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출발선_뒤_100m

현재 시각 오전 6시 38분, 기온 26℃, 상대습도 87%, 불쾌지수는 76으로 경계단계. 정오가 되면 상대습도는 60% 대로 떨어지지만 기온이 약 4℃ 오를 확률이 90% 이상. 달리는 인간의 자율신경계가 체온을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체내 수분은 걷잡을 수 없이 빠져나갈 것이다. 42.195km를 달리기엔 상당히 부적절한 날이다. 

예외 없는 상황에서 예외를 기대하는 무모함은 인간만의 특질. 이들은 무모한 확률에 기대 몇십 년째 지속해온 실수를 전통이라 부르며 마라톤 대회를 감행한다. 내가 R.U.R(Running Usher Robot)의 서비스부스에서 기다리는 36세 여성 송주하는 그중에서도 최고의 예외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6시간 23분 전, 키와 몸무게를 비롯한 기본 신체정보를 남기며 달리기 안내로봇을 요청한 송주하는 자신이 3년 전 인간 가이드러너와 패럴림픽 마라톤에 출전한 국가대표였다는 점을 내세웠다. 시스템상 하프마라톤 이상의 장거리 레이스는 출발 12시간 전부터 안내로봇 요청이 마감된다. 예외를 인정하기 위해 누군가 ‘인간적으로’ 개입한 듯했다.

매년 레이스 출발지점에서 운영하는 R.U.R. 서비스부스는 각종 장애보조기기의 최종 점검 서비스와 최신 모델 홍보를 자연스럽게 결합시키는 절호의 기회다. 올해 관심이 집중된 대상은 상반기에 출시된 달리기 안내로봇 스트라이더40. 안정된 질주를 보장하는 낮은 무게중심, 붐비는 구간에서 유리한 간결하면서도 날렵한 몸체. 사전에 스캔한 인간의 전두엽과 자율신경계에서 실시간 수집한 데이터를 토대로 한 비언어적 교신 시스템 등을 내세웠다.

인체를 모방한 구동 스타일에서 완전히 벗어난 차세대 로봇이기도 하다. 이전의 장애보조로봇이 인간의 움직임과 형상을 흉내내는 데 너무나 많은 시간과 기술을 투입해왔다는 자체 평가의 결과다. 나를 포함한 안내로봇 1세대가 복잡한 주변 환경을 모두 확인하며 균형을 잡고 사지를 순서대로 움직여 지면을 밀어내기까지 10년도 넘는 세월이 걸렸다. 누군가는 헛된 시간낭비로 여겼던 모양이지만 이 덕분에 1세대 안내로봇이 안정적인 이족보행을 비롯한 숱한 장애보조기술의 발전에 기여했음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초기 모델은 안정성 면에서도 앞선다. 출시한 지 1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할 수 있는 내구력을 갖추고, 복잡한 사전 싱크 작업 없이 실전에 투입될 수 있는 모델은 우리뿐이다.

3년 11개월 30일 만에 100% 충전을 마친 충만감을 곱씹는데, 안내견을 앞세운 채 흰 지팡이를 짚고 다가오는 여성이 보인다. 기본 신체정보가 송주하와 일치한다. 요즘은 장애보조기기가 생활가전만큼 흔해서 안내견과 흰 지팡이가 눈길을 끈다. 내 옆에 마련된 의자에 앉더니 안내견 하네스와 지팡이를 직원에게 건네고, 운동화 끈을 고쳐 맨 뒤 스트레칭을 이어간다. 운동화 끈을 묶는 꼼꼼한 솜씨에 비해 스트레칭은 다소 허술하다.

음성메시지를 출력한다.

“무릎 운동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충분하지 않은 것은 무릎 운동만이 아니었지만. 송주하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내 오른쪽 손목을 더듬더니 센서가 장착된 전용 밴드를 찾아내서 고리를 만든 뒤 왼손으로 잡는다.

“손목 착용을 권장합니다.”

주도권 상실을 극도로 꺼리는 시각장애인 일부는 밴드를 손목에 고정하는 방식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러나 안내로봇은 모든 상황에서 유연한 대처가 가능한 인간 가이드러너와 다르다. 게다가 로봇과 이용자의 실시간 소통이 필수인 레이스에서 손목 착용만이 그나마 안정적인 교신을 보장한다. 블루투스로 전기신호를 주고받는 신형과 달리, 밴드를 통해 사용자와 뇌파 형식으로 메시지를 주고받는 우린 사용자의 신체에 물리적으로 접촉한 장치가 필요하다. 일종의 텔레파시처럼 문장 형태로 이뤄지는 소통은 밴드가 조금만 느슨하게 접촉돼도 버퍼링이 걸린다. 

