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끼잉, 하는 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 깜빡 낮잠에라도 빠졌던 걸까?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옆에 놓인 생수병을 들어 물을 마셨다. 덕구가 발치에 깔린 러그에서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덕구는 나의 반려견이다. 어미개와 함께 보호소에 버려졌던 녀석을 데려온 게 벌써 십 년 전이니, 우리는 함께 나이를 먹어가고 있는 셈이다.

“덕구 잘 잤어? 이리 온.”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지만, 왠지 덕구는 어두운 눈빛을 풀지 않고 쭈뼛대며 보고만 있었다. 문득 밖에서 시끄러운 음악이 여전히 들린다는 것을 알았다.

“오호, 밥때가 됐다, 이거지?”

나는 주방으로 가서 덕구의 밥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프리미엄 연어 사료에 닭가슴살 토핑을 얹은 것이다. 보호소 출신답지 않게 어려서부터 입맛이 까다로웠던 덕구는, 반드시 갓 구운 닭가슴살을 사료에 얹어줘야 밥을 먹는다. 덕구의 밥그릇 옆에 새로 따른 물까지 준비하고 나서야, 내 점심을 차렸다. 은박 포장 안에 든 동결건조 음식에 뜨거운 물만 부으면 되는, 간결한 식사였다. 우적우적 밥을 씹는 동안, 다시 바깥은 조용해졌다. ‘퍼펙트케어’의 점심 식사 알람서비스가 종료된 것이다.

밥을 다 먹고 나서 그릇을 씻어 건조대에 올려놨다. 덕구는 어느새 자기 자리로 돌아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창밖은 조용했다. 조용하다 못해 적막했다.

사방을 둘러봐도 보이는 거라곤 오직 황톳빛 지평선뿐. 아, 물론 정말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다. 정확하게 사각으로 구획된 공간에 띄엄띄엄 집들이 늘어서 있긴 했다. 집들은 저마다 출입구를 같은 방향으로 한 채 창문을 꼭 닫고 있었다. 마당은 모두 같은 크기인데, 담이 낮아서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덕구와 산책을 하며, 각 집의 마당을 들여다본 적이 있다. 보았다. 현관 앞에 매실나무가 한 그루씩 서 있고 그 아래 작은 화단의 풀이 반쯤 시든 것까지, 모든 게 우리집과 똑같았다. 장독대엔 뚜껑이 닫힌 항아리가 두어 개 놓여 있지만, 그 안에 진짜 된장이나 고추장이 담겨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긴 고추장이나 된장이 들었다손 쳐도, 먹을 수 없을 만큼 곰팡이가 가득 피어 있지 않을까. 내가 알기론, 여기선 아무도 식사를 손수 준비하지 않는다. 좀 전에 먹은 것 같은 전투식량(우리는 다들 이 맛없는 밀키트를 ‘전투식량’이라고 부른다. 오래전 군대에서 배급받았던 것처럼, 은박 포장 안에 뜨거운 물만 부으면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이 사흘에 한 번, 아홉 포씩 공급되는 덕분이다.

하긴, 집에서 뭔가를 요리하고 싶어도, 그건 불가능하다. 이곳엔 가게가 없고, 그 흔한 편의점도 없으며, 어딘가 꽤 떨어진 마을에 마트가 있다고는 하나, 거기까지 갈 교통수단 또한 없으니까. 여긴 버스도 다니지 않고 택시도 오지 않는다. 물론 부를 일도 없지만 말이다. 그들(사흘에 한 번씩 밀키트를 배송하고 우리에게 여러 쓸모 있는 강의나 신체활동 등을 알려주는 사람들이다)은, 이곳엔 모든 게 다 갖춰져 있다고 했다. “그리고 어르신, 혹시라도 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주시고요.” 매번, 밀키트를 갖다줄 때마다 공손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싹싹하게 말했다.

