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스토리 공모전 총 36편의 수상작 중 과학동아 특별상을 수상한 소설을 지면으로 소개합니다
“기어 1단에서 현재 시속 120km.” 타는 듯이 목이 마르다.
“기어 2단. 클러치 타이밍이 완벽했습니다.” 속도라는 건 빠르면 빠를수록 더 목이 마르다. 마치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표류자가 목이 마르다고 바닷물을 마시면 더 목이 마른 것처럼.
“준비하세요. 시속 340km에서 기어 3단 들어갑니다.” 운전을 보조하는 인공지능(AI)인 ‘선미’가 여성 목소리로 침착하게 말했다.
“아니, 이대로 계속 가다가 380에서 3단 들어간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삼삼칠’이 단호하게 말했다. 원래 아이디는 ‘전자인간 삼삼칠’이지만, 그의 팬들은 그냥 간단히 줄여서 ‘삼삼칠’이라고 불렀다.
“마음대로 하소서. 전하.” 선미가 그의 긴장을 풀어주려고 사극풍으로 말한 거였지만, 삼삼칠은 지금 긴장을 풀 여유 따위가 없었다. 시속 300km를 훌쩍 넘은 속도에서 조금이라도 운전을 삐끗하면, 자동차가 비행기처럼 공중에 붕 떠서 초고속으로 회전하면서 산산조각이 나버린다. 드래그 레이싱(Drag Racing약 400m의 직선 코스를 급가속으로 달리는 자동차 경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끔찍한 사고들이 다 그렇게 발생한다.
삼삼칠이 얼음처럼 냉정하게 흔들림 없는 시선과 날카로운 반응속도로 차를 몰았다. 지평선까지 끝없이 펼쳐진 직선 고속도로를 따라서 수백 대의 차가 폭풍처럼 질주하고 있었다. 천둥 같은 엔진 소리에 천지가 진동했다. ‘빠르게 질주하고 싶다’는 건 인간이 가진 가장 원초적인 본능이다. 태초에 초원을 달리던 인간에게 있어서 ‘속도’는 곧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극한의 속도감과 공포감에 대한 욕망을 합법적으로 해소하며 짜릿한 쾌감을 느끼고 싶어서 레이싱에 집착한다.
지금 이곳은 ‘자동차 경주 전용 메타버스’인 ‘매드스피드(Mad Speed)’. VR 속에서 좌우폭이 500m인 거대한 고속도로가 일직선으로 무한히 펼쳐진다. 전 세계에서 매드스피드에 접속한 수백만 명의 유저들이 오직 하나뿐인 이 도로 위를 함께 달린다. 이 경주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24시간 365일을 쉬지 않고 달린다. 하늘에 높이 떠있는 대형 홀로그램 전광판에 전체 유저들의 현재 순위가 실시간으로 표시된다.
물론 선수가 24시간 접속해 있을 수는 없다. 식사도 해야하고, 화장실도 가야하고, 잠도 자야한다. 그래서 선수가 로그아웃했다가 다시 접속하면, 그가 로그아웃했을 때의 순위에 맞춰서 스타트 위치가 정해진다. 즉, 이전에 로그아웃할 때 300등으로 달리고 있었다면, 이번에 접속할 때는 현재 300등인 유저의 옆에서 같은 속도로 달리면서 그의 자동차가 생성되는 것이다.
삼삼칠이 박력 있게 클러치를 밟으면서 기어를 올렸다.
“기어 3단 오케이.” 삼삼칠이 선미의 목소리를 들으며 엑셀을 힘껏 밟았다. 그의 자동차가 짐승처럼 앞으로 튀어나가면서 엄청난 가속도가 그의 몸을 운전석 뒤로 떠밀었다. 엔진 소리가 심장박동처럼 리드미컬하게 쿵쾅거리고 광란의 속도감이 오감을 자극했다. 그 쾌감을 견디지 못해서 온몸의 신경이 전율했다.
이 미칠 듯한 기분느껴보지 못한 놈은 죽어라.
레이싱 순위가 바뀌었다. 삼삼칠과 그의 자동차인 ‘눈먼 짐승’이 12등으로 올라갔다.
