서 사적으로 묘사한 독특한 작품이다. 우주선이 오랜 세월을 우주공간에서 머무는 동안, 처음 지구에 서 출발할 때 탑승했던 사람들은 모두 사망하고 그 후손들이 우주선을 조종한다. 그러나 어느 순 간 폭동이 일어나 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하고 거대한 우주선 내부도 구역이 나뉘어져 서로 적대적 인 집단끼리 대립하게 된다. 그들은 선대로부터 지식을 전수받지 못해 미신에 좌우되는 야만적인 수준으로 전락하며,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세계가 우주선이라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게 된다. 그 러나 선각자와 같은 인물이 등장해 비로소 자신들의 실체를 파악하고 다시 우주 개척의 길에 나 선다는 내용이다.
외계인이 제작한 도시우주선 - 태양에서 삶의 에너지 얻는 라마
'하드 SF'에서 또하나의 교과서적인 모범을 보여주는 걸작인 아서 클라크의 장편 '라마와의 랑데 뷰'(1973) 역시 거대한 도시우주선을 묘사한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는 인간이 아니라 정체불명의 외계인들이 만든 원통형의 거대한 인공 구조물이 등장한다.
서기 2130년 우주를 감시하던 레이더가 지구로 접근하는 정체불명의 물체를 포착한다. 놀랍게도 지름 20km에 길이가 50km에 이르는 거대한 실린더형의 인공 물체였다. 탐사대가 라마라고 명명 한 이 미지의 우주선 안에 들어가보니 여섯개의 도시와 얼어붙은 바다까지 있는 하나의 독립된 세계였다. 그러나 수수께끼처럼 생명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라마가 태양에 접근하면서 바다가 녹고 대기 운동이 활발해지더니 로봇 비슷한 생명체들 이 수없이 생겨나 우주선 내부를 정비하기 시작한다. 라마가 태양으로 곧장 날아가자 탐사대원들 은 서둘러 철수하고 인류는 숨을 죽인 채 관찰한다. 태양에 아주 가까이 접근한 라마는 모종의 에너지를 얻은 듯, 다시 방향을 돌려 머나먼 우주 저편으로 아무 말없이 사라져버린다.
아서 클라크는 미항공우주국(NASA)의 우주탐사선 프로젝트에서 일했던 젠트리 리와 함께 1989 년부터 이 작품의 후속편들을 다시 발표했다. '라마 II' '라마의 정원'과 같은 후속편에서 라마는 다시 지구로 날아와 대규모로 지구 이민들을 받아들인다. 그리고는 다른 외계생명체들까지 탑승 시켜 우주 저편으로 미지의 여행을 계속한다.
지구를 식민지로 설정한 외계인 - 인체 비밀 실험이 진행되는 도시 '다크 시티'
인류가 우주로 나가서 새로운 식민지를 개척한다는 설정과는 반대로, 외계인들이 지구를 정복해 식민지로 삼는다는 설정도 심심찮게 접할 수 있다. 고전적인 예로는 아서 클라크의 기념비적 장 편 '지구유년기 끝날 때'(1953)를 들 수 있다. 인류가 우주를 향해 최초의 로켓을 발사하려는 즈음 갑자기 세계 각지의 대도시 상공에 거대한 외계 우주선들이 나타난다. 인류는 지구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그들의 놀라운 과학기술에 제대로 저항할 엄두도 내지못한 채 굴복하고 외계인 총독 의 통치를 받게 된다.
여기까지는 전형적인 '침략-식민지화' 구성이지만 후반부는 다르다. 이 작품의 외계인들은 지구 인류에게 어떠한 착취나 고통도 안겨주지 않고 오히려 인간으로 하여금 야만적인 본성을 억제하 고 자율적인 평화를 유지하도록 인도한다. 사실 외계인은 지구 인류가 조만간 획기적인 진화를 겪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자신보다 초월적인 존재의 위탁을 받아 지구를 보호하러 온 것이 었다.