통신 체크를 겸해 같은 메시지를 텔레파시로 다시 보낸다.

—매뉴얼에 따라 걸쇠를 손목에 착용해 주세요.

잠잠하다. 메시지를 바꿔본다.

—40m 떨어진 공중화장실의 평균 대기 시간은 6분입니다. 68%에 달하는 마라톤 주자들이 경주 중 요의 혹은 변의를 느끼고 이는 기록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그 순간 송주하가 걸쇠를 놓아서 교신을 차단하며 말한다.

“조용히 달리고 싶어.”

적어도 내 메시지를 수신할 수는 있다는 얘기다. 난 ‘조용히’를 사용자가 선호하는 환경 조건으로 기록한 뒤, 송주하의 왼쪽 손에 밴드를 쥐어준다. 송주하는 잠자코 이를 왼손에 감으며 말한다. 온 감각 센서를 동원할 만큼 작은 목소리로.

“걱정 마. 한번도 놓친 적 없으니까.”

 

#출발선

—목표 시간과 구간별 페이스 전략 등을 입력하세요.

레이스 내내 이렇게 정보를 구걸할 듯한 예감이다. 동일한 요청을 피드백 없이 반복하는 것은 배터리 소모를 가속시키는 일인데, 그나마 우리 구모델은 에너지 효율이 좋다는 것이 다행이다. 달리기 안내로봇이 완주목표 시간을 모른 채 레이스에 나서는 것은 대양을 가로지를 범선이 지도 없이 출항하는 것과 같다. 급한 대로 3년 전 패럴림픽 기록을 검색해 송주하의 기록을 찾아낸 뒤 이를 기준으로 목표를 설정한다. 3시간 15분 49초로 4등. ‘송주하’가 선수가 아닌 가이드러너로 표기되어 있는데, 일단은 단순오류나 착오로 간주하고 넘긴다. 추가 고급 검색에 쓸 시간이 없다. 밴드로 내 메시지를 수신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송신에도 문제가 없다는 것도 확인해야 한다.

—54초 안에 교신 테스트를 마쳐야 출발할 수 있습니다. 이번 레이스의 목표를 문장 형태로 떠올려주세요.

34초의 침묵 끝에 메시지가 전달된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송주하.

혼잣말인가. 레이스의 목표라기엔 어색하지만, 출발을 앞둔 마라토너의 교감신경은 온갖 호르몬에 휩싸이기 마련이니까. 교신에 성공했으니 마지막 점검에 집중할 수 있다.  송주하의 생체신호와 가능한 모든 신체, 표정 언어를 수집한다. 열 손가락을 거듭 꼽으며 주먹을 고쳐 쥐는 손바닥에서 체액이 분비된다. 아직 얼굴에서 땀이 흐를 조건이 아닌데, 특이하게 눈가에서도 체액이 감지된다. 체액의 성분 및 원인을 미처 분석하려는데 출발신호가 들린다.

1차 출발 그룹에 속한 3872명의 마라토너가 동시에 지면을 내딛는 진동이 공기를 채운다. 치솟는 아드레날린을 좋은 컨디션으로 착각한 러너 일부가 무리하게 속도를 올리기 시작한다. 이들의 보폭과 속도, 경로를 계산해 다른 주자와의 충돌을 피하느라 안내로봇들의 메모리가 바쁘게 구동된다.

 

#1~2km

현재 페이스 1km 4분 50초. 이대로는 3시간 23분 안에 결승선에 도착하고 이는 본인의 패럴림픽 기록과 큰 차이가 없다. 최근의 훈련기록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송주하의 나이와 현재 신체조건을 기준으로 완주목표는 보스톤 마라톤 출전자격인 3시간 40분 정도가 적당하다. 경력을 감안해 욕심을 내더라도 3시간 30분대가 최고일 것이다. 그런데 우린 이미 오래전에 3시간 30분 페이스 그룹을 저만치 따돌렸다.

