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저는 책을 통해 세상을 알아가는 과정이 참 즐거웠습니다. 소설, 만화 가리지 않고 읽었지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호기심을 해결해주는 책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무지개는 왜 생기는지, 배는 어떻게 바다에 뜨고, 비행기는 어떻게 하늘을 나는지 초등학생, 중학생 수준에 맞춰 설명해주는 책을 찾아보기가 어려웠죠.
그러던 중 서점에서 어린이 과학동아를 접했습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과학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재미에 푹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학교에서 장래희망을 조사할 때 과학자, 연구원이라고 적기 시작한 것도 그래서였습니다. 이렇게 장래희망을 정하니, 과학고에 진학하고 싶다는 목표도 생겼습니다. 비록 과학고 진학은 실패했지만 준비하는 과정에서 중학교에선 접하기 힘든 범위의 물리, 화학을 배우며 세상 구석구석을 움직이는 과학의 원리들을 더 깊이 익힐 수 있었습니다.
과학동아에서 찾은 진로의 이정표
일반고에 진학해선 내신 관리와 모의고사 같은 대학 진학을 위한 공부를 하느라, 과학적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이해하며 즐거워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웠습니다. 그런 시절에 과학동아는 과학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사고력을 키워준 길잡이 중 하나였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모의고사 풀이에 지친 야간 자율학습시간, 잠시 들춰보는 과학동아는 만화책처럼 재미있었죠. 과학동아에서 심도 있게 다룬 내용들이 당시 제 수준에서 이해가 될 듯 말 듯할 때는 오히려 이해해보고 싶다는 승부욕도 생겼습니다. 흥미 있는 기사는 여러 번 반복해서 읽으며 사고력을 키울 수 있었고, 결국 내용의 절반이라도 이해할 때의 그 성취감이 좋았죠. 그래서 고등학교 3년 동안 과학동아를 정기구독했습니다. 그 밖에도 친구들과 과학동아리를 만들어 간단한 실험도 해보고, KAIST 사이버영재학교에 올라온 문제 풀이에 도전하거나 KAIST 창의력글로벌리더십 캠프에 참여하는 등 교과 과정 외의 다양한 과학 활동을 스스로 찾아다녔습니다.
세부 진로는 고등학교 2학년 무렵 정했습니다. 그 전에도 세상에 도움이 되는 뭔가를 하고 싶다는 추상적인 목표는 갖고 있었죠. 그러다 과학동아에서 핵융합과 한국형 핵융합연구로인 KSTAR에 대한 기사를 우연히 접했습니다. 그때 ‘한국이 핵융합 연구를 선도하고 있구나, 핵융합을 연구한다면 핵융합발전소 현실화에 조금이나마 공헌할 수 있지 않을까? 핵융합발전소에서 전기를 많이 생산하면 세상에 큰 도움이 되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원자핵공학과를 입시의 목표로 잡았고 서울대 원자핵공학과에 진학했습니다.
대학에서 플라즈마와 핵융합 개론 등을 배우며 핵융합 분야에 대한 관심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같은 분야 대학원에 들어가 핵융합 이론과 플라즈마 거동 등을 좀 더 심도있게 배운 이유였죠. 하지만 공부하면 할수록 머리로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계산과 통제가 어려운 핵융합 플라즈마 거동을 연구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그렇게 찾은 길이 플라즈마 진단입니다. 핵융합 플라즈마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졌는지 진단하려면, 플라즈마 내부 위치에 따른 전자의 온도와 밀도 측정이 중요합니다. 저는 톰슨산란진단을 이용해 플라즈마 진단을 수행했습니다. 톰슨산란진단은 레이저를 전자에 쏘았을 때 이에 반응해 방출하는 스펙트럼으로 플라즈마 전자의 온도와 밀도를 측정하는 방식입니다.
지도교수이신 황용석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님의 가르침과 선배 김영기 한국핵융합에너지연구원 선임연구원의 도움 덕분에, 대학원에서 첫 3년은 플라즈마 레이저 관련 기술들을 익히며 전자의 밀도와 온도를 더 정확히 측정할 방법을 찾는 데 집중했습니다. 그 결과, 대학원 실험실에서 직면할 수 있는 다양한 공학적 문제를 해결하며 서울대 핵융합 플라즈마 발생장치 VEST에서 높은 신뢰도로 플라즈마 전자의 온도와 밀도를 진단해낼 수 있었죠. 그렇게 남은 대학원 생활도 순조롭게 흘러갈 줄 알았습니다.