이쯤에서 짐작하겠지만, 이곳은 특수한 마을이다. ‘마을’이란 단어가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간 그렇다. ‘퍼펙트케어’라는 회사가 보건복지부와 손을 잡고 만든 보호시설이라는 것이다. ‘~라는 것이다’라고 말한 건, 나 역시 그렇게 전해 들은 게 전부이기 때문이다. 나도 그렇고 옆집에 사는 박도 그렇고, 우리는 다들, 정확히 어떻게 해서 이 마을에 들어와 살게 된 건지 잘 모른다. 아마 여러분도 마을 입구에 있는 커다란 입간판을 보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으리라. 거기엔, 다음과 같이 새겨진 간판이 황무지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며 끼익끼익 소리를 내고 있다. <;피치랜드-고령 치매 환자 특수 보호 구역. 관계자 외 출입금지>;

그렇다. 여기 사는 우리는 치매에 걸린 데다 나이까지 많다. 그러니 뭘 기억하고 있겠는가. 아니, 뭔가를 기억한들, 그게 정말 제대로 된 기억인지조차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오죽하면 밥 먹는 걸 잊을까봐 하루 세 번 사이렌이 울리겠는가 말이다.

집 현관엔 낡고 빛바랜 광고지 한 장이 꽂혀 있는데, 나는 심심할 때마다 그걸 꺼내 읽는다. 거기엔 복숭아꽃이 만발한 마을 그림이 있고, 맨 위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평화로운 마을, 피치랜드를 아시나요? 오래전 도연명이 꿈꿨던 불로불사의 공간 무릉도원을, 의료서비스 전문기업 퍼펙트케어와 함께 누려보세요.”

이제는 완전히 하얗게 변해버린 사진 속 복숭아꽃을 쓰다듬는데,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보니, 박이 반려 거북인 령을 안고 서 있었다.

“뭐해? 아직 외출 준비도 안 하고?”

박이 다짜고짜 외치는 바람에 나는 당황했다. 외출이라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박은 혀를 끌끌 차며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덕구가 천천히 나와 박에게 꼬리를 흔들었다. 령은 박의 품에 안긴 채 짧고 뭉툭한 네 발을 버둥거리고 있었다.

“오늘 센터에서 교육 오는 날이잖아.”

그제야 아차, 싶었다. 사흘에 한 번 있는 교육은 언제나 미리 공지되고, 그래도 잊고 마는 거주민이 있기에 손목에 채워진 워치에도 계속 알림이 뜬다. 그런데도 이렇게 까맣게 잊고 있었다니. 겉옷을 입는데, 자꾸 손이 떨렸다. 혹시 내 증세는 점점 악화되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최근 들어 모든 게 다 안개에 휩싸인 듯 느껴진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여기는 경증 치매 환자의 거주 시설이므로, 증세가 안 좋아지면 마을에서 쫓겨나는 건 물론이거니와 덕구와도 영영 이별해야한다. 중증 치매 노인이 지낼 곳은, 사방이 벽으로 막힌 특수 요양원뿐이니까.

“죽었잖아.”

떨리는 손으로 단추를 채우는데, 박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라고? 누가?”

내가 묻자 박이 등 뒤로 현관문을 닫으며 작게 속삭였다.

“원이 죽었다고. 오늘 아침에 영구차가 와서 실어 가던데, 못 봤어?”

원이라면, 박의 집에서 두 블록 건너에 살던 사람 아닌가. 문득 원을 언제 마지막으로 봤는지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엊그제였나. 덕구와 함께 마을 길을 걸을 때, 마당 안에서 쭈그리고 앉아 잡초를 뽑는 모습을 본 것 같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그날, 원 옆에 응당 있어야 할 늙은 코커스패니얼종의 개가 보이지 않았던 것도 같다. 아니, 잠깐만. 그런데 그때 난 원에게 뭐라고 말했지? ‘개는 어디 있나요?’라고 물었던가. 그러자 원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지. 우리 해피 말하는 건가요? 해피는 엊그제 무지개다리를 건넜어요. 벌써 열다섯 살이니, 갈 때가 되긴 했지요.

“원이 죽은 거일종의 펫로스 증후군일까?”

혼잣말처럼 중얼대는데, 박이 주머니를 뒤지더니 꼬깃꼬깃 접은 쪽지를 펼쳐 내밀었다.

‘종이 아닌가? 어디서 구했어?’라고 물으려다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건 종이가 아니라 밀키트 포장지 안쪽에서 도려낸 얇은 은박지였다.

“조용히 하고, 그냥 읽어보라니까.”

