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2023 SF스토리 공모전 총36편의수상작중 양자나노과학연구단 특별상을 수상한 소설을 지면에 소개합니다.
2175년
2175년 스코틀랜드 포트 윌리엄. 미래에도 영국 사람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은 여전해 보였다. 지역 국회 의원의 유세 현장엔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사람들이 밀집해있었다.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침해하는 ‘마더’ 시스템은 폐지돼야합니다!” 대중들 앞에 선 포트 윌리엄의 의원이 확성기에 대고 목청껏 외치기 시작했다. 그의 발언에 여기저기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쓰레기 같은 놈. ‘마더’ 덕분에 살기 좋아진 세상에 태어나 놓고. 저런 망언을 내뱉다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선임 요원 제임스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데이비드, 자네는 미래에서도 ‘마더’에 대한 믿음이 꽤 굳건했나 보군. 저 괘씸한 의원 놈을 벌건 대낮에 사람들 앞에서 쏴 죽인 거 보면. 슬슬 움직이도록 하지. 곧 자네가 살인을 저지를 시간이야.”
제임스는 내게 눈짓을 보내며 내 반대쪽 군중 속으로 이동했다. 내가 실패했을 시, 나 대신 상황을 마무리 짓는 것이 선임 요원인 그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나 자신을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미래의 내게 다가갈수록 그의 모습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얼굴, 목과 손의 주름.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카락. 앙상하게 말라버린 몸. 다리 한쪽은 심하게 절고 있었고, 그마저 지팡이에 의존해야만 겨우 발을 내딛는 것이 가능해 보였다. 게다가 그는 임무 중 큰 부상을 입었는지 왼쪽 얼굴부터 목을 타고 멀리서 봐도 눈에 선명한, 깊고 긴 흉터가 있었다. 마치 살이 반으로 찢겼다가 겨우 다시 붙어 가까스로 아물었을 경우에나 생길 법한 자국이었다.
하지만 그는 누가 봐도 나 자신, 데이비드 로이드의 모습이었다. 그걸 알아챈 순간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의식돼 모자를 푹 눌러썼다. 비록 외향에서 풍기는 연륜은 다르지만 같은 모습을 한 사람 둘이 한 장소에 있다는 걸 알아챘을 때, 이를 의아하게 여기지 않을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폭삭 늙어버린 나 자신을 바라보자니 복잡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그의 볼품없는 모습에 조금 서글픈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떤 모습으로 늙고 싶다’라는 생각은 단 한번도 진지하게 해본 적 없지만, 지금 눈앞에 우두커니 서있는 저 남자처럼 늙는 건 달갑지 않았다.
그의 행색을 위아래로 훑다 그가 가슴에 배지를 하나 달고 있음을 발견했다. 특수 정보국 마크가 새겨진 배지. 퇴직 요원들에게 주어지는 영예로운 배지였다. 저 나이가 돼서도 여전히 정보국 요원이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니. 난 멀리서 훈장과도 같은 그 배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는 저 배지 뒤에 암살에 사용할 총을 숨기고 있는 걸까?
긴장감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게 ‘마더’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하고 좀 더 뛰어난 요원이 되기 위한 길이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노인 한 명을 죽이는 거다. 오히려 그에겐 그게 더 좋을 수도 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죽어버리면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저런 볼품없는 모습으로 하루하루 연명하며 버틸 필요가 더 이상 없을 테니 말이다.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그와의 거리를 좁혀갔다. 대각선 방향에 밀집한 군중 사이로 내가 서있는 방향을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는 제임스의 모습도 얼핏 보였다. 난 마른침을 꿀꺽 삼킨 후 군중들 사이에 생길 틈을 엿보며 오른손을 왼쪽 가슴팍 안주머니 속의 총으로 서서히 가져갔다.
‘이때다!’
가슴팍의 총을 꺼내 들려는 찰나, 한 어린 여자아이가 갑자기 내 시야를 가로막더니 미래의 내게 달려들었다.