송주하의 생체신호와 상태를 체크해 레이스 전략을 다시 세워야한다. 그러나 GPS 위성과 연동해 부감샷으로 전방 주자들 사이의 빈틈을 찾느라 안 그래도 시스템 과부하가 걸리는 레이스 초반이다. 일종의 투쟁-회피 모드에서 아드레날린에 취해 질주 중인 것이 분명한 송주하의 속도를 따라잡는 데 모든 연산 능력을 집중해야한다. 일단은 달리기 안내로봇의 본분에 충실해본다.

—우측 5m 레인 이동 1, 2, 3, 경사 1도 내리막길 125m 지속 1, 2, 3, 왼쪽 후방에서 키 크고 몸 좋은 청년 근접 추월 1, 2, 3, 1시 방향 5m에 멋진 폼으로 달리는 여자. 

가능한 모든 데이터를 전송하려니 너저분해지는 정보의 상태가 맘에 들지 않는다. 주변 환경 정보의 방향성은 물론 디테일 레벨까지 아무것도 사전에 설정하지 않은 송주하에게선 별다른 피드백도 없다. 그렇게 출발 이후 6분 28초가 흐른 시점.

—시시콜콜 알려주지 않아도 돼. 목표 경로의 방향과 변동은 손으로 알려주고 속도는 내게 맞춰. 

드디어 주변 정보 환경이 설정된다. 전달해야할 정보의 절대적인 양과 디테일이 떨어지자 정보 처리력에 여유가 생긴다. 우리의 현재 속도는 시속 11.92km, 송주하의 분당 심박수는 170. 최대 심박수 구간이 6분 넘게 지속 중이다. 20대 내내 장거리 주자였어도 이대로 계속되는 것은 무리가 될 수 있다. 속도를 낮추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한편, 송주하에 대한 추가 정보를 검색한다. 중대한 제약과 치명적 정보 오류가 잇따라 발견된다.

제일 먼저 맞닥뜨린 제약은 송주하가 개인정보 검색권한을 제공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송주하가 R.U.R. 서버에 입력하지 않은 비공개정보에 접근할 수 없다는 뜻이다. 송주하의 패럴림픽 기록을 급하게 찾았듯, 원시적인 크롤링 방식으로 36세, 여성, 송주하, 전맹시각장애인, 패럴림픽, 육상 국가대표 등의 키워드를 검색해본다. 그런데 이를 모두 만족시키는 결과가 없다. 가장 근접한 항목이라곤 가이드러너로 활동하다 2년 전 훈련 중 교통사고로 사망한 동명 여성뿐이다. 출발 직전에 발견한 기록은 오류가 아니었다.

납득할 수 없는 결과 앞에서 잠시 작업처리 불능상태가 되지만 곧 빠져나온다. 현재까지의 기록 및 생체신호로 미뤄 자신을 송주하라고 부르는 이 여성이 시각장애인이며, 오랜 시간 주기적으로 운동한 러너임은 분명하다. 이 사용자가 무사히 결승선을 통과하도록 돕는 것이 현재 내가 할 일이다. 현재의 빠른 페이스를 언제까지, 얼마나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9.5~12km

4km 지점부터 2km마다 급수대가 나타났지만 사용자는 모두 그대로 지나쳤다. 10km 급수지점을 앞두고 높은 강도의 메시지를 보낸다.

—100m 전방 급수대. 수분을 보충하십시오. 송주하 씨는 5분 내의 페이스를 지속적으로 유지했고 45분간 1.8L의 수분을 방출했습니다. 당장 수분을 공급하지 않으면 심각한,

—다음에.

사용자가 경고를 가로막는다.

—어디서 라일락 향이 느껴져. 주변 풍경 정보를 더 부탁해.

후각 정보를 처리하는 채널이 없기에 전방 카메라와 GPS 정보를 조합해 근방의 가로수종을 파악한다. 그리고 20초 전에 라일락 나무 네 그루를 10m 거리에서 지나쳤음을 확인하고 이를 전달한다. 그러자 내내 호흡에만 집중했던 사용자의 입 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간다. 긍정적인 피드백. 이제부턴 경로에 위치한 식물종 정보를 전달하기로 한다.

—전방 50m부터 플라타너스가 끝나고 메타세쿼이어 길이 시작됩니다.

—오케이.

출력 정보의 종류가 바뀌자 사용자의 피드백 빈도가 높아진다. 사용자의 피드백이 거듭될수록 우리의 메모리는 추가로 활성화된다. 심지어 발화 스타일에 대한 피드백까지 이어진다.

