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71년 무령왕릉에서 시꺼먼 널판자가 출토됐다. 무령왕과 왕비의 관을 이루고 있던 나무다. 11조각의 판자는 발굴 당시 별 관심을 끌지 못했다. 하지만 이 나무판자에는 고대 한·일간의 관계를 밝혀줄 과학적 증거가 숨어 있다. 나무판은 일본에서만 자라는 신비의 나무로 이뤄졌다는데….
역사는 언제나 이긴 사람의 눈으로 쓰여진다. 백제도 마찬가지다.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던 백제는 삼국통일 과정에서 나당 연합군에 정복당해 수많은 기록과 유물이 철저히 파괴됐다. 이로 인해 백제의 역사를 제대로 밝혀낼 수 있는 자료가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던 중 지난 1971년 7월 5일, 충남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는 광복 후 최대 규모의 백제 고분 발굴이 이뤄졌다. ‘잃어버린 왕국’ 백제의 제25대 왕인 무령왕의 왕릉이 신비의 1천5백년을 뒤로 한 채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더욱이 무령왕릉은 도굴꾼의 피해를 전혀 받지 않은 ‘처녀분’. 왕릉에서는 모두 1백8종, 2천9백6점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유물이 출토돼 학계의 관심이 집중됐다.
수많은 유물중에는 왕과 왕비의 시신을 감쌌던 11조각의 널판자도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이 나무판자는 발굴 당시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다. 시꺼먼 옻칠이 돼 있었으며, 관을 이루고 있던 나무라 어쩐지 으스스한 느낌마저 풍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판자에는 백제와 일본의 교류를 밝혀줄 귀중한 증거가 숨어 있었다.
자연·사회 변화 알려주는 타임캡슐
무령왕의 무덤 속으로 들어간 발굴팀을 처음 마중한 것은 실같은 나무뿌리와 뒤엉켜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널판자였다. 왕과 왕비의 시신을 감쌌던 널판자는 조금씩 허물어지기는 했지만 지나온 긴긴 세월을 용케도 이겨내고 있었다.
땅속에 묻힌 나무판자는 대체로 20-30년이면 거의 썩어 없어진다. 무덤 속은 적당한 습기와 일정한 온도에 깜깜하기까지 해 나무를 망가뜨리는 미생물의 낙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제인들은 처음부터 이런 점을 미리 알고 특별한 조치를 취했다. 나무를 베어 완전히 말린 후 그 위에다 옻을 수십번 칠해 널판자 조각 하나하나를 완전 밀봉했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방수페인트로 습기를 철저히 봉한 셈이다. 이 널판자로 황금장식이 주렁주렁 달린 아름다운 나무관을 짜고 그 위에 다시 한번 옻을 칠해 습기가 절대로 스며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무령왕의 관은 이같은 정성과 뛰어난 옻칠 기술 덕분에 기나긴 세월을 버틸 수 있었다.
