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있는 것보다 회사에서 일하는 게 더 재미있습니다.”
자화전자 김상면(59) 대표는 자타가 공인하는 ‘일 중독’ 엔지니어다. 맨손으로 시작해 전자부품 전문 업체 자화전자를 매출 1200억원이 넘는 중견기업으로 키워내고도 “70대 후반까지 일하는 것이 꿈”이란다.
“사업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밤늦게 회사에 나와 돌아보고 나면 힘을 얻는다”는 그는 지칠 줄 모르고 25년째 기술 국산화를 주도해왔다. 그 결과 이제 자화전자는 세계 각국에서 부품 공급을 요청받는 우수 하이테크 업체로 자리매김했다.
연탄불 달구며 창업의 꿈 키우다
어린 시절 그의 꿈은 엔지니어였다. 중학교를 마칠 때쯤 공고를 졸업하면 서울대 공대에 입학할 수 있는 제도가 시행됐다. 기회라고 생각한 그는 주저 없이 청주공고에 입학했다.
그런데 6개월 만에 제도가 폐지되는 바람에 크게 실망했다. 일단 입학했지만 이번엔 “실습 위주의 공고 수업이 적성에 맞지 않았다”고 한다. 꿈을 포기하기 싫었던 그는 다시 인문계로 옮겼고, 재수 끝에 1966년 한양대 금속공학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 공업진흥청, 풍산금속, 진흥화학 등 여러 직장을 거치며 경험을 쌓자 기술에 자신이 생겼다. 스스로 회사를 차려 제품을 만들고 싶었다. 1979년 고향 충북 청원에서 낡은 기와 공장을 개조해 창업에 나섰지만 쉽지 않았다. “고무자석(고무에 자석 분말 혼합) 원료를 만드는 중에 수해로 전기가 끊겼습니다. 할 수 없이 연탄불에 재료를 녹이면서 제품을 만들었죠.”
컬러TV 시대가 갓 열린 1981년, 김 대표는 자화전자를 세우고 브라운관의 컬러 영상을 재현하는 자석 부품인 PCM(Purity Convergence Magnet)을 개발하기로 했다. 집에도 거의 들어가지 못하고 공장에서 연구로 밤을 새우기를 몇 달, 마침내 첫 개발에 성공했다. 당시 국산 제품은 그의 제품이 유일했고, 시장성도 좋아 보였다.
그러나 대기업에 납품을 신청했지만 승인은 2~3년씩 걸렸다. 당연히 회사도 생활도 궁핍해졌다. 신생 회사로선 감당하기 어려운 압박이었다.“돈은 없는데 빚쟁이는 한 달이 멀다하고 찾아오고, 주위에선 ‘납품도 못하는 업체’라며 싸늘한 시선을 보냈어요. 자칫 사기꾼으로 몰릴 위기였죠.”
아내가 결혼반지를 팔아 공장 기름값을 대고 옆집에 쌀을 꾸러 다니기까지 했다. 김 대표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지만 결국 “남보다 뛰어난 기술을 개발하는 수밖에 없다”고 이를 악물었다.
기술 국산화 집념이 성공의 힘
그러던 중 숨통이 트였다. 기술력을 인정받아 마침내 납품 승인이 난 것. 납품 실적을 제시하고 운 좋게 은행 대출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힘들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돈이 생기는 대로 밤새워 만들어 팔았다. 매출이 오르기 시작했고, 이익은 매년 쑥쑥 늘었다.
“일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어요. 잠을 줄여가며 제품을 만들었지만 행복했습니다.”
일에 대한 열정이 지나친 나머지 자칫 위험한 순간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새벽 2~3시에 일어나 제품을 싣고 직접 차를 몰고 돌아다니며 납품하던 김 대표가 한 번은 돌아오는 길에 너무 졸려 도로변의 가이드 레일을 들이받는 사고를 낸 것이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자신이 붙은 그는 국내에선 생산하지 못하던 ‘PTC 서미스터’(PTC thermistor) 개발에 나섰다. 특정 온도에 이르면 급격히 저항이 증가하는 소자로 화재경보기, 전기밥솥, 자동차 등에 널리 응용되는 온도 제어용 센서 제품이다. 8년이나 걸렸지만 기어이 개발에 성공하고 인증 검사를 통과했다.
김 대표는 이때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선 기술 국산화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매출액의 5% 이상을 연구개발비로 투자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위기를 기회 삼아 틈새시장 공략
얼마 안 가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휴대전화 진동 모터, 자석 롤, 전동팽창밸브, 액정표시장치(LCD) 부품, 플라스마 디스플레이 패널(PDP) 부품 등 매년 신제품을 쏟아냈다. 회사는 곧 고성장 궤도를 질주했고, 국내 굴지의 전자부품 생산업체로 우뚝 솟았다. 외국에서도 주문이 이어져 수출이 급증했다.
그러던 가운데 뜻밖의 기회가 다가왔다. 바로 1998년 IMF 구제금융 사태. 원-달러 환율이 2000원대까지 치솟아 올랐다.“전체 매출에서 수출 비중이 높다보니 다른 회사는 줄줄이 부도를 내던 시기에도 우리 회사는 결재대금으로 받은 달러 가치가 올라 오히려 환차익이 늘어났습니다. 위기에서 성장의 발판을 마련한 셈이죠.”
현재 자화전자가 생산하는 PCM은 세계시장의 56%, PTC 서미스터는 국내시장의 85%를 차지한다. 허름한 기와 공장 건물은 어느새 중국과 말레이시아에 현지 공장을 둔 종업원 3천명의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2004년 당기순이익만 171억원을 냈고, 수출액이 전체 매출의 85%를 차지한다.
그가 말하는 성공 비결은 간단하다.
“저는 경영자라기보다 100% 엔지니어라고 생각해요. 불황일 때도 연구개발에 투자한 게 성장의 비결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김 대표는 기술개발이 경쟁력으로 이어진다는 굳은 신념을 갖고 있다. 충북 청원 본사의 임직원 330여명 가운데 연구개발 인력이 140명에 이를 정도다. 올 연말에도 다시 신제품을 발표할 예정이다. 김 대표는 “자석과 전자세라믹 기술이 모두 집약된 고부가가치 상품으로 주력을 바꿔나갈 계획”이라고 한다. “자화전자를 세계적인 전자부품 업체로 키우고 싶다”는 그의 ‘일 중독’은 아직 끝이 없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