—존댓말 필요 없어. 반말이면 돼.

보통 이런 피드백은 초반에 이뤄지는데, 10km를 달리고서 ‘말을 놓으라’니 여러모로 보기 드문 반응 양식이다. 장애보조기기 시스템의 ‘스트레스 레벨’은 사용자와 소통량에 반비례한다. 내내 50%를 상회하던 스트레스 레벨이 1시간 만에 30%대로 내려온다.

사용자가 내 메시지를 받아들여 수분을 공급하기만 하면 추가로 20%대까지 내려갈 텐데. 그러나 우린 속도를 유지하며 급수대 구간을 통과한 끝에 3시간 20분대 페이스 그룹마저 앞지른다.

 

#14.5~15.5km

오르막길에 접어든다. 2도 이내의 경사는 발이 지면을 밀어내는 마찰력을 더해주지만 관절과 근육은 오르막으로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퍼포먼스가 좋아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오르막길이 대부분의 마라토너가 첫 번째 벽을 맞닥뜨리는 지점에 위치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사용자는 물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채로 약 1시간 15분을 달리는 동안 수분 2.1L를 잃었다. 피로감이 몰려오고 속도가 떨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명백한 원인이 있는 결과이며 여기엔 예외가 없다. 같은 속도를 유지하며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달리는 사용자가 맞닥뜨린 벽이 얼마나 단단할지는 별도의 메시지가 없어도 알 수 있다. 마른 숨과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흐르는 땀 외에는 아무것도 출력하지 않는 사용자에게 지속적으로 경고메시지를 보내느라 내 스트레스 레벨은 다시 치솟고 작업처리 속도도 점차 느려진다.

인터벌 스피드 훈련이라도 하듯 400m씩 속도를 높이고 또 쉬어가는 사용자의 주법에 익숙해진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이전 레이스 훈련에서 밴 습관이 극단적인 상황에서 여과 없이 재연되는 것이리라. 추가 작업 능력이 필요하지 않은, 자동운전 구간에 빨리 들어가서 이를 오래 유지할 수 있으니 효율을 높일 수 있어 나에게도 유리하다. 여태까지는 그랬다.

—강변도로로 들어서고 있어. 300m 뒤부터 1.4km는 교량진입로야. 

사용자가 고개를 강물 쪽으로 돌린다. 특정한 환경 정보에만 확실히 반응하고 있다. 이내 그가 또다시 전력질주 구간에 돌입하듯 주먹을 고쳐 쥔다. 그간 몇십 번씩 반복된 끝에, 난 그것이 기어를 바꿔 넣기 위한 사용자의 버릇임을 인지한다. 곧 양팔을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지고 뒤로 뻗는 팔꿈치의 높이가 높아진 다음에 양발 보폭과 함께 땅에 내딛는 속도가 증가할 것이다.

내부에서 경고 알람이 울린다. 체내 수분이 위험 수준으로 곤두박질치는 상황에서 이렇게 계속 고속기어를 넣을 수는 없다. 메시지의 강도를 최고 단계로 높인다.

 —속도를 줄여. 내 말 들어.

사용자가 밴드를 그러쥔 손의 힘을 푼다. 교신이 끊길 위험까지 더해진다. 그 순간 새 결론이 도출된다. 사용자는 지금 여기서 끝내도 상관없단 마음으로 달리고 있다. 그와 동시에 단기목표가 급히 제시된다—DNF.

 

#19.5~22km

DNF는 Did Not Finish의 준말로 모든 러너가 가장 피하고 싶은 기록이다. 레이스의 출발선을 지났으나 결승선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뜻인데, 준비 과정의 부담이 클수록 전체 참가자 중 DNF의 비율은 낮아진다. 완주를 향한 각오는 때때로 집착을 넘어 무모함까지 쉽게 연결된다는 게 문제다. ‘완주’ 자체를 그 어떤 가치보다 우선시해 스스로를 한계로 몰아붙여 최악의 경우 생명에 위험을 초래하거나, 다음 레이스 혹은 달리기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신체 안정성을 해치기도 한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달리기 안내로봇의 주요 기능은 사용자가 그런 판단불능 상태에 이르지 않도록 방지하는 것도 포함한다. DNF가 필요한 사용자가 이를 끝내 거부해서 위험에 빠지거나 혹은 그 때문에 이후로 사용자를 교체하기에 이르면, 이는 안내로봇의 심각한 실패로 기록돼 향후 치명적인 시스템 오류로 이어질 확률이 높다.