“멀었어! 아직 멀었어!” 속도에 굶주린 삼삼칠이 짐승처럼 으르렁댔다. 주위 풍경이 그의 시야 옆으로 쏜살같이 빠르게 지나갔다. 지금 매드스피드의 경주용 차들은 사막을 가로질러서 일직선으로 쭉 뻗어있는 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엔진의 열기가 터질 듯이 불을 뿜었다. VR 속에 만들어진 이 고속도로는 가장 선두에서 달리고 있는 차량보다 항상 100만 km 앞까지 미리 도로가 생성된다. 그래서 레이서들은 도로가 끝날 염려 없이 무한 질주할 수 있었다.
2000km의 사막 구간이 끝나자 주위 배경이 마법처럼 바뀌었다. 몇시간 또는 하루 종일을 달려야하는 레이서들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서 매드스피드의 개발진이 이번에 새로 업데이트한 기술이었다. 새로운 배경은 거대도시의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의 컨셉이었다. 시간대는 밤이었다. 네온사인과 홀로그램 광고판으로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초고층 빌딩 숲. 그걸 배경 삼아 수백 대의 경주용 차가 폭주했다.
“시속 460km 돌파.” 선미의 말과 함께 눈먼 짐승이 앞서가던 일곱 대를 제치고 5등으로 올라갔다. 드디어 ‘제2그룹’의 맨 앞에서 달리게 됐다.
4년 전에 매드스피드가 출시된 이후, 레이싱이 계속 진행되면서 경주차들은 자연스럽게 세 그룹으로 나뉘어졌다. 현재 가장 앞에서 달리고 있는 제1그룹은 평균속도가 시속 800km인데 단 네 대뿐이었다. 미국 레이서인 ‘엑셀F’의 ‘갓모드’. 독일 레이서인 ‘하복’의 ‘소닉크루저’. 이태리 레이서인 ‘밀레니오’의 ‘라돌체72’. 일본 레이서인 ‘엠페러’의 ‘미드나잇 블루’.
그 뒤를 달리는 제2그룹은 평균속도가 시속 400km이다. 현재 50여 대의 차량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치열하게 선두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이들은 어서 빨리 앞으로 치고 나가서 제1그룹에 끼고 싶어하지만, 지금까진 아무도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 외 나머지 수백만 대의 차량들은 모두 제3그룹에 속했다. 삼삼칠은 매드스피드에 가입해서 첫 차를 만든 지 6개월 만에 제2그룹으로 올라왔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만년 5등. 그는 단 한 번도 그 위로는 올라가보지 못했다. 모두가 염원하는 제1그룹으로는 단 한 번도 올라가보지 못했다.
*
삼삼칠이 힘차게 기어 4단을 넣었다. “시속 500km. 차체 진동이 심합니다.” “괜찮아.” “괜찮지 않아요.” “괜찮다니까! 그냥 달려!” 삼삼칠이 선미의 말을 무시하고 엑셀을 더 밟았다. 눈먼 짐승의 엔진이 포효하면서 앞으로 힘차게 박차고 나갔다. 제2그룹의 차량들이 빠르게 뒤로 멀어지고, 저 멀리 제1그룹의 꽁무니가 아련히 보이기 시작했다.
“보인다! 따라잡을 수 있어!” 삼삼칠이 흥분해서 소리쳤다. 그의 자동차인 눈먼 짐승은 람보르기니의 대표적인 슈퍼카인 아벤타도르 두 대를 옆으로 나란히 붙여서 결합하고, 여기에 터보엔진 8기를 얹은 괴물 같은 머신이다. 운전석은 두 대의 차량 사이에 따로 만들었다 . 운전석이 전투기처럼 앞쪽으로 길게 튀어나와있어서 시야를 넓게 확보했다. 이런 차량을 만든다는 게 현실세계에서는 말도 안 되지만, 메타버스인 매드스피드의 차량 제작 메뉴에서는 모든 게 가능했다. 유저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형태와 기능의 차량을 제작할 수 있었다.
물론, ‘돈’만 있다면. 돈 많은 유저들은 자기 차를 아예 기본 뼈대부터 새로 설계해서 만든다. 하지만, 삼삼칠은 그 정도 재력은 안되니까 기존의 슈퍼카를 베이스로 삼고 최대한 튜닝을 해서 몬스터 머신을 만든다. 기존의 상식을 깨는 과감하고 미친 튜닝 때문에 그의 차를 좋아하는 팬들도 많았다.