박의 말에, 나는 돋보기를 꺼내 들여다보았다. 거기엔 박이 뾰족한 뭔가로 이런 글자들을 새겨놓았다.

진돌(개)→김→보리(개)→오→샤미(고양이)→윤→해피(개)→원→?

“이게 뭔데?”

내가 물었지만 박은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현관문에 달린 렌즈 구멍으로 누구인지 확인도 하기 전에, 벌써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센터 직원이잖아. 내가 여기 있는 걸 알면, 벌점이 나올 텐데.”

박은 몸을 숨길 곳을 찾았지만, 문이 먼저 열렸다. 밖엔 유니폼을 입은 퍼펙트케어 직원이 정자세로 서 있었다.

“어르신들, 여기서 뭘 하고 계신가요? 얼른 마을회관에 모이셔야죠. 그리고 박 어르신, 이런 식의 방문이 금지되어 있다는 건 잘 아실 텐데요. 누차 말씀드렸다시피, 기억이 온전치 못한 분들 사이에서 생길 수 있는 온갖 불미스러운 사건을 미리 예방하기 위해 만든 규칙이니,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이번엔 그냥 넘어가겠지만, 다음번엔 저도 어쩔 수 없다고요.”

박은 알았다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는 거북이 령을 안고, 나는 덕구의 하네스줄을 끌며 마을회관으로 향했다. 직원은 두어 걸음 떨어진 채 앞서 걷고 있었다. 눈치를 보던 박이 또다시 낮게 속삭였다.

“어느 날부턴가, 난 이상하다는 걸 느꼈어. 자넨 정말 모르겠냐고. 봐, 우리가 키우는 반려동물이 죽으면 기다린 것처럼 그 주인이 세상을 떠난단 말이야. 처음엔 그저 우연의 일치겠거니 했는데, 벌써 네 번째 이런 일이 생기니까.”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과연 이 동네에 김이라는 사람이 살기는 했나? 그가 정말로 진돌이라는 개를 키우기는 했고?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대체 박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단 말인가. 박이 여기 입소해 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그의 기억 능력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어쩌면 김이나 윤, 오 같은 이들은 박의 상상 속에서 태어난 존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박은 내 말을 듣더니 눈썹을 모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아니야. 정말 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니까. 왜냐하면이건 자네에게만 털어놓는 건데, 사실 난 기록을 하고 있거든. 여기 온 뒤로 틈틈이 다 적었단 말이야.”

그의 대답에, 나는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기록이라고 했어?”

그러면서 동시에, 앞에 가는 직원이 우리 말을 엿듣진 않는지 재빨리 살폈지만, 그는 앞만 보며 걸을 뿐이었다.

 

처음 이 마을에 입주했을 때―그게 언제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이곳에 꽤 많은 금기사항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중 하나가 기록의 금지였는데, 퍼펙트케어 직원의 설명에 따르면, 기록은 오히려 치매 환자의 두뇌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기록 자체에 아무런 신빙성이 없어요. 어떤 어르신은 불과 한 시간 전 일도 기억 못 하는데, 그런 분이 뭔가를 기록한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사실 전에 그와 관련된 사고도 있었고요. 순전히 자기만의 상상으로 뭔가를 기록해온 노인네가, 아니 어르신이, 결국 그게 다 진짜라는 망상에 빠져 마을을 탈출한 거죠. 그분이 사라졌다는 걸 알고 보안팀이 며칠간 일대를 수색했지만, 어르신을 찾을 순 없었어요. 저기 바깥, 황무지에서 길을 잃고 만 거지요. 그로부터 일 년쯤 지나서, 마을로 들어오는 계곡 입구에서 시체가 하나 떠올랐어요. 정확히는 백골이라고 해야 옳겠군요. 그래요, 자신의 망상을 모두 사실이라 믿었던 이의 비참한 말로라고 할까요. 어쨌든, 그러므로 절대 기록은 안 됩니다. 아무것도요. 그림이나 글도, 다 금지예요. 왜냐하면, 우리에겐 어르신들을 안전하게 보호할 의무가 있으니까요. 아시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만약 금기사항을 어겼다가 발각될 시 곧바로 퇴소 조치를 받아들이겠다는 각서에 서명까지 했다. 그들은, 내가 금기사항을 잊지 않도록 현관문 옆 벽에 각서의 사본을 붙여두기까지 했다. 그런데 박이 몰래 기록을 하고 있다니. 규칙을 어긴 것에 대한 걱정보다도, 박이 망상에 빠져 무모한 짓을 저지를지도 모른단 생각에 더 불안했다. 그 또한 마을 밖으로 나가 황무지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건 아닐까.

