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과학동아 키즈] "힘든 양자통신에 도전한 이유요? 그냥 좋아하니까요"

내가 과학을 좋아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어린 시절 기억을 더듬어봐도 아빠가 사다주신 어린이용 영어 교재나 천자문 정도 외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이렇게나 외골수로 과학을 좋아하게 된 건 온전히 내 기질이 아니었을까 싶다. 사촌 언니 오빠들이 유난히 많아서 새 책보다 물려받는 책이 훨씬 많았고, 그중 화려한 사진과 흥미진진한 소재가 가득한 과학잡지가 딸려오기도 했다. 그 잡지만큼은 누가 안 시켜도 읽고 또 읽었다. 나와 과학동아의 첫 만남이었다.

 

느리지만 포기하지 않은 물리 마니아

 

초등학교 때부터 장래희망란에 막연히 과학자를 적었지만 과학에 진심이 된 건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그중에서도 물리학을 정말이지 너무 좋아했는데, 우주의 모든 것이 수학으로 해석도, 예측도 된다는 사실이 굉장히 경이로웠다. 또 그 원리들을 하나씩 깨우칠 때마다 지식을 얻는 것 이상의 울림을 느꼈다. 당시만 해도 일반고, 그것도 여고에서 물리를 좋아하는 학생은 굉장히 희귀했다. 약 200명의 고3 전교생 중에 이과가 70명 남짓이었고, 그중에 나를 포함한 대여섯 명이 수능 과학탐구 영역에서 물리II를 선택했던 걸로 기억한다. 가끔은 친구들 사이에서 특이한 애 취급까지 받았지만, 그것마저 기분 좋았다. 친구들은 모르는 물리학의 재미를, 나만 아는 것이 어린 마음에 뭔가 뿌듯했달까.

 

물리를 좋아한다고 하면 뭔가 영재 같은 이미지를 떠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학창 시절에 수업을 잘 따라가는 학생은 아니었다. 생각이 느린 편이었고, 선생님이 설명하시는 내용을 혼자 머릿속으로 정리하는 사이에 수업은 벌써 저만큼 진도를 나가곤 했다. 특히 수학, 물리 같은 과목은 예습을 하지 않으면 선생님의 수업 속도를 따라가기가 무척 어려웠다. 학기 초엔 마음먹고 열심히 예습하기도 했지만 많은 학생처럼 그런 기간은 길지 않았다. 결국은 숙제가 나오거나 시험이 다가올 때까지 미루다 거의 독학하다시피 다시 공부하곤 했다. 이렇게 혼자 공부하는 습관 덕에 대학에서의 공부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대학은 공대로 진학했다. 물리학은 먹고 살기 힘들다는 어른들 말씀에 막연히 공대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물리학과 연관이 있어 보이는 기계공학과와 전자공학과 중에서 고민하다가, 고등학교 물리에서 역학보다 전자기학 파트가 좀 더 재밌었다는 이유로 전자공학과를 택했다. 막상 전자공학과에서 공부해보니 물리학 원리를 토대로 한 응용 분야이지만 물리학보단 수학적인 도구들을 더 많이 활용하는 분야였다. 학문의 결이 상상했던 것과 조금 달랐지만, 학부 과정이니 아직 깊이 있는 연구를 해보지 않아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까닭에 석사, 박사 과정의 연구가 내가 기대한 부분들을 채워줄 거라는 생각으로 대학원에 진학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여기서 더 큰 방황을 겪게 됐다.

 

한량과 박사의 시간

 

중고등학교 시절을 돌이켜보면 다시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다. 그렇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내 안에서 동기를 찾지 못하고 주변 친구들에 대한 경쟁심으로 공부했다는 것이다. 대학교에 진학한 후 예스(YEHS・Young Engineers Honor Society)라는 공대 연합동아리 활동을 하며 내 또래인데도 인생관이 훨씬 성숙해서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는 여러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들을 보며 내가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지, 내가 정말 살고 싶은 삶은 무엇인지에 대해 아직 제대로 고민해본 적조차 없었음을 깨달았다.

 

평생 누군가와 경쟁하는 마음으로 살고 싶진 않았는데, 어느새 이기는 것이 삶의 큰 동기 중 하나가 됐음을 깨닫고 한순간에 허탈감이 몰려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하필 열심히 연구해야할 대학원 시기에 쓰나미처럼 몰려온 허탈감 덕에, 아직 삶의 동기를 찾지도 못한 채로 나 자신을 지긋지긋한 경쟁에서 일단 ‘자체 해방’시키고 말았다.

