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주요기사] 계산 화학 · AI · 로봇으로 새로운 화학 연구의 장을 열다

알파세대를 위한 다시 쓰는 과학교과서 ②

편집자 주
교과서는 엄격한 검증을 거쳐 만들어집니다. 현재 시점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지식이죠. 하지만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고, 특히 과학은 새로운 관측이나 실험을 통해 끊임없이 수정되며 발전합니다. 우주와 생명의 진리에 다가서기 위해 오늘도 한 걸음을 내딛는 기초과학 연구자들의 이야기를 5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독일의 과학자 리비히는 질소, 인, 칼륨이 식물 생장에 꼭 필요한 원소라는 것을 밝혀내고, 질소가 포함된 인공 비료를 개발하여 사용할 것을 제안하였다. 하버는 공기 중의 질소를 수소와 반응시켜 암모니아를 대량으로 합성하는 제조 공정을 개발하였다. 이렇게 합성한 암모니아로 만든 질소 비료는 농산물의 생산량을 늘려 식량 증대에 크게 기여하였다.

-고등학교 화학 I 교과서(비상교육, 2015) 중-

 

 

독일의 과학자 프리츠 하버는 1909년 2만 번이 넘는 실험을 통해 질소를 수소와 결합해 암모니아로 합성하는 오스뮴 기반 촉매제를 찾았다. 이후 또다시 만 번이 넘는 실험 끝에 철 기반의 촉매로 암모니아를 대량 생성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했다. 이처럼 과거에는 원하는 물질을 생성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실험으로 확인해야 했다. 시간이 지나 조금 더 효율적인 방법, 이론을 바탕으로 화학 반응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경우를 추릴 수 있게 됐지만, 원하는 물질을 얻기까지는 여전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GIB
만능 작용기의 구조를 나타낸 모식도: 백무현 IBS 분자활성 촉매반응 연구단 부연구단장은 분자를 전극에 부착해 전압에 따라 작용기를 제어하는 데 성공했다. 작용기는 유기화학에서 분자들의 특징적인 화학 반응을 담당하는 부분이다. 이전까지는 하나의 작용기가 정해진 특정 화학반응만을 줄 수 있었지만 이번 연구로 전압 조절만으로 다양한 작용기를 구현할 수 있게 됐다.

 

화학 반응의 메커니즘을 규명하는 계산 화학

 

‘계산 화학’은 바로 이런 한계를 극복하는 돌파구로 등장했다. 계산 화학은 원하는 물질을 만들기 위해 화학 반응이 일어나는 메커니즘에 주목한다. 즉 화학 반응의 중간체 형성, 전환 상태 특성, 반응 속도 등을 분석해 특정 화합물을 합성하는 데 필요한 조건을 최적화하고, 새로운 반응을 예측하고 실험을 설계한다. 백무현 기초과학연구원(IBS) 분자활성 촉매반응 연구단 부연구단장은 4월 4일 인터뷰에서 “실험을 하다보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는 있지만,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 분자 단위에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분자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분자 안의 전자 구조는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이해해 화학 반응의 메커니즘을 규명하는 것이 계산 화학의 영역”이라고 설명했다. 

 

IBS 분자활성 촉매반응 연구단은 잘 반응하지 않는 탄화수소 활성화 과정의 메커니즘을 규명해 효율적인 촉매를 찾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를 위해 전이금속 촉매반응 개발 및 합성 적용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장석복 단장과 계산 화학 전문가인 백 부연구단장이 손을 잡았다. 백 부연구단장은 “촉매 반응은 매우 빠르게 지나가기 때문에 이 과정을 이론과 실험만으로는 정확하게 분석하기 어렵다”며 “계산 화학은 촉매 반응이 일어나는 순간을 포착할 수 있어 연구에 매우 유용하다”고 설명했다.