“할아버지~!” 여자아이의 등장에 미래의 내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아이고, 우리 예쁜 손녀딸 왔구나. 엄마 아빠는?” “저기 뒤에 와요. 할아버지 빨리 보고 싶어서 뛰어왔어요.”
‘할아버지?’ 총에 닿은 손가락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 서늘한 기운은 곧바로 내 가슴으로 전해졌다.
특수 정보국에서의 경력이 내 인생의 전부라고 믿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나. 연애나 결혼 따위는 단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없다. 그런데 지금 눈앞 50년 뒤의 내게 손녀가 있다니. 내가 미래에 결혼해 자식을 낳고, 손녀를 본다고?
소녀의 뒤를 따라 한 부부가 등장했고 그들 역시 미래의 나를 가볍게 포옹한 뒤 그의 곁에 섰다. 딸인지 며느리인지는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미래의 내 얼굴에 맺힌 땀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난 그 자리에 동상처럼 우두커니 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봤다. 먼발치 미래의 나는 너무 행복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단 한번도 상상해 본 적 없던 내 모습. 가정을 이뤄 행복해하는 그 모습이 지금 눈앞에 펼쳐졌다.
순간 손목에 미세한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손목에 삽입된 마이크로칩 형태의 시계에서 살인이 벌어지기 3분 전이 됐다는 알림이 울린 것이다. 하지만 지금 저렇게 가족과 함께 행복해하는 노인이 당장 3분 뒤에 살인을 저지를 것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자식들과 손녀가 보는 앞에서 총으로 사람을 쏴 죽인다고? 저렇게 힘없고 지팡이 없이는 거동도 못하는 노인이?
난생처음 ‘마더’의 예측이 틀린 게 아닌지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손목시계의 알림이 한 번 더 울렸다. 사건 발생까지 2분밖에 남지 않았다. 저 멀리 환한 얼굴로 가족과 담소를 나누는 미래의 나 자신과 손목시계를 번갈아 쳐다봤다. 동시에 반대편에 자리 잡은 제임스가 허리춤에 찬 총에 손을 올리고 서서히 다가오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사건 1분 전 알람이 울렸다시간이 다가올수록 내 심장도 덩달아 빨리 뛰기 시작했다. 사나운 표정의 제임스와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는 미래의 내 모습 사이에서, 난 그 순간까지도 결정을 못 내리고 갈팡질팡했다
‘탕!’ 스코틀랜드 포트 윌리엄 중앙 광장 한복판에 쓸쓸한 총성 한 발이 울려 퍼졌다.
2125년
“데이비드 요원님. 국장님이 뵙자고 하십니다.” 내가 속한 수사팀 2부의 비서가 무표정한 표정으로 다가와 말을 건넨다. ‘국장이 나를?’ 국장이 일반 요원과 직접 면담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그런데 이제 갓 5년 차인 나를 보자고 했다고?’
국장실로 향하는 내내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 모든 촉이 이 부름은 최근 진행 중인 승진과 관련한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2105년. 인류는 비로소 ‘범죄 없는 세상’을 이뤄냈다. 모든 것은 영국의 한 과학자의 연구 덕분이었다. ‘마더(Mother)’라 불리는, 미래의 범죄자를 예측해내는 프로그램을 개발한 것이다. 시스템의 사용법은 간단했다. ‘마더’는 미래에 범죄가 일어나는 시간, 범죄를 저지르는 인물과 주변 정황을 예측해 짧은 보고서로 출력한다. 현재 세계에선 ‘마더’가 지목한 인물을 미리 체포하거나 처벌하면 된다. 간단한 사용법과 달리 시스템을 개발한 과학자의 신원, 시스템의 과학적 원리 등, 이 ‘마더’에 대한 거의 모든 정보는 현재까지도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진 상태다.
