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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는 전 세계의 6% 수준이지만 연구개발(R&D) 예산은 전 세계 17%에 달하는 곳, 고품질의 과학 논문 4개 중 1개가 발행되는 곳. 오랫동안 축적해 온 수준 높은 연구 경험과 그 시간 동안 만들어 온 연구 인프라가 있는 곳. 이는 유럽연합(EU)의 얘기다.
2025년, 한국은 유럽과 함께 과학기술 연구를 이끌어가게 된다. ‘호라이즌 유럽’ 준회원국 가입 최종 서명을 앞두고 한국 과학기술 연구에서 기대되는 변화에 대해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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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2일 윤석열 대통령이 샤를 미셸 유럽연합(EU) 상임의장(왼쪽),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과의 공동 언론발표를 통해 호라이즌 유럽 가입으로 한국과 EU의 파트너십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호라이즌 유럽’ 준회원국 가입 협상 완료
2024년 3월 25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과기부)는 “유럽 집행위원회 연구혁신총국과 한국의 ‘호라이즌 유럽’ 준회원국 가입 협상을 완료했다”고 발표했다. 호라이즌 유럽은 유럽연합(EU) 최대 규모의 다자 간 연구혁신(R&I, Research and Innovation) 프로그램이다.
EU는 1984년부터 지금까지 연구 및 기술 개발을 위한 기본 프로그램(프레임워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프레임워크 프로그램은 유럽 내 연구 중복 투자를 피하고자 기획됐다.
8월 5일 화상 인터뷰를 통해 만난 류보현 KIST-유럽연구소 바이오센서연구단 선임연구원은 “유럽은 중복된 주제의 연구를 하는 것을 무의미하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EU는 프레임워크 프로그램을 통해 단일한 R&I 선정, 평가 및 과제 관리, 정산 시스템을 운영해왔다. 호라이즌 유럽은 제9차 프레임워크 프로그램이다. 1차부터 6차까지는 총 4, 5년의 주기로 진행됐으나 7차 프로그램부터 기간이 7년으로 늘어났다.
2014년부터 2020년까지 진행된 8차 프로그램, ‘호라이즌 2020’부터 프레임워크 프로그램에 지평선, 수평선을 뜻하는 ‘호라이즌(horizon)’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지식과 기술의 경계를 넘고 인간 지식의 지평을 넓힌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호라이즌 유럽은 총 3개의 ‘필러(pillar)’로 구성돼 있다. 필러는 세 가지 주요 연구 영역을 뜻한다. 이 중 준회원국이 참가할 수 있는 연구 영역은 필러 2다. 필러 2는 ‘글로벌 문제 해결’과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영역으로 기후변화, 인구 고령화, 보건 위기 등 인류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연구개발 등을 주제로 한 과제를 지원한다. 호라이즌 유럽에는 7년간 약 140조 원의 연구비가 지원되며 필러 2에는 전체 예산의 53%가 넘는 약 79조 원의 예산이 분배됐다.
그동안 프레임워크 프로그램은 EU 회원국만 참여할 수 있었다. 준회원국 가입 조건도 유럽 27개 국가와 이들 국가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나라로 한정됐다. 그러다 2018년, 호라이즌 2020 당시, EU는 우수한 과학기술 역량을 보유한 비 유럽지역 6개국(한국을 비롯해 뉴질랜드, 캐나다, 호주, 일본, 싱가포르)에 준회원국 가입을 제안했다.
호라이즌 유럽 주요 연구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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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국 중 뉴질랜드(2023년)와 캐나다(2024년)는 이미 준회원국으로 가입했다. 한국은 2022년 2월 호라이즌 유럽 준회원국 가입 의향서를 전달했고, EU와의 탐색회의 및 본 협상을 거쳐 2024년 3월 가입 협상을 타결했다. 현재 협정 체결 절차가 진행 중이며,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2024년 하반기에 협정서 최종 서명 등 남은 가입 절차를 완료해 내년부터 세 번째로 호라이즌 유럽에 참여할 수 있다. 아시아 국가 중에선 최초로 호라이즌 유럽 준회원국이 되는 것이다.