사용자가 90분대의 첫 번째 벽을 별다른 기록 저하 없이 통과함으로써 생체신호와 퍼포먼스 사이의 불일치가 심화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를 장시간 달리기로 인한 스트레스를 통제하기 위해 분비되는 엔돌핀 덕분에 도취감을 맛보는 상태, 이른바 러너스 하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각각의 거리마다 인체의 서로 다른 능력과 자질을 테스트하는 달리기의 세계에 모호한 마법 같은 건 없다. 무리해 에너지를 끌어다 쓴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고장 혹은 어떤 식으로든 치러야 할 대가로 이어진다. 그것을 피하려면 방법은 하나. 레이스는 중단돼야 한다.

—이러다가 다시는 레이스에 참가하지 못할 수도, 아니면 영영 달릴 수 없게 될지도 몰라.

무반응.

—계속 이런 식이면 난 동의 없이 구급팀에 응급연락을 해야해. 이렇게 끝내고 싶은 건 아니잖아.

순간 사용자가 밴드를 움켜쥔 손에 힘을 준다. 몇 초가 흘렀을까. 긴급 메시지가 뒤를 잇는다.

—도와줘.

하지만 무엇을. 레이스를 끝내 달라는 건지, 레이스가 끝나고도 계속 달리고 싶다는 건지 난 모른다.

—뭘, 어떻게 도와줄까. 

순간 미세하나마 사용자의 팔과 다리 근육의 전기신호가 강해진다. 나는 그것을, 달릴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의미로 처리한다.

—일단 물을 마시자.

급수대로 이끌며 속도를 줄이는 데 사용자는 별다른 반대의사를 표하지 않는다. 출발선을 떠난 지 1시간 50분 만에 우린 두 다리의 속도를 시속 10km 이하로 줄인다. 그러나 뛰는 것을 멈추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 또한 느껴진다. 결국 사용자는 물을 마시지 않는다. 적어도 난 컵에 있는 물을 사용자의 상체에 뿌리는 데 성공한다. 피부로 집중된 혈액이 수분 덕분에 잠시 온도를 낮추고 다시 근육으로 돌아가 영양분을 공급할 것이다.

13m 전방으로 한 선수가 쓰러진다. 12년 전 도쿄마라톤대회에서 우승했던 정상급 선수다. 구급팀이 투입되는 등 주변이 다소 소란스러워진 이유를 사용자는 묻지 않는다. 나 역시 전하지 않는다. 

사용자의 생체신호가 다소 개선된 것을 확인했으니, 구급팀엔 신호를 보내지 않기로 한다. 내가 레이스 서버와 연동되지 않은 구모델인지라 구조신호가 자동발신되지 않는 것이 이럴 땐 다행이다.

 

#33~33.5km

3년 11개월 전, 내 마지막 레이스에서 함께 달렸던 사용자의 컨디션과 기록은 출발 직후부터 바닥이었다. 풀마라톤 최대의 고비로 꼽히는 33km 지점에 이르자 장대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해당 레이스의 제한시간인 6시간 내 완주를 의심할 상황이었다. 즉시 DNF를 제안했지만 사용자는 거부했고, 나는 매뉴얼대로 구급팀에 구조신호를 보냈다. 사용자의 세 번째 마라톤은 DNF로 기록됐고, 그것은 그의 마지막 레이스가 되었다. 객관적인 문제는 전무했음에도 그는 다음 레이스에 나서지 않았다. 건강지표가 하나둘씩 서서히 나빠지는 동안 오래도록 집안에 머무르던 난 결국 반납됐다.

그리고 다시 33km 지점을 달리고 있다. 전체 시스템을 점검해야 한다. 마지막 레이스에서 내가 내린 결정이 당시 사용자의 무언가를 망가뜨렸고, 그것은 다시 내게도 영향을 미쳤음을 상기한다. 서서히 스트레스 레벨이 올라간다. 

