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대전 토박이다. 유치원 시절부터 박사 과정까지 모두 대전에서 지냈고, 현재 일하는 곳도 대전에 자리한 연구원이다. 초등학교 시절엔 대전 시내에 경문사라는 서점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동네 책방보다 조금 큰 수준이었지만 당시만 해도 대전에서 가장 큰 서점이었다. 부모님은 주말마다 나와 동생을 이 책방으로 데려가셨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된 1986년, 언론에선 연초부터 핼리혜성 소식을 뜨겁게 다뤘다. 70여 년 만에 지구에 돌아온 이 혜성의 존재는 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나를 단숨에 사로잡았다. 그렇게 서점에서 핼리혜성을 다룬 책을 찾다, 갓 창간된 과학동아를 처음 만났다. 내용을 전부 이해하진 못했어도 멋진 그림들만으로 내겐 충분했다. 이 그림들이 온갖 상상을 떠올리는 단서가 된 덕분이다.
옥상에서 망원경을 안고 살던 학창시절
어린 시절 나는 밤하늘에 관심이 특히 많았다. 어느 날엔 케플러식 망원경을 설명하는 그림을 어디선가 보곤 직접 제작을 시도하기도 했다. 망원경의 원리도 제대로 몰랐던 때지만, 먼저 문방구와 철물점에서 볼록렌즈 2매와 기다란 PVC 파이프를 샀다. 그냥 그림처럼 렌즈를 통에 고정하면 될 거란 생각으로, 렌즈를 열심히 닦고 나름 꼼꼼히 테이프로 고정하며 흥분했던 시간이 기억난다. 물론 혜성이나 별을 그렇게 볼 순 없었다.
그리곤 초등학교 6학년 내내 천체망원경을 사달라고 부모님을 졸랐다. 천체망원경은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에 갖게 됐다. 망원경으로 달과 토성을 처음 봤던 때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 흥분과 감격이란! 추운 줄도 모르고 하늘이 맑은 날이면 옥상에서 망원경을 안고 살았다.
별에 관한 관심은 고등학생이 되며 더 강해졌다. 대전과학고(현재 과학영재학교로 전환)에 진학해 별누리라는 천문동아리에 들어가, 자율학습이 끝난 밤 11시면 어김없이 망원경을 들고 학교 옥상에 올라갔다.
이 무렵 별과 함께 나를 유혹한 또 다른 주제는 바로 컴퓨터다. 과학동아에 컴퓨터의 원리나 베이직(BASIC)을 능가할 새로운 컴퓨터 언어를 소개하는 기사가 나오길 매달 들뜬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래서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기사도 슈퍼컴퓨터에 대한 것이다. 세상에, ‘슈퍼’라는 수식어가 붙은 컴퓨터라니! 초중학교 시절 슈퍼맨 영화를 즐긴 내게는 특히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이름이었다. 너무도 재미있게 기사를 읽었지만 솔직히 그때는 슈퍼컴퓨터가 내 연구 인생의 동반자(?)가 되리란 생각은 꿈에서도 하지 못했다.
카오스의 매력에 빠져들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엔 KAIST에 진학해 물리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대학에 와선 별에 대한 관심은 다소 사그라들었는데, 그 빈자리를 컴퓨터가 마저 채웠던 것 같다. (솔직히 고백하면 컴퓨터 게임에 쏟은 시간이 너무 많았다.) 대학 1학년이었던 1992년은 한국에 컬러모니터, 그래픽카드(VGA)가 본격적으로 보급된 때다.
이즈음 필자를 충격을 빠트린 것은 또 있었다. 바로 카오스와 프랙탈이다. 특히 컬러모니터에 펼쳐지는 프랙탈의 세계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 복잡하고 매혹적인 패턴들이 간단한 수학적 공식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에 거듭 충격을 받았다. 과학동아에서 본 멋진 프랙탈 그림을 직접 만든 프로그램으로 내 컴퓨터에 재현해 친구들에게 자랑하기도 했다.
