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국제삼엽충학회에 참석한 김공룡 박사. 그는 ‘독일 화석연구소’ 소속 마리 트릴로비테 박사의 ‘삼엽충을 통해 보는 오르도비스기 층서학 연구’ 발표를 보고 큰 감명을 받는다. 트릴로비테 박사에게 다가가 발표에 대한 감상을 전한 이후 메일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연구에 대한 조언을 주고받던 어느 날, 트릴로비테 박사는 김공룡 박사에게 ‘함께 연구를 해보자’며 제안하는데...
과학과 기술은 보편 타당성을 전제로 국경과 언어, 문화를 넘는 공통의 지식입니다. 이 때문에 연구자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전 세계에 있는 연구자들의 연구 동향을 파악하고 교류함으로써 높은 수준의 연구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과학기술 연구개발(R&D)에서 국제협력은 왜 필요할까요? 과학기술기본법 제18조, 일명 ‘과학기술의 국제화 촉진’은 ‘국제사회에 공헌하고, 국내 과학기술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과학기술분야의 국제협력을 촉진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과학기술 역량은 세계 무대에서 국가의 위신과 직결되며 과학기술 자체가 외교의 수단인 동시에 공적개발원조(ODA)와 연계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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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연구부터 네트워킹까지, 다양한 방법들
김공룡 박사는 한국 고생대 소속, 마리 트릴로비테 박사는 독일 화석연구소 소속인 만큼 두 사람의 연구는 ‘국제 공동연구’가 됩니다. 이런 공동연구는 과학기술 연구의 국제협력 중 가장 대표적인 방식입니다. 공동연구는 한 나라의 과학자가 다른 나라의 기관에 가서 연구를 하거나, 연구자들이 각자의 기관에서 연구를 나눠 진행하는 방식으로 이뤄집니다.
공동연구는 연구자 개인이나 팀 단위로 이뤄질 수도 있지만, 막대한 예산과 노력이 필요한 거대과학 프로젝트의 경우 공식적으로 국가가 참여하기도 합니다. 현재 프랑스 남부 카다라쉬에 건설 중인 ‘국제핵융합로실험로(ITER)’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상용화가 가능한 핵융합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전 세계 총 35개국이 ITER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2003년에 정식으로 가입했습니다. 이런 거대과학 국제 공동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선 분담금을 내야 합니다. 한국은 ITER에 약 3723억 원(2020년 추정치)을 납부했습니다. ITER 건설비용의 약 9% 수준의 금액입니다.
‘네트워킹’도 보편적인 국제협력 활동 중 하나입니다. 김 박사와 트릴로비테 박사가 학회에 참석해 의견을 교류하고, 메일을 주고받으며 연구 협력 관계를 형성한 것이 네트워킹입니다. 네트워킹은 공동연구의 기반을 마련하는 일입니다. 송재준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 국제협력팀장은 “다른 문화와 제도 안에 있는 연구자, 기관과 협력해야 하기에 상호 간의 신뢰를 기반으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합니다.
공동연구와 네트워킹 외에도 다양한 방식의 과학기술 국제협력이 있습니다. 해외 우수 과학기술 인력을 유치하는 것, 국내 연구기관이 해외에 진출하는 것과 외국 연구기관을 국내에 유치하는 것, 연구개발 시설ㆍ장비, 과학기술지식ㆍ정보를 공동으로 활용하는 것, 과학기술 관련 국제기구 및 국제행사를 국내에 유치하는 것 등입니다. 또 개발도상국의 발전과 복지증진을 위한 과학기술 관련 정책ㆍ제도를 전수하는 것도 국제협력입니다. 한때 한국이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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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혜국에서 공여국으로, 국제협력의 역사
한국의 과학기술 국제협력은 경제 발전 역사와 맥락을 같이합니다. 한국은 1945년부터 1999년까지 ODA를 받은 수혜국이었습니다. 송치웅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지속가능혁신정책연구단 선임연구위원은 “오랜시간 과학기술 국제협력은 한국 연구 및 기술 수준 향상을 위해 선진국으로부터 지식과 인프라를 도입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고 말했습니다.
우선 사람들을 과학기술 선진 국가로 보내 지식과 기술을 배워오게 했습니다. 그 시작은 미국과 체결한 ‘원자력 협정’과 ‘미네소타 프로젝트’였습니다. ‘원자력의 비군사적 이용에 관한 원자력 협정’은 1956년 2월에 체결돼, 미국에 원자력 연구자들을 유학 보냈습니다. 미국의 국제협력청(ICA)이 지원한 개발도상국 교육 지원 프로그램, ‘미네소타 프로젝트’는 1955년부터 1961년까지 7년 동안 진행됐고, 총 226명의 서울대 의대, 공대, 농대 교수들이 미국 미네소타대에 연수를 다녀왔습니다.