나는 박에게 경고하듯 중얼거렸다.

“조심하라고. 기록 같은 걸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잖아? 돌아가면 당장 다 없애버리는 게 좋을 거야. 여기서 쫓겨나면, 자네 역시 갈 곳 하나 없는 신세 아닌가?”

내 말에, 박은 대답도 없이 회관으로 먼저 들어갔다.

안에는 벌써 대부분의 거주민이 모여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옆엔 각자가 키우는 개나 고양이, 새, 거북 같은 동물들이 웅크린 채였다. 덕구는 얌전히 나를 따라오더니, 발치에 놔준 조그만 방석 위에 몸을 틀었다. 이곳 거주민들 사이에 미약하나마 공감대 같은 게 형성되어 있다면, 그건 백 퍼센트 반려동물에 관한 것이리라. 신기하게도 여기 입소한 사람들은 모두 한 마리 이상의 동물을 키웠고, 그게 서로 간의 유일한 대화 소재였으니까.

 

교육은 어두워져서야 끝났고, 나는 잠든 덕구를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박 또한 거북이를 등에 업다시피 한 채 걸었다. 우리는, 가로등 불이 켜진 길목에서 인사를 나눴다.

“그럼, 또”라고 말을 얼버무린 것은, 여기선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딱히 만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새 잠에서 깬 덕구를 마당에 내려놓는데, 뒤에서 갑자기 박이 소리쳐 불렀다.

“잠깐만 이리 와봐. 꼭 할 말이 있어.”

가까이 다가가니, 박이 작게 속삭였다.

“아까 그 직원, 아무래도 그때 그 사람 같다니까. 나한테 언젠가 오래전 왔던 사람. 와서 이상한 말을 하고 갔다고. 정말이야. 내가 죽으면 령을 어떡할 거냐면서. 무슨 서류에 사인하라고 했어. 그럼 자기네가 거북이를 책임져준다는 거지. 그래, 기억나. 분명 그 사람이었어. 그때 내가 서류에 사인했는지 안 했는지는 몰라. 어차피 기억한다 해도, 그게 진짜라는 보장도 없고. 다만 저놈 얼굴이 암만 봐도 낯익어. 그리고 말이야, 이건 내 가설인데, 만약 그렇다면 이 모든 게 설명된다니까.”

알 수 없는 얘기를 열정적으로 떠드는 박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이상했다. 누렇게 뜬 것 같기도 하고 창백해진 것 같기도 했다. 얼핏 보면 마네킹처럼 기묘하게 매끄러워 보이기도 했지만, 그건 아마도 가로등 조명 탓일 거다.

이번에도 그는 주머니에서 조그맣게 접은 쪽지를 꺼냈다.

“들어가서 읽어봐. 어쩌면 이게 우리의 마지막 대화일 수도 있으니까.”

이런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긴 채, 박은 거북을 안고 가로등 불빛 밖으로 걸어갔다.

그의 집 대문이 여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한동안 마당에 서 있었다. 덕구는 뭐가 그리 기분 좋은지 마당 여기저기를 뛰어다녔다. 급기야는 매실나무 밑을 앞발로 마구 파더니 흙더미에서 뒹굴기까지 했다. 흙투성이가 된 녀석을 데리고 현관문을 여는데, 어디선가 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모퉁이 전봇대 뒤에 누군가가 서 있다가 스르륵 자취를 감추는 듯 보였지만, 거기까지 가서 확인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다만 그 실루엣이 아까의 그 직원을 닮았다는 어렴풋한 느낌이 머리를 스칠 뿐이었다.