반면 80년대 TV연속극으로 방영돼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SF영화 'V'(1983-1984)는 상당히 통속 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지구인과 똑같이 생긴 외계인들이 일단 지구를 정복한 뒤 비교적 온건한 정책을 쓴다. 그러나 사실 이들은 지구인의 껍질을 뒤집어 썼을 뿐 실제 외모는 흉칙한 파충류형 이며, 이들이 지구에 온 목적은 식량의 비축이었다. 그 식량은 다름아닌 인간인 것이다.
한편 최근 미국에서 발표된 영화 '다크 시티'(1998) 역시 외계인들이 관리하는 지구인 식민지를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의 외계인들은 종족 전체가 사멸의 위기를 맞게 되자 일종의 우주도시에 지 구인들을 가두고는 매일 밤마다 뒤바뀐 기억을 주입시키며 모종의 실험을 계속한다. 지구인들에 게 숨겨진 생명의 원동력을 찾아내려는 목적이다. 주인공은 우여곡절끝에 이 음모를 깨닫고, 나아 가서 자신이 초능력을 지녔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이집트 출신의 호주 감독 알레스 프로야스가 연출한 이 영화는 무척이나 개성있는 스타일로 SF 매니아들 사이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우리나라에는 12월 경 개봉될 예정이다.
우주 진출의 미래 - 지구는 돌아올 수 있는 고향
인류가 개척할 우주식민지의 궁극적인 형태는 물론 외계 행성이 될 것이다. 가깝게는 지구를 제 외한 태양계의 다른 행성들부터 멀리는 은하계 각지의 수많은 별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은하계 밖의 까마득한 외계도 인류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다.
얼마전 달에서 물이 발견됐다는 소식은 많은 사람들을 들뜨게 했다. 달에 식민지를 개척하는 일 이 훨씬 수월해졌기 때문이다. 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만능 물질이다. 호흡과 음식 조리에 필수적일 뿐만 아니라 수소를 분해해 내 우주선 연료로도 쓸 수 있다. 만약 물이 없 다면 만들어 써야 하는데, 여기에 드는 비용과 노력이 막대하기 때문에 외계 식민지를 개척할 때 물이 있는 곳은 엄청난 이점을 지니게 된다.
달의 식민지를 묘사한 소설은 많이 있지만, 대표작으로 하인라인의 휴고상 수상작품인 '달은 무자 비한 밤의 여왕'(1966)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달의 식민지가 지구에 대해 독립을 선포하고 대결을 벌인다. 고성능 인공지능 컴퓨터까지 포함된 주인공 일행은 스릴넘치는 액션극을 벌인 끝 에 승리를 얻는다.
태양계의 다른 행성들에 지구인 식민지가 건설되는 것도 SF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설정이다. 영화 '토탈 리콜'(1990)은 화성 식민지의 비참한 환경을 묘사했고, 알프레드 베스터의 장편소설 '타이거! 타이거!'(1956)는 25세기의 미래를 배경으로 태양계의 내행성(금성, 지구, 화성)연합과 외 행성(목성, 토성, 해왕성의 위성들에 건설된 식민지) 연합이 벌이는 전쟁을 묘사하고 있다.
아서 클라크의 단편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달 식민지. 한 소년이 우주복을 입은 채 아버지의 손을 잡고 달의 계곡으로 산책을 나간다. 어느 지점에 이르자 아버지는 하늘을 가리킨다. 찬란히 빛나는 지구. 소년은 달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 문에 아직 한번도 지구에 가보지 못했다. 그러나 소년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지구에 발을 디디지 못할 것이다. 지구는 핵전쟁으로 폐허가 돼 아무도 살 수 없는 불모의 땅으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앞으로 인류는 드넓은 우주로 탐험과 개척의 길을 나서겠지만, 고향인 지구를 잃은 뒤에 운명처럼 내쫓기듯 떠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우주에 지구는 하나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