 

그렇게 해방된 나는 연구에 집중하지 못한 채로 지도교수님의 걱정을 한몸에 받으며 대학원 시기의 상당 부분을 한량처럼 보냈다. 분명 내 안에 학문을 좋아하는 마음, 연구에 대한 갈증 같은 것들이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연구를 하며 내 한계를 계속 확인하고 극복해내는 과정이 상당히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경쟁이란 것이 없어도, 혹은 경쟁에서 뒤처지는 순간이 오더라도 순수하게 학문을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그런 고통을 견딜 수 있을까 하는 의심과, 이렇게 고통스러운 길을 꼭 계속 가야할까 하는 의문을 동시에 가졌다. 불행인지 다행이지 그 답을 찾기 전에 지도교수님의 정년퇴임이 다가왔고, 그 전에 학위 연구를 마치라는 미션이 떨어졌다. 긴급 미션을 완수하기 위해 짧진 않았던 한량 생활을 청산하고 연구에 매진해 무사히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량의 시간 덕에, 보통은 4~5년 걸리는 박사 연구를 절반도 안 되는 기간에 벼락치기로 하다 보니, 대학원을 졸업한 무렵엔 내 안의 동기를 찾긴커녕 논문 연구에 학을 떼는 지경이 됐다. 내 안의 동기를 찾고자 했던 질문들은 외면한 채, 단지 논문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만으로 회사에 입사해 주어진 업무에 만족하기도 했다.

 

입사 초엔 5세대(5G) 무선통신 표준화 업무를 담당했다. 서면으로만 연구를 발표하고 피드백을 받는 논문 연구와 달리, 회의에서 타사 연구원들과 직접 대면해 기술에 대해 치열하게 논의하는 과정이 생동감 있게 느껴졌다. 제안한 기술이 긴 논의 끝에 표준 기술로 채택됐을 땐 약간의 뿌듯함도 있었다.

 

양자통신이라는 낯선 분야에 뛰어들다

 

하지만 입사 2년 차가 되고 표준화 업무에도 웬만큼 익숙해진 어느 날 문득 ‘이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 이게 맞나, 정말 재밌어했던 연구가 이게 맞나. 난 물리학을 좋아했고 이 모든 것의 출발점에는 물리학이 있었는데, 물리학과 점점 멀어지더니 이젠 물리학을 전혀 몰라도 상관없는 일을 하고 있었다. 덮어뒀던 예전의 질문들을 다시 꺼냈고, 비로소 답할 수 있을 듯했다. 물리학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일반 물리와 전자기학 외에는 물리학 강의를 들은 적도 없었다. 나는 물리학을 전공해 학위를 받은 다른 연구자들은 물론이고, 물리학과 학부생과 경쟁해도 이미 뒤처져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해보고 싶었다. 학교가 아닌 현업에서, 전공하지 않은 분야를 처음부터 다시 공부해서 연구한다는 건 지금까지 해온 어떤 연구보다 척박할 과정일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견딜 수 있을 듯했다. 이 모든 것을 감당하게 하는 동기가 ‘그냥 내가 좋아하니까’였으므로.

 

결심이 선 후로 석사, 박사학위 전공이었던 무선통신을 물리학과 접목시킬 수 있는 분야가 무엇일지 탐색했다. 그러던 중 양자통신이라는 분야가 눈에 들어왔다. 그즈음 같은 연구소의 선행연구팀에서 양자통신 연구에 착수하기로 했다는 소식도 들렸다. 고전통신이 고전물리학에 기반해 정보를 전달하는 기술이라면 양자통신은 양자물리학에 기반해 정보를 전달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통신 기법이다. 원리는 그동안 내가 연구해온 기술들과 완전히 달랐지만, 양자통신 시스템이라는 큰 그림을 그리는 데는 지금까지의 연구 경험이 유용하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입사 3년 차에 양자통신을 연구하는 선행연구팀으로 부서 이동을 지원했고, 어느덧 4년째 양자통신을 연구하고 있다.

 

학교가 아니어서 가르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혼자 책이나 자료를 보고 공부하는 방식은 내게 너무 익숙해서 견딜 만하다. 이 분야의 논문들을 보다 보면 이해가 되는 논문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어려운 논문이 여전히 더 많다. 그럴 때면 아직도 갈 길이 멀구나 싶은 생각에 종종 막막해진다.

 

그렇지만 문득문득 내가 성장했음을 느끼며 또 나아갈 힘을 얻는다. 느리지만 내 속도로 꾸준히 나아간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40대가 된 어느 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더 성장해있을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리고 좋아하는 과학을 향해 각자의 속도로 꾸준히 나아가는 이 세상 모든 전공자들을 떠올려 본다. 진심으로 응원하는 마음으로.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2023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글 및 사진

    김자영 LG전자 책임연구원

🎓️ 진로 추천

  • 물리학
  • 전자공학
  • 컴퓨터공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