 

집으로 들어와 덕구에게 밥을 먹이고 씻긴 다음, 드라이룸에 들여 잘 말렸다. 녀석은 익숙한 자세로 바람을 쐬더니 보송보송해진 몸이 마음에 드는 듯 곧바로 러그에 가 누웠다. 나는 저녁 식사용 밀키트를 꺼내 더운물을 붓고, 식탁 의자에 앉아 박이 건넨 쪽지를 꺼냈다. 자잘한 글씨가 새겨진 은박지였는데, 너무 많이 구겨져서 다 알아보긴 힘들었다.

“가설우리는 로봇이다. 반려동물 전용 로봇. (구겨져서 안 보임) 근거는 나의 기록과 기억강, 자네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을 텐데? 연쇄적인 죽음의 이유반려동물이 죽으면, 그 동물을 돌보는 로봇도 더는 필요치 않으니까. 김, 오, 윤, 원. 이들은 모두 처분된 것.”

갑자기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욕을 내뱉으며 박이 건넨 은박지를 잘게 찢어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러고도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다가, 쓰레기통을 다시 뒤져 은박지를 꺼낸 다음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렸다. 주 1회 들르는 미화 요원이 본다면,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

물을 내리고 나서도 오래도록 화장실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밤이면 밤마다 떠오르는 기묘한 광경. 망상 혹은 꿈이라고 여기던 그것이, 정말 나의 기억이란 말인가? 아니, 그럴 리 없어.

어두운 거울 속엔 왠지 낯설어 보이는 늙은이가 서 있었다. 당연히 그건 나지만, 그렇지만 정말로 ‘나’란 말인가. 도대체 ‘나’라는 건 뭐지? 무엇 하나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존재를 ‘나’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동사무소 직원이 우리집에 온 것은, 아마 이곳에 입소하기 두어 달 전의 일일 거다. 누군가 쾅쾅 문을 두드리기에 빗장을 여니, 후줄근한 셔츠에 구겨진 바지 차림의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내가 들어오라는 말도 하기 전에 성큼 현관으로 들어섰다.

“혹시 강희만 씨 맞습니까?”

뭐라고 대답할지 생각하는데,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그가 조그만 태블릿을 열었다.

“지난주 보건소에 다녀오셨지요? 어르신의 국가 건강검진 기록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애석하게도 살날이 얼마 안 남으셨더군요.”

남자는 내 낯빛을 살피더니 얼른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앞으로 저 녀석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난 그가 넌지시 가리키는 곳을 돌아봤다. 덕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 우리 개를 말하는 거요?”

남자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이게 일종의 사회문제가 되고 있어서요. 워낙 반려동물을 키우는 집이 많다 보니, 고령자들이 키우던 개나 고양이가 홀로 남겨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결국 그 동물들은 주인이 죽고 나면 보호소로 직행하게 되고요. 아시다시피 국가에선 고령자의 정신 건강도 관리하고 있는데, 검진 결과, 어르신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홀로 남겨질 덕구의 거취 문제더군요.”

나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건강검진을 하던 중, 중간에 어느 작은 방에서 긴 설문지에 답을 했던 것이 떠올랐다. ‘치매 검사인 줄만 알았는데, 그런 거였나?’ 내 생각을 읽었는지, 남자가 손을 비비며 말했다.

“치매 검사였던 건 맞습니다. 다만 그때 노인들의 우울증 검사도 같이 진행한 거죠. 혹시 미디어를 통해 보셨는지 모르지만, 불과 수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의 노인 자살률은 세계 1위였습니다. 그나마 다행히, 대대적인 고령자 대상 정신 건강 프로젝트가 시행됐고, 지금은 5위권 정도로 뚝 떨어진 상태죠. 어디 보자, 어르신은 자살 위험 지수가 85점이나 되니”

갑자기 짜증이 났다. 늙었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을 이렇게 속속들이 파헤쳐도 되는 건가? 분명 나는 보건소에서 아무런 고지도 받지 못했다. 누군가가 나의 내면을 속속들이 파헤쳐도 된다고 허락한 적이 없다는 말이다. 당장 나가라고 소리치려는 찰나, 동사무소 직원이 속삭였다.

“덕구는요? 한 번이라도 상상해보셨어요? 보호소의 열악한 환경에 대해? 어르신이 돌아가신 후에도 덕구가 안전하게 지낼 방법이 있는데, 들어라도 보시면 어때요?”