 

IBS 분자활성 촉매반응 연구단은 계산 화학을 이용해 신약 원료인 감마-락탐 합성에도 성공했다. doi: 10.1126/science.aap7503 연구팀은 반응성이 낮은 탄화수소로 감마-락탐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촉매를 ‘밀도 범함수 이론’을 사용한 계산 화학 프로그램으로 분석 및 예측하고 실험으로 결과를 도출했다. 밀도 범함수 이론은 전자의 위치와 속도를 모두 고려하는 대신, 밀도로 전자의 분포를 계산해 물질의 물리적 성질을 예측하는 방법이다. 계산 화학에서 분자와 고체의 전자 구조를 계산하는 데 널리 사용된다. 백 부연구단장은 “전통적인 화학 연구 방식만으로 촉매 연구를 진행하기엔 한계가 있다”며 “최근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새로운 화학 반응을 발견하고 예측하는 연구가 늘어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백무현 IBS 분자활성 촉매반응 연구단 부연구단장. 백무현 IBS 분자활성 촉매반응 연구단 부연구단장은 어떤 아이디어든 해볼 수 있는 연구 환경에 대해 강조했다. “제가 떠올린 만능 작용기의 초기 아이디어는 엉뚱하기 그지없었어요. 하지만 이걸 무모한 소리로 넘기지 않는 연구 환경 덕에 80여 년 간 널리 사용돼 온 전통적·화학적 실험법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합니다.”

 

AI, 화학 연구의 강력한 조교가 되다

 

계산 화학으로 좋은 촉매 후보를 찾았다고 하더라도 이를 현실에 구현하기 위해서는 실험이 필요하다. 실험을 통해 반응 온도와 압력을 얼마나 높일지, 여러 물질(전구체)의 혼합 비율을 어떻게 최적화할지를 정해 새로운 소재의 정확한 합성 레시피를 만들어야 한다. 이때 인공지능(AI)은 최고의 조교가 될 수 있다. 

 

“150년 동안 인간이 알아낸 화합물의 개수는 모든 논문과 발견을 합쳐도 2000만~3000만 개 정도입니다. 하지만 존재할 수 있는 물질의 가능성은 1060가지가 넘습니다. 이 모든 것을 실험을 통해 알아가기에는 시간도 재료도 부족합니다. 실험을 통해 나오는 폐기물은 자연을 오염시키기까지 하죠.”

 

3월 29일 울산 UNIST 본원에서 만난 바르토슈 그쥐보브스키 IBS 인공지능 및 로봇 기반 합성 연구단 단장은 AI와 로봇으로 새로운 기능성 분자와 물질을 찾고 있다. 그는 AI를 활용한 화학 연구의 선구자로 손꼽힌다. 약 20년간 AI를 활용한 화학 연구에 몰두하며 화학 물질 합성 경로를 알려주는 AI 소프트웨어 케마티카(Chematica)와, 단순 화학물질이 생물학적 분자로 이어지는 화학적 반응 경로를 빠르게 분석하는 소프트웨어 올케미(Allchemy)를 개발하기도 했다. 

 

특히 케마티카는 기존에 알려진 화학 이론 알고리즘과 방대한 화학 반응 데이터, 안정성과 환경적 영향 데이터를 학습해 주어진 화합물을 합성하기 위한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프로그램이다.

 

바르토슈 연구단장은 IBS 인공지능 및 로봇 기반 합성 연구단 연구진이었을 당시 생명체의 탄생 원인을 밝히는 프로그램 골렘(Golem)도 개발했다. doi: 10.1016/j.chempr.2023.12.009 바르토슈 단장은 원시 지구에 존재했을 것으로 예상되는 물, 메탄, 암모니아 같은 간단한 형태의 분자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화학 반응을 규칙으로 만들고, 이 규칙을 컴퓨터 언어로 바꿔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특이한 점은 이 프로그램에 필요한 계산을 블록체인 방식으로 해낸 것이다. 블록체인 방식은 대량의 데이터를 분산 처리할 수 있어 슈퍼컴퓨터가 할 수 있는 계산을 여러 컴퓨터로 나눠서 할 수 있다. 바르토슈 단장은 “금융, 암호화폐 분야에서 주로 쓰이던 블록체인이 계산 화학에 활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획기적인 예시”라며 “수년이 걸릴 계산을 2~3개월 수준으로 단축했다”고 설명했다.

 
바르토슈 그쥐보브스키 IBS 인공지능 및 로봇 기반 합성 연구단 단장. 바르토슈 그쥐보브시키 IBS 인공지능 및 로봇 기반 합성 연구단 단장은 한국이 인공지능 및 로봇 기반 합성 연구를 이끄는 리더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한국은 인공지능과 로봇을 활용한 연구단을 가진, 아시아 최초이자 세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나라입니다. 해외 각국의 연구원이 우리와 함께 연구하기 위해 한국으로 오고 있죠. 한국은 이제 이 분야를 이끄는 리더로 나아가야 합니다.”

