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4일 오전, 간간이 내리는 빗속으로 검은 승용차 한 대가 한국과학기술원(KAIST) 본관 앞에 멈춰 섰다. 문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KAIST 신임총장 로버트 러플린 박사.
“I feel like a king(왕이 된 느낌입니다).” 수많은 취재진과 KAIST 교수, 학생들의 환영에 화답한 그의 재치 있는 첫마디였다. 부인과 2명의 아들을 함께 동반한 그는 엄청난 취재 열기에 다소 놀란 듯 했지만 곧 주위를 향해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며 학생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는 여유를 찾았다.
연구중심대학으로 거듭날 것
유진 부총장의 소개로 KAIST 교수들과 간단히 인사를 마친 러플린 박사는 곧 기자회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연구중심대학의 본질은 어디나 동일하다”고 밝히면서 “(자신이 몸담았던) 미 스탠퍼드대와 KAIST의 상황은 다르지만 연구중심대학이라는 속성은 같다”는 말로 총장직에 임하는 각오를 피력했다.
특히 그는 “변화의 속도가 느린 미국에서는 감히 이뤄낼 수 없는 연구중심대학의 혁신 모델이 한국에서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서 “기적을 이루겠다”는 말로 한국의 이공계대학 총장직을 맡기로 결심한 이유를 내비쳤다.
그는 “KAIST가 세계의 모든 대학이 본받고 싶은 대학 모델이 될 수 있도록 힘쓸 것”이라며 “아시아 지역이 제조업의 핵심 역량을 바탕으로 세계를 이끌어갈 것이기 때문에 아시아의 이공계 대학, 특히 KAIST가 성장할 수 있는 확률이 클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그는 KAIST가 세계로 뻗어나가기 위해서는 “총장과 교수들 사이의 활발한 의사소통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기존의 프로그램을 억지로 변화시키기 보다는 교수들과 충분한 논의를 거쳐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는 방향으로 이끌겠다는 것.
그가 노벨물리학상 수상자기 때문에 한국의 노벨상 수상 가능성과 그가 이 부분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도 쏟아졌다. 그는 자신이 노벨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것은 “모험적으로 연구를 수행했기 때문”이며 따라서 “KAIST 내에도 모험적 연구에 대한 지원을 강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모험적 연구를 위해 투자가 선행될 수 있도록 “대학과 정부, 산업계 사이에 건전한 비즈니스 관계가 정립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우수학생 몰릴 것” 기대
현재 스탠퍼드대를 휴직중인 그는 앞으로 2년 동안 KAIST 총장직을 수행하고 그 성과에 따라 재계약을 하게 된다.
그간 노벨상 수상 경력이 있는 총장은 과연 얼마나 많은 연봉을 받을까에 대해 여러가지 추측이 난무했다. 하지만 그는 “나는 액수를 밝혀도 상관없다”고 하면서도 “과학기술부의 요청으로 밝히기 어렵다”고 말해 연봉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베일에 싸이게 됐다.
이날 오후 진행된 취임식에는 오명 과학기술부 장관을 비롯해 과학기술계 인사, KAIST 교수, 학생 등 1천여명이 참석했다. 취임식을 지켜본 KAIST의 한 학생은 “기초 학문 연구를 맘껏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했고, 또 다른 학생은 “국내 이공계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변화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는 기대감을 나타냈다.
러플린 박사는 취임식을 시작으로 ‘짧은’ 기간 동안 총장 업무에 들어갔다. 7월 23일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8월 중순 귀국해 공식 업무를 시작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취임식에는 가족과 함께 왔지만 다시 한국에 올 때는 ‘홀몸’으로 오게 된다.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는 두 아들이 학업 때문에 미국에 머물러야 하기 때문.
그는 취임식 이튿날 노무현 대통령을 접견했다. KAIST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달라는 노대통령의 주문에 대해 “한국 과학계는 미국보다 규모가 작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시도하기 어려운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어서 그는 16일 포항에서 열린 제35회 국제물리올림피아드대회에 참석해 미래의 노벨상 수상 후보들을 격려했고, 21일에는 이들을 위해 특별 강연도 가졌다.
KAIST의 한 입시 관계자는 “8월 2일부터 대학입시 원서교부를 시작하는데 은근히 우수한 학생들이 몰릴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된다”고 얘기해 KAIST 내부의 들뜬 분위기를 암시했다. 예년보다 수험생 부모들로부터 문의전화가 많이 온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앞으로 러플린 총장은 KAIST 총장 공관에서 지내면서 업무를 돌보게 되며, 의사소통의 문제가 없도록 개인 수행비서와 통역사 등의 보좌를 받을 예정이다 ‘러플린 효과’ 가 KAIST를 얼마나 변화시킬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