학부생 시절 ‘마더’에 관한 강의를 들었다. 당시 교수는 ‘마더’를 가능케 한 기술은 국가 기밀이어서 극소수의 사람만 알고 있으며, 학계에서도 정확한 원리는 모르지만 추측할 뿐이라고 말했다. 당시 그가 내세운 가설은 바로 ‘마더’의 기술이 양자물리학의 양자 얽힘의 원리에 기반을 두고 개발됐다는 것이었다.
한 근원에서 태어난 한 쌍의 입자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있어도, 심지어 수십억 광년 거리에서도 서로 얽힌 상태가 풀어지지 않는다. 그게 양자 얽힘의 기본 개념이다. 왜 다들 그런 경험을 해본 적 있지 않은가. 연인 사이나 가족들 사이에서, 눈에 보이지 않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어떤 신비한 연결 고리들이 존재하는 경우들. 거리의 멀고 가까움에 상관없이 서로 통하는 그 무언가를 발견하는 경우 말이다.
이런 연결이 아원자의 세계에도 존재한다. 고로 한쪽 입자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면 즉각적으로 10억 광년 바깥에 있는 다른 입자에서도 그 변화가 나타난다. 이들 사이의 공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한 근원에서 태어난 한 쌍의 입자는 서로가 우주 양끝에 있어도 한쪽이 변화하면 다른 쪽에 즉각 영향을 미친다.
교수는 ‘마더’가 과거와 미래의 인물들을 연결 짓는 데에 이 양자 얽힘의 원리를 이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현재 알려진 양자물리학에서 양자 얽힘으로 ‘공간’적인 부분은 설명이 가능하지만 ‘시간’적인 부분은 설명이 불가능하다. 아마 그래서 당시 교수는 자신이 이야기가 ‘추측’에 불과하다고 말했을 게다.
대중은 이런 이론적인 이야기에 큰 관심이 없다. 사람들은 단순히 ‘마더’로 더 살기 좋고 안전한 세상이 된 사실에 만족하며 열광했다. 게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더’에게 지목당하지 않기 위해, 사람들 스스로 철저하게 자기 주변을 검열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마더’는 순식간에 사람들이 믿고 따르는 단 하나의 지표가 됐다. 영화에나 등장할 법했던 기술이 현실화되자, 영국을 중심으로 몇몇 강대국이 발 빠르게 움직여 ‘마더’를 독점했다. 그 결과 ‘마더’를 차지한 국가들이 함께 세운 ‘특수 정보국’은 세계를 지배하는 새로운 권력의 중심으로 우뚝 섰다. 정보국이 촉망받는 젊은이들이 가장 선망하는 직장이 된 것 역시 우연은 아니다. 나도 어린 시절부터 이 정보국에 들어오는 것이 목표였고, 요원들이 으레 거치는 엘리트 코스를 악착같이 밟아서 이 조직의 일원이 됐다.
국장실의 문을 두드리자 들어오라는 그의 목소리가 안쪽에서 들렸다. 무척 긴장됐지만, 평온하고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정말 승진 통보를 위해 나를 불렀다면 요원다운 기개를 보여야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국장은 사무용 책상에 두 다리를 올린 채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내게 앉으라고 대충 손짓한 뒤에도 말없이 한동안 서류를 앞뒤로 넘겨가며 읽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가 짧게 기침을 하더니 서류를 책상에 탁 올려놓으며 말했다.