“엔진 온도 잘 봐!” “온도는 괜찮습니다.” “좋아. 시속 600km에서 기어 5단 넣는다!” “속도 줄이세요. 차체 진동이 한계예요. 지금 안 느껴져요?” 선미가 날이 바짝 선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머신이 달리는 동안 차체 상태, 도로 상태, 주변 차량들의 상태를 종합적으로 살펴서 실시간으로 위험지수를 계산한다. 그 위험지수가 높아질수록 선미의 성격도 까칠해진다.
하지만, 삼삼칠은 위험 따위 상관하지 않았다. 고속 질주는 위험하기 때문에 즐거운 거니까. 위험이 무서우면 이불 밖으로 평생 나오지 마라. 무게가 수 톤이 넘는 쇳덩이를 타고 초고속으로 폭주할 때, 온몸으로 느껴지는 차체의 진동과 귀청이 터질 듯한 엔진 소리가 지금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는 걸 깨닫게 해준다. 극도로 긴장감을 높여준다. 이런 긴장감 속에서 신체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온몸의 근육이 긴장 상태에 들어간다.
뇌는 이런 신체변화를 감지하고 아드레날린을 대량으로 뿜어낸다. 삼삼칠은 그때마다 혀끝에서 비릿한 신맛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레몬즙 속에 담가놓은 배터리 같은 맛이었다. 아드레날린의 맛.
속도의 맛.
자, 이제부터는 ‘폭풍’이 몰아칠 시간이다. 먼저, 아드레날린이 심장을 자극해서 미친듯이 펌프질한다. 동공이 크게 확장된다. 뇌가 흥분해서 집중력과 운동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이렇게 ‘아드레날린 폭풍’이 뇌와 신경계를 마구 휘저어놓으면서 극한의 쾌감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마치 마약처럼 속도감에 중독돼간다.
“속도 줄이라니까 정말!” 선미가 신경질적으로 날카롭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들은 체도 안 하고 삼삼칠이 기어를 더 올렸다. 그러자, 눈먼 짐승의 왼쪽 차체가 파워를 이기지 못하고 약간 금이 가면서 비틀어졌다. 그 바람에 차체의 균형이 깨지자 오른쪽 차체가 지면 위로 살짝 들렸다. 그 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물리법칙 그대로였다.
오른쪽 차체 밑으로 불어닥친 시속 600km의 강풍이 눈먼 짐승을 비행기처럼 공중에 높이 띄워 올렸다. 지상에서 30m 높이까지 수직으로 솟구친 머신이 초고속으로 핑그르르 회전하면서 산산조각으로 분해됐다. “그러게 내가 뭐랬!” 선미의 날카로운 외침소리가 엄청난 소음에 파묻혀서 안 들렸다.
눈먼 짐승이 공중에 솟구쳐 올랐다가 처참한 파편이 돼서 다시 땅에 떨어질 때까지, 그 짧은 몇 초의 시간 동안, 무려 117대의 차량이 그를 제치고 지나갔다. 홀로그램 전광판에 새겨진 그의 마지막 순위는 122등. 5등으로 앞서 달리고 있었던 삼삼칠은 순식간에 122등으로 밀려난 채 로그아웃됐다.
*
태호가 메타버스 전용 가상현실(VR)기기를 벗어서 집어던졌다. 이런 일이 하도 많아서 벽마다 두꺼운 쿠션을 붙여놨기 때문에 VR기기는 안전했다. 상당히 고가인 VR기기가 부서지면 나중에 후회가 크다. 윤태호의 매드스피드 아이디는 ‘전자인간 삼삼칠’. 그가 바로 ‘눈먼 짐승’을 모는 레이서이며 한국인 중에 매드스피드에서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한 인물이다. 현재까지 그의 최고기록은 세계 5위.
태호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흥분이 서서히 가라앉아서 평정을 되찾자, 침대 위에 떨어진 VR기기를 주으러 갔다. 자기가 앉아있는 낡은 휠체어의 바퀴를 양손으로 돌리면서.
태호는 하반신 마비다. 그를 어중간하게 아는 사람들은 당연히 태호가 위험하게 차를 몰다가 사고가 나서 불구가 됐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도 그럴 만한 게, 태호는 모두가 다 알아주는 속도광이었다. 그는 만 18세가 되자마자 운전면허를 취득하고 곧바로 차를 샀다. 밤마다 미친듯이 자유로를 달렸다. 기존 차량의 성능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게 되자, 스스로 차를 튜닝하면서 자동차의 구조와 설계를 공부했다. 그러다 보니까 최대출력이 200마력 밖에 안되는 차를 개조해서 600마력까지 끌어올리는 실력이 됐다.