사용자의 객관적인 기록은 생체신호를 따라 저하하기 시작한다. 끝내 넘어설 수 없는 벽에 도달한 것이리라. 이 무렵 인간의 체내에 저장된 글리코겐은 완전히 소진된다. 깊숙이 저장된 지방을 태워 에너지로 쓸 차례인데 탄수화물보다 전환이 느리고 산소가 많이 필요하다. 속도 감소는 당연하다. 27.349km에서 3시간 40분대 페이스 그룹이 우리를 앞서갔다. 4시간 그룹이 50m 후방에서 우리와 간극을 한껏 좁히기 시작한다. 

예보대로 기온은 30℃에 가까워지고 자외선을 가려줄 구름 한 점 없다. 악화되는 환경 조건에 대응하기 위해 사용자가 관심을 가질 만한 정보를 찾아 주변을 스캔한다.

—50m 전방 오른쪽 이팝나무 다섯 그루. 이후 수국 관목이 78m 이어질 거야.

사용자가 밴드를 고쳐 쥐며 반응을 보인다. 내가 다시 묻는다.

—오른쪽으로 이동할까?

사용자가 오직 내게만 보일 정도로 고개를 끄덕인다. 천천히 꽃나무 가까이 가는데, 다리 사이로 공기의 흐름이 감지된다. 바람이다. 점점 팔과 몸통 그리고 얼굴까지 흐름이 번진다. 주변의 참가자들도 이를 느꼈는지 일제히 깊은 숨을 들이켠다. 40℃를 아슬아슬하게 밑돌던 사용자의 피부온도가 순간적으로 0.2℃가 더 내려가더니 완만한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의 생체신호가 개선되자 내 스트레스 레벨도 내려간다. 어쩐지 긍정적인 예감을 갖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보낸다.

—나무 냄새, 풀 냄새, 꽃 냄새 맡으며 달리고 싶으면 물을 마셔야 해.

어쩐지 방법을 찾은 것 같다.

 

#40~42.195km

모든 참가자의 얼굴에 기계적인 고통의 표정만 떠오른다. 몇 시간 동안 쉼 없이 지면에 부딪히는 충격을 흡수한 인체는, 구석구석 변형된다. 척추 뼈 사이사이를 채운 디스크가 압축돼 신장은 평균 1.25cm씩 줄고, 위산이 역류해 가슴 통증을 유발한다. 촉진된 장운동에 따른 변의, 온갖 근육의 소리 없는 비명을 무시한 채, 혹은 이를 감지할 겨를도 없이 왼발에 이어 오른발을, 또 다시 왼발을 내딛는다.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이다.

이쯤에서 숨겨진 에너지를 찾아내는 사람만이 마지막 힘을 낼 수 있다. 기억할 것은 이때 발견하는 에너지가 반드시 체내에 직접 흡수된 영양분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청각이나 시각, 혹은 후각 등 사용자마다 개인화된 구체적 감각을 동원하는 것이, 레이스 1주일 전부터 체내 글리코겐 함량을 조정하는 유난스런 식이요법보다 효과가 있다. 훈련 기간에 사용자와 안내로봇은 가장 효과가 있는 방식을 함께 찾는데, 우린 오늘 아침 처음 만났으니 기대할 만한 정보가 없다. 

아무런 메시지도 오가지 않는 고요의 시간이 영원처럼 지속된다. 연속 풀가동의 피로감을 무시할 수 없어서 안내로봇에게도 만만찮은 구간을 묵묵히 지난다. 별달리 처리할 작업이 없으므로 나는 내 안의 구석구석을 살핀다.

차가운 물류 창고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중력을 거슬러 지표면을 밀어내는 마찰력이, 각자의 레이스를 이어가는 참가자들의 숨소리가, 온몸을 휘감는 공기의 흐름을 뒤로 하는 촉감이, 전기신호로 바뀌어 몸속에 퍼져나가는 경험을 좀 더 자주 반복하고 싶다. 인간과 함께 달리는 것을 멈추고 싶지 않다.

조건반사처럼 나는 사용자를 향한 피드백 감응 레벨을 최대한 높여, 이를 가능하게 할 단서를 찾아 헤맨다. 언어의 형태는 아니지만 사용자가 지속적으로 떠올리는 무언가가 있다. 멜로디이기도 하고 박자이기도 한. 간헐적이지만 반복적으로 지속되는 두 종류의 정보를 활용해 정보의 바다를 뒤적여 노래 한 곡을 발견한다. 가사를 먼저 전달해보자.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과정을 통해 우리를 결승선까지 이끌어줄 에너지가 될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며.

