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한국은 대상을 정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이뤄지는 ‘무차별 범죄’로 두려움에 떨었다. 신림역 흉기 난동, 서현역 흉기 난동, 대전 교사 흉기 난동 등 약 5건의 흉기 난동 사건이 7~8월 사이에 벌어졌다. 치안 강국으로 통하는 한국이 어쩌다 이렇게 불안한 상황이 됐을까. 전문가들은 범죄의 전염성을 이유로 든다. 범죄가 어떻게 전염되는지, 전염을 막을 방법은 없는지 알아봤다.
7월 21일 오후 믿을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해가 밝게 떠 있는 2시 경 서울 신림역 인근 길 한복판에서 흉기 난동이 일어난 것이다. 이 사건으로 한 명이 목숨을 잃고 3명이 다쳤다. 가해자는 현장에서 검거됐다. 충격적인 뉴스는 신문과 방송을 뜨겁게 달궜고,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그날의 공포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흉기 난동을 벌이는 등 무작위 테러를 하겠다는 게시글이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8월 3일 6시경 경기도 서현역에서 또다시 흉기 난동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서울 신림동 공원에서, 2호선에서, 경기도 광명역에서, 경북 칠곡군에서 사건이 이어졌다. 국민들의 두려움이 커지자, 서울 강남역 등 인파가 많은 지역에는 경찰특공대가 배치됐다.
전염병처럼 퍼지는 무동기 범죄
일련의 사건들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낀 이유는 그것들이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모르는 무차별 범죄였기 때문이다. 배상훈 우석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지금껏 우리나라에는 원한 보복 등 분명한 이유가 있는 살인이 많았지만, 최근 발생하는 범죄는 피해자가 특정되지 않는 무차별 범죄”라고 설명했다. 이어 “무차별 범죄는 강력 범죄의 가해자가 제대로 처벌 받지 않는 무질서 속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며 “범죄는 계속해서 퍼지는 전염성을 띤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범죄의 전염성은 어느 정도일까. 대량 학살(3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성격의 범죄가 자주 발생하는 미국에서는 일찍부터 대량 학살 사건의 전염성에 대해 연구해왔다. 2015년 셰리 타워스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계산 및 모델링 과학 센터 연구원(현 독일 고등 지속가능성 연구소 연구원)은 대량 학살 사건은 일시적으로 전염성이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doi: 10.1371/journal.pone.0117259
타워스 연구원팀은 USA 투데이, 총기 규제를 촉구하는 미국의 비영리단체 브래디 캠페인 등에서 얻은 1997년부터 2013년까지 미국에서 벌어진 대량 학살 사건수를 전염 예측 모형에 넣어 분석했다. 그 결과 대량 학살 사건이 일어난 후 13일 동안 다음 대량 학살 사건이 일어날 확률이 증가하고, 하나의 사건은 최소 0.30개의 새로운 사건을 유발했다. 타워스 연구원은 “직전의 대량 학살 사건이 다음 대량 학살 사건 발생률에 영향을 준다는 증거를 발견했다”고 설명했다.
대량 학살에 대한 뉴스 보도가 증가하면 비슷한 사건이 증가한다는 연구는 2022년 마이클 제터 호주 서호주대 경제학과 교수가 진행했다. doi: 10.1016/j.euroecorev.2022.104221 제터 교수는 대량 총격 사건의 수와 미국 뉴스 프로그램 ABC’s 월드 뉴스 투나잇에서 대량 총격 사건 관련 단어들이 언급된 횟수의 상관관계를 분석했다. 두 요소가 진짜 관계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총격 사건과 관련 없는 ‘화산’ ‘지진’ 등의 단어가 언급된 횟수도 반영해 비교했다. 그 결과 대량 총격 사건에 대한 뉴스 보도가 증가하면 3-4주 동안 대량 총격 사건이 증가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사건이 언론에 자주 언급되는 것이 다른 모방 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온라인 커뮤니티는 범죄 전염을 부추길까?
범죄가 원래 전염되는 것이라면, 한국에서 최근 유독 흉기 난동 사건이 ‘연이어’ 발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배 교수는 두 가지를 답했다. 첫째는 가해자의 범행 동기가 광범위한 불만에서 기인해, 새로운 가해자가 범행을 쉽게 마음먹을 수 있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로 신림역 흉기 난동 사건 가해자의 범행 동기는 사회에 대한 불만이었다.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광범위한 동기다. 때문에 불만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비슷하게 사회에 대한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저런 이유로 범행을 하기도 하네. 나도 억울해’라는 마음을 가지고 범행을 예고하거나 저지른다는 것이 배 교수의 설명이다.
두 번째 이유는 정보가 빠른 속도로 퍼지고 재생산될 수 있는 온라인 커뮤니티가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배 교수는 “SNS를 통해 사건에 대한 의견이 재생산되면서 범죄를 부추길 수 있다”며 “특히 혐오나 과격한 의견이 많은 특정 커뮤니티에서 사건이 이상한 방향으로 재해석되는 것이 큰 문제”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신림역 흉기 난동 사건이 특정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남녀 혐오 싸움으로 번진 이후에 ‘여성만 10명 죽이겠다’ ‘남성만 10명 죽이겠다’와 같은 글이 인터넷에 속속 등장했다. 이처럼 SNS, 온라인 커뮤니티와 같은 소셜미디어가 사건을 전염시키는 데 미치는 영향은 얼마나 될까.