한국 최초의 국가 과학기술 연구기관이 설립된 것도 국제협력의 결과였습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현 한국과학기술연구원ㆍKIST)는 1965년 한미 정상 회담에서 최초로 논의돼, 당시 백악관 과학기술 고문이었던 도널드 호닉 박사의 자문을 통해 1966년 2월에 설립됐습니다. 해방 후 대한민국에 뿌리내린 현대적인 의미의 과학기술은 국제협력으로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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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연구 다른 정책, 국제협력의 난관
이처럼 오늘날 한국 과학기술 연구자들이 전세계 연구자들과 공동연구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수십 년간 선진 과학기술 연구를 배우고 기초연구 생태계를 조성해온 결과입니다. 공동연구는 연구에 참여하는 모두의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런데 이런 공동연구에 참여를 망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사자인 현장 연구자들입니다.
앞서 과학정책 연재 4화, ‘연구가 잘됐는지 어떻게 평가할까?’에서도 살펴 봤듯이, 한국은 정량적인 연구평가 체계를 구축해 연구자들의 과제와 연구자 개인의 성과를 매년 판단합니다. 이와 같은 평가 시스템은 한국 연구자들이 국제협력을 꺼리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송 팀장은 미국 에너지부(DOE) 산하의 연구소를 예로 들며 “그곳에서도 매년 평가가 진행되지만, 연차 평가 결과는 연구자에게 큰 영향을 미치진 않는다”며 “수 년에 걸친 성과 전체로 연구자를 평가한다”고 설명합니다. 반면 한국은 최종적으로 훌륭한 성과를 거둬 마지막 해 평가에서 최고 등급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 전 해에 낮은 등급을 받은 기록이 있다면 과제 기간 동안 연구자 개인은 ‘보통’ 수준일 뿐입니다. 이 때문에 송 팀장은 “DOE 산하 연구소와 같은 해외기관과 공동연구를 하는 한국 연구자들은, 연구에 관해 조율을 하는 연구 초기 단계에선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려운 것을 감수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외에도 소속기관과 협력기관 양쪽에서 요구하는 행정 절차를 연구원들이 모두 감당해야하는 것도 부담 요소입니다.
한편 2024년 R&D 예산이 2023년도 대비 16.6%가 삭감된 반면, ‘국제협력 R&D’ 예산은 기존 5000억 원에서 1조 8000억 원으로 3배 이상 크게 늘었습니다. 긍정적으로 보이지만 현장의 목소리는 다릅니다. 정부출연연구소(출연연)의 국제협력은 R&D 예산 내 주요사업비 내에서 이뤄져, R&D 예산 삭감 출연연이 하고 있던 국제협력에 제동을 건 것입니다.
한국천문연구원(천문연)은 한국, 미국, 이스라엘, 모로코, 몽골에 관측소를 두고 우주물체 전자광학 감시시스템(OWL-Netㆍ아울넷)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황정아 천문연 우주과학본부 책임연구원은 “모로코에 위치한 OWL-Net 2호기의 오퍼레이터 인건비와 연 4억 원의 전기세를 못 주고 있는 상황”이라며 “신의와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국제협력 연구에 큰 차질을 빚고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3배 이상 증가한 국제협력 R&D 예산은 바이오, 인공지능(AI), 양자, 반도체 등 전략기술 분야에 한정돼 있을 뿐만 아니라 명확한 협력 방식과 계획은 부재한 상태입니다. 김창영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는 2023년 11월에 열린 2023 해외우수연구기관 공동연구 심포지엄에서 “기초연구에 대한 투자가 선행돼 국내 연구자의 연구 역량이 늘어야 국제협력을 논할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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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형 연구 시작, 국제협력의 미래
한국 과학기술 국제협력은 현재 어떤 단계일까요? 전문가들은 입 모아 “선진국형으로 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한국은 공여국으로 성장했습니다. 1991년 외무부(현 외교부) 산하기관으로 한국국제협력단(KOICA)을 설립했고, 베트남에 VKIST 설립을 지원하는 등, 우리 역사 경험이 반영된 과학기술 ODA 시스템을 구축해 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리더’의 고민도 필요합니다. 송 팀장은 “한국의 과학기술이 전 세계 그리고 인류에게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지,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만 선진국형 국제협력 시스템을 갖출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한국을 위한 과학을 넘어 전 세계를 위한 과학을 고민할 때에 국제협력의 새로운 계단을 밟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송 선임연구위원도 “아직 한국은 주요 과학기술 선진국이 주도하는 국제협력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국가”라며 “한국이 프로젝트를 주도하기 위해선 민간 산업 기술과 기초과학의 역량을 바탕으로 ‘기술적 우수성’이 있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세계적으로 경쟁력있는 기술적 우수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국제협력이 필요하겠죠. 지금보다 더 나은 과학기술 국제협력 정책과 제도가 필요한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