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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Part2. 유전체 연구의 미래, 생물학에서 정밀의학으로

2015년 1월 20일,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은 한 해를 여는 국정연설인 ‘연두교서’를 통해 정밀의학의 시대를 열겠다고 발표했다. 인간 유전체 프로젝트(HGP)로 밝혀진 유전체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정밀 진단과 치료를 하는 새로운 의료 체계를 구축하겠다는 뜻이었다. HGP는 생물학을 넘어 의학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HGP 20년이 지난 지금, 유전체 의학의 최전선을 다투는 두 기업의 현장을 방문했다.

6년 걸릴 희귀 유전질환 진단을 한 달 만에

 

학교에서 또는 회사에서 평범한 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몸의 이상을 느낀다. 머리가 아프거나, 숨을 쉬기 힘들어 병원을 방문한다. 그러나 의사는 원인을 찾지 못하고, 며칠 쉬라고만 얘기한다. 증상은 심해지지만 어떤 병원에서도 원인을 찾지 못한다. 시간은 속절없이 흐른다. 마침내 국내 유병인구 2만 명이 안되는 희귀 질환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땐 첫 진단으로부터 6년 후. 이미 병세는 심각해진 상황이다.

 

위에 가정한 상황은 많은 희귀 질환 환자들이 겪는 고통이다. 희귀병 중에서도 약 80%를 차지하는 희귀 유전질환의 문제는 질병을 특정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사례가 적어 환자도 의사도 원인을 알기 힘들다. 질환명을 정확히 진단받는 데만 4~9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는 분석도 있다. doi: 10.1371/journal.pone.0265847

 

“질환 특정이 힘든 희귀 유전질환 환자의 경우, 유전체 전체를 분석하면 질환의 원인을 찾기가 훨씬 수월합니다. 이제는 전체 유전체를 대상으로 희귀질환 환자 검사를 진행하는 것이 글로벌 표준입니다.”

 

11월 9일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에서 만난 희귀 질환 유전체 검사 업체 쓰리빌리언 금창원 대표의 설명이다. 쓰리빌리언은 환자의 유전체 전체에서 병원성 돌연변이를 찾아 유전질환을 진단한다. ‘한 달 만에 희귀 유전질환을 진단한다’, 이것이 쓰리빌리언의 목표다.

 

유전자 염기서열을 읽어서 유전병을 판단하는 것은 이전부터 해왔던 일이다. 대표적인 예는 1996년부터 시작된 유전성 유방암 검사인 ‘브라카(BRCA) 검사’다. 브라카 검사는 유방암 발병에 관여하는 두 유전자인 BRCA1, BRCA2의 유전자 염기서열을 읽어내 병원성, 즉 병을 일으키는 돌연변이를 밝혀 낸다.

 

예전에는 몇몇 유전자에 한해서만 검사를 시행했다면, 최근에는 전체 유전체 염기서열을 분석한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이렇게 하면 7000종 이상의 희귀 질병을 한 번에 검사해 비용과 시간을 극적으로 절약할 수 있다.

 

금 대표는 “글로벌 표준 변이 병원석 해석 기준인 ACMG 가이드라인의 28개 기준을 통해 돌연변이의 병원성을 분석한다”고 설명했다. 이전에 보고된 병원성 돌연변이인지, 일반인에게서도 발견되는지, 보고되지 않았다면 단백질의 구조를 크게 변화시키는 ‘넌센스 돌연변이’인지 등을 하나하나 분석하는 식이다.

 

데이터 쌓일수록 유전체 의학 강해져

 

이렇게 전체 유전체 분석이 가능해진 가장 큰 요인은 유전체 분석 가격 하락이다. HGP 시절 한 명의 유전체 염기서열 분석을 위해 들인 돈은 3조 원에 달했다. 이 비용이 2015년 1인당 1000달러(약 130만원)의 벽을 돌파하더니 현재는 거의 200달러(약 26만원)까지 떨어졌다. 유전체 분석이 자기공명영상(MRI) 같은 의학 장비를 사용하는 비용만큼 저렴해지면서, 진정한 ‘유전체 의학’의 시대가 열릴 조건이 갖춰졌다.

 

저렴한 가격을 바탕으로 유전체 분석 데이터가 쌓이면서, 희귀 유전질환에 관한 새로운 데이터도 빠르게 모이고 있다. 금 대표는 “실제로 쓰리빌리언에서 진단한 희귀 유전질환의 60%가 기존에 보고되지 않은 새로운 돌연변이로 발생했다”고 밝혔다.

 

새롭게 발견된 희귀 유전질환 돌연변이는 미국 정부가 운영하는 ‘클린바(ClinVar)’ 라이브러리에 쌓여 전 세계의 생명공학 기업과 병원에 공유된다. 이렇게 데이터가 쌓일수록 전 세계 희귀 유전질환 환자들의 진단율이 높아지고, 진단율이 높아지면 희귀 유전질환을 판별할 AI 프로그램을 더 정확하게 만들 수 있다. 선순환이 지속되는 것이다.