이런 경험들 때문이었을까. 대학 시절의 관심은 결국 카오스 현상과 복잡계, 그중에서도 플라즈마를 다루는 연구에 쏠렸다. 석사와 박사학위 주제도 핵융합 플라즈마 연구를 택했다. 핵융합 플라즈마는 양자역학을 적용할 필요가 없는 고전적 물리계에서 가장 복잡한 시스템이다. 이런 까닭에 이론 연구에서도 펜과 종이만 사용하는 순수 이론적인 접근은 매우 제한적이다. 컴퓨터, 특히 슈퍼컴퓨터를 사용한 시뮬레이션 연구가 필수다. 박사과정 동안엔 펜티엄 CPU(최대 CPU 클럭속도 60~300MHz)를 탑재한 개인용 컴퓨터를 여러 대 연결한 리눅스 클러스터 컴퓨터로 시뮬레이션 연구를 수행했다. 그러면서 더 강력한 슈퍼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길 열망했다.
2003년 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일한 뒤, 한국핵융합에너지연구원(KFE)에 입사했다. 과학동아 독자 여러분이라면 익숙할, 인공태양을 만드는 연구기관이다. 하늘의 별처럼 뜨거운 플라즈마 덩어리를 만들고 핵융합 반응을 유도해 에너지를 생산하는 연구를 수행한다. 이런 핵융합 연구 중에서도 내가 담당한 분야는 1억℃에 이르는 초고온 플라즈마의 물리적 성질을 슈퍼컴퓨터로 모사, 예측하는 것이었다.
핵융합 연구의 문을 열다
박사학위를 받고 핵융합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2000년대 초반만 해도 한국은 핵융합 실험 장치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소프트웨어 기술과 컴퓨터 자원이 모두 부족했다. 당시 내 임무는 우리 연구원에서 운영하는 핵융합 장치인 ‘KSTAR’를 활용하는 실험과 그밖의 핵융합 연구를 위해 슈퍼컴퓨터를 구축하고, 슈퍼컴퓨터로 시뮬레이션을 수행할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개발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핵융합 플라즈마를 표현하는 방정식을 유도한다. 그리고 이 방정식을 컴퓨터로 풀 수 있는 형태로 바꾼다. 이 과정을 보통 이산화(discretization)라 부른다. 핵융합 플라즈마의 움직임은 이런 이산화 과정을 거쳐 적게는 수백만 개, 많게는 수백억 개에 이르는 변수들의 연립 방정식으로 표현된다. 이제 이렇게 변수가 많은 연립 방정식을 컴퓨터로 풀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작성해야 한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도 역시 변수가 많다.
보통의 개인용 컴퓨터로는 몇 년이 걸려도 풀기 어려운 방정식을 어떻게 빨리 풀 수 있을까. 답은 슈퍼컴퓨터로 여러 미지수에 대한 계산을 동시에 진행하는 것이다. 즉 수천~수만 개의 CPU를 동시에 사용해 계산 시간을 단축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고등 수학 기법을 적용해야 하고, 효율적인 알고리즘을 개발해야 한다. 과학동아를 보며 슈퍼컴퓨터와 관련된 지식들을 꾸준히 습득한 덕분인지, 수만 줄에 이르는 프로그램도 포기하지 않고 완성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의 상상이 이끌어준 인공태양
돌이켜 보면 학창 시절 과학동아는 내게 구글이나 유튜브였다. 시간이 나면 습관처럼 그림, 사진들을 뒤적였고, 특히 멋진 천체사진들을 보고 또 보며 온갖 상상을 펼쳤다.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별과 은하가 플라즈마로 만들어졌다는 사실, 또 거기서 핵융합 반응이 일어나 지구의 모든 생명에 에너지를 나눠주며 우주를 빛내고 있다는 사실을 과학동아를 통해 배웠다.
물론 그 시절에 핵융합 연구를 위해 인공태양 실험을 하는 현재의 모습을 상상하지는 못했다. 초중고 시절의 상상들이 무의식적으로 필자를 지금의 자리로 이끌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그래서 지금 과학동아를 읽는 학생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별과 은하를 품은 우주의 아름다움, DNA와 바이러스에서 인간에 이르는 생명의 경이로움을 가득 담은 글과 사진을 보며 잠시라도 온갖 공상을 펼쳐보면 어떨까 하고 말이다. 여러분의 꿈이 어떤 미래를 펼쳐 보일지, 과학과 기술의 어떤 혁신을 일으킬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