새로운 연구와 새로운 분야로 나아가기
난관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닥쳤습니다. 대학 시절부터 박사과정을 염두에 뒀기에 군대를 가지 않고 바로 대학원에 진학해, 박사과정 전문연구요원으로 대체복무를 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 무렵 저와 같은 학생들이 많았는지 박사과정 전문연구요원의 경쟁률이 치열해졌고 선발되려면 상당히 높은 수준의 영어점수가 필요했습니다. 부끄럽게도 영어 실력이 부족해 여기서 탈락했죠.
하지만 연구를 꼭 계속하고 싶었습니다. 절실한 마음으로, 대학원에서 배운 레이저를 활용한 진단 기술과 플라즈마 지식을 살릴 방법을 찾았습니다. 결국 기초과학연구원(IBS) 초강력 레이저과학 연구단에서 전문연구요원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레이저와 플라즈마에 대한 지식을 공유하지만, 초강력 레이저과학 연구단에서 하는 연구는 대학원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처음부터 배워가며 새로운 연구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초강력 레이저과학 연구단에서의 연구는 4PW(페타와트·1000조W)급 펨토초(1000조 분의 1초) 레이저로 입자를 가속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중에서도 레이저로 전자를 가속하고 이 가속된 전자로 엑스선, 감마선 등을 발생시키는 연구를 했습니다. 펨토초 레이저로 가속한 전자에 펨토초 레이저를 충돌시켜 전자가 아주 강한 레이저 전기장을 느끼는 상황을 연출합니다. 이때 발생 가능한 강력장 양자전기역학 현상 중 하나인 비선형 컴프톤 산란이 중심 주제였습니다. 한 마디로 극한의 전기장을 실험적으로 구현하는 거죠. 남창희 초강력 레이저과학 연구단 단장님의 지도 아래 비선형 컴프톤 산란 실험에 3년간 매진한 결과, 박사 학위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박사 학위를 마무리하며 순수한 기초과학 탐구보다 공학적 문제 해결이 적성에 더 맞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복잡한 수식을 전개하고 이해하는 것보다 광학계(미러, 렌즈)를 설계하고 더 정밀하게 정렬해서 목표했던 바를 달성할 때 더 큰 보람을 느꼈으니까요.
현재는 제가 지금까지 익힌 광학, 전자빔, 엑스선·감마선, 플라즈마 기반 기술과 지식을 활용해 공학적 적성을 더욱 살릴 수 있는 산업계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광학 또는 전자빔 기반의 진단 계측 시스템을 개선하고 최적화하는 기술 등의 발전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미래의 과학을 발전시킬 모두의 잠재력
돌이켜보면 지금의 저는 고등학생 때 상상하던 모습과는 사뭇 다릅니다. 과학 기술 분야에 종사하고 있지만 활동 분야는 꿈꾸던 핵융합 플라즈마에서 레이저 플라즈마로 바뀌었고, 앞으로는 산업계에서 과학자보다는 공학자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역량을 발휘할 계획입니다.
지금까지 연구자의 길을 걸어오며 고비와 한계도 있었지만, 제가 좋아하는 과학으로 인류에 보탬이 되겠다는 삶의 목표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 덕분에 계속 새로운 길과 적성을 찾으며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까닭에 과학이 좋아 과학동아를 애독하는 청소년 독자들께도 여러분 모두가 앞으로의 과학 발전에 기여할 잠재력이 있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현대 과학은 첨단 장비들과 수많은 공학자, 기술자의 노력 위에서 발전하고 있습니다. 꼭 과학고를 가야먄, 혹은 학업 성적이 좋아야만 훌륭한 과학자나 연구원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광학계를 공학적, 기술적으로 더 정교하고 균일하게 가공하는 역량이 있다면, 광학에 바탕을 둔 과학 발전에 아주 크게 기여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가능성을 품은 여러분이 과학동아를 통해 관심 분야와 적성을 찾아서, 한국 과학계를 다방면으로 발전시킬 훌륭한 과학자, 공학자, 기술자로 성장하길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