나는 멈칫했다. 그래, 덕구. 나만 믿고 사는 덕구가 있었지. 망설이는 틈을 타, 남자는 빠르게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화려한 그림이 인쇄된 팸플릿이었다.

“어르신, 이겁니다. 그동안 세상에 없던, 그야말로 획기적인 반려동물 케어 서비스지요!”

그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팸플릿을 훑어보았다. 복숭아꽃이 활짝 핀 평화로운 마을. 거기서 한 노인이 닥스훈트종의 개와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 아래로 이런 문구가 보였다. <;당신과 꼭 닮은 휴먼시밀러가 당신보다 더 따뜻하고 세심하게 당신의 반려동물을 보살핍니다. 그들이 생을 마감하는 그 순간까지.>;

“나와 닮은 휴먼시밀러?”

내 말에, 남자가 가방에서 주섬주섬 서류를 꺼냈다.

“그렇습니다. 뭐니뭐니해도 반려동물은, 자기 주인과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니까요. 이 서비스를 이용하면, 어르신이 만약 돌아가신다 해도―죄송합니다.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서―덕구는 마치 어르신과 함께 지내듯 행복하고 평온하게 남은 삶을 누릴 겁니다.”

그는 긴 설명을 늘어놓았지만, 간략히 요약하면, 5세대 휴먼-시밀러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인간과 똑같은 존재를 제작한다는 게 핵심이었다.

“어르신이 동의하시고 서류에 사인하시면, 곧바로 DNA를 채취하여 그 정보를 데이터베이스에 저장합니다. 나중에 어르신이 (안타깝게도) 덕구보다 먼저 세상을 뜨면, 곧바로 그 정보를 바탕으로 어르신의 생전 모습과 똑같은 휴먼시밀러가 제작되는 거지요. 외모만 같은 게 아니라 체취, 버릇, 내면, 무엇보다도 덕구를 사랑하는 마음까지 그대로 빼다 박은, 완벽한 돌봄 로봇이라고 할까요! 그런 다음 둘은, 그러니까 어르신을 닮은 휴먼시밀러와 덕구는, 반려동물을 키우기에 적합한 특수 시설로 이송됩니다. 거기서 휴먼시밀러는 덕구를 보살피는 일에 모든 걸 쏟으며 나날을 보내게 되고, 그렇게 완벽한 돌봄을 받던 덕구가 세상을 떠날 때, 이 서비스도 종료되는 겁니다. 어떤가요? 혹시 이 서비스를 이용해볼 의향이 있으십니까?”

솔직히 털어놓자면, 건강검진 결과통보서를 받은 다음 날부터 수면제를 조금씩 모으고 있었다. 내가 죽는 데 쓸 건 아니었다. 어차피 내게 남은 생은 두어 달이고, 굳이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이 세상과는 곧 작별일 터이니. 다만 덕구가 걱정될 따름이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에 홀로 남겨질 덕구. 죽음이 뭔지, 나이듦이 뭔지도 모르는 덕구는, 자기가 또다시 버려졌다고 생각할 테니까. 그것만은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수면제를 한 알씩 모아서 봉지에 담을 때마다 덕구의 턱을 쓰다듬었다. 그래, 같이 가자. 아빠가 갈 때, 너도 가는 거야. 걱정하지 말렴.

마루 구석에서 앞발을 핥던 덕구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딴청을 피우며 꼬리를 한 번 흔들었다.

“하지만 비용은보다시피, 난 가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

그러자 동사무소 직원이 다시 한 번 웃었다.

“그래서 제가 나온 것 아닙니까, 어르신? 사실 이번 휴먼시밀러는 일종의 프로토타입입니다. 아직 완성된 건 아니다, 이 얘긴데요. 휴먼시밀러를 개발한 회사에선, 수급자나 차상위 계층 노인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테스트하고 싶다는 제안을 해왔습니다. 특별히 저희 지자체에만 기회를 준 거라고 할까요. 제안이 들어오자마자, 우린 관내에서 조건에 부합되는 노인 이십 명을 추렸습니다. 거기 어르신이 포함된 거고요.”

마침내 서류에 사인을 하며, 나는 다짐하듯 물었다.