“데이비드 요원. 케임브리지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했어? 수석 입학에 수석 졸업이라.” “네, 맞습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입사 2년 차에, 큰 사건을 맡아 해결했고.” “네, 영국의 악명 높은 해커였던 ‘블랙 닥터’와 관련된 사건입니다. ‘마더’에게 미래 살인자로 지목됐는데, 이를 자신의 해킹 기술로 은폐하려 했고 실제로 한동안 수사망을 피해 도망 다녔습니다.” “근데, 어떻게 잡았지?” “대학교 때 해킹에도 관심이 있어 관련 강의를 열심히 들었던 것이 도움이 됐습니다.” “고작 대학교 때 배운 지식으로,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해커를 잡아냈다?” “아, 그건” 내가 대답을 머뭇대자 국장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가로챘다. “자넨 어쩌다가 요원이 됐나?”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여전히 내겐 답하기 힘든 질문이다. 하지만 흔들리거나 주저하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됐기에 마음을 굳게 먹고 답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출장을 가셨다가 괴한에게 총을 맞고 돌아가셨습니다. ‘마더’ 시스템이 있었다면 막을 수 있었겠죠. 그 후로 아버지 몫까지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저 같은 피해자가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마더’가 만든 이 이상적인 세계를 지켜나가는 데 일조하겠다고 말입니다.”
국장이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아버지는 뭘 하시는 분이셨지?” “케임브리지에서 물리학을 가르치셨습니다.” “오호. 그래서 자네도 케임브리지로 진학했나?” “영향이 없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고 싶었고, 이 분야에서 세계 최고인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전 항상 제가 하려는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자 노력하고 이뤄냅니다. 특수 정보국에 입국한 것도 그 이유입니다.” “특수 정보국이 세계 최고다?” “그렇습니다.” 국장이 피식 웃어 보였다.
“그래? 그럼 어머님 밑에서 컸나?” 난 그의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힘겹게 답했다. “어머니도 제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음주운전 차량에 치이셨다고 하더군요. 이 역시” “‘마더’가 있었으면 막을 수 있었겠군.” 국장이 내 말을 가로챘다. “그렇습니다.” 난 목소리에 힘줘 답했다. 내가 딱하다고 생각했던 걸까? 국장은 그런 날 한동안 말없이 빤히 쳐다봤다.
“부국장이 자네가 보기 드문 인재라고 하던데.” “과찬이십니다.” “겸손하고 성실하기까지 하고 말이야.” 난 이때 확신했다. 이 자리가 내 승진 통보 자리라는 것을.
“앞으로 우리 조직을 이끌어갈 리더로 성장할 친구라고 칭찬이 대단하던데.” “감사합니다.” “최연소 선임 요원 자리에 자네가 거론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을 테지?” “그런 이야기가 있다는 건 소문으로만 들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국장이 아까 읽다 책상 위에 던져 놓은 서류를 내 앞으로 밀었다. 난 국장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고는 서류를 열어보라는 신호임을 알아채고 재빨리 그 서류를 집어서 첫 장을 펼쳤다.
“이건” 서류를 펼쳐든 나는 흠칫 놀랐다. 국장이 건넨 서류는 바로 ‘마더’의 범죄 예측 보고서였다. 그리고, 그 보고서에 등장하는 인물은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다. “한번 소리내 읽어보지.” 당황한 내게 국장이 지시했고,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마더’의 보고서를 읽어 내려갔다. “2175년 1월 8일. 스코틀랜드 포트 윌리엄. 지역 국회의원의 유세 현장에서 해당 의원 사망. 사망원인은 총격. 살인자 이름은데이비드 로이드사건 번호”
‘마더’가 나를 미래의 살인자로 지목했다. 내가 살인을 저지른다고? 말도 안 된다. 난 ‘마더’ 시스템을 깊이 신뢰하고 ‘마더’ 덕분에 범죄가 사라진 이 세계를 사랑한다. ‘마더’의 예언을 현실화시키는 이 특수 정보국이 내 꿈의 직장인 것도 바로 그 이유다. 그런데 내가 살인자라니.