유럽연합 연구 과제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기회
“호라이즌 유럽 필러 2에서 나오는 과제와 주제는 EU 27개 회원국이 인적, 물적 자원을 투자해 도출한 사회 현안과 문제 해결 방법입니다. 연구가 완료된 뒤의
결과는 한국 사회에도 큰 자산이 될 겁니다.”
_류보현 KIST-유럽연구소 바이오센서연구단 선임연구원
호라이즌 유럽에 준회원국으로 참여하게 된다면, 한국 과학기술 연구자들이 EU의 연구비를 받을 수 있게 된다. 이미 한국에서도 프레임워크 프로그램에 참여해 국제 공동연구를 하고 있는 연구 기관들이 있다. 호라이즌 2020에는 128개 기관이, 호라이즌 유럽에는 지금까지 30개 기관이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등 EU 회원국 기관과 함께 공동연구를 수행했다(2023년 12월 기준). 하지만 한국 연구 기관은 이들 회원국의 파트너 기관(associated partner)으로만 참여할 수 있었다. 파트너 기관은 호라이즌 유럽 예산을 활용할 수 없어 연구비를 자체적으로 조달해야 한다.
2025년부터 한국이 준회원국이 되면 한국 연구자 혹은 연구기관도 연구 주관기관으로 호라이즌 유럽 연구과제에 참여할 수 있다. 별도의 국내 선정평가 과정 없이 호라이즌 유럽 예산에서 직접 연구비 혜택을 받게 되는 것이다.
“3책 5공에 포함되나요?” 7월 22일 과기부와 주한EU대표부가 대구 경북대에서 공동으로 주최한 5차 호라이즌 유럽 지역 설명회에서 한 연구자가 손을 들고 질문했다. ‘3책 5공’이란 정부 연구개발(R&D) 동시수행 과제 수 상한제도를 뜻한다. 연구자가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과제 수는 최대 5개, 연구책임자는 최대 3개까지 허용한다는 뜻이다.
이에 박석춘 과기부 구주아프리카협력담당 사무관은 “제한받지 않는다”고 답했다. 호라이즌 유럽은 한국의 국가연구개발사업 과제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호라이즌 유럽에 참여하게 된다면 연구자들에겐 연구의 다양성이 확보되고, 연구비 제약도 완화되는 셈이다.
호라이즌 유럽 필러 2 세부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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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구자들은 필러 2 산하 과제 공고 대부분에 지원할 수 있다. 물론 일부 과제는 회원국만 참여할 수 있어, 준회원국의 참여를 제한하는 공고가 나올 수도 있다. 김주영 주한EU대표부 과학기술혁신정책관은 경북대 호라이즌 유럽 설명회에서 “참여 제한 과제 공고는 드문 경우라 거의 모든 공고에 참여할 수 있다고 보면 된다”며 “한국의 지적, 인적 자원과 유럽의 높은 수준의 연구 경험과 연구 인프라를 결합할 수 있는 기회”라고 설명했다.
필러 2 세부 프로그램별 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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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러 2는 3개의 연구 영역 중 가장 큰 규모로, 호라이즌 유럽 전체 예산의 53%가 넘는 535억 유로(약 79조 원)의 예산이 지원된다.
네트워킹의 다각화, 국제협력의 다원화 기대
“EU 내 연구기관과의 공동연구 기회를 확보하고, EU연구진과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다자간 연구 프로그램 경험을 확보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_박석춘 과기부 구주아프리카협력담당 사무관
호라이즌 유럽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컨소시엄이다. 다자 간 연구 프로그램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과학자가 머리를 맞대게끔 하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필러 2에선 하나의 과제에 최소 3개의 기관이 참여하는 것을 요구한다. 거대 과제의 경우 최대 50여 개의 기관이 하나의 컨소시엄을 만들어 지원하기도 한다. 그렇다 보니 호라이즌 유럽에 참여하기 위해선, 이 컨소시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첫 번째 관문이다.