“이게 다 무료라는 거지? 그리고 내가 죽으면 정말로 우리 덕구는 완벽한 돌봄을 받으며 살 수 있는 거고?”

“그렇다니까요. 이런 기회가 어디 흔한가요?”

“그런데그 휴먼시밀러인가 뭔가는 정말 나와 똑같을까? 그러니까 내 말은그 기계가 진짜 나처럼 우리 덕구를 잘 보살필 수 있을까, 하는 거야.”

“그 부분은 전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두고 보면 아시겠지만, 아마 나중에 둘을 나란히 세워놔도 덕구는 누가 진짜 어르신인지 알아채지 못할 거예요. 어쨌든, 이제 서명하셨으니, 바로 DNA를 채취하겠습니다. 잠깐 혀를 좀 내밀어 주시겠어요?”

그는 가방에서 꺼낸 키트로 내 입속 상피세포를 채취한 다음, 뚜껑을 닫았다. 아니, 그날은 그냥 돌아갔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여하간 중요한 것은, 결국 그 휴먼시밀러인가 뭔가 하는 프로젝트가 불발로 끝났다는 사실이다. 건강검진 당시 말기암으로 판정됐던 조직 검사 결과에 오류가 있었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휴먼시밀러 프로젝트 대상자에서 제외됐고, 우리의 나날은 전처럼 조용하고 지루해졌다. 덕구는 온종일 볕이 잘 드는 마루에서 잠을 잤고그리고 나는그런데 나는 뭘 했더라? 왜 항상 기억은 여기서 끝나는 거지? 언제, 어떻게 해서 이 마을로 들어왔는지를, 왜 떠올리지 못하는 걸까.

“미친 박가 놈 같으니라고.”

낮게 욕을 하며, 잠든 덕구를 끌어안았다. 녀석의 털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이렇게 생생한데, 이 감촉이 이렇게나 진짜 같은데대체 박은 무슨 헛소리를 한단 말인가. 아무리 기억이 흐릿해져가고 있어도, 내가 살아 숨 쉰다는 건 덕구만 봐도 알 수 있는 거였다.

덕구를 도로 러그에 눕히며, 내일은 박에게 한마디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잠을 청하다 말고, 벌떡 일어나서는 쓰레기통에서 밀키트 포장지를 한 장 찾아냈다. 구겨진 은박지를 잘 편 다음, 이쑤시개로 정성껏 글자를 새겼다.

-박, 거북. 그다음엔?

 

눈을 뜨니, 어느새 아침이었다.

덕구는 벌써 일어나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녀석의 배변패드부터 갈아주고 닭가슴살을 굽는데,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현관문을 열고 마당에 나가니, 박의 집 앞에 하얀 구급차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무슨 일 있소?”

담 너머로 묻자, 하얀 천에 싼 뭔가를 안고 있던 직원이 대답했다.

“여기 사시던 박군호 어르신이 오늘 아침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어요. 엊저녁, 키우던 거북이 죽었다고 연락을 주셨는데, 그새 또 이런 일이”

그러고 보니, 흰 천에 싸인 둥근 덩어리는 거북의 형태를 닮은 듯했다.

집에 들어와서도 한동안은 식탁 앞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밀키트는 다 식었지만, 별로 먹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결국 싱크대에 쏟아버리고 그릇을 정리하는데, 조그맣게 접은 쪽지가 눈에 띄었다. 누군가가 뾰족한 것으로 글자를 새긴 은박지였다.

-박, 거북. 그다음엔?

대체 이 수수께끼 같은 말은 뭐지? 혹시 박이 떨어뜨린 건가? 아니, 박이 여기 들른 적이 있기는 한가? 문득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그래, 누가 쓴 메모인지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차피 나와는 상관없는 일인데.

난 은박지를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지고, 구석에 있던 바구니에서 강아지용 원반을 꺼냈다. 이제 덕구와 놀아줄 시간인 거다.

 

❋김희선

소설가. 약사. 장편소설 ‘무한의 책’ ‘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 ‘무언가 위험한 것이 온다’, 소설집 ‘라면의 황제’ ‘골든 에이지’ ‘빛과 영원의 시계방’, 산문집 ‘밤의 약국’을 썼으며, 젊은작가상, SF어워드 등을 수상했다.

2023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김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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