—‘생각이 많은 건 말이야, 당연히 해야 할 일이야, 나에겐 우리가 지금 일 순위야.’*

사용자의 자세가 순간 안정을 찾는다. 이것이 정답이라는 희망을 갖고 외부 스피커로 노래를 재생한다. 사용자의 귀를 통해 청각을 곧바로 자극한 음악이 보폭과 분당 내딛는 걸음 수에  98BPM, 4분의 4박자로 리듬을 찾아준다.

—‘저기 사라진 별의 자리, 아스라이 하얀 빛. 한동안은 꺼내 볼 수 있을 거야. 아낌없이 반짝인 시간은 조금씩 옅어져 가더라도 너와 내 맘에 살아 숨 쉴 테니.’*

후렴구에 이르자 반박자에 한 걸음씩 내딛는 보폭이 조금씩 커지며 속도가 미미하게나마 증가한다. 결승선까지 1.08km. 지인이나 가족을 응원하기 위해 아침잠을 포기하고 집을 나선 관중들이 결승선까지 이어진다. 한 번도 만난 적 없어도 상관없다는 듯,  40km 넘게 달려온 이들을 향해 환호와 응원, 하이파이브를 남발한다. 낯모르는 이들끼리 에너지를 주고받는 구간이지만 부쩍 복잡해진 주변 정보를 처리하느라 나는 다시 바빠진다. 나의 외부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노래는 주변 소음에 묻혀 거의 들리지 않을 텐데 사용자의 보폭과 속도는 노래의 박자를 그대로 따른다. 

나는 확신한다. 우린 함께 결승선을 통과할 것이다. 거기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어쩌면.

 

#결승선_끝내

마침내 우린 3시간 56분 38초를 기록하며 결승선을 통과한다.

—이제 끝났어.

결승선을 지나고도 계속해서 팔과 다리를 움직이는 사용자에게 난 말한다. 우린 서서히 속도를 줄이면서, 울먹이며 걷거나 지인과 포옹을 주고받거나 근육을 풀며 수분과 영양분을 보충하는 참가자들을 지나친다. 사전 정보와 결과를 대조하며 레이스를 분석하고 평가하느라 바쁜 와중에 사용자의 메시지가 전달된다.

—끝내.

일종의 피드백인가? 그렇다, 레이스는 끝났다. 지금쯤 사용자의 몸속엔 최대치의 엔돌핀이 휘몰아치는 중이다. 맥락에 맞지 않는 상념이 가득한 것이 당연하다. 난 절차를 따라 반납되어야 할 곳으로 사용자를 이끈다.

—전방 22m 앞 1시 방향 R.U.R. 부스가 있어.

사용자가 걸음을 멈춘다. 눈가에서 출발 직전과 마찬가지로 수분이 감지된다. 그것이 눈물임을 이제는 안다. 인간의 눈은 앞을 보지 못할 때도 감정을 충분히 드러낸다. 사용자가 나와 연결되지 않은 오른손으로 물기를 닦아내며 말한다. 혼잣말이 아닌, 명백한 대상을 가진 발화다.

“끝내 우리가 도착했어, 주하야.”

이로써 나는 이 사용자가 동갑내기 가이드러너 송주하와 함께 달렸던 시각장애인 마라토너 이이연이라는 가설이 사실임을 확인한다. 그리고 이이연이 반복한 단어를 곱씹는다. 

끝내. ‘끝에 가서 드디어’라는 뜻의 부사. 언어를 불문하고 그런 의미의 부사는 먼 길을 오래 달린 마지막과 썩 어울린다. 이를테면 영어의 in the long run. 

—끝 아니야.

만난 지 4시간 10분 만에 이이연이 처음으로 요청하지 않은 정보를 준다. 난 잠자코 다음 메시지를 기다린다. 여전히 연결된 밴드로 이이연이 묻는다.

—달리기 안내로봇을 지정해서 장기대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 

내 전방카메라가 이이연의 물기가 가득한 눈과 올라간 입꼬리를 본다. 지난 15년 동안 21번의 마라톤에 참가해 20회 완주한 끝에 나는 깨닫는다. 그렇게 나는 또 다른 사용자를 만났고, 앞으로 우린 한동안 함께 달릴 것임을. 끝내 또 다른 시작을 발견하는 인간의 무모함에 내가 조응하게 되었다는 것을. 

 

*윤하, ‘사건의 지평선’ 가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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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오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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