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엽충 연구를 마음껏 하고 싶은 김공룡 박사에게 시련의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열심히 지원서와 제안서를 써냈지만, 계속해서 연구과제 선정에 탈락한다. 반면 원하는 과제를 수주하는 데 성공한 건너편 연구실은 축제 분위기. 침울한 김공룡 박사에게 ‘어쩔 수 없다’는 친구의 위로 아닌 위로가 돌아온다. 삼엽충 연구가 돈이 안 되는 게 문제라고?
기초과학과 응용과학이란 용어를 들어본 적 있을 겁니다. 기초과학은 자연계 본질을 이해하고 탐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반면, 응용과학은 과학을 활용해 실용적인 기술을 개발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과학기술 분야에서 기초와 응용이란 단어는 과학정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입니다.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기초과학 연구와 응용과학 연구가 각각 지식 탐구, 기술 개발을 목적으로 한다는 정의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정부가 국가의 과학정책을 정립하고, 과학기술 연구를 조직화하려고 노력한 시기에 정립됐기 때문입니다.
1945년 7월, 바네바 부시 당시 미국 과학연구개발국 국장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보고서를 하나 올립니다. ‘과학, 그 끝없는 프론티어(Science耔he Endless Frontier)’란 이름의 이 보고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과학연구 자금 지원 정책 논의의 시금석이 됐습니다. doi: 10.1515/9780691201658 보고서에서 부시는 기초과학이 응용과학 발전의 주요 요인이라 주장합니다. 기초과학의 산물인 과학 지식을 응용과학이 활용하고, 응용과학의 산물인 기술은 다시 기초과학의 수단이 되므로 국가가 과학 연구에 투자하면 선형적으로 계속해 발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미국은 페니실린, 레이더시스템, 원자폭탄 개발로 기초과학이 크게 주목받던 시절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쌓아 올린 기초과학 연구 결과를 기반으로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승리할 수 있었다는 주장이 미국사회에 널리 받아들여졌습니다. 눈에 보이는 성과를 바탕으로 기초과학 연구가 언젠가는 사회 혁신이 될 수 있다는 주장과, 부시가 보고서에서 제시한 선형적 발전론은 기초과학 연구의 지원을 크게 넓혔습니다.
응용에 ‘기여’할 수 있는 기초연구를 지원
과학적 기초 및 응용연구에 대한 탐구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도널드 스토크스 전 미국 프린스턴대 정치학과 교수는 1997년 저서 ‘파스퇴르 쿼드런트’를 통해 기초과학과 응용과학이 선형적이라기보다 동시적이면서도 서로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문제 해결의 기여 가능성(Considerations of Use)’과 ‘과학의 근본 이해(Quest for Fundamental Understanding)’를 쌍축으로 하는 사분면을 제안했습니다.
주목할 것은 과학의 근본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동시에, 문제 해결에 기여할 가능성이 있는 연구입니다. 스토크스 교수는 이를 ‘응용에 기여할 수 있는 기초연구(UIBR嗹se-inspired basic research)’라 명명했습니다. 복잡한 이름의 이 분야를 응용연구 혹은 응용연구의 사전연구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동기가 있을 뿐,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두갑 서울대 과학정책대학원 교수는 “응용에 기여할 수 있는 기초연구는 응용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국가 공공 연구개발(R&D) 예산의 핵심 지원 대상”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과학기술 연구는 ‘혁신을 일으킬 가능성’으로 판단됩니다.
경제 개발 혹은 노벨상, 가시적 성과에 주목하는 한국
한국의 연구개발 예산 지원은 보다 단기적인 경제 개발을 위해 이뤄져 왔습니다.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한국에선 독립국가 건설과 국가의 경제 성장이 연구의 목표였습니다. 1960년대까지는 건축, 토목, 광산학, 농학 등 국토 재건에 적용할 수 있는 실용 학문이 우선시 됐습니다. 1970년대에 중화학공업화 정책이 시행된 뒤로는 과학기술이 산업화, 공업화를 통한 경제 발전을 돕는 수단이었습니다. 기계, 철강, 조선, 전기전자, 화학공학 분야에 많은 투자가 이뤄졌습니다.
척박한 한국 기초과학 연구에 조금이나마 단비가 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77년 한국과학재단(현 한국연구재단의 전신)이 설립되면서입니다. 과학기술 연구 지원을 위해 설립한 이 재단을 통해 대학에 기초과학 연구비가 지원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한국은 응용과학 연구를 우선했을 뿐만 아니라, 기초과학 연구조차 특정 목적을 위해 지원했습니다. 기초과학을 기술 개발과 문제 해결의 수단으로써만 바라본 것입니다.
특정 목적을 위한 기초과학 연구의 대표적인 예는 1983년 한국과학재단에서 실시한 ‘특정목적기초연구’ 사업입니다. 전기전자, 기계 화학공학 등 산업이 발전하기 위해 필요한 연구를 지원했던 이 사업을 통해 한국 기초과학 분야에는 목적지향적인 연구 문화가 싹텄습니다. 강기천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전임연구원은 “1982년부터 1993년까지 총 12년 동안 일반 기초연구에 지원됐던 예산과 1986년부터 1989년까지 4년 동안 특정목적기초연구에 지원된 예산은 각각 200억 원 규모로 비슷한 수준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응용 및 개발을 위한 기초과학 연구에 치우친 과학정책 및 집중 투자는 1990년대 초까지도 이어졌습니다.
순수 기초과학 연구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은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등 경제적인 성장에 뚜렷한 성과를 낸 이후부터입니다. 한국 최초 순수이론기초과학 연구기관인 고등과학원(KIAS)이 1996년 10월 설립됐습니다. 2011년에는 기초과학연구원(IBS)도 설립됐습니다. 두 기관 모두 노벨상에 대한 강한 열망이 설립의 큰 동력이 됐습니다. 즉 한국 과학정책 안에서 기초과학은 오랫동안 응용 및 개발을 위한 연구였다가, 언제부턴가는 노벨상을 받기 위한 연구로 다뤄진 것입니다. 혁신보다는 가시적인 성과를 위한 행보였습니다.
과학을 위한 과학기술정책이 필요하다
2009년 당시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취임 연설에서 “과학을 올바른 위치로 복원시키겠다”고 말했습니다. 이 연설은 과학의 ‘올바른 위치’가 무엇인지에 관한 논쟁을 불러왔죠. 특히 유럽위원회 내 유럽사회 속 과학에 대한 모니터링 활동(MASIS) 전문가 그룹은 “계속되는 변화와 그 변화가 평가되는 방식을 고려해 과학이 앞으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좋은지, 혹은 적절한지 질문을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비판했습니다. doi: 10.2777/467
한국 과학기술은 앞으로 어떤 위치를 가져야 할까요. “기초과학은 국가의 지적 토대이며, 과학기술 생태계를 건강하게 만드는 국가 필수자산입니다.” 홍성주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혁신시스템연구본부장은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는 기초과학 그 자체를 위해 이뤄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목적을 위해 과학기술 연구를 이끌어왔던 사회 분위기는 지금도 남아 가시적인 성과를 요구합니다. 2015년, 서울대 공대가 ‘2015 서울대 공대 백서’를 통해 “단기성과와 양적지표로 평가받는 교수들이 만루홈런(고위험고가치 연구)을 치는 타자가 아닌 번트(쉬운 연구)를 쳐 출루(연구비를 확보)하는 타자가 되는 것에 만족했다”며 자기비판을 한 것이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