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세운 동명왕, 백제 온조왕, 알에서 나온 혁거세’.
초등학생 때 염불 외듯이 부른 노래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의 가사입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혁거세는 신라를 건국한 초대 왕, 박혁거세로 알에서 태어난 인물이라고 알려져 있죠. 대대손손 설화로 전해지는 ‘알’이 미래에 다시 등장했습니다.
바로 영화 ‘팟 제너레이션’ 속에서 말입니다.
10월 3일 개봉한 ‘팟 제너레이션’은 인공 자궁을 이용해 임신과 출산이 가능한 미래를 그리는 영화입니다. 이곳에서 많은 여성들은 승진을 위해, 신체의 변화를 막기 위해, 그 밖의 다양한 이유로 임신과 출산을 인공 자궁 ‘팟’에 맡기려고 합니다.
영화의 주인공 레이첼은 거대 테크회사의 임원으로 승진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그토록 얻기 힘들다는 자궁센터의 예약 기회도 함께 거머쥐게 되죠. 흙과 자연을 사랑하는 식물학자인 남편 앨비는 이 모든 과정이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하지만, 아내의 입장을 백번 이해하고 팟 출산을 감행하기로 결정합니다. 과연 레이첼과 앨비의 인공 출산은 무사히 이뤄질까요?
현실 속 인공 자궁은 어떤 모습일까?
영화 속 인공 자궁을 현재 기술로 그대로 구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의학의 발전으로 체외에서 난자와 정자를 수정시키는 시험관 아기 기술은 개발됐지만, 결국은 수정된 배아를 산모의 자궁에 착상시켜 키워냅니다. 권하얀 신촌세브란스 산부인과 교수는 “자궁은 다른 장기들보다도 체내 시스템과의 상호작용이 정말 중요한 기관”이라며 “아기가 성장하는 데 필요한 호르몬이나 대사 작용 등을 모두 인공적으로 구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본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인공 자궁 연구는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9월 14일 국제학술지 ‘네이처’에는 미국 필라델피아 아동병원(CHOP) 연구원들이 22~28주에 너무 이르게 태어난 미숙아를 대상으로 인공 자궁 임상시험을 승인받고자 신청했다는 소식이 실렸습니다. doi: 10.1038/d41586-023-02901-1 여기서 말하는 인공 자궁은 양수로 가득 찬 자궁과 유사한 환경을 만들어 미숙아가 폐 성숙이나 뇌 발달 등을 하는 데 도움을 주는 장비입니다.
CHOP 연구원들은 2017년, 사람으로 치면 28주 이전에 태어난 새끼 양을 인공 자궁에서 4주간 키우는 데 성공한 바 있습니다. doi: 10.1038/ncomms15112 당시 연구진은 인공 자궁에서 자란 새끼 양의 혈액이 안정적으로 순환했으며, 산소도 정상적으로 공급됐다고 밝혔습니다. 이후 이 인공 자궁을 사람에 맞게 개선했고, 올해 드디어 인간에 대한 임상시험을 신청한 것입니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9월 19~20일 독립 자문단 회의를 소집해, 규제와 윤리적 고려 사항, 기술적 안전성 등을 검토했습니다. 만약 FDA가 이를 승인한다면 미숙아가 인공 자궁을 이용하는 첫 사례가 될 전망입니다.
2017년 CHOP 연구진이 논문과 함께 공개한 영상을 보면 인공 자궁은 영화에서처럼 동그란 ‘알’ 형태가 아니라 비닐백 형태의 ‘바이오백’입니다. 그 안에는 양수와 유사한 전해질 용액이 채워져 있고, 탯줄의 혈관은 산소를 공급하는 외부 장치에 연결됩니다. 논문에 따르면 연구진은 혈관을 통해 산소뿐만 아니라 탄수화물, 아미노산, 지질 등 새끼 양이 성장하는 데 필요한 각종 영양소를 제공했습니다.
연구진은 새끼 양이 인공 자궁에서 자라는 동안 상태를 쉽게 확인하기 위해 바이오백을 투명하게 만들었으며, 주기적으로 새끼 양의 움직임, 호흡 상태, 수면 주기를 살피고, 신경학적인 발달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근전도 검사를 실시해 새끼 양이 정상적으로 발달하고 있는지를 확인했습니다. 동일한 임신 기간 엄마 자궁에서 자란 양과 비교한 결과, 수면 주기 등은 모두 동일하게 나타났습니다.