국산차를 튜닝하는 걸로는 한계가 오자, 슈퍼카로 눈을 돌려서 페라리를 샀다. 차를 사는 동시에 차를 담보로 잡히고 대출을 받는 방식이었다. 한 달에 수백만 원씩 나가는 할부금을 갚으려고 주유소에서 일하면서 매일 라면만 먹었다. 당연히 슈퍼카를 튜닝하는 데도 그의 실력이 발휘됐다. 불법 개조한 태호의 빨간색 페라리는 인천공항고속도로와 서해대교에서 광란의 질주를 벌이면서 ‘붉은 제왕’으로 군림했다. 그의 차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에게 태호는 이렇게 말했다.
“어떡하면 이런 차를 탈 수 있냐고아주 간단해. 가족도 애인도 다 필요 없어. 다 버려. 그리고 전부 다 쏟아부으면 돼. 네 인생의 전부를.” 사람들은 태호가 저렇게 차를 몰다가 곧 죽을 거라고 수근거렸다. 그리고, 그날이 왔다.
태호가 자동차 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경기도 펜션에 놀러가서 잠을 자는데 지붕이 무너졌다. 흔한 부실공사였다. 지붕에서 떨어진 커다란 대들보가 그의 척추를 짓뭉갰다.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결국은 하반신 마비였다.
“인생이란 게 참 어이없다. 그치?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빠르게, 더 미친듯이 달려볼 걸 그랬어. 하하” 태호는 이 말을 남기고 스피드의 세계에서 사라졌다. 그 후, 지방에 내려간 태호는 카센터에서 일하면서 삶을 꾸려나갔다. 휠체어를 탄 몸인데 차를 다루는 솜씨가 워낙 좋아서 수입이 꽤 높았다. 그러던 어느 날, 카센터에 찾아온 손님들이 ‘매드스피드’라는 것에 대해서 얘기하는 걸 우연히 들었다.
‘뭐? 그런 게 있다고?’ 장애인도 아무런 제약 없이 자유롭게 차를 운전할 수 있는 메타버스. VR 속에 무한히 펼쳐진 고속도로. 그 위에서 시작도 끝도 없이 광란의 레이싱을 벌이는 수백만 대의 경주용 차들.
“정말로 그런 게 있어요어떻게 가입하면 되죠내 컴퓨터로도 될까요? 컴퓨터는 얼마나 빨라야 돼요?” 항상 생기 없던 태호의 눈동자에 광채가 되살아났다. 그렇게, 태호는 질주의 세계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매드스피드에 가입한 지 겨우 6개월 만에 ‘한국 최고속’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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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이걸 이쪽에 붙이는 게 더 차체가 가벼워질까?” 태호가 VR기기를 머리에 쓰고 컴퓨터 앞에 앉아있었다. 산산조각 나버린 자기 차를 대신해서 ‘눈먼 짐승 2호’를 만들려는 것이다. 그는 벌써 며칠째 매드스피드의 차량제작 메뉴를 붙잡고 밤낮으로 씨름하고 있었다.
신규 유저가 매드스피드에 가입하면 기본 차량을 무료로 받는다. 하지만, 기본 차량은 사양이 낮아서 최고 속도가 시속 200km 밖에 안 나온다. 미래학자였던 엘빈 토플러는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의 세계는 ‘강자’와 ‘약자’ 대신 ‘빠른 자’와 ‘느린 자’로 나뉠 거”라고. 태호는 당연히 ‘빠른 자’가 되고 싶었다. 무한 고속도로를 제대로 달리려면 비싼 돈을 들여서 고성능 차를 사야한다. 더 빨리 달리고 싶다면 더 많은 돈을 들여서 차를 개조하면 된다. 무척 이해하기 쉬운 ‘돈의 법칙’이었다.
매드스피드의 유저들은 차고처럼 생긴 VR에서 자기 차를 개조한다. 자유롭게 차체를 늘였다가 줄였다가, 붙였다가 떼었다가 하면서 정밀하게 깎고 다듬는다. 커다랗고 무거운 차량 부품을 이리저리 돌려보면서 여기저기 끼워 맞춰본다. 당연히 현실세계에서 차량을 개조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쉽고 재미있다. 그만큼 ‘상상력’이 중요하다. 상상을 실제로 이룰 수 있는 VR에선 상상력의 크기가 모든 것을 좌우한다.