궈 치우 중국 난징대 공학 및 응용과학부 학생과 지지 사샤 동 미국 휴스턴대 건설관리학과 교수가 함께한 연구팀은 총기 난사로 인한 대량 학살 사건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전염될 수 있는지를 분석한 연구 결과를 2022년 발표했다. doi: 10.1016/j.cie.2022.108565 연구팀은 2013년부터 2020년까지 총격 사건과 관련된 528만 7396개의 트위터(현 X) 게시글을 수집했다. 그리고 머신러닝을 통해 각 게시글이 총격 사건을 부정적으로 여기는지, 긍정적으로 여기는지, 중립적으로 여기는지를 라벨링(분류)했다. 예를 들어 “나는 그 대량 총격 사건이 싫다”는 게시글은 부정적, “100킬만 더 하면 좋을 듯”과 같은 게시글은 긍정적, “우리나라에서 더 이상 총기 사건이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는 내용은 중립적이라고 구분했다.
연구팀은 이후 긍정, 부정, 중립으로 라벨링된 게시글 수를 각각 변수로 사용한 전염병 예측 모형을 만들고 트위터 게시글이 총격 사건의 증가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예측했다. 그리고 예측 결과를 실제와 비교했다. 그 결과 이후에 벌어진 총격 사건을 가장 정확히 예측한 모델은 총격 사건에 대한 긍정적인 게시글 수를 변수로 사용한 모델이었다.
치우 교수는 “이번 연구 결과는 총격 사건 등 끔찍한 사건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가 소셜미디어상에 확산되는 현상이 실제 총격 사건 증가와 관련있다는 것을 증명한 연구”라고 설명했다. 배 교수는 “모든 커뮤니티가 문제라기 보다는 사건을 희화화하는 특정 불건전한 커뮤니티가 범죄에 영향을 준다”고 의견을 덧붙였다.
유해 콘텐츠 규제, 범죄를 막을 수 있을까?
유럽연합(EU)에서는 안전하고 예측 가능하며 신뢰할 수 있는 온라인 환경을 만들기 위해 2023년 8월 25일부터 디지털 서비스법이 발효됐다. 디지털 서비스법은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이 자사 플랫폼에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부적절한 콘텐츠나 허위 정보 콘텐츠 등 유해 콘텐츠가 게시될 시, 직접 제거해야 한다는 내용이 골자다.
이런 규제는 실제로 유해 콘텐츠의 확산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마리안 안드레이 리조이우 호주 시드니공대 교수팀은 디지털 규제법이 도입됐을 때 유해 콘텐츠의 확산을 막을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8월 14일 국제학술지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발표했다. doi: 10.1073/pnas.2307360120
연구팀은 유해한 콘텐츠를 삭제하는 디지털 서비스법의 조정이 어떤 효과를 보이는지 분석하는 수학 모형을 만들었다. 이때 변수로는 유해 콘텐츠가 다른 콘텐츠를 재생산하는 ‘피해도’와 유해 콘텐츠 확산 강도가 절반으로 줄어드는 데 걸리는 시간인 ‘반감기’를 설정했다. 연구팀은 2022년 7월 1일부터 12월 31일 사이에 트위터에 올라온 ‘기후변화’와 ‘이민자에 대한 미국의 정책’에 관한 게시글 데이터를 이용해 디지털 서비스법으로 유해 콘텐츠 확산이 어떻게 변하는지(확산 정도)를 예측했다.
기후변화에 관한 게시글은 이민자에 대한 미국 정책에 관한 게시물보다 더 잘 퍼졌다. 그리고 잘 퍼지는 주제일수록 콘텐츠를 조정했을 때 유해 콘텐츠가 재생산되는 정도가 더 확실히 줄어들었다. 또 글이 게시된 후 24시간 안에 조정을 하면 해당 유해 콘텐츠의 재생산을 50%까지 줄일 수 있었다. 즉, 유해한 콘텐츠를 지우는 등의 조정은 유해 콘텐츠 재생산으로 인한 피해를 줄이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같은 논리를 IT 강국인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긴 어려울 수 있다. 스마트폰으로 누구나 인터넷에 접속하고 게시글을 생산할 수 있는 한국은 유해 콘텐츠로 인한 피해 확산에 특히 취약한 환경이다.
한국에도 네이버 등 포털 사이트의 뉴스 편집권을 규제하는 내용이 담긴 정보통신망법 개정안 입법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다만 이 법안은 뉴스의 내용에 대해서만 규제할 뿐 네티즌이 직접 게시할 수 있는 SNS 등의 글을 규제할 능력은 가지고 있지 않다. 트위터, 페이스북 등 전 세계인이 사용하는 SNS의 게시글을 규제할 수 있는 유럽의 디지털 서비스법과는 다른 점이다.
이성엽 고려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현재 한국은 불법 영상만 법적으로 제재할 수 있고 그 외의 유해 콘텐츠는 자율 규제에 맡기고 있다”며 “최근 우울증 갤러리의 자살 방조, 온라인 커뮤니티 속 살인 예고 글로 국민들의 두려움이 확산되는 현상을 봤을 때 규제를 강화하는 입법이 필요하다”고 의견을 밝혔다. 다만 배 교수는 “EU의 경우 3년간 인프라와 프로그램을 구축한 뒤, 디지털 서비스법을 도입했다”며 “한국도 체계적인 (유해 콘텐츠 대응) 프로세스를 구축한 뒤 규제를 도입해야 흐지부지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