 

로봇 실험으로 더욱 빨라지는 화학 연구

 

바르토슈 단장이 이끄는 IBS 인공지능 및 로봇 기반 합성 연구단의 연구실에선 흰색 가운을 입고 보안경을 쓴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다. 분주히 실험 중인 로봇 팔이 있을 뿐. 로봇 옆에는 로봇에게 실험을 지시하는 컴퓨터가 있고, 화면에는 파이썬 코드들이 빼곡했다. 

 

“AI가 탑재된 소프트웨어를 통해 화합물의 제작법을 예측한 뒤에는 직접 실험을 통해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는 로봇을 사용해 실험하고 있습니다. 로봇은 인간처럼 잠을 잘 필요도, 밥을 먹을 필요도 없기 때문에 연구자 스무 명이 5년 동안 실험할 양을 로봇 한 대가 3개월 만에 해낼 수 있죠.” 바르토슈 단장은 로봇 실험을 통해 연구 결과를 더 빨리 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IBS 인공지능 및 로봇 기반 합성 연구단은 연구단의 이름과 구성원을 바꿔 올해 초에 새롭게 출범했다. 그런데도 이미 복잡한 유기 화학 메커니즘 분석, 생체 물질대사 메커니즘 규명 등 뛰어난 성과를 냈으며 올해 국제 최고 학술지에 논문 세 편을 공개했다. AI와 로봇을 사용해 약 4개월의 시간 동안 빠른 속도로 여러 성과를 낸 것이다. 바르토슈 단장은 “AI와 로봇으로 발견한 새로운 화학 구조들은 또다시 AI가 학습할 자료가 된다”며 “시간이 흐를수록 더 똑똑한 AI 소프트웨어를 만들 수 있게 되고, 이는 화학 연구의 퀀텀 점프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UNIST 울산 본원에 있는 IBS 인공지능 및 로봇 기반 합성 연구단의 실험실. 인간 대신 로봇이 정확하고 쉼 없이 실험을 수행한다. 실험하는 로봇은 연구단이 직접 만든다.

계산 화학과 AI 화학의 강력한 시너지 효과

 

IBS 나노입자 연구단과 인공지능 및 로봇 기반 합성 연구단은 공동 연구를 통해 인공지능 기반 촉매 성능 예측 프로그램을 직접 제작해 세계 최고 수준의 그린수소 생산 성능을 가진 페로브스카이트 산화물 촉매를 발견했다. doi: 10.1038/s41563-023-01707-w 해당 예측 프로그램은 촉매 물질의 구조 분석 데이터와 구조에 따른 산소 발생 반응 성능을 학습한 뒤, 1만 가지 촉매 후보 중 성능이 제일 좋은 단 하나의 촉매를 정확히 예측했다.

 

이렇게 예측한 촉매 성능은 직접 실험한 값과 비교했을 때 오차가 단 1%에 불과했다. 문 연구원은 “AI를 활용한 화학 연구는 화학물질의 성능을 예측하는 데 특별한 능력을 보이지만 어떤 이유로 결괏값을 도출했는지는 알기 어렵다”며 “이 부분을 계산 화학으로 보완한다면 엄청난 화학 연구 시스템이 탄생할 것”이라고 말했다. 

 

AI를 활용한 화학 연구는 앞서 설명한 계산 화학과 긍정적인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다. 화학 반응의 메커니즘을 깊이 있게 파악하는 계산 화학과, 방대한 양의 데이터에서 중요한 상관관계를 식별하고 최적의 화합물을 예측하는 AI가 결합하면, 화학 연구의 속도와 정확성이 향상되고 연구할 수 있는 영역도 광범위해진다. 계산 화학과 AI, 로봇이 결합됐을 때 얻을 수 있는 시너지 효과는 암과 치매 치료제 개발, 초전도체 합성과 같이 인류의 미래를 근본적으로 바꿀 새로운 화학물질의 탄생으로 이어질 수 있다. 백 부연구단장은 “계산 화학과 AI, 로봇을 활용한 화학 연구 분야에서 한국의 연구자들은 충분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의 화학 연구가 퀀텀 점프를 통해 인류의 삶을 향상시키고 지속 가능한 미래를 구현하기를 기대해본다.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2024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진로 추천

    • 기계공학
    • 수학
    • 화학·화학공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