태호는 더 빠른 속력을 얻기 위해서 ‘자동차 엔진’을 버리기로 했다. 그 대신 ‘전혀 다른 엔진’을 차에 싣기로 했다. 매드스피드의 규정에 따르면, 어떤 엔진으로 차가 달리는지는 전혀 상관없었다. 자동차와 다른 탈것을 구분 짓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 그것은 바로 ‘바퀴’다. 매드스피드에서 ‘규정에 적합한 자동차’라고 인정받으려면 중요한 건 오직 두 가지다.
첫째, 바퀴가 4개 이상 달려있어야 한다. 둘째, 바퀴가 땅에 접촉해서 달려야한다.
매드스피드의 레이서들은 원래 비행기를 무척 혐오했다. “날개 달린 건 흉측해.” “바퀴가 달려야 아름답지.” 그래서 ‘바퀴 근본주의자들’이라고 불릴 정도로 레이서들은 바퀴에 집착했다.
그로부터 몇 주 후. 마침내 눈먼 짐승 2호의 설계도가 완성됐다. 태호는 괴물 같은 형태의 머신을 VR 속에서 이리저리 돌려보면서 모든 각도에서 자세히 점검했다. 완벽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문제는 ‘돈’이었다. 제작비 견적을 한번 뽑아보니 대략 47억 5천만 원이 나왔다. 여기에 연료비까지 합하면 최소한 60억 원은 필요하다. 태호가 VR기기를 벗고 곰곰이 생각해봤다. ‘어떡하지?’
매드스피드를 시작한 이후, 그의 수입은 별로 많지 않았다. 매드스피드 개발사에서 레이싱 순위에 따라서 매달 지급해주는 상금이 주된 수입원이었고, 팬클럽과 후원회에서 가끔씩 보태주는 후원금이 조금 있었다. 여기에 펜션 사고 때 받은 보상금을 합쳐도 턱없이 돈이 모자랐다. 아무리 고민해도 그런 거금을 마련할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다 버려” 태호가 무의식 중에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가족도 애인도 다 필요 없어집도 뭣도 다 필요 없어다 버려그리고 전부 다 쏟아부으면 돼네 인생의 전부를” 전에는 입버릇처럼 늘 하던 말이었는데, 정말 오랜만에 그의 입에서 다시 나왔다. 오랜만에 이 말을 해보니 그 어감이 참 좋았다. 어둡던 시야가 확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태호가 주위를 둘러봤다. 그동안 살아온 작은 방이 오늘따라 더 작게 느껴졌다. “그래. 다 버려야지.” 마침내 결심을 하니까 마음이 무척 편해졌다. 태호가 손때 묻은 낡은 휠체어를 천천히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다내 발이 돼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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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삼칠이 돌아온다!” 삼삼칠이 매드스피드에 복귀한다는 뉴스가 나오자 한국 커뮤니티가 후끈 달아올랐다. 그것도 새로운 머신인 ‘눈먼 짐승 2호’를 타고 나온다고 하자, 아주 그냥 난리가 났다. 만년 제2그룹에 머물러있는 삼삼칠이 과연 이번엔 최선두 그룹으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인가. 항상 5등으로 끝난 삼삼칠이 과연 이번엔 1등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한국에서 과연 ‘매드스피드 전 세계 1등’이 나올 수 있을 것인가.
이제 삼삼칠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매드스피드 팬들에게도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그래서 레이싱을 시작하기 전에 ‘전자인간 삼삼칠’이 아닌 ‘인간 윤태호’를 취재하려고 방송국에서 취재진이 찾아왔다.
“근데, 여기 정말 맞아요?” 여성 리포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게도 인터뷰 장소는 일반 집이 아니라 어느 대학병원의 병실이었다. 병실에 들어온 여성 리포터가 태호를 보고 깜짝 놀랐다.
커다랗고 두꺼운 유리 실린더 안에 투명한 액체가 가득 차있고, 그 속에 사람의 뇌와 척수가 둥둥 떠있었다. 뇌와 척수에는 수많은 파이프가 꽂혀있어서 혈액과 영양분을 공급하고, 노폐물을 밖으로 배출했다. 대뇌 부위에는 초소형 컴퓨터칩이 여러 개 꽂혀있어서 옆에 있는 컴퓨터와 원격으로 연결돼있었다. 이것이 지금 태호의 모습이었다.