순간 머릿속에 생각 하나가 스쳤다. 그렇다. 이건 분명히 승진의 한 관문이다. 이 보고서는 가짜고, 내게 이 가짜 보고서를 보여줌으로써 내 반응을 보려는 것이다. 이게 바로 승진의 최종 관문이다. 잠시 놀랐던 마음을 재빨리 추스른 뒤 보고서를 읽기 전과 마찬가지로 평온하지만 기개 있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보고서를 다 읽을 때까지 아무 말없이 지켜보던 국장이 입을 열었다. “자, ‘마더’가 자네를 미래의 살인자로 지목했네. 그리고 자네는 그 사실을 지금 이 자리에서 알게 됐고. 어찌할 텐가?”
얼핏 국장의 얼굴에서 아까 본 의미심장한 미소가 다시금 스멀스멀 올라왔다. 역시 날 시험하려는 게 분명했다. “죗값을 받겠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내가 도덕적으로 올바르고 ‘마더’ 시스템을 전적으로 믿고 있으며, 정보국에 충성하는 뛰어난 인재임을 보여줄 절호의 기회였다. “오호.” “전 ‘마더’가 만들어낸 범죄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믿고, 이를 지키기 위해 정보국에 입사했습니다. 제 믿음을 저버리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안 그래도 부국장이 자네라면 그렇게 이야기할 것이라고 했지.” “정보국 요원으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잘 알겠네.” 됐다. 해냈다. 이걸로 승진은 확정이다. 최연소 선임 요원의 타이틀을 거머쥘 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국장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책상 위 붉은 버튼을 눌렀고 다른 서류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나가보라는 말이 없었기에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 고민하던 찰나, 국장실 문이 열리더니 건장한 요원 둘이 들어와 나를 제압했다. ‘마더’에게 지목된 미래 범죄자들은 이렇게 정보국 요원들에게 연행돼 심문받은 뒤 그 결과에 따라 처벌을 받는다.
이미 ‘처벌을 받겠다’라고 말한 것으로 테스트가 끝난 줄 알았는데, 요원들이 나를 생각보다 거칠게 다룬 탓에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 진심을 확인하려는가 보다 싶어 순순히 체포에 응했다. 그렇게 눈이 가려지고 포박된 채로 어디론가 이송됐다.
* * *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안대와 포박이 풀리자 눈앞에 놓인 커다란 기계가 보였고, 곧바로 기계 뒤쪽에서 부국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데이비드 요원은 운이 참 좋아.” 부국장이 천천히 다가오며 운을 뗐다. 드디어 승진 이야기를 하려는가 싶어 흥분됐지만,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듯 답했다. “부국장님! ‘마더’가 저를 미래의 살인자로 지목했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죗값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저를 처벌해 주십시오!”
부국장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해야 맞지만, 이번엔 조금 상황이 달라. 그래서 데이비드 요원 운이 좋다고 한 거야. 일단 이걸 착용하게.” 부국장은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옆에 놓인 작은 헬멧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복잡해 보이는 전선과 회로가 덕지덕지 붙은 헬멧은 아까 본 커다란 기계에 연결돼있었다.
“이게 뭐죠?” “마더.” “네?” 부국장이 무심한 목소리로 답했다. “새로운 임무를 하나 주겠네. 지금부터 ‘마더’의 힘을 이용해 자네가 살인을 저지를 2175년으로 가게나. 그곳에 도착해 미래의 데이비드 요원이 살인을 저지르기 전에 그를 사살하도록.” “” 한동안 멍하니 부국장을 응시했다. 지금 부국장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미래? 나 자신을 죽이라고?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는지 보기 위해 여기 제임스 선임 요원이 동행할 걸세. 그가 보는 앞에서 미래의 자네 자신을 사살하고 돌아오면 돼. 임무에 성공하면 범죄자로 지목된 일은 없던 걸로 하고, 자네를 선임 요원으로 승진시키도록 하지.”