컨소시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연구자들의 네트워킹이 필수적이다. 네트워킹은 연구자가 각자의 연구 및 성과를 바탕으로 맺어 나가는 협력 관계다. 이를 위해서는 누가 어떤 주제의 연구를, 어떤 방식으로 하는지를 잘 알아야 한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 유럽 연구자들과의 네트워킹엔 약세를 보여왔다. 8월 5일 한국연구재단 서울청사에서 만난 백민정 국제협력본부 국제협력기반실장은 “그동안 한-EU 공동연구지원사업을 진행해 왔지만, 유럽 연구자들로부터 ‘어떤 한국 연구자와 함께 연구해보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7월 30일 영국 워릭대에서 진행된 ‘2024년 한국-유럽 과학기술인대회’에서도 같은 맥락의 이야기가 쏟아졌다. 특히 현윤경 국가수리과학연구소 소장 직무대행은 “한국과 유럽 과학계가 서로의 능력을 잘 모른다”고 지적했다.
한국 연구자들의 네트워킹은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연구자들의 학위 과정은 네트워킹의 근간이 되는데, 25개 과학기술 분야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 소속 해외 학위자 10명 중 8명은 미국과 일본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2023년 10월,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속 민형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1225명의 해외 석박사 출신 중 709명(57.9%)은 미국에서, 289명(23.6%)은 일본에서 학위를 받았다. 독일, 영국, 프랑스 등 유럽의 주요 과학기술 강국은 세 개 국가를 모두 합쳐도 고작 146명(11.8%)에 그쳤다. 당시 민 의원도 “학위 국적 쏠림 현상이 학문적 다양성을 저해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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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24일 ‘웨스턴 발칸 인포 허브’에서 개최된 호라이즌 유럽 워크숍. 알바니아, 세르비아, 코소보 등 서부 발칸 국가의 연구자들은 호라이즌 유럽 참여에 관한 의견과 모범 사례를 공유했다. 호라이즌 유럽 참여국들 내 연구기관 등은 소속 연구자들의 과제 수주 경쟁력을 높이고 프로젝트 진행을 원활히 하기 위해 연구 제안서 작성, 프로젝트 관리 기법 등에 대한 교육을 진행한다.
이런 상황에서 호라이즌 유럽은 한국의 과학기술 네트워킹을 확장해 학문적 다양성을 확보할 기회가 된다. 과기부와 한국연구재단 역시 입을 모아 “한국 과학기술계가 전통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과학기술 네트워킹의 축이 다각화되고, 국제협력이 다원화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다만 연구자들 입장에서는 없던 네트워킹을 새로 만드는 일이 막막하게 느껴질 수 있다. 5차 호라이즌 유럽 지역 설명회에서도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하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얘기가 나왔다. 이에 박 사무관은 “기존 호라이즌 유럽 참여자와 과제 평가자를 초청한 설명회를 기획해 보겠다”고 답했다.
앞서 2021년, 2022년 호라이즌 유럽 준회원국으로 가입한 알바니아, 세르비아, 코소보 등도 연구자들의 과제 수주 경쟁력을 높이고 원활한 프로젝트 진행을 위한 워크숍 등을 진행하고 있다. 한편 한국연구재단에는 7월 1일자로, 연구자들 지원을 위한 전담 조직으로 호라이즌 유럽TF팀이 꾸려졌다.
네트워킹을 통해 컨소시엄에 들어가, 과제를 수행하게 된다면 그 과정과 경험 역시 호라이즌 유럽에서 기대할 수 있는 주요 성과다. 우상하 한국연구재단 국제협력본부 호라이즌 유럽 TF팀장은 “EU는 오랫동안 협력을 통한 연구를 하는 노하우를 쌓아왔고 이를 제도화한 곳”이라며 “연구자들은 물론 연구지원 기관에서도 수준 높은 공동연구가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진행되는 방법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하우 습득은 앞으로 한국이 주도할 다자 간 협력 사업의 밑거름이 된다. 다자 간 공동 연구는 오늘날 과학기술을 이끌어가는 주요 축이다. 단일국은 물론 2개국이 협력하는 양자 공동연구를 넘어 적게는 수 개, 많게는 수십 개 국가의 연구 기관들이 함께 공동의 목표를 향해 협력하는 방식이다. 지금까지 한국은 다자 간 연구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팔로워’ 국가였다. 우 팀장은 “호라이즌 유럽으로 선진 협력 프로그램의 노하우를 학습해 한국 주도의 다자 간 협력 프로그램으로 나아가는 것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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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연구재단은 호라이즌 유럽 준회원국 가입을 계기로 연구개발(R&D) 기획, 선정, 평가 시스템의 선진 노하우를 살펴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우상하 국제협력본부 호라이즌 유럽TF 팀장, 백민정 국제협력본부 국제협력기반실장, 정유림 국제협력본부 호라이즌 유럽TF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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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식 시간과 평가 방법에서 벗어나야