한편 같은 해 조지 마샬리스카 미국 미시간대 의대 교수팀은 ‘인공 태반’을 개발해 새끼 양을 16일간 살렸다고 발표했습니다. doi:10.1016/j.jpedsurg.2018.06.001 미시간대 연구진이 개발한 인공 태반의 기능은 CHOP 연구진의 인공 자궁과 유사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미시간대의 인공 태반은 ‘폐 발달’에 좀 더 초점을 맞췄습니다. 새끼 양의 폐에 양수와 유사한 액체를 넣어 외부와의 압력을 유지하는 시스템입니다. 연구진은 논문에서 “현재 의료 시스템에서는 폐가 덜 발달한 새끼 양에게 기계적인 호흡을 시키는데, 이 경우 자칫 폐가 손상되거나 폐 발달을 저해하는 경우가 생긴다”고 언급했습니다.
인공 자궁에서 자란 아이, 행복할 수 있을까?
영화에서 자궁센터를 방문한 한 부모는 이런 말을 합니다.
“제 조카가 자궁센터에서 태어났는데 꿈을 꾼 적이 없어요.”
인공 자궁이 만약 개발된다고 해도 그 아이가 행복할 수 있을까요? 권 교수는 “태반을 통해 태아의 발달을 돕는 다양한 호르몬이 전달된다”며 “(자궁 속 아기가) 단순히 크기가 커지고 장기가 정상적으로 자란다고 해서 잘 성장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했습니다. 즉 향후 뇌 발달이나 정서적 성장을 수년에 걸쳐 추적 관찰해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학계에서 인공 자궁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점 중 하나는 아이와 산모의 유대감입니다. 그간 많은 연구를 통해 임신 과정 동안 산모의 뇌 변화가 일어나고, 이는 아이와의 유대감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2016년 엘세리네 호크제마 네덜란드 라이덴대 교수팀은 임신 기간 동안 산모의 뇌 변화가 일어나고, 이는 출산 후 약 2년간 유지된다는 연구를 발표했습니다. doi: 10.1038/nn.4458 연구진은 임신 전후의 산모를 대상으로 뇌 스캔을 한 결과 신경세포가 밀집돼 있는 회백질 부위가 크게 감소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 차이는 컴퓨터 알고리즘이 회백질 영역만 보고도 임신 중인 여성을 구분해 낼 수 있을 정도로 컸습니다. 보통 회백질이 감소하는 것은 뇌에 부정적인 변화라고 보지만, 연구진은 감소 패턴에 따라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연구진은 임신 중에 회백질이 감소하는 이유는 명확하진 않지만 여성의 두뇌가 아기의 필요에 반응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전문화되기 때문일 수 있다고 추정했습니다.
호크제마 교수팀은 이와 같은 연구를 발전시켜 지난해 산모 뇌의 변화가 아기와의 유대감 강화와 관련이 있다는 논문을 국제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에 발표했습니다. doi:s41467-022-33884-8 연구진은 특히 쉬고 있을 때의 뇌 상태인 ‘DMN(Default Mode Network)’에서 뇌 변화 정도와 유대감 간의 관계를 파악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연구진은 임신 중 DMN 상태에서 뇌 네트워크 변화가 크고 강할수록 아기와의 유대감도 강하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호크제마 교수는 ‘사이언티픽 아메리칸’과의 인터뷰에서 “아기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을 억제하고 긍정적인 행동을 촉진하는 것과 (뇌 변화가) 연관성이 있을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인공 자궁은 아직까지 많은 윤리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직 사례가 많지 않다 보니 의학적인 처치로 살 수 있는 아기를 안전성이 확인되지 않은 인공 자궁을 통해 키우는 게 맞느냐는 지적이 학계에서는 계속 제기되고 있습니다.
영화처럼 완전하게 자궁을 대체할 수 있는 ‘팟’의 경우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겠죠. 임신과 출산의 과정이 과학적으로 명백하게 밝혀지지 않아서 아이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서도 완전히 알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번 영화가 인공 자궁이 가지고 있는 많은 사회적 함의를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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