순간 머릿속이 하얘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까 봤던 그 ‘마더’의 보고서가 진짜라는 이야기인가? 내가 미래의 살인자? 지금 이 상황이 내 승진을 위한 테스트가 아니란 말이야? 아니, 그보다. 마더를 이용해 미래로 가라는 이야기는 무엇이며, 미래에 가서 나 자신을 사살하라는 건 또 무슨 이야기인가.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혼란스러웠다. “아까 본 ‘마더’ 보고서가 가짜라고 생각했을 거야. 이해는 가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보고서는 가짜가 아니야. ‘마더’는 데이비드 요원이 약 50년 뒤 살인을 저지른다고 예측했네.” 믿을 수 없어
“원래대로라면 다른 사람들처럼 처벌받아야 맞지만, 내부적으로 검토한 결과, 자네를 정보국 소속으로 남기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네. 그래서 이렇게 기회를 주는 거야.” “기회라고요?” “그렇네. 죄를 씻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 시간이 촉박하니 서둘러 떠나는 것이 어떻겠나? ‘마더’ 보고서 처리 내용은 사흘 안에 의회에 제출해야해. 제임스 요원?” “네, 부국장님.”
그동안 말없이 한구석에 서있던 제임스 선임 요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185cm는 족히 돼 보이는 커다란 키. 그런 키에 걸맞은 어마어마한 덩치. 이름으로만 들어온 제임스 피터슨 선임 요원. 특수 정보국 소속 선임 요원들의 신상이나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는지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서, 같은 정보국 소속인 일반 요원들도 잘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요원의 신분으로 눈에 띄는 공을 세운, 뛰어난 인재들만 선임 요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부터는 제임스 요원의 지시를 따르게. 그럼 행운을 빌겠네.” 부국장은 그 말을 남기고 바로 자리를 떴다. “‘마더’ 사용은 처음이겠지?” 제임스가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처음이다 마다요. 마더에 시간 여행을 시켜주는 능력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일단 이걸 써. 사건 발생 몇 시간 전으로 이동하게 될 테니 도착해서 이야기하지.” 제임스는 부국장이 건넨 헬멧을 내 머리에 씌웠다. 그러더니 아무렇지 않게 기계로 걸어가 조작하기 시작했다.
“조금 어지러울 거야.” 제임스가 자신도 헬멧을 착용하며 말했다. 그는 지체 없이 스위치를 눌렀고, 곧바로 기계가 굉음을 냈다. 머리를 조이던 헬멧에서 열기가 느껴지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2175년
우리는 정말 시간을 뛰어넘어 2175년 스코틀랜드의 소도시 포트 윌리엄에 도착했다. 제임스는 이 모든 것이 익숙하다는 듯 태연하게 행동했지만 난 충격에서 쉽사리 빠져나올 수 없었다. 놀라움과 당황도 잠시, 곧 마음엔 현실적인 불안감이 차올랐다. 내게 주어진 ‘임무’ 때문이었다. 미래의 나 자신을 죽이라는 그 황당한 임무 말이다.
그때까지도 이게 내 승진 시험의 한 관문이 아닐까 하는 희망을 품어봤지만 줄곧 진지한 자세로 임하는 제임스를 보며 헛된 희망임을 깨달았다. 그렇게 제임스에게 이끌려 ‘마더’가 예측한 살인이 일어날 장소인 중앙 광장으로 향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그때까지 줄곧 침묵을 지킨 제임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특수 정보국에 입사하고 나서 활약이 대단했나 봐? 이렇게 특별 대우를 받는 걸 보면.” 다소 빈정거리는 제임스의 말투.