 

세계 각국 정부와 연구 단체가 많은 유전체 분석 데이터를 쌓으려는 이유도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 변이를 찾아내기 위해서다. 스케일을 더 키워 수만, 수십만 명의 다양한 인종별 유전체를 분석하면 특정 인종에서 많이 나타나는 유전적 변이도 찾아낼 수 있다.

 

2023년 5월 10일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실린 ‘인간 범유전체(Human pangenome)’ 연구가 이러한 노력의 결실이다. doi: 10.1038/s41586-023-05896-x 국제 인간 범유전체 참조 지도 컨소시엄(HPRC) 공동 연구팀은 다양한 유전적 배경을 가진 47명의 유전체를 분석해 ‘참조 범유전체’를 만들었다. 그만큼 다양한 유전적 변이를 참조 범유전체를 통해 분석할 수 있다.

 

세계 각국의 유전체 데이터베이스 설립 노력도 지속되고 있다. 영국 정부는 2006년부터 ‘UK 바이오뱅크’ 사업을 통해 50만 명의 유전체를 분석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2022년에는 이중 15만 명의 유전체 정보를 발표하기도 했다. doi: 10.1038/s41586-022-04965-x 2022년 11월 기준, UK 바이오뱅크의 자료를 활용해 나온 논문만 6000편에 달한다.

 

한국은 2024년부터 ‘국가통합 바이오 빅데이터 구축 사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6000억 원이 넘는 예산을 투입해 최종 100만 명의 유전체 등을 분석하는 것이 목표다. 이렇게 정밀의학이 실현되면 미래 고령화 사회가 부담할 의료 비용도 획기적으로 줄어든다. 치료에서 예방 의학으로 가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HGP가 열어젖힌 문이다. 한 명의 유전체로는 부족하다. 많은 유전체 자료가 모일수록 유전체 의학의 힘은 강해진다. 아직은 모아야 할 자료가 많다. “지금까지 약 1만 개의 희귀 질환이 발견됐고, 그 중 80%가 유전질환에 속합니다. 지금도 매년 새로운 희귀 유전질환이 250~300개씩 발견되고 있어요. 앞으로도 유전체 의학과 진단 분야는 꾸준히 성장할 겁니다.” 금 대표의 말이다.

“유전체 분석이 앞으로는 사회를 바꿀 것”

 

많은 독자들에게 희귀 유전질환 진단 서비스는 먼 이야기로 들릴 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전체 분석은 생각보다 훨씬 우리 삶 가까이에 다가와있다. 최근 SNS 등에서 이슈가 되는 ‘유전자 검사’가 한 예다.

 

한국의 유전체 분석 기업인 마크로젠은 지난 6월 28일 유전자 검사 플랫폼 ‘젠톡(GenTok)’을 출시했다. 젠톡은 식습관, 운동 능력, 비만, 피부와 모발 관리 등 생활과 밀접한 유전 요인들을 검사해준다. DNA칩 위에 원하는 특정 DNA의 돌연변이를 감지할 수 있는 염기서열을 부착해 검사자의 DNA와 반응시키는 것이다. 스마트폰 앱으로 신청 후 검사 키트에 타액을 담아 보내면, 열흘 정도 지나 앱을 통해 검사 결과를 받아볼 수 있다.

 

“사람들이 유전체 분석 기술을 친숙하고 가깝게 느꼈으면 하는 바람에서 ‘젠톡’ 서비스를 만들었습니다.” 11월 2일, 마크로젠 본사에서 만난 서정선 마크로젠 회장은 젠톡 서비스의 취지를 이렇게 밝혔다. 서 회장은 서울대 의대 교수 시절, 한국인 유전체 ‘AK1’ 분석 결과를 네이처에 발표하는 등 한국인 유전체 연구의 기틀을 닦아왔다. 그가 만든 생명공학 기업인 마크로젠은 전 세계에서 보내온 유전체 시료를 분석하며 성장했다. 젠톡은 연구실과 병원에 국한된 유전체 분석을 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게끔 넓히려는 서 회장의 시도다.

 

“미국에서 유전체학은 치료보다는 조상 찾기 등의 서비스로 먼저 소개됐습니다. 거대 생명공학 기업으로 성장한 미국의 ‘23andme’도 주 사업 수단은 조상 찾기였죠.” 서 회장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유전체 분석을 저렴하고 재미있게 진행할 수 있다면, 한국에서도 찾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마지막으로 서 회장에게 유전체학의 미래에 대해 물었다. 그는 2003년 4월, 프랜시스 콜린스 당시 미국 국립유전체연구소(NHGRI) 소장이 동료들과 네이처에 쓴 “유전체 연구의 미래에 대한 비전”이라는 글을 인용했다. doi: 10.1038/nature01626

 

“콜린스 소장은 2003년 HGP를 완료한 후 유전체 연구의 청사진을 발표합니다. HGP가 만든 인간 유전체가 먼저 생물학을, 그 다음엔 의학을, 나중에는 사회에 혁명적 변화를 일으킬 거라는 내용이었죠. 지금까지의 유전체학은 생물학을 바꿨고, 지금은 의학을 바꾸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사회를 바꾸게 되겠죠. 많은 분들이 유전자를 어렵거나 복잡한 것으로 느끼지 않는다면, 이런 변화가 더 빠르게 오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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