“윤태호씨어떻게저기, 그” 리포터가 당황해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뭘 먼저 얘기할까요?” 컴퓨터 스피커에서 태호의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태호는 뇌와 척수를 제외한 자기 육체 전부를 미국의 첨단 생명공학 회사에 팔았다. 그의 물질적인 육체뿐만 아니라 유전자 정보, 혈액 정보, 신경세포 정보, 호르몬 정보 같은 모든 생물학적 정보까지도 해당 회사의 소유물이 됐다. 여기에 더해서 그의 육체와 생물학적인 정보를 이용해서 앞으로 개발하게 될 모든 신약에 대해서도 회사가 영구적, 독점적으로 소유하게 됐다. 그 대신 태호는 현금 100억 원을 일시불로 받았다.
그의 뇌와 척수를 적출하는 고난이도의 수술비는 당연히 회사에서 부담했다. 뇌와 척수를 보관할 생명유지장치를 제작하는 비용, 뇌와 컴퓨터를 연결하는 인터페이스를 제작하는 비용도 해당 회사에서 모두 부담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생명유지장치와 뇌-컴퓨터 인터페이스를 유지보수하려면 매달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데, 이것도 앞으로 태호가 사망할 때까지 회사에서 전액 지불하기로 했다. 태호는 이 정도면 제법 좋은 조건의 거래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마련한 돈으로 그는 눈먼 짐승 2호를 제작할 수 있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다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리포터가 결국은 울음을 터뜨렸다. “죄송죄송합니다으허엉엉엉” “괜찮아요. 난 지금 행복합니다.” “유윤태호씨그럼, 인터뷰를 끝내기 전에훌쩍마지막으로팬들에게훌쩍하고 싶은 말이있나요?” “글쎄요” 잠시 침묵하던 스피커에서 태호의 밝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자인간 삼삼칠이 진짜로 ‘전자인간’이 됐습니다! 축하해주세요! 아, 이거 너무 썰렁한가? 아하하하!” 이 방송이 인터넷을 통해서 전 세계로 스트리밍되자 매드스피드의 동시접속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신규가입자 수도 갑자기 수직으로 치솟았다. 모두가 삼삼칠을 보려고 매드스피드에 몰려드는 것이다. 언론에서는 이 현상을 ‘삼삼칠 효과’라고 불렀다.
2시간 동안 진행된 눈먼 짐승 2호의 시스템 최종 점검이 마침내 끝났다. 드디어 무한 고속도로에 뛰어들어서 레이싱을 다시 시작할 때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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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삼칠이 눈먼 짐승 2호의 운전석에 앉은 채로 ‘대기실’에 있었다. 이곳은 레이싱에 뛰어들기 전에 운전자와 차량이 대기하는 VR이다. “선미야, 그동안 잘 있었어? 나 보고 싶었지?” “” 삼삼칠이 운전보조 인공지능인 선미에게 쾌활하게 말을 걸었지만, 그녀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너혹시 삐졌냐?” “삐지긴 무슨저번에 내 말대로 했으면 사고 안 났잖아요!” “이번엔 네 말 잘 들을게.” “당연히 그래야죠근데, 좀 이상하다?” “응? 뭐가?” “예전보다 성격이 더 밝아진 거 같네요.” “그런가확실히갑갑한 육체를 벗어버리니까 더 가벼워진 거 같아. 몸도 마음도.” “흠, 좋아요. 컨디션도 좋고. 그럼 한번 달려볼까요?” “그래, 가자.” 삼삼칠이 홀로그램패널을 열고 레이싱 스타트 버튼을 눌렀다.