“호라이즌 유럽에 참여하게 된다면 장기 연구의 가치가 강조되는 유럽 문화와 단기간에 성과를 만들어 내는 한국 문화 간의 차이가 크게 느껴질 겁니다. 합리적인 시간을 갖고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연구 경험이 한국으로 스며드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_류보현 KIST-유럽연구소 바이오센서연구단 선임연구원
호라이즌 유럽엔 장밋빛 미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첫 번째는 연구 주제가 한정된다는 점이다. 작년 하반기, 몇몇 외신들은 일본은 주제가 정해져 있지 않아 자유롭게 기초과학 연구를 할 수 있는 필러 1에는 지원할 수 없다는 점에서 호라이즌 유럽 준회원국 가입을 망설이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준회원국도 호라이즌 유럽에 보조금을 분담하며 참여함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연구가 제한되기 때문이다. 일본은 아직 준회원국 가입 협상을 시작하지 않았다. 2020년, 콘스턴스 아비스 당시 미국 국무부 과학기술부장도 “호라이즌 유럽에서 제시한 연구 협력 조건은 미국이 원하는 수준이 아니다” 라고 공개적으로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이에 관해 백 실장은 “지금으로써는 필러 2에만 참여할 수 있는 한계가 분명하지만, 협력 관계가 이어진다면 그 다음 단계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호라이즌 유럽이 2027년에 종료되는 프로그램인 것도 아쉬운 점 중 하나다. 호라이즌 유럽은 2027년을 마지막으로 종료된다. 한국이 2025년, 준회원국으로 참여하게 된다면 고작 3년 여의 시간만 남은 것이다. 이 기간 동안 한국은 다음을 준비해야 한다. 2028년부터는 시작되는 10차 프레임워크 프로그램에도 준회원국으로 참여할지 말지를, 3년 동안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은 호라이즌 유럽에 분담금을 내고 준회원국으로 가입한다. 과제 참여율에 따라 분담금을 ‘사후 정산’하는 방식이다. 분담금의 규모는 현재 협상 중이다. 정부는 분담금을 내는 만큼, 한국 연구자들이 호라이즌 유럽에서 그에 준하는 수준의 연구비를 지원받기를 기대하고 있다.
처음부터 뿌린 만큼 거두는 것은 쉽지 않다. 한국 연구자들이 유럽 연구자들의 ‘이너 서클’로 진입하기 위해 네트워킹을 할 수 있는 기회와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다. 때문에 실패와 성공의 이분법이 아닌 의의와 가치를 파악하는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 류 연구원은 “지금부터 3년은 ‘웜업’ 기간으로 보고 10차 프레임워크를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과학기술의 성과를 바라보는 기준도 달라져야 한다. 류 연구원은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창궐했을 때, 각국의 정부와 모든 제약 연구 기관이 백신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한 사례를 예시로 들었다.
당시 영국 옥스퍼드대와 아스트라제네카가 바이러스 벡터 백신을, 미국 화이자와 독일 바이오엔테크 그리고 미국의 모더나 등이 RNA 백신을 만들어냈다. 한국은 백신 및 치료제 개발에 약 560억 원의 예산을 투입했다. 하지만 상용화에 성공한 백신은 하나도 없다.
류 연구원은 “한국에선 이를 연구 및 개발의 실패로 바라보는 태도가 분명히 있었다”고 말했다. 특히 “과학기술 정책 결정권자들에게 오랫동안 축적된 연구가 있어야 낼 수 있는 성과와, 연구를 축적하는 과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유럽은 단기간에 만든 성과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그런 유럽과 함께 공동 연구를 진행할 때, 한국의 기존 평가 방식 그대로 연구자들의 성과를 바라본다면 연구자들이 호라이즌 유럽에 참여하는 것을 꺼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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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라이즌 유럽이 제시하는 과학의 미래
“호라이즌 유럽에 참여하게 된다면, 성평등을 통해 과학기술 혁신과 발전을 꾀하고자 하는 EU의 가치와 방향이 한국에서도 자리 잡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합니다.”