나무는 예로부터 생활도구를 만드는 재료로 이용됐다. 손쉽게 구할 수 있고 가공하기 쉬워 가장 널리 사용된 재료중 하나다. 나무로 만들어진 문화재는 그 재질을 밝혀보면 뜻밖의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우선 수백-수천년을 이어온 나이테에는 그해의 자연현상이나 천재지변의 정보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또한 나무는 좋아하는 환경이 서로 달라 나무마다 자라는 지역이 한정돼 있다. 이 때문에 무슨 나무로 만들었는지를 알아내면 당시 사람들의 국가간 또는 지역간의 교역범위를 짐작할 수 있다. 나아가 톱과 대패, 자귀 등의 흔적을 정밀분석하면 당시의 과학기술까지도 짐작할 수 있다. 이렇듯 역사의 흔적을 밝혀줄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는 보물창고가 바로 목재인 것이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관재는 매우 오래돼, 옻칠이 된 밑나무는 조금 썩기도 했지만 나무 세포의 기본 모양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발굴이 이뤄지고 꼭 20년만인 1991년, 필자는 무령왕의 관재 조각을 입수하는 행운을 얻었다. 현미경 접안렌즈를 통해 확대된 세포모양을 들여다보던 필자는 놀라움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일본인이 자기네 나무라고 자랑해 마지않는 ‘금송’의 특징적 세포배열이 잃어버린 기나긴 세월을 뛰어넘어 필자와 눈을 마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창상벽공’(windowlike pit)이라는 금송의 구조는 송진을 분비하는 작은 샘이 없고, 마치 창문을 가로로 배열해 놓은 듯한 독특한 모습 때문에 유명하다. 창상벽공의 세포모양을 가진 나무는 세계적으로 하나밖에 없다. 이 때문에 필자는 무령왕의 관재가 금송임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고야산에서 자라는 큰 나무
금송은 겉씨식물 바늘잎무리(침엽수)에 속하는 늘 푸른 나무다. 흔히 이름만 보고 금빛나는 소나무쯤으로 알고 있으나 소나무와는 촌수를 세기도 어려운 먼 친척이다. 식물학적으로 낙우송과(科)의 금송속(屬)이라는 자손이 아주 귀한 집안의 외동아들이다. 세계의 다른 어떤 곳에도 없고 오직 일본열도의 남부지방에만 자란다.
금송은 키가 수십m에 지름이 두세 아름을 훌쩍 넘는 큰 나무다. 판자로 만들면 연한 황갈색을 띠어 고급스럽고, 나이테가 살짝 드러나는 은은함이 돋보인다. 또한 잘 썩지도 않으며 특히 습기가 많은 장소에 쓰더라도 오래 버틸 수 있으므로 나무관의 재료로는 최상품이며, 나무통이나 배 만드는데도 알맞다. 당연히 최고급 목재로서 예로부터 일본의 왕궁 기둥을 비롯해 고급관리나 임금의 관재로 쓰였다.
금송이란 이름은 처음 우리나라에 이 나무가 들어올 때 중국에 있는 다른 나무와 혼동해 잘못 알려진 것이다. 일본인들은 금송을 ‘고우야마끼’(コウヤマキ)라 부른다. ‘마끼’란 큰 나무를 뜻하는 말이니 이름을 풀어보면 ‘고야(高野, 고우야)라는 산에 자라는 큰 나무’란 뜻이다. 고야산은 한때 일본의 수도로서 백제와 관련이 깊은 ‘나라’지방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지금도 금송은 고야산을 중심으로 일본 남부에서 자란다. 일본에서 고야의 한자 읽기는 일본식인 ‘다카노’와 우리발음 그대로인 ‘고야’가 혼용돼 쓰인다. 일본의 한자발음 규칙을 따른 것이만 우리말인 고야가 그대로 쓰인다니 무척 흥미롭다.
그렇다면 왜 무령왕은 이국땅의 나무관을 안식처로 삼았을까. 무령왕 관재가 일본 특산 금송으로 만들어진 명확한 사연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이 미스터리의 단서는 우선 무령왕의 탄생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에서 태어난 무령왕
무령왕은 서기 501년(40세)에 즉위해 22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 523년(62세)에 생을 마감한 백제 25대 임금이다.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으로 한성을 빼앗기고 지금의 공주로 내려와 나라의 기틀을 새롭게 펼친 ‘웅진 백제’ 시대의 중심인물이라고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에는 간단히 24대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라고만 적혀 있으나, 일본 역사책 ‘일본서기’의 무령왕 출생 기록은 훨씬 구체적이고 상세하다.
백제 21대 개로왕이 친동생 곤지를 일본으로 보내려 하자, 곤지는 개로왕의 왕비, 즉 형수를 자기에게 달라는 이상야릇한 요구를 한다. 이에 개로왕은 곤지와 왕비를 결혼시키고 ‘왕비는 지금 임신해 만삭이 다됐으니 만약 가는 길에 아이를 낳는다면 백제로 돌려보내라’는 조건을 붙인다. 개로왕의 왕비는 일본으로 향하던 도중, ‘각라도’라는 일본의 한 작은 섬에서 훗날의 무령왕이 될 아이를 낳는다. 곤지는 아기 무령왕이 태어나자 개로왕과의 약속대로 모자를 배에 태워 백제로 돌려보낸다.