무한 고속도로. 이번 배경은 얼어붙은 남극이었다. 눈폭풍이 휘몰아치는 동토의 땅에 거대한 고속도로가 지평선 끝까지 일직선으로 쭉 뻗어있었다. 앞만 보고 미친듯이 질주하는 여러 대의 차량 중에 현재 122등인 차가 있었다. 흰색 바탕에 검은색 동그라미를 찍은 달마시안 무늬의 포르쉐 911 터보였다. 그 바로 옆에 눈먼 짐승 2호가 스폰(Spawn플레이어가 게임 내 월드에 생성되는 것)됐다. 초기 속도는 달마시안 포르쉐와 동일한 시속 378km. 삼삼칠이 등장하자 매드스피드의 시청자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그가 탑승한 새로운 머신의 모습을 보자, 시청자들이 처음엔 당황해서 흠칫했다가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눈먼 짐승 2호는 전체 길이가 20m를 넘는 거대한 크기였다. 페라리 스트라달레 세 대를 옆으로 연결해서 앞바퀴 부분을 만들고, 마찬가지로 스트라달레 네 대를 옆으로 연결해서 뒷바퀴 부분을 만들었다. 태호는 항상 이태리 슈퍼카를 이용해서 개조차량을 만들었는데, 그게 태호의 작품을 상징하는 시그니처였다.
엔진은 일곱 대의 차량들 위에 F119-PW-100 터보팬 엔진을 2기 올렸다. 이 엔진은 현재 지구상 최강의 전투기인 F-22 랩터의 제트엔진으로, 최고 속력 마하 2.4로 날게 해준다. 삼삼칠이 탑승한 운전석은 맨 앞에 있는 세 대의 스트라달레 중에 가운데 차에 있었다. 압도적인 크기의 몬스터 머신이 갑자기 도로 위에 나타나자, 시청자뿐만 아니라 같이 달리던 레이서들도 깜짝 놀랐다.
“엔진 점화.” 삼삼칠이 버튼을 힘차게 누르자 2기의 제트엔진이 동시에 불을 뿜었다. 눈먼 짐승 2호를 뒤에서 바짝 쫓아오던 10여 대의 차량이 그 화염 폭풍에 휩쓸려서 날아가버렸다. 몇 대는 뜨거운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폭발했다.
오랜만에 매드스피드에 접속해서 무한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하면, 처음엔 그 미친 속도를 감당하지 못해서 머신이 너무 빠르고 강력하다고 느껴진다. 하지만, 몇 분이 지나면 금세 익숙해져서 오히려 머신이 너무 느리다고, 충분히 빠르지 못하다고 느끼게 된다. 그래서 늘 더 강한 파워의 빠른 머신을 갈망하게 된다.
“현재 속도 시속 610km. 음속의 절반입니다.” “차체 상태는?” “완벽 그 자체.” “좋아, 이대로 계속 간다.” 눈먼 짐승 2호가 앞서가던 제2그룹을 순식간에 따라잡았다. 그대로 힘차게 계속 앞으로 치고 나가서 제2그룹의 최선두에 섰다.
현재 5등. 너무나 익숙하고 지긋지긋한 그 순위.
“선미야, 지금부터가 승부다. 준비됐어?” “엔진 온도 양호. 차체 상태 양호. 올 그린(All Green).” “좋았어. 간다!” 삼삼칠이 엔진 조작 스위치를 모두 올리고 엑셀을 풀로 밟았다. 제트엔진 2기의 노즐이 활짝 벌어지면서 최대출력으로 불을 뿜었다. 어마어마한 가속도가 삼삼칠을 뒤로 밀어붙였다. 그대로 운전석 의자에 파묻혀 들어갈 것 같았다. 주변이 빠르게 지나가면서 정면 가운데 부분으로 삼삼칠의 시야가 좁아졌다. 마치 터널 속에서 바라볼 때 터널 출구만 동그랗고 밝게 보이는 것 같았다. 레이서들에겐 이미 익숙한 터널비전(Tunnel Vision) 현상이었다.
“시속 1000km. 음속에 가까워집니다.” “끄으윽” 삼삼칠이 이를 악물고 살인적인 가속도를 버텼다. 생각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웠다. 그만큼 훨씬 더 즐거웠다. 그는 속도에 중독됐다. 속도가 그를 자극하고 쉴 새 없이 몰아붙였다. 만약, 그가 느린 삶을 살거나 단 한 번이라도 질주를 멈춘다면, 갑자기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공허가 찾아올지도 몰랐다. 그는 그런 두려움에 빠져있었다.
“시속 1224km. 음속돌파.” 눈먼 짐승 2호의 전면부에 원뿔모양으로 강력한 충격파가 발생했다. 동시에 ‘콰쾅!’ 하는 엄청난 폭발음이 터졌다. 음속돌파의 상징인 소닉붐(Sonic Boom) 현상이었다. 그 강렬한 모습에 매료된 매드스피드의 시청자들이 열광적으로 환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