_권지혜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WISET) 정책연구센터장
“성평등을 비롯한 다양성, 평등, 포용은 이미 ‘글로벌 스탠다드’입니다. 전통적인 문화와 기존의 질서를 뒤집는 문화 안에서 연구하는 사람들도 춤을 출 수 있습니다.”
_류석영 KAIST 전산학부장
한국 과학기술계가 호라이즌 유럽과 맞춰야 할 주파수는 또 있다. 바로 성평등을 향한 노력이다.
“호라이즌 유럽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기관의 ‘성평등 계획(GEP텴ender Equality Plan)’수립이 필수적입니다.” 6월 18일 열린 한국 다양성협의체 발족식에서 권지혜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WISET) 정책연구센터장이 말했다.
GEP는 연구 참여 기관이 과제를 수행하는 동안 조직 내 성평등을 구현하는 활동이다. 호라이즌 유럽으로 연구비를 지원받은 기관은 GEP를 수립하고 이행한 뒤 보고해야 한다. 성평등을 위해 참여 기관이 달성해야하는 목표를 수치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각 기관이 각자 목표를 정하고 달성 과정을 매년 보고서로 제출한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8월 2일 WISET에서 만난 권 센터장은 “참여 기관의 자율성을 기반으로 능동적인 성평등 활동을 요구하는 것은 호라이즌 유럽이 유일하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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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KAIST 포용성 위원회 설립에 앞장섰던 류석영 전산학부장은 “다양성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태도는 경직된 연구 문화를 탈피하고, 스스로의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는 중요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GEP에는 총 4개의 활동이 필수로 요구된다. 첫 번째는 적극적으로 GEP를 공개하는 것이다. 기관의 최고 경영진이 서명한 GEP를 기관의 공식 웹 사이트에 게시해 모든 조직 구성원이 이를 알게 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성평등을 위한 지원과 전문적인 성평등 구현 노력 방법과 약속이 GEP에 포함돼야 한다. 또한 조직 내 성별 데이터를 수집 및 분석하고, 최초 목표로 설정한 평등 계획을 이행해 매년 보고해야 한다. 마지막으로는 조직 구성원들에게 성평등에 관한 교육과 무의식적인 성 편견을 예방하는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 호라이즌 유럽은 이런 GEP를 통해 성평등은 물론 조직 문화를 개선하고 일과 삶의 균형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EU 프레임워크 프로그램에서 성평등이 요구된 것은 8차, 호라이즌 2020부터였다. 당시 EU 집행위원회는 ‘성평등이 사회의 공정성을 높이고, 조직의 혁신 성과를 높이고, 경제 성장을 촉진하는 중요한 레버(lever・지렛대)’라고 판단했다. 불균형을 타파하면 더 큰 다양성이 조직의 성공과 혁신 성과를 이끈다는 것이다. 이런 EU의 정책적 판단을 두고 류 연구원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의 과학기술 인적 자원이 미국 등으로 넘어간 경험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인재 유출의 경험이 인적 자원 확보에 대한 욕구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호라이즌 유럽 외에도 EU는 성평등과 같이 소수자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와 노력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유럽 내 주요 연구 기관들도 마찬가지다. ‘노벨 사관학교’라 불리는 독일 막스 플랑크 연구소는 제3국에서 온 인재들을 위한 여러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성평등 부서가 채용 과정에서 결정권을 행사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류 연구원은 “과학기술에서 창조성은 핵심 요소이며, 인적 다양성이 창조성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인종차별과 성차별 등 사회적 소수자를 배제하는 사회에는 인적 구성이 다수자를 중심으로 편향될 수밖에 없고, 조직 문화가 경직될 수밖에 없다.
“오늘날엔 인공지능(AI) 연구자와 국문과 교수가 만나 함께 연구를 합니다.” 8월 1일 대전에서 만난 류석영 KAIST 전산학부장은 “과학기술 연구를 선도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듣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정말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과학기술계 안에서 다양성, 평등, 포용을 시혜나 역차별로 바라본다면, 연구자로서도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다.
호라이즌 유럽은 이처럼 한국 과학기술계의 대전환을 요구한다. 지평선과 수평선 저 너머로 미래와 혁신을 향한 연구가 한국과 EU 모두에게 어떤 내일을 가져올지 기대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