형제가 한 여자를 공유하던 시절도 아니고 막강한 권력을 가진 임금이 그럴 필요도 없을 터인데, 무령왕이 태어난 과정은 이처럼 신비롭고 해괴망측하기까지 하다. 어쨌든 탄생과정이 시사하듯 무령왕은 일본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이런 역사적 흔적을 마냥 부인만 할 수 없었던지, 지난 2001년 12월 23일 아키히토 일본왕은 “간무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적힌 ‘속일본기’의 기록으로 봐서 한국과의 인연을 느낀다”'고 고백했다. 그들의 지금까지 태도로 봐서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대 한·일 관계 밝혀줄 과학적 증거
우리나라와 일본 사료에는 금송을 어디서 어떻게 한반도로 보냈는지를 밝혀줄 내용이 없다. 그러나 금송이란 나무의 특성을 과학적으로 들춰보면 짐작은 가능하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널판자 11개를 일일이 조사한 결과, 베어낼 당시 나무 지름은 1백50cm, 나이는 3백년 이상이었다. 이 정도의 큰 나무가 자라는 곳은 ‘고우야마끼’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일본의 고야산 주변일 것이다. 여기서 베어진 나무는 판자로 켜진 다음 우리나라와 일본을 잇는 옛 뱃길을 따라 백제로 옮겨졌을 것이다. 즉 오사카-시고쿠-후쿠오카를 잇는 좁은 해협을 거쳐 우리나라의 남해안으로 들어온 후 해안선을 타고 금강하구로 진입해 곰나루, 지금의 공주에 닿는 길이다.
무령왕과 왕비의 나무관은 아름다운 관 덮개가 달린 고급 목관이다. 현재 남아 있는 무령왕과 왕비 관에 쓰인 널판자는 길이가 2.5m, 너비가 20-60cm, 두께가 6cm다. 이 정도 규모라면 관 하나를 만드는데 필요한 널판자는 적어도 10장이 넘는다. 다듬다가 버리는 것도 있고 말리는 과정에 갈라져 못쓰는 것도 있으니 실제로 쓰인 널판자는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왕과 왕비의 관에 필요한 재목은 판자로 따져도 30-40장은 족히 돼야 한다. 작은 배라면 두척은 돼야 하고 큰 배라도 한배 가득 실어야 겨우 가능한 엄청난 양이다.
일본인 학자 길정수부(吉井秀夫)는 이렇게 말한다. “금송이 백제로 보내져 무령왕릉의 목관으로 사용된이유를 당시의 역사적 배경으로 설명할 수 있다. 백제와 일본 사이에는 밀접한 교류가 있었으며, 무령왕 시대는 백제가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던 시기로 오경박사가 일본에 새로운 문물은 물론 불교를 처음 전해주기도 했다. 이런 선진국 백제로부터 문물을 전해 받고 은혜의 보답으로 일본이 자진해 금송 관재를 보냈다.”
또다른 설명도 있다. 당시 일본은 백제의 강력한 세력권 안에 있어서 백제가 좋은 관재를 직접 수입해 가져왔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무령왕의 관에 사용된 많은 양의 금송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우선 일본과 수많은 교류가 먼저 있었다고 봐야한다. 역사적 배경이 무엇이고 일본과 백제의 교류 목적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역사학자들이 밝혀야 할 몫이다. 무령왕의 관이 일본에서만 나는 금송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움직일 수 없는 과학적 증거이니, 이 사실을 바탕으로 한·일 간의 관계를 재조명해야 할 것이다.
현재 국립공주박물관 앞뜰에는 일제강점기에 심어진 세그루의 금송이 단아한 모습으로 자라고 있다. 그들의 선조가 백제 중흥의 기수 무령왕의 시신을 감싸고 있었다는 영광의 세월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엄하게 파헤쳐 전시되고 있는 대왕의 유물을 말없이 지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