“특별 대우라뇨? 미래의 나 자신을 죽이는 게 특별 대우입니까?” 모든 것에 민감했던 난 까칠하게 답했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계속 일도 할 수 있게 해주고 승진도 시켜주겠다고 하잖아? 자네 올해 30세인가? 난 40대가 다 돼서야 선임 자리에 올랐어. 이 정도면 특별 대우 아닌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전 그 ‘마더’의 보고서가 가짜라고 생각했단 말입니다.” “‘마더’ 보고서를 가짜로 쓰는 일은 없어. 자네가 본 그 보고서는 진짜야. 실제로 ‘마더’는 자네를 미래의 살인자로 예측했어.”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제가 임무에 실패하면 어떻게 되죠?” “돌아가서 처벌을 받아야지.” 그의 차갑고 무심한 말투에 말문이 턱 막혔다. 미래의 나를 죽여야 내가 산다. 미래의 나를 제거해야 내가 사랑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다. 미래의 나를 죽여야 현실의 내가 존재할 수 있다.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시간 여행이 가능한 건 어찌어찌 머릿속으로 이해를 했습니다. ‘마더’로 미래의 범죄도 예측 가능한 세상에 이상할 것 없지요. 그런데 대체 왜 그 기능이 정보국에서 사용되는지는 도통 모르겠습니다. 설마 정보국엔 모두 저처럼 미래에 살인을 저지를 사람들이 모여있습니까? 그래서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서 이렇게 미래로 와 자기 자신을 살해하는 겁니까?” “음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제임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쭉 켜며 답했다. “왜 국가 정상들이나 대기업 총수들 중엔 ‘마더’의 살인 예측에 이름이 오르는 사람이 없는지 궁금한 적 없었어?” “!!??”
제임스의 말이 맞았다. 각국 정상, 거물급 정치인, 유명 기업인 중 ‘마더’의 보고서에 이름이 오른 사람은, 이 시스템이 도입된 후 단 한 명도 없었다. 난 지금까지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다. 그렇게 높은 위치에 올라 사회적 명예와 부를 갖춘 사람들이 범죄 따위를 저지를 일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더’의 보고서에 그런 사람들의 이름이 오르고 실제로 처벌받으면 어떻게 될까? 사회가 혼란스러워지겠지. ‘마더’의 존재 목적이 뭐야. 사회 질서 유지잖아. 그 목적에 반할 수는 없는 일이고.” 난 제임스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그 이야기는마더 보고서에 이름을 올린 사람의 미래로 가 그 사람이 살인을 저지르기 전에 먼저 제거한다” “그래, 그게 우리 특수 정보국, 특히 선임 요원들의 주 임무 중 하나지. ‘마더’ 보고서에 이름이 오른 사람들은 미래의 자신을 제거함으로써 현재의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일종의 면책권이 생겨. 당장 처벌받지 않고 자신이 누리던 것들을 누릴 수 있고, 또 미래에 살인 사건에 연루돼 사회적으로 추락하지 않는 이점도 있고, 여러모로 그들에겐 이득이지.”
“그럼미래의 자신이 죽은 사람들은 현실 세계에서 어떻게 되죠?” “수명이 줄어들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미래의 자신이 살해당한 날이 그 사람이 실제로 사망하는 날이야. 보통은 자연사한다더군.” 범죄. 이건 명백한 범죄 행위다. 범죄 없는 세상을 위해 태어나 운영되는 특수 정보국이, 기득권층의 전유물이 돼 범죄를 방조하고 선량한 시민들을 기만한 것이다. 충격에 빠진 나와 달리 제임스는 이 모든 것이 너무 당연하다는 듯, 별다른 동요 없이 이야기했다.
“하지만 정보국이 뒤를 봐주는 사람들은 매우 한정적이야. 그래서 자네가 특별 대우를 받는다고 이야기한 거야. 자네는 유명한 정치인이나 기업인도 아니지 않은가. 이제 곧 미래의 자네가 살인을 저지를 시간일세. 이 역시 임무라는 걸 기억해. 현실 세계에서 자네의 목숨은 이 임무의 성공 여부에 달렸어.”
내 목숨이 이 임무의 성공 여부에 달렸다는 말이 참 아이러니하게 들렸다. 내가 맡은 임무란 결국 내 목숨을 끊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이 콘텐츠는 과학기술진흥기금 및 복권기금의 재원으로 운영되고,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과학창의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성과물로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발전과 저소득·소외